20. 고르디우스의 매듭
죽은 손우경을 부둥켜안고서 그저 넋이 나간 채로 울면서 앉아 있는데 먼발치에서 오조가 지팡이를 들고서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내가 아니라 바로 관음존자에게. 초반에 불시의 공격으로 부상을 입고 쓰러졌던 파오는 어찌 된 일인지 전혀 보이지가 않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좋다, 이젠…….
오조가 관음존자와 마주 선 채 싸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당신에겐 여러 가지로 고맙게 생각해. 하지만 내 친구에게까지 손을 댄 건 용서할 수 없어.”
“남의 좋은 기분까지 잡치지 말고 그만 사라져주겠나, 그림리퍼. 네가 뛰어난 소환술사라곤 해도 내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을 텐데.”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알겠지. 그리고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니야.”
그 순간 관음존자의 등 뒤로 누군가 빠르게 파고들어갔다. 파오였다. 허나 아돌프가 재빨리 공중으로 뛰어오르는 바람에 파오는 몸 안에 든 피를 모두 터트려버리는 혈류종을 성사시키지 못했다. 관음존자가 허공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같잖다는 미소를 지었다.
“너네 둘이 한꺼번에 덤벼봤자 소용없어. 너희들이 개중에선 걸출한 놈들일진 몰라도 한 녀석은 지금 이 상황에서 소환진을 그릴 시간조차 확보하지 못할 테고, 다른 녀석은 근접전이 아닌 이상 그 위험한 살인 기술이 완전히 무용지물이니까. 아님 파오 네 녀석이 시간을 버는 사이에 그림리퍼가 소환진을 그려볼 작전이라도 세운 거라면, 미리 말해두는데 쓸데없는 일에 시간 낭비하지 마라.”
관음존자가 자기가 한 말에 스스로 피식거리더니 새삼 너그러운 얼굴로 선처를 해주겠다 말한다.
“하지만 난 지금 몹시 기분이 좋으니까 자비심을 베풀어줄게. 너희들 모두 이대로 얌전히 물러난다면 방금 전 일들은 따로 죗값을 묻지 않도록 하지.”
파오가 쓴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야, 인마, 그딴 재수 없는 말을 지껄이면 가려다가도 성질나서 그냥은 도저히 못 가겠다!”
관음존자는 한쪽 눈가를 들어 올리며 조용히 파오와 오조에게 손을 펼쳤다. 기문파공이 터져 나오기도 전에 둘 다 자리를 비껴났다. 파오가 공중으로 날아올라 관음존자와의 거리를 좁혀보려고 했으나 실력으로 호각을 이루던 손우경도 따라잡지 못한 스피드였다. 그래, 손우경도……. 파오가 다섯 군데로 공간이 갈라지는 공격을 피하면서 밑에 있던 나에게 소리를 질렀다.
“현아! 이 멍청한 자식아! 거기서 혼자 눈물 빼고 있지 말고 너도 빨랑 피해! 산 사람은 살아야 할 것 아냐!”
하지만 이대로 관음존자의 공격에 맞는대도 나는 크게 상관없었다. 이젠 아무것도 의미가 없으니까. 죽은 손우경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면서 멍하게 앉아 있었다. 파오는 위에서 아돌프를 상대로 고전하고 있었고, 오조는.
오조는?
관음존자의 예상대로 파오가 주의를 끄는 사이에 오조가 바닥에다가 소환진을 그리는 중이었다. 순간 나쁜 예감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묵묵히 소환진을 그리는 오조의 표정에 알 수 없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다. 얼른 소환진의 모양새를 들여다보자 어떤 기시감이 들었다. 눈썰미가 없는 편임에도 바로 알 수 있었다. 저건 분명히 유리 돔 안에서 기갑 괴물들이 나타났을 때 오조가 최상위 계급이었던 문 안의 여자를 부르던 소환진이었다.
나는 다급한 목소리로 오조를 불렀다.
“오, 오조야, 안 돼! 너 그거 쓰지 마!”
새끼 여우가 그 외침에 고개를 들어서 내 쪽을 바라봤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놈에게 계속 외쳤다.
“쓰지 말라구! 그거 하, 한번만 더 쓰면 너 죽어, 죽는다고!”
이렇게 새끼 여우까지 잃을 순 없었다. 허나 오조는 내 말에도 그저 빙긋 웃으며 지팡이를 열심히 움직였다.
그때 내 머리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오조는 지금 자신의 남은 생명을 모두 걸어서 소환진을 완성시키려 하고 있었고, 평소에 내가 비겁자라고 욕하던 파오마저도 지금 공중에서 관음존자와 생사를 다투는 혈전을 벌이고 있는 와중이었다.
저런 어린아이와 자기 자신만 알던 파오도 손우경의 죽음에 힘껏 분노하고 있는데 나만 또 이 자리에 앉아서 겁쟁이처럼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나로 인해 일어난 손우경의 죽음에도 그저 넋을 놓은 채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 심지어 너무나 쉽게 내 삶을 포기해버리기까지 했다.
허나 당장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언제나 피해 의식에 사로잡혀서 내게 일어난 과거의 나쁜 일들과 미래에 어쩌면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들을 곱씹거나 두려워하느라고 이미 많은 세월들을 허비하고 있었다.
나의 시간은 항상 과거 속에서 멈춰 있었다. 상처받는 것이 두려워서 앞으로 나아갈 용기조차 내지 못했었다. 혹시라도 같은 일이 반복될까 봐 지레 겁부터 집어먹고서 주위에 둥글게 그려놓은 안전선 안으로만 계속 숨어들어갔다. 그리고 그 안전선의 경계는 세월이 갈수록 더 좁아졌다. 이제는 아예 움직일 구석도 없이 나는 그저 서 있기만 해야 했다.
세상 모든 것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그러다 문득 깨닫게 되었다.
누구나 자기 몫을 해나가는 어른이 되어갔지만, 오로지 나 혼자서만 전혀 성장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걸.
내가 아직도 어린아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은 손우경의 시신을 바닥에 내려놓고서 멀거니 머리 위를 올려다보았다. 새삼 어느 누구를 탓할 것도 아니었다. 매일같이 불안에 떨면서 이런 결과에 대해 단 하루도 빠짐없이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 모든 것들은 불안한 내 마음이 만들어낸 일종의 결과물이었다.
어디서부터 바로잡아야 할지 알 수 없었으나 그래도 확실한 것이 하나 있었다.
지금 어떻게든 내 두 다리를 움직여서 오조를 뜯어말려야 했다. 변명이나 핑계 같은 걸 생각하지 말고, 내가 원치 않는 일들이 더는 나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나는 이 순간에 후회가 남지 않게 최선을 다해야 했다. 결과가 어찌 나오든지 그것은 그 후에 생각할 일이었다.
아무것도 못할 것처럼 잔뜩 움츠러들었던 두 어깨를 폈다. 자세가 달라지니 두려움으로 가득 찼던 마음이 순간 홀가분해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곧장 오조에게로 달려갔다. 설령 문 안의 여자가 등장해서 관음존자와 싸워 이긴다 해도, 그로 인해 안 그래도 얼마 남지 않은 새끼 여우의 생명 에너지를 깎아먹는 것은 원치 않았다. 내가 소환진을 이제 거의 다 완성해가던 새끼 여우의 팔을 확 붙들고서 뭔가를 말하려던 차였다.
그때 파오가 우리가 서 있던 바닥 근처로 큰 소리를 내며 떨어져버렸다. 아까부터 관음존자는 전력을 다하고 있지 않았다. 전직 천봉대원수를 그저 놀아주는 수준으로 상대하던 아돌프가 입가를 히죽거리며 바닥에 쓰러져 있던 파오에게 최종 일격을 가하려 했다. 그에게 자비란 없었다.
그 순간 나는 파오의 앞을 막아섰다. 관음존자를 가로막다니 내가 생각해도 아마 미친 게 틀림없었지만, 손우경처럼 내게 소중한 다른 녀석들까지 두 눈 뜨고서 다 잃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도 생각보다 하나도 무섭지가 않았다. 오히려 나는 아돌프를 두 눈 똑바로 뜨고서 노려보고 있었다.
나도 뭐가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겠다. 세상에서 죽는 것이 가장 무서웠던 내가, 손우경의 죽음으로 가치관이 변해버린 직후부터는 마치 꽁꽁 얼어붙은 얼음이 해동되듯이 날 속박하던 두려운 감정들에게서 해방되고 있었다.
관음존자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웃더니 우리가 있는 바닥으로 내려왔다. 새빨간 눈동자가 표독스럽게 내 얼굴을 긁어내렸다. 그는 진노한 듯한 음성으로 내게 말했다.
“지금 네놈 머리가 어떻게 되기라도 한 거냐. 앞에서 걸리적거리지 말고 저리 비켜.”
“……싫습니다. 이 녀석들에게 손댈 거라면 저부터 죽이십시오.”
아돌프가 한숨을 내쉬며 나를 빤히 쳐다봤다.
“현아.”
“…….”
“네가 누구의 것인지 벌써 잊은 게냐.”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 어두운 방 안에서 나를 나직하게 부르는 목소리 톤이었다. 몸이 예전 기억들에 반응하고 있어서인지 입에서 평소처럼 같은 말이 튀어나올 뻔했다. 관음존자가 재차 나에게 너는 누구의 것이냐고 물었지만 나는 가까스로 견뎌냈다.
“……저는.”
“…….”
“이제 당신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자 관음존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나에게 점점 다가왔다. 나는 손우경의 가슴에서 뽑아낸 금강저를 몸 앞으로 불쑥 내밀었다. 아돌프는 내가 고작 그깟 걸로 자길 위협하려고 하는 게 정말 기도 안 찬다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내게로 오는 걸음만은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아무 망설임 없이 금강저를 내 목으로 들이댔다.
“그 이상 다가오면 주저 없이 제 목을 찌르겠습니다. 여긴 당신이 알려주신 대로 어떤 사람이든지 한 번에 즉사할 수 있는 부위니까요.”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잠시 침묵했다. 어느새 금강저를 쥔 손이 떨리고 있었지만 나는 내 결심을 무너트리지 않으려고 손우경을 떠올렸다. 그래, 여긴 어차피 네가 없는 세상인걸. 우경아, 조금만 더 기다려…….
관음존자가 한 걸음 더 다가오자 나는 금강저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어 조금씩 내 목으로 찔러 넣었다. 진짜로 너무 아팠다. 목에서 피가 흐르는 게 느껴졌지만, 나는 죽음을 각오한 결연한 의지를 보였다.
허나 놀랍게도 관음존자는 내게 더는 다가오질 못하고 있었다. 그가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나에게 입을 열었다. 어쩐지 당혹스러운 표정 같아 보이기도 했다.
“……너.”
“…….”
“내가 좋은 말로 할 때.”
“…….”
“그거 당장 내려놔.”
왠지 눈가에 뜨거운 눈물이 차올랐다. 관음존자는 내가 우는 걸 끔찍하게 싫어했지만 예전에 손우경이 나에게 울어도 된다고 말했었다. 녀석은 감정 표현만이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요소라고 했었다. 그래서 나는 울면서 얘기했다. 여태까지 참고 있었지만 계속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저는 더 이상은…… 당신의 장난감으로는 살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날 놔줄 수 없다면 내가 먼저 당신을 놓을 것이다. 그러자 관음존자의 몸에서 엄청난 기운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손우경과의 싸움에서마저 한 번도 흥분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는 그였었다.
내 목으로 금강저를 마저 박아 넣으려던 찰나, 그 순간에 또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관음존자가 나에게 환각 기술을 사용한 것이다. 내 귓가로 바닥에 금강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서운 악령들이 도처에서 나를 잡아먹으려고 달려들었다. 가장 선두에 서 있던 것은 저번처럼 이나가 아니라 결국 나 때문에 죽어버린 손우경이었다. 녀석은 두 눈을 잃은 채로 피눈물까지 흘리며 나를 향해 사납게 달려들었다.
손에서 힘이 풀리고 무릎이 절로 꺾였다. 이래선 안 돼……. 다시 저 관음존자에게 종속된 채로 평생을 살아갈 순 없었다. 저건 다 환각일 뿐이다. 그렇지만 너무나 처참한 모습으로 변해버린 손우경을 보니 마음이 한없이 약해져간다. 자꾸만 언제나 두려움에 젖어 있던 원래의 나로 되돌아가고 싶어졌다. 이를 악물고서 간신히 견뎌내는데 손우경과 다른 악령들이 썩어가는 아가리로 내 몸을 산 채로 뜯어 먹었다.
그렇게 손우경의 날카로운 이빨이 내 심장으로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확 놀라서 전신을 경련하다가 나는 그만 제정신이 돌아왔다.
정신을 차려보니 내 몸이 관음존자에게 들려서 허공에 떠 있었다. 움직이려고 해도 어떤 주술을 걸어놨는지 손가락 하나조차 까딱할 수 없었다.
게다가 내가 환각에 당한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진 몰라도 여기 클리포트는 마치 팔열지옥처럼 변해 있었다. 오조와 파오는 입가에서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진 채로 움찔거리고 있었고, 거꾸로 매달린 황도 12궁의 조각상들 입에서는 우리가 위층에서 죽이고 내려왔던 수많은 마법사들의 시체가 마치 물이 나오는 것처럼 바닥을 향해 쉴 새 없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관음존자는 내가 깬 것을 눈치챘는지 나에게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너에게도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으니 머리에서 몇 가지 프레임들이 동시에 충돌하면서 잠시나마 발생한 프로그램상의 오류일 뿐이다. 인간의 정신은 생각 외로 섬세하니까. 포타라카로 돌아가면 이번 한 번만은 네 머리에 깔려 있는 다른 쓸모없는 것들을 지워주도록 하마.”
그는 방금 전에 내가 벌인 행동에 대해 질책하지 않았으나 나는 고작 이런 꼴로 관음존자에게 들려 있는 나 자신이 원통할 따름이었다. 나는 다 죽어가는 음성으로 그에게 물었다.
“……관음존자, 당신 지금 무슨 짓을 꾸미고 계신 겁니까…….”
아무리 봐도 지금의 상황은 정상적이지가 않았다. 게다가 바닥으로 계속해서 쌓여가는 시체들은 앞서 우리가 죽였던 숫자들보다도 더 많은 듯했다.
“영혼을 모으고 있는 중이다.”
관음존자가 기운 없이 축 늘어져 있던 내 이마로 손가락을 가져다대자 내 눈으로 괴이쩍은 장면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건 손우경이 일전에 나에게 한번 해줬던……. 사람들의 시체에서 어떤 에너지 같은 게 쑥 빠져나와 클리포트 천장에 거꾸로 박혀 있던 크리스털 덩어리에 하나둘씩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너의 영안을 잠시 개방해줬을 뿐이다. 심약한 네놈은 평상시엔 안 보고 사는 게 속 편한 장면들이지.”
“저, 저게 대체…….”
“네가 내 생각보다 잘해줘서 일이 훨씬 빨리 끝났다. 오래 묵혀뒀던 그 골칫덩어리를 처치하고 내 오랜 계획을 완성하는 것, 이 두 마리 토끼를 한 번에 잡은 셈이다. 크리스털은 창조의 도구이자 포털을 연결하는 전이의 힘이다. 그리고 크리스털은 그 순백의 결정으로 인간들의 영혼을 끌어 모으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저것이야말로 수십 년 전에 에메랄드 태블릿의 비전을 작동시켜 어느 ‘완전한 것’을 태어나게 했던 크리스털이다. 천도 프로젝트 당시에 저걸 본떠 만든 크리스털에도 꽤 많은 영혼을 모아놨었지만 손우경 그 자식이 부숴버리는 바람에 일이 수포로 돌아갔지. 그 후로 수정궁도 지어봤지만 역시 원조는 따를 수가 없는 모양이야. 조금만 더 기다리면 이제 곧 완성이 될 거다.”
“……뭐가 말입니까.”
허나 관음존자는 제대로 대답해주지 않았다.
“글쎄. 다 완성되어보면 너도 알게 되겠지.”
아부-게르다에서 만났던 연금술사 박철우가 자신이 인간의 영혼을 만들고 있다고 말했었는데 어쩌면 이것도 그와 같은 연장선일까. 영혼을 만들어서 도대체 무엇에 쓰려고…….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관음존자는 비록 지금 나를 물건처럼 무미건조하게 들고 있었지만, 어쩐지 절대 놓치지 않으려는 듯 손아귀에다가 힘을 꽉 주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손우경의 시체가 바닥 어디쯤에 있는지나 열심히 찾고 있었다.
죽은 시체들의 피 냄새와 더운 공기가 뒤섞여서 호흡이 꽉 막혀온다. 조각상들의 입에서 시체들을 뱉어낼 때마다 크리스털로 흘러들어가는 영혼의 수도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오조와 파오라도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었는데 나는 또 관음존자에게 무기력하게 붙잡혀 있을 뿐이었다.
이렇게 다 끝난 걸까.
손우경이 죽고, 다른 녀석들의 생사마저 장담 못하는 이 상황에서 나는 또 포타라카에 끌려가 관음존자의 장난감처럼 살아가는 날들이 이어지는 걸까. 무엇보다도 손우경의 죽음을 아직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내가 있었다. 실감이 전혀 안 났다. 아무리 참아보려 해도 그 슬픔이 가슴 안에서 용해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한쪽 눈에서 눈물을 뚝 떨어졌다. 손우경이 보고 싶었다. 녀석을 안고서 키스하고 싶었다. 내가 이런다고 죽은 사람이 다시 되살아나서 돌아올 리도 없겠지만, 마지막으로 한 번이라도 녀석과 다시 만나서 그동안 못했던 말들을 해주고 싶었다.
울고 있는 나를 관음존자가 달래듯이 말했다.
“다 감정놀음일 뿐이다. 돌아가서 바로 고쳐주마. 네 왼손에도 다시 생명 에너지 통로를 이어야 하고.”
헛웃음이 났다. 사람이 무슨 기계도 아니고 슬픈 감정을 고쳐주네 마네 하다니. 이런 인간 밑에서 목숨 하나 유지하며 살아보겠다고 그간 머저리같이 굴었던 나에게 화가 치밀었다. 아돌프와 함께 포타라카로 돌아갈 바에는 그냥 저 시체들과 함께 이곳에 묻히는 편이 더 나았다. 조각상에서 떨어지던 시체들이 뚝 멈추자 영혼을 모두 흡수한 크리스털이 공명을 하듯 새하얀 빛을 뿜어냈다. 하도 눈이 부셔서 잠시 눈을 감았는데 그때 귓가에 총성이 들려왔다.
-펑!
-펑!
-펑!
내 몸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감각에 눈을 번쩍 떠보니 그 순간 누가 아래에서 내 몸을 받아 들었다. 새카만 로브를 온몸에 걸친 사람이었다. 로브 후드를 푹 눌러쓰고 있어서 얼굴이 잘 보이진 않았지만 턱의 윤곽으로 봐선 분명 남자인 듯했다. 정체불명의 로브를 쓴 남자가 씩 웃으며 날 바닥에다 내려놓더니 자신은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어, 근데 갑자기 내 몸이 움직인다.
뭔가에 홀린 기분으로 위를 쳐다보니 조각상들의 입에서 검은 로브를 입은 수십 명의 남자들이 대거 등장해 양손에 총을 들고서 관음존자에게 집중 포격을 퍼붓는 중이었다. 관음존자는 빠른 속도로 총알을 피하고 있었으나 자그마치 수십 군데에서 날아오는 총알을 피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 기문파공의 방어막은 물리적인 것들은 막을 수가 없다고 그랬었지.
허나 지금은 그런 것들보다는 손우경의 시신을 찾는 일이 먼저였다. 여기서 다른 시체들과 함께 휩쓸리게 만들 수는 없었다. 정말 다행히도 내가 떨어진 위치는 좀 전에 손우경이 죽음을 맞이했던 장소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그리고 놈의 시신을 발견한 순간 너무 기쁜 마음에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죽은 손우경을 껴안고서 이렇게라도 다시 재회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는데 위쪽에서 휘익 하는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방금 날 도와준 남자가 한 손을 치켜들어서 로브 입은 남자들에게 신호를 보내자 이번엔 총이 아니라 대포들이 등장하여 단 하나의 표적을 노렸다. 저건 또 무슨 일이야. 그러나 관음존자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공격을 피하면서도 기문파공으로 총을 든 한 사람, 한 사람을 노려 맞히고 있었다. 관음존자에게 공격당한 사람들이 하나둘씩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때 바닥으로 떨어지던 시체에게서 몸을 꽁꽁 감추고 있던 로브가 벗겨졌다.
나는 다시금 놀라고 말았다.
저건 분명 척살부의 제복이었다. 위에서 총탄 공격을 하고 있던 녀석들이 일거에 로브를 벗어던지며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본격적으로 공간 위로 떠오른 척살부 제복을 입은 놈들이 어인 영문인지는 몰라도 자신들의 주인인 관음존자를 공격하고 있었다. 게다가 날 도와줬던 남자가 조각상의 입에서 큼직한 대포 하나를 챙겨 와선 파오가 쓰러진 바닥으로 휙 던져주며 크게 외쳤다.
“죽은 척 그만하고 좀 일어나라구, 파오 사형!”
이, 이 목소리는!
내가 얼떨떨하게 머리 위에 떠 있는 남자를 눈이 휘둥그레져서 올려다보는데 파오가 씩씩한 목소리로 신랄한 욕까지 쏟아내며 쓰러져 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오, 손우경 이 개자식아! 이제야 오면 어떡하라고! 내가 죽은 척하려다가 진짜로 뒈질 뻔했잖아!”
하늘 위에 뜬 남자가 로브 후드를 벗으며 놈을 멍청하게 바라보고 있던 나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다.
“안녕, 현아. 거기서 보니까 오늘따라 얼굴이 더 예쁘네.”
“어, 어떻게…….”
아무리 다시 봐도 손우경이었다. 아까 관음존자에게 두 눈을 뽑히고 내게 심장 부근을 찔린 그 손우경 말이었다. 뭐가 어찌 된 사연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눈에서 무작정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완전히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내 인생에서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 같던 그 기적이, 지금 내 눈앞에 현존하고 있었다. 손우경은 총알을 피하느라 정신이 없는 관음존자를 쓱 올려다보며 내게 말을 건넸다.
“미안, 아까는 들킬까 봐서 조마조마했는데 속아줘서 고마워.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다 해줄게. 뭐, 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속이라는 말도 있잖아. 내가 너 펑펑 울린 대가는 저녁에 힘내서 보답하는 걸로 할게.”
녀석이 입으로 바람을 훅 불자 내 품에 안겨 있던 손우경의 시체가 머리카락 한 올로 바뀌어버린다. 하……. 손우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놈이 양손으로 바주카포 한 대를 들쳐 메고서 관음존자에게로 뛰어들었다.
관음존자는 총을 피하느라 정신없는 와중에도 완전히 죽은 줄로만 알았던 손우경이 재등장한 탓인지 날아가던 속도가 잠시 느려졌다. 손우경이 말했다.
“……꽤나 놀란 얼굴이네. 처음부터 오년 전 상황을 그대로 답습한다고 믿은 게 바로 네 실수야. 한번 진 것엔 미련두지 않는다구. 내가 설마 예전 상황을 다시 반복해가면서까지 네놈에게 졌던 일을 절치부심 했을까 봐서?”
손우경은 바주카포를 쏘는 척하다가 다른 손으로 화염구를 날리며 가뜩이나 정신없는 관음존자를 약 올리려고 들었다. 과연 녀석다운 행동이었다.
파오는 벌써 위로 올라가서 거의 독 안에 든 쥐나 마찬가지인 아돌프에게 크게 소리쳐가며 신나게 포격하는 중이었다.
“총알 맛이 어때? 내가 마하데바 호에서 숙취에 시달려가며 빼돌린 물건이라구. 아, 물론 실제로 물건을 털어 온 건 우경이었지만. 배에 타기 전에 우경이가 아주 큰맘 먹고서 나한테 꽤 좋은 사실들을 알려줬었지. 바로 네놈의 약점이자 자기 약점에 대해서! 기문파공이 생각보다는 무적의 기술이 아니더라고. 으아! 진작 알았으면 내가 일 때려치우기 전에 포타라카에서 총격전이라도 한번 벌여보는 건데.”
하지만 관음존자는 수십여 개의 총알이 사방으로 날아드는 상황에서도 아직 단 한 대의 총알도 맞지 않은 상황이었다. 손우경이 바주카포 두 발을 연달아 쏘아 보내자 아돌프는 공중에서 수영을 하듯이 머리를 뒤로 숙여서 급속도로 아래쪽으로 몸을 떨어트렸다. 척살부는 공간마다 결계를 치며 관음존자의 이동 범위를 좁혀가고 있었다. 파오는 대포 말고 품 안에서 작은 권총 하나를 꺼내 들고 바닥으로 스스로 떨어져 내리는 관음존자를 조준했다.
“지금 네놈 부하들이 왜 널 공격하나 머리로는 잘 이해가 안 되겠지?”
파오가 아주 끈질기게 쫓아다니며 갖은 조롱과 함께 총알들을 날려댄다.
“종단 놈들을 통 믿을 수 없다고 일부러 바깥에서 인재들을 등용했다지? 근데 얘네들은 전부 네놈에게서 억울하게 가족들이 죽임을 당한 애들이라구. 나랑 같이 널 때찌해주려고 물밑에서 열심히 힘을 길렀거든.”
관음존자가 사방으로 기문파공을 개방시켰다. 다들 외곽지대로 몸을 피했다. 다시 돌아온 손우경이 기문파공을 쓰지 않는 건 지금 아군의 숫자가 너무 많아서인 듯했다. 파오는 총알이 다 떨어진 권총을 바닥으로 휙 던져버리고서 다시 뒷주머니에서 다른 총을 뽑았다.
“척살부 안에다가 내가 심어둔 알짜배기들만 남겨놓느라고 내가 진짜 고생이 많았지! 중간에 장기간 일행들의 발을 묶어놓으면 네놈이 분명 우리가 배신할까 봐 조바심을 내면서 고 새까만 똥강아지들을 줄줄이 보내올 거라고 미리 예상했거든. 그런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아줘서 고맙다. 덕분에 아주 수월하게 네놈 부하들을 미리 싹 처단할 수 있었지. 바로 오늘의 이날을 위해서!”
파오와 척살부가 마치 짠 것처럼 동시에 발포하며 원한에 사무친 목소리로 외쳤다.
“이것이 네놈 손에 여태껏 죽어나간 사람들의 복수다!”
드디어 이 길고 장대한 이야기의 막이 내리는구나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내 착각이었다. 갑자기 관음존자가 무시무시하게 포효를 하자, 총알들을 비롯하여 모든 이들이 전부 다 벽 쪽으로 튕겨 나갔다. 오직 손우경만 제외하고 말이다.
관음존자가 진언을 외우며 검지와 중지를 딱 소리 나게 부딪치자 하늘에 매달린 크리스털이 괴상한 소음을 내면서 마침 바닥에 쌓여 있던 시체들이 모두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들은 팔을 앞으로 쭉 내밀고서 벽에 튕겨서 바닥으로 떨어진 우리 편 사람들을 향해 걸어갔다. 예전에 강시 마을에서 봤던 모습들과도 거의 흡사했다. 시체가 강시화僵尸化하고 만 것이었다. 이제 죽은 사람까지도 자기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관음존자의 사악한 힘에 진심으로 소름이 끼쳐왔다. 아래쪽에서 파오와 척살부가 숫자가 어마어마하게 많은 강시들을 상대로 새로운 싸움을 벌이자, 시체들이 우수수 빠져나간 자리로 나는 기절해 있던 오조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새끼 여우에게 달려가서 일단 놈의 숨부터 확인한 후, 아직 호흡이 붙어 있는 오조에게 안도했다. 손바닥으로 뺨을 툭툭 쳤더니 그제야 오조가 부스스한 눈을 떴다. 아까 내가 환각에 시달리는 동안 대체 관음존자에게 무슨 일을 당했는지 얼굴이 한층 더 창백해져 있었다.
“삼장…….”
나는 오조를 들쳐 업고서 우리에게 달려드는 강시들의 얼굴에 금강저를 휘둘렀다. 대부분의 놈들은 전부 벽으로 몰려가 있어서 내가 상대할 것들은 정말 몇 안 되는 잔챙이들뿐이었다. 허나 머리 위에서는 여전히 손우경과 관음존자의 팽팽한 신경전이 상당 부분 진행 중이었다.
“……반대했어야 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석가여래께서 네깟 놈을 내 그림자 인간으로 염두에 두고 계신다고 했을 때부터.”
마침 바닥을 내려다보던 관음존자와 나는 눈이 딱 마주쳤다.
“그래, 난 너를 직접 죽일 순 없으니 대신에 칼을 숨겨놨었지. 네놈의 심장을 찌를.”
“네 덕분에 꽤 진귀한 장면을 보긴 했지만, 사실 생각보다 별로 유쾌한 장면은 아니더군. 예전에도 너는 내 것을 전부 다 가져가버리고서 내 주변 사람들까지도 앗아갔었지. 하지만 이번만은 다를 거다.”
“그때 절망 어린 네 얼굴은 다시 생각해도 꽤 봐줄 만했지. 어쨌든 네가 이런 깜찍한 연극을 벌인대도 결국엔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걸 지금쯤이면 몸소 깨닫고 있지 않나? 게다가 너 또한 나를 죽일 수 없는 건 매한가지지.”
손우경은 기문파공으로 관음존자의 머리를 노리며 쏘아붙였다.
“죽나 안 죽나 어디 한번 해보자구! 난 누구에게도 지지 않으니까!”
손우경과 관음존자는 다시 기문파공으로 이차 전쟁에 돌입했다.
“하, 여전한 녀석이군. 석가여래께서도 네놈에게 필요한 건 겸손이라고 하지 않든. 그래, 내가 마련해준 감옥에 오년 동안 갇혀서 그 겸손이 무엇인지는 잘 깨달았냐?”
“부탁이니 제발 그 더러운 입으로 석가여래님을 들먹이지 마라! 아돌프 너 같은 놈이 기문파공을 쓰는 것만으로도 수치스러우니까!”
“너야말로 기문파공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나대지 마라. 석가여래께서는 기문파공으로 자비심 있게 불쌍한 중생들을 구도하려고 하셨지. 돔 안은 이미 햇빛을 보지 못해서 점점 미쳐가는 축생들의 지옥이었으니까.”
“대체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나는 위쪽을 더는 올려다볼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손우경이 지는 모습을 보게 될까 봐. 그게 너무 두려웠다. 관음존자의 말대로 손우경과 파오가 날 속이는 연극까지 벌여가며 관음존자의 뒤통수를 치려 한 것치고는, 지금 이 많은 사람들이 아돌프 단 한 사람을 못 당해내고 있었다.
척살부와 파오들은 강시들과의 싸움에서 다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인간적으로 강시들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마음이 또 울가망해진다. 그때 조금씩 기운을 차리고 있던 오조가 내 어깨에 얹힌 자신을 바닥으로 내려달라고 했다. 일단 새끼 여우부터 조심스레 바닥으로 내려놓고서 나는 다시 우리에게 몰려드는 강시들을 향해서 금강저를 겨누었다.
이 싸움에서 과연 우리가 무사히 살아 돌아갈 수 있을까.
아무도 죽지 않기를 바랐으나 나에게 주어진 능력만으로는 저들에게 도움을 주기가 턱없이 부족했다.
크리스털에 영혼을 빨아 먹힌 것은 물론, 남겨진 육신까지도 관음존자에게 고스란히 이용당하고 있는 저 강시들을 금강저로 하나씩 처리하며, 나는 불현듯 삶과 죽음이 사실은 아주 우스운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인생은 영혼이 육체 안에 들어가서 잠시나마 꾸는 꿈들이라고 한다. 인생이라는 하나의 꿈이 끝나게 되면 또 다른 꿈으로 이동하며, 그렇게 하나의 영혼이 영원한 윤회를 반복한다고 했다.
내가 죽은 후에는 대체 어떤 세계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었으나, 만약 내가 죽더라도 이 세계는 계속해서 멈추지 않고 이어질 것이다. 이것은 당연한 진리였다. 내가 그토록이나 무서워하던 죽음은 사실 어느 누구에게나 똑같이 공평하게 찾아오는 일들이었다.
그리고 여기 있는 모두가 이곳에서 전부 죽게 되더라도, 내가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은 우주의 도서관 어딘가에 빼곡하게 저장되어서 언젠가 어느 누군가가 내가 꾸었던 이 꿈들을 다시 재생시켜주는 날이 올 것이다.
삶이란 그 순간순간들은 마치 덧없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전부 지나고 나면 어느새 하나의 이야기가 완성되는 것이었다. 마치 책장에 꽂힌 책들처럼, 누군가 나의 꿈을 발견해서 그 첫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이 이야기는 제일 처음부터 시작되고 마침내 끝이 날 것이다.
그러니 만약 이 세계를 만든 신이 있다면, 아니, 어쩌면 이게 누군가의 상상이거나 혹은 지금 책장을 넘기고 있는 도중이라면 제발 저에게도 부디 알려주세요. 그리고 기적을 보여주세요.
어떻게 해야만 지금 나의 이야기가 해피 엔딩으로 완성될 수 있는지를.
음?
그때 내 머리로 뭔가가 스쳐 지나갔다. 그것은 말라깽이 연금술사 박철우의 얼굴이었다. 나 지금 꽤 심각한데 왜 뜬금없이 박철우의 얼굴이 떠오른 거지.
-연구 진척은 대체 얼마나 되어가고 있지?
-사실…… 한 달 전하고 크게 다를 바가 없어요. 현재 배양 중인 호문쿨루스들은 추위에 너무 민감해서 조금만 온도가 떨어져도 금방 다 죽어버리는걸요.
이런 한가한 생각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러나 머리에서는 계속해서 당시 연금술사의 집에서 그곳 지하에 위치해 있던 어느 지하실의 모습이 생각났다. 크기가 제각각인 플라스크들과 유리병들이 잔뜩 널려 있고, 유리로 된 벽장에는 연금술 배합 재료가 일렬로 진열되어 있는.
지하실은 호문쿨루스들이 추위에 민감하다고 해서 온종일 한여름처럼 후덥지근한 온도가 유지되고 있었다. 마치 지금 이곳의 온도처럼 말이다.
이곳의 온도……?
-나도 내가 직접 갔으면 좋겠지만.
-…….
-지금은 자리를 오래 비울 수 없는 처지라서.
서쪽으로 출발하기 전에 관음존자가 했던 말들이 기억난다. 그가 그다음 말을 뭐라고 했었더라.
-게다가 바깥 날씨가 굉장히 추우니까.
추위를 지독하게 타는 관음존자는 수정궁 안에서도 늘 털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수정궁의 온도도 언제나 일정하게 후덥지근했었다.
-현玄이라고 했나. 이름처럼 눈동자가 굉장히 검군.
-이런 날씨에 여기까진 어떻게 걸어왔지?
이건 내가 어린 시절 관음존자에게 버려졌다가 맨발로 다시 티뷸라 궁까지 걸어갔을 때의 기억이다. 왜 갑자기 머리에 이런 생각들이 우후죽순으로 떠오르는 걸까. 그가 말한다.
-추운 건 딱 질색이야.
윤기가 흐르고 촉감이 보드라워 보이는 하얀 털, 관음존자의 털 코트가 퍽 따뜻해 보였었다. 실내에서도 저런 것을 걸치고 다니는 걸로 봐선 아마도 추운 것을 굉장히 못견뎌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저리 말한 아돌프가 기묘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생각해보니까 내가 방금 너에게 엄청난 얘기를 들려준 거 알고 있어?
연금술사 박철우와 추위를 타는 관음존자라. 핵심이 뭐지. 내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는 이 둘 사이의 핵심이 대체 뭘까. 뭔가가 손에 잡힐 듯 말 듯한 아주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이 아이는 제 걸작 중 하나예요. 영혼을 추출하기 위한 방식이 아니라 파라켈수스가 후대에 남긴 정석적인 호문쿨루스 제조법에 따라 만들어본 아이로 이름은 메이라고 붙였답니다.
그러자 그 후덥지근한 방 안에서 박철우가 내게 보여준 호문쿨루스가 떠올랐다. 원형 플라스크 안에 담겨서 칠흑같이 검은 머리카락에 새하얀 피부를 가졌던 여체형 호문쿨루스. 그 호문쿨루스는 붉은 빛이 감도는 작은 눈동자로 나를 지그시 올려다보고 있었다. 영혼이 없는 것처럼 텅 빈 눈동자에는 그 어떤 생기조차 없었다.
어?
-천도 프로젝트 때부터 느낀 거지만 대체 관음존자님께서 무슨 생각을 가지고 계신 건지 모르겠어요. 차라리 죽지 않는 영약을 만들라거나 돌멩이를 황금으로 바꾸는 기술을 연구하라고 하시면 제 연금술 인생을 전부 다 걸고서라도 마그누스 오푸스를 완성시키겠는데…… 이건 정말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한 처사인 것 같아요…….
-인간의 영혼을 만들어서…… 그 영혼을 추출하라니요. 그건…… 신의 영역이에요. 우리 인간의 손으로는 결코 만들어낼 수 없다구요…….
이거 어쩌면…….
-……관음존자, 당신 지금 무슨 짓을 꾸미고 계신 겁니까…….
-영혼을 모으고 있는 중이다.
그가 붉은 눈동자로 나를 바라본다. 아까까지만 해도 손우경이 죽은 줄로 착각하고서 전부 흘려들었던 말들이 다시 내 귓가에서 그대로 되풀이되고 있었다.
-크리스털은 창조의 도구이자 포털을 연결하는 전이의 힘이다. 그리고 크리스털은 그 순백의 결정으로 인간들의 영혼을 끌어 모으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저것이야말로 수십 년 전에 에메랄드 태블릿의 비전을 작동시켜 어느 ‘완전한 것’을 태어나게 했던 크리스털이다. 천도 프로젝트 당시에 저걸 본떠 만든 크리스털에도 꽤 많은 영혼을 모아놨었지만 손우경 그 자식이 부숴버리는 바람에 일이 수포로 돌아갔지. 그 후로 수정궁도 지어봤지만 역시 원조는 따를 수가 없는 모양이야. 조금만 더 기다리면 이제 곧 완성이 될 거다.
-……뭐가 말입니까.
-글쎄. 다 완성되어보면 너도 알게 되겠지.
십수 년 동안 조금도 자라지 않는 몸과 붉은 눈동자. 온도에 무척이나 예민한 호문쿨루스와 역시 추위에 민감한 관음존자……. 연금술사 박철우는 영혼을 만드는 것은 신의 영역이라고 난색을 표했었다.
설마하니.
저 관음존자의 정체가 호문쿨루스라서 자신도 인간이 되기 위해 영혼을 얻어내려고 했단 말인가.
그러나 그것은 나중에 천천히 재고해봐도 좋을 문제였다. 공중에서는 손우경이 스피드가 워낙에 빠른 관음존자에게 다시 밀리고 있었다. 나는 오조에게 황급하게 부탁했다.
“오조야! 너 지금 정령들 소환해서 여기 온도 자체를 엄청 끌어내릴 수 있어? 빨리! 급해!”
새끼 여우가 나에게 두 팔뚝을 붙잡힌 채로 눈을 깜빡이며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 어. 그야 할 수는 있는데 왜 갑자기…….”
“설명은 내가 좀 이따가 할 테니까 어서! 아마 포타라카의 평소 날씨만큼이면 충분할 거야!”
오조는 지팡이를 치켜들더니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4대 원소의 정령들이 모두 나와서 주인인 오조의 명령을 받들었다. 먼저 불의 정령 살라만더는 아직도 불에 타고 있는 대왕 펭귄의 시신과 땅에서 흐르고 있는 용암들을 자신의 몸에 전부 흡수시켜서 깨끗하게 거둬갔다. 그리고 땅의 정령 노움은 강시들의 시체들이 널려 있는 바닥을 통째로 꿀꺽 집어삼켰다. 이윽고 물의 정령 운디네가 이 드넓은 공간의 바닥을 발목 부분까지 물에 푹 잠기게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바람의 정령인 실프가 세찬 바람을 몰고 와 그 물을 완전히 꽁꽁 얼려버렸다.
이제 딱히 할 일이 없어 보이는 살라만더와 노움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얼어붙은 빙판 위에 올라서 버젓이 팔짱을 끼고 있는데, 그때 아름다운 물의 정령과 멋진 모습을 가진 바람의 정령이 서로의 손을 맞잡고 공중으로 서서히 올라갔다. 그들이 허공에 올라 정령의 춤을 추자 마침내 물과 바람이 만나 이 모든 공간으로 거센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한파와도 같이 급조된 추위에 순간 내 아래턱이 달달 떨려왔다. 그때 클리포트 곳곳에서 탄성이 튀어나왔다. 눈으로 뒤덮인 이 하얀 세상에서 공중에 떠 있던 두 개의 검은 인영이 벌이고 있는 그 오랜 전투가 드디어 끝을 보이고 있었다.
손우경의 기문파공을 정통으로 맞은 아돌프가 바닥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소복하게 쌓인 눈 위로 몸이 툭 떨어진 관음존자의 낯빛은 투명할 정도로 창백했다. 아마 몸에서 피가 흐르는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이쯤 되는 추위에는 어깨를 잔뜩 움츠릴망정, 저렇게 사경을 헤맬 정도로 몸이 떨리지는 않을 거였다.
관음존자를 격추시키고서 곧장 바닥으로 내려온 손우경은 눈이 내리는 주변 환경을 둘러보며 오조에게 이걸 네가 했냐는 듯한 눈짓을 건넸지만, 새끼 여우가 손가락으로 얼른 나를 가리켰다. 허나 손우경과 자세한 얘기를 나누기엔 서로의 거리가 너무 떨어져 있었다.
아돌프가 그렇게 초라해 보인 것은 그때가 난생처음이었다. 온몸이 발작하듯이 덜덜 떨리고 있었는데 저게 방금 전까지만 해도 우리 모두를 죽음의 공포 속에 몰아넣던 그 무서운 인물과 동일인이 정말 맞나 싶었다. 하지만 이제껏 내가 그렇게나 미워하던 남자인데도 막상 저런 꼴을 보게 되니까 기분이 무척 이상했다. 파오가 손우경에게 어쩔 거냐고 묻고 있었지만, 녀석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저런 아돌프를 내려다보는 손우경의 표정도 그리 평온해 보이지만은 않았다. 어쩐지 많은 생각들이 교차하고 있는 눈빛이었다.
얼음처럼 차츰 굳어지는 몸이 이제는 눈 속에서 아예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다. 몸이 얼어가던 아돌프는 차가운 눈동자로 내가 있는 방향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문득 내 심장이 욱신거렸다. 흡사 장례식과도 같은 분위기였다. 검은 옷을 차려입은 척살부 대원들과 우리들. 그리고 중앙에서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저 관음존자까지.
손우경이 모두의 앞으로 한발 나섰다. 녀석의 손에는 여의봉이 아주 평범한 길이로 들려 있었다. 놈이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내가 아주 오래전에 석가여래님과 둘이서 수행을 하러 돌아다니던 날들이었어. 어느 날, 물의 신전 요하임이라고 불리는 곳에 도착하게 되었는데 갑자기 스승님께서 그 안에 나에게 꼭 필요한 물건이 숨겨져 있으니 들어가서 그걸 꼭 가져오라고 하셨지.”
예전에 우리에게 들려줬던 그 여의봉 발굴에 관한 일화를 꺼내려는 건가. 당시 비기를 지키던 신전 사람들을 모조리 죽이고서 자기가 여의봉을 훔쳐왔다고 하지 않았었나.
근데 그 얘기를 왜 지금 꺼내는 거지?
“난 사실 그곳에 들어가는 게 그리 내키지가 않았어. 신전 외관은 너무 오래되어서 낡고 음습한 분위기가 흘렀었고, 약 몇 백 년 동안 사람의 손을 전혀 타지 않은 내부에는 이미 온갖 사악한 것들이 다 들러붙어 있었으니까. 솔직히 무서웠다. 그때는 내가 아직 어린 나이이기도 했었고 하필이면 너무 어두운 저녁 시간이었어.”
내가 들었던 얘기와는 뭔가 미묘하게 다른 듯했다.
‘예전에 내 스승님하고 둘이서 서쪽 지역으로 여행 겸 수행을 가던 길에 물의 신전 요하임이라고 불리는 어떤 장소를 발견했어. 오래전에 무슨 용왕인가를 모셨다는 신전이더라. 뭐 대종말 전에야 별의별 종교들이 다 판을 쳤을 때니까 그냥 그런가 보다 했었는데, 어째 그저 그런 유적지치고는 이상하게 외관 관리가 잘되어 있더라고.’
손우경은 우울한 목소리로 관음존자를 향해서 계속 말을 이어갔다.
“일종의 담력 테스트 같은 거라고 여겼었다. 잡귀와 악령들이 들러붙을까 봐 내 안의 두려움과 싸우며 점점 안쪽으로 들어가다 보니 어느덧 석가여래께서 알려주신 방이 나오더군. 방 안의 문을 열자 매캐한 먼지 냄새가 코를 지독하게 찔렀었지. 들고 있던 횃불로 안을 샅샅이 비춰보니 그 넓은 방 안에 제단 같은 것이 하나 놓여 있었어.”
손우경은 자신의 손에 들린 여의봉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긴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 제단 위에는 어느 죽은 사람의 삭은 뼈들과 함께 바로 이 여의봉이 꽂혀 있었다. 그것도 뼈의 왼쪽 가슴, 즉 심장 부위를 관통하고 있었지. 제단 위에서 사람을 죽인 건지 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그 물건에 차마 손을 댈 수가 없었다. 뭔가 기분이 나빴으니까.”
그럼 그때 우리에게 했던 말들은 다 농담이었다는 건가.
‘호기심에 무작정 쳐들어가봤는데 알고 보니까 그 요하임이라는 곳에는 먼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왔다는 여의봉如意棒이라는 이름의 비기祕器가 숨겨져 있었더라고.’
‘뭘 그래서야? 신전에 잠입하면서 어차피 그 비기를 지키고 있었던 놈들도 다 죽인 마당에 그렇게 그럴듯해 보이는 보물을 거기다가 쓸쓸하게 남겨두고 갈 순 없잖아. 누가 들어와서 그걸 슬쩍 가져가기라도 하면 신전에서 얼마나 곤란해지겠어? 그래서 내가 잘 보관해주기로 결정했지.’
손우경은 쓸쓸해진 눈으로 관음존자를 내려다봤다.
“내 인생에서 가장 무서웠던 순간을 대라고 하면 아마 그때가 처음일걸. 스승님한테 차마 못 가져왔다는 말을 할 수가 없어서 떨리는 손으로 그 봉을 뽑아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냅다 신전 밖으로 달려 나왔지. 내가 그렇게 빨리 뛸 수 있다는 걸 그때서야 알았다.”
녀석이 아돌프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이걸 가지고 나오자 앞에서 날 기다리고 계시던 스승님이 잘했다는 칭찬과 함께 나에게 그런 말을 하셨지. 이 여의봉은 언젠가 나에게 큰 어둠이 깃들 시에 그것을 봉인하기 위한 물건이 될 거라고. 그 신전은 오래전 어떤 사악한 존재를 봉인하기 위한 장소였고, 그 봉인을 위해 쓰였던 물건이 바로 이 여의봉이라고 하셨다. 그때에는 그런 얘기를 하는 석가여래님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지.”
손우경은 여의봉을 하늘 위로 높이 치켜들었다.
“……때가 되면 자연히 알게 될 거라고 했는데, 나는 내가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 저절로 느끼고 있어.”
손우경은 참았던 숨을 내쉬며 어딘지 회한이 섞인 어조로 아돌프에게 마지막 작별 인사를 건넸다. 나는 그 장면을 차마 지켜볼 수 없어서 그 순간 고개를 홱 돌리고 말았다.
“……잘 가라, 내 그림자여.”
여의봉이 아돌프의 왼쪽 심장으로 힘껏 내리찍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