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그걸 꼭 내 입으로 말해야 알겠냐
하아, 잠에서 깨자마자 입에서 절로 한숨이 나왔다. 요즘 또 잠잠하다 했더니 간만에 아주 오래전 일을 꿈으로 꾸었다. 땀에 흠뻑 젖은 이마를 쓸어 올리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뜨거워진 눈두덩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이미 흐릿해진 꿈의 잔상을 완전히 지워보려 했다. 다시 떠올려봐도 치가 떨릴 만큼 싫은 기억이다.
한때 세상에 대한 시야가 우물 안 개구리만큼이나 좁고 편협했을 무렵, 나는 내 침실 안에서 벌어지는 시시콜콜한 일들이 이 세상의 전부인 양 크게 착각했었다.
바깥세상과 나를 연결해주는 통로는 오로지 창문뿐이었고, 그 창문 너머로 하루가 멀다 하고 나를 찾아오던 어느 소년만이 내 무료했던 일상의 유일한 낙이었다.
그게 어떤 감정이었는지는 지금도 명확치가 않다. 물론 더 깊게 생각하고 싶지도 않지만. 확실한 건 부모와 집을 비롯해서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 어린아이에게 당시 의지할 만한 상대라곤 단지 그 녀석뿐이었다는 거다.
나는 군부 입단 테스트를 빌미로 그를 찾아갔고, 군 생활 중이던 그가 내 상황을 알게 된다면 어떤 식으로든 분명 나를 도와주리라 조금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약 반년 만에 다시 만난 그는 나를 완전히 모르는 척했다. 심지어 초지일관 나를 수많은 예비 동자승 가운데 한 명으로 대했다. 내게 항상 다정하고 친절했던 이웃 형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마치 낯선 타인을 바라보는 듯한 무감한 눈동자로 파오는 철저하게 나의 군부 입단 자질에 관한 것들만을 시험했고, 남들보다 배는 냉정한 기준으로 나를 평가했다.
그래, 파오 또한 주변의 시선들을 의식하느라고 그렇겠지. 군대란 원래 그런 곳이니까. 아무래도 함부로 행동하기가 어려울 거야.
눈으로 파오의 일거수일투족을 좇으며 나는 도리어 이전보다 선이 더 날카로워진 그의 안위를 걱정했다. 군대 생활이 많이 힘든가 보다. 분명 이 테스트가 끝나면 예전처럼 그는 내게 그간의 안부를 묻고 우린 다시 반갑게 재회할 수 있을 거라고, 나는 시험 내내 그런 헛된 희망을 잠시도 버리지 않았었다.
그러나 불합격 판정을 받은 후 모두가 떠난 시험장에 지쳐서 널브러진 나에게 그는 끝끝내 찾아오거나 어떠한 기별조차 보내오지 않았다. 아마 부모님이 돌아가셨던 날보다, 더 크고 서럽게 울었을 것이다. 간신히 억누르고 있던 절망감과 아픈 기억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마지막 희망이 사라지자, 정말 이 세상에 나 혼자 오롯이 남겨진 기분이 들었다. 먹먹해진 기분과 함께 앞으로의 미래가 전혀 보이지 않는 듯했다.
오기를 가지고 자그마치 열네 번의 입단 시험을 치르는 동안, 그는 점점 더 모질게 굴었다. 군대가 그를 바꿔놓은 건지, 아님 애초부터 그런 인간이었는지 몰라도 얼마나 저속하고 비열한 언변을 구사하는지, 그에게서 얘기를 들을 때마다 정말 내가 아는 파오가 맞나 내 귀를 의심했다.
‘여긴 너같이 실력 없는 놈들의 덜떨어진 어리광이나 받아주는 곳이 아니라구.’
‘뭘 단단히 착각하나 본데, 넌 이제 가진 것 하나 없는 일개 천애고아일 뿐이야. 하물며 빈민가에서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 지원한 저 쓰레기들보다 더 한심한 존재지. 저놈들은 너완 달리 그나마 체력 하나라도 멀쩡하니까.’
‘수험번호 587번, 더는 눈뜨고 봐줄 수가 없는 수준이군. 저 자식, 앞으로 시험장 근처엔 얼씬도 못하게 해.’
그 외에도 당시 나약하고 여렸던 마음에 깨진 유리 조각들처럼 푹푹 처박힌 말들이 참 많았었다. 하지만 이보다 더 깊은 곳에 있는 부분은 나조차도 차마 건드릴 수가 없었다. 가까스로 아문 상처에서 또다시 피가 철철 흐르게 될 것이 뻔하니까 말이다.
추억은 그 이름만으로는 아름다울지 몰라도 현실은 본디 시궁창인 법이었다. 그렇게 파오와의 질긴 악연에 몸서리치며 이제 그만 침대에서 일어나려던 차였다. 갑자기 뒷골이 쩌르르 하고 울려왔다. 두통을 동반한 강한 현기증에 몸의 균형을 잃은 채 침대 위로 푹 쓰러졌다.
어라, 내가 왜 이러지.
꿈 때문에 일어나자마자 기분을 잡쳐서 별다른 생각은 안 하고 있었는데, 그러고 보니 내가 어제 저녁에 어떻게 잠들었는지가 확실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분명 잠이 안 와서 몸을 연신 뒤척이다가 그저 가벼운 산책이나 하려고 잠시 밖으로…….
밖으로?
내가 정말 밖으로 나가긴 한 건가. 왜 그 후로는 기억이 아예 없는 거지. 아무래도 잠을 설치다가 그대로 잠들어버린 듯한데 뭔가 상당히 찝찝하고 묘한 기분이 들었다. 기억이 뚝 끊기기라도 했는지 잠들기 직전까지의 일들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머릿속에 희끄무레한 안개라도 낀 것 같다. 손우경과 거사를 벌인 지도 얼마 되지 않아서 컨디션이 그리 나쁘지는 않을 텐데, 대체 이 현기증과 두통은 어디에서 왔단 말인가.
설마 손우경이 옆에 없어서?
나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만에 하나일지도 모르는 가설을 강력하게 부정했다. 아냐, 그냥 피곤해서 그런 거야. 조금만 더 누워 있다가 일어나려고 베개를 베고 편하게 자리를 잡았다. 근데 손우경은 지금 나라카인지 뭔지 하는 던전에 들어가서 괴물들을 때려잡고 있을까. 아직 만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앞으로 일주일이나 남은 그 한정적인 시간이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여러 가지 상념에 사로잡힌 눈이 스르륵 감기려는데 귓가에 방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 침실로 들어온 방문자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마음속에서 거의 사그라지던 분노의 불씨가 또다시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꿈에서까지 나타나 나를 심술궂게 괴롭혀대더니 이른 아침부터 또 꼴 보기 싫은 얼굴이나 들이밀고 있었다.
파오가 생글대는 낯짝으로 아침 인사를 건넸다. 놈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심드렁하게 굴었더니 그쪽에서 정말 이상할 정도로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왠지 모르게 불편한 시선을 보내왔다.
“밤새 잠은 푹 잤냐.”
“……불쾌하니까 저한테 새삼스럽게 안부 같은 거 묻지 마십시오. 그런 건 됐으니까 무슨 용건인지나 말씀하세요.”
“별것도 아닌 걸로 까다롭게 굴기는. 우리가 한 해 두 해 알고 지낸 사이도 아닌데 그깟 안부 따위가 무슨 대수라고.”
“아마도 당신이 일방적으로 찾아오지만 않았더라도 결단코 지속되지 않았을 그런 사이입니다. 본인 입장이 곤란해지니 제게 더 이상 아는 척하지 말아달라고 얘기했던 것도 바로 당신이구요.”
기어코 내 가시 돋친 혀가 아주 깊은 곳에 파묻혀 있던 상처들을 끄집어낸다. 계속 나를 모른 척하려 드는 파오를, 그의 기숙사와 수행장 사이의 길목에서 하루 종일 기다렸었다. 녀석에게도 무슨 피치 못할 사정이 있겠거니 여기며 어쩌면 다시 거절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떨치려고 열 살짜리 꼬마아이는 부단히도 애를 썼었다.
날이 어둑해질 무렵, 마침내 먼 곳에서 걸어오는 놈을 발견했었다. 도반들과 낄낄거리며 숙소로 돌아오던 녀석이 쭈그리고 앉아 있던 나와 눈이 마주치자 금세 차가운 얼굴로 돌변했다. 그때 정확히 뭐라고 했었더라. 아마 내 평생 죽어도 안 잊힐 말을 했던 것 같은데 세월의 흐름이라는 게 정말 무섭긴 한가 보다. 너무 장시간 동안 묻어두어 머리 안쪽에 처박힌 기억 속에서 몇 겹의 거미줄들을 걷어냈다. 그러자 서서히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 그러니까 아마도.
‘귀찮아. 제발 부탁이니까 자꾸 나한테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지 말아줘.’
그때의 앳된 모습에 비하면 이제는 얼굴이 너무나 성숙해졌지만, 알맹이는 여전히 같은 것이리라 생각이 든다. 종단 내에서 우연찮게 마주칠 때마다 항상 싸우고, 상처 주고, 지독하게 미워한 세월이 어언 십오 년이었다. 그러나 거의 반 습관적으로 튀어나오는 날카로운 말들은 놈의 뻔뻔한 낯짝에 흠집을 내는 것이 아니라 전부 나에게로 튕겨 돌아와 내 가장 나약한 부분을 파고들었다. 언어라는 것은 언제나 거울이다. 타인에게 상처를 준 것만큼, 딱 그만큼의 몫이 다시 나에게로 돌아왔다. 어쩌면 그 이상일수도. 게다가 내가 아팠던 것을 너 역시 똑같이 느껴보라고 같잖은 보복을 해봤자, 언제나 원한이 더 큰 쪽이 지는 게임이었다.
내 표정에 서린 과거의 앙금들을 읽어낸 파오가 후 하고 짧은 숨을 토해내며 입을 열었다.
“지금에 와서 내가 무슨 말을 해봤자 소용이 없겠지만.”
“…….”
“네 넘치는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고 해서 내가 먼저 널 배신하거나 한 적은 없어.”
진짜 되도 않는 소리를 하고 있네. 내가 침대 시트에서 허리를 일으키며 차갑게 대꾸했다.
“말장난 다 끝나셨으면 이제 그만 제 방에서 나가주셨으면 좋겠는데요.”
파오는 주머니 안을 뒤적여 은박지에 포장된 커다란 알약 하나를 나에게 툭 던져주며 넌지시 얘기했다.
“기력을 빠르게 회복시켜주는 청심환이다. 얼굴빛이 많이 창백한데 내키면 먹어두든가.”
“…….”
“그리고 이곳 아부 게르다의 서쪽 지구에는 황금연성과 엘릭서에 대해 연구하는 연금술사들의 공방 거리가 있을 거다. 천도 프로젝트에서 살아남은 생존자 몇몇이 그곳 연금술사 조합에 섞여 들어갔단 얘기가 있는데 관심 있으면 박철우라는 남자를 한번 찾아가봐.”
“박철우요? 돔에서 살아남은 한국 출신이 많은 건 알지만 특이하게 아직까지도 이름에 성을 붙여서 쓰는군요.”
그래서 현재 동양에서 사용되는 화폐 단위와 언어 체계, 혹은 문화적인 습관 등은 전부 다 그 한국이라는 나라와 민족으로부터 기인된 것들이 많았다.
파오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우경이 자식이랑 마찬가지로.”
역시 파오도 그 점에 대해서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데 그 엘릭서라는 게 뭡니까.”
“현자의 돌이라고 들어본 적 없냐. 황금 변성과 모든 만병을 치유한다는 기적의 물건임과 동시에 인간을 불로불사의 영원한 존재로 만들어준다는 만능약이다.”
“그게 뭐 어때서요. 허황된 꿈을 꾸는 인간이란 어디에나 있는 법이 아니던가요. 현자의 돌이 천도 프로젝트와 무슨 관련이라도 있단 겁니까?”
파오가 끄응 하며 한심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내려다봤다.
“너보고 하나를 가르쳐주면 열을 깨우치라곤 안 하겠는데, 혹시 우경이가 평소에도 좀 답답하다고 안 하냐?”
그래, 유리 돔 안에서 걔한테 백치미 어쩌고 하던 얘기는 들어본 것 같다. 파오는 내게 간단한 질문을 던졌다.
“천도 프로젝트의 ‘천도’가 네 생각엔 무슨 뜻인 거 같아?”
나는 잠시 생각해보다가 바로 고개를 저었다. 나 또한 그것에 대해 전혀 궁금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관련 문건이 일급 기밀로 분류된데다가 그저 지명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사실 깊이 고민해본 적이 없었다. 파오는 그런 나의 반응을 익히 짐작했다는 듯 바로 친절한 설명을 곁들여주었다.
“천도는 선가의 신선들이 먹는다는 천계의 복숭아를 뜻해. 전설이긴 해도 그 복숭아를 딱 한입만 베어 먹으면 설령 인간이라고 해도 마치 신선처럼 영원히 죽지 않고 영생할 수 있지. 이래도 내가 아까 말한 현자의 돌이랑 아무런 연관이 없어 보이냐?”
“……천도 프로젝트란 게 설마 불사의 몸에 대해 연구하던 거였습니까?”
“나도 완전히 다 엎어져서 엉망이 된 뒤처리만 맡았던 거라 자세히는 몰라. 다만 내가 천봉대원수로 재임한 기간 동안 접수됐던 대다수 실종 사건 피해자의 신원을 그곳 내부 리스트 안에서 전부 발견한 걸 보면 아마 인간을 가지고 뭔가를 실험했던 건 틀림없어.”
내 기분 탓인가, 손우경이 요 며칠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평소 실없는 소리와 행동들로 빈축을 사던 파오가 어째서인지 꽤 진지해진 것 같았다.
“천도 프로젝트는 군부 고위 관계자들조차 전혀 알지 못했던 관음존자의 단독적인 개인 프로젝트였어. 내가 그것을 보고받은 것은 아주 나중의 일로, 그 프로젝트와 관련된 종단 주요 인물들 사십여 명이 모두 목과 몸통이 분리되어 처참하게 살해당했다는 것과 그 프로젝트에서 연구하던 기밀 데이터들이 모조리 파괴됐다는 것뿐. 그리고 그런 대담한 범행을 저지른 당사자는 여태껏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어느 신원 불명의 청년이었고, 그 단 한 명이 종단 내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놓은 채 아무 조사도 없이 다섯 개의 검 수용소에 즉각 수감이 됐지.”
내가 파오의 입장이라도 충분히 손우경을 수상하게 여길 만한 상황이다. 그럼 여태 남들 앞에서 파오가 필요 이상으로 자기 실력을 감추고 있었던 건 바로 그 때문일까.
“너도 관음존자 밑에서 별별 험한 꼴은 다 보고 자랐을 테니 여기 아부 게르다가 그 녀석 수하의 가장 큰 군사 자금줄이란 것 정도는 당연지사 알고 있겠지? 이곳에 연금술사들의 공방 거리가 조성된 건 약 오년 전. 천도 프로젝트가 괴멸했던 것도 역시 오년 전. 흔한 우연치고는 구린 구석이 많지 않아?”
“저에게 이런 얘기를 해주시는 이유가 뭡니까.”
“넌 내 말이라면 콩으로 메주를 쑨대도 안 믿을 녀석이니까. 진실을 네가 직접 확인해보는 게 어떨까 해서.”
파오는 손가락 두 개로 박철우의 이름이 적힌 뻣뻣한 명함 한 장을 쓱 내밀면서 날 채근하듯 말했다.
“……내가 얼마나 더 상세하게 설명해줘야 그 무거운 엉덩이를 뗄래?”
나는 침대에서 재빨리 일어나 손으로 명함을 낚아챘다.
연금술사들의 공방 거리라고 해봤자 그리 대단한 것은 없었다(사실 둘째 날에 아부-게르다의 화려한 중심부를 구경한 이후로는 뭘 봐도 크게 감흥이 없어진 상태긴 하다). 왜냐하면 이곳은 집들이 전체적으로 아기자기하게 지어졌다는 것과 지붕에 솟아오른 커다란 굴뚝에서 쉴 새 없이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거의 평범한 주택가나 다름없었다.
박철우의 명함에 적혀 있는 주소를 물어물어 찾아간 곳은 신기하게도 벽 사면을 몇 겹의 철판으로 둘러서 만든 집이었다. 집이라기보단 차라리 무슨 방공호에 가까웠다. 그 철판 벽에서는 창문은커녕 문처럼 생긴 것조차 찾아볼 수가 없었다. 몇 번을 둘러봐도 사람이 드나드는 출입구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주소는 암만 봐도 여기가 맞는 것 같은데 안에 정말 사람이 살기는 하는 건지. 철판으로 된 벽을 조심스레 두들겨보다가 급기야 주먹으로 쾅 하고 쳐봤는데 하마터면 손뼈가 으스러질 뻔했다. 철판 두께가 엄청나게 두꺼웠는데 이 정도로 과잉 방어를 하는 이유야 안 봐도 뻔했다.
박철우가 천도 프로젝트의 몇 안 되는 생존자라고 하더니만 확실히 그 당시의 트라우마로 인해 세상에 대한 경계심이 더욱 커진 듯했다. 이런 경우는 아주 비일비재하게 보았다. 관음존자와 조금이라도 연관되었던 자들이라면 더더욱이나.
이를 어쩐다. 기껏 여기까지 찾아왔는데 이대로 그냥 돌아가야 하나.
그때 철판 위쪽의 스피커폰 형태로 된 박스에서 걸쭉한 남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거 남의 집 앞에서 누구요?
나는 잠시 머리를 굴려봤다. 지금은 구태여 솔직하게 대답해줄 필요가 없을 듯했다. 거기다 내가 누구누구요, 라고 말한다고 한들 저쪽에서 반갑게 환영해줄 분위기도 아닌 것 같고. 하도 손우경이나 파오같이 머리가 비상한 놈들이 내 주변에 널려 있는지라 뭐 하나 단순하게 생각할 수가 없어졌다.
-누구냐니까요?
나는 집 근처를 다시 한 번 주의 깊게 둘러봤다. 그래봤자 내 추측에 불과하지만, 이런 철판으로 된 방어벽까지 쳐둘 정도라면 박철우는 필시 인간에 대한 두려움 역시 상당할 터였다. 아마도 내 정체를 밝히는 순간, 이 집 전체를 거북이 등껍질 삼아서 언제든 불쑥 내민 머리를 다시 집어넣을 남자였다. 그런 의미에서 이 집 주인은 가급적이면 집 밖으로는 외출도 별로 하지 않을 성정일 게 분명했다. 그럼 이런 타입들이 가장 달가워할 만한 방문자는 누가 있을까…….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한번 모험을 걸어보기로 했다. 일단은 경계를 누그러트린 후 저 철옹성 같은 문부터 열게 하는 게 급선무였다.
“박철우 씨, 주문하신 식료품 배달 왔습니다.”
스피커폰 너머가 잠잠해졌다. 잘못 찍은 건가 해서 난감하게 뺨을 긁적이는데 갑자기 몇 겹으로 둘러싸여 있던 철판 문들이 하나하나 큰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움푹 꺼져 들어갔다. 철판으로 벽을 두른 게 아니라 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 구조였구나. 이윽고 다른 공방들처럼 평범하고 멀쩡하게 생긴 집 하나가 눈앞에 드러났다. 허겁지겁 문이 열리며 아마도 박철우 본인으로 예상되는 남자가 화를 내면서 튀어나왔다.
“음식들을 주문한 지가 언젠데 이제야 가져다주는 겁니까! 굶어죽는 줄 알았다구요!”
그는 삐쩍 마른 체형에 구부정한 등을 가진, 키가 멀대처럼 큰 남자였다. 안경을 고쳐 쓰던 박철우가 나와 얼굴을 맞닥뜨린 순간, 눈동자가 자연히 내 제복으로 향했다. 항상 겪는 일이긴 해도 관음존자의 만자 문양 배지를 보게 된 사람들의 반응은 한결같아진다. 어찌 보면 가슴팍에 이와 똑같은 표식을 매달고 다니는 척살부의 다른 선배들이 그동안 저질러온 만행 탓이기도 하겠지만.
“으아악! 여, 연구 결과는 조만간 보고 드리겠다고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비명을 지르던 박철우가 바닥에 엎드려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며 벌벌 떨어댔다. 이쯤 되면 허탈하기까지 하다. 한번 툭 던져본 미끼에 월척을 낚은 것까진 좋은데, 박철우가 방금 전 내게 한 저 말들은 파오의 추측처럼 관음존자와 이곳 연금술사 공방이 서로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소리나 매한가지였다.
“죄송합니다! 제발 때, 때리지만 말아주세요! 이번 결과가 자꾸 늦어지는 건 제 탓이 아니라구요!”
양파 껍질이 생각 외로 한 겹, 한 겹 너무 잘 벗겨져서 눈이 매워왔다. 내 발밑에서 엎드려 떨고 있는 박철우를 보니 마음이 무거워진다. 일이 이렇게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될 줄은 몰랐다. 파오의 부추김에 찾아온 곳이지만, 천도 프로젝트든 뭐든 간에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오직 하나.
바로 손우경의 정체였다.
불사신을 지향하는 것쯤이야 여태 역사적으로도 소위 이 세상을 거머쥐었던 권력자들이라면 늘 자행해왔던 일이다. 환영제야단을 한입에 집어삼킨 아돌프라는 거대한 구렁이가 서쪽 연합국이라는 쥐새끼들을 가지고 놀다가 문득 심심해진 나머지 새로운 짓거리를 생각해냈을 거다. 관음존자가 뒤에서 무슨 간계를 꾸미든지 아무 관심 없었다.
그저 손우경이 무엇 때문에 그 천도 프로젝트를 방해하려고 들었는지, 부차적으로 손우경과 천도 프로젝트의 배후인 관음존자와는 또 어떤 연관 관계가 있는지 그것을 이 남자에게서 확인받기 위함이었다. 허나 저 박철우의 상태를 보니 내가 크게 구슬릴 필요도 없을 것 같긴 한데.
그러나 나는 박철우가 지금 오해하는 것처럼 놈을 핍박하기 위해 찾아온 아돌프의 간악한 하수인인 척 굴려다가 다시 방향을 180도 선회했다. 슬쩍 안쪽을 들여다보니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굴 속 같은 집이 보였다. 이런 곳에서 온종일 뭔가를 연구하고 있을 이 남자에게 어쩐지 오래전 나의 모습이 고스란히 투영되고 있었다. 결코 동정심은 아니었다. 이런 겁먹은 상태로는 내가 원하는 대답을 제대로 들을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나는 박철우를 일으켜 세운 뒤 문을 닫고서 집 안쪽으로 들어갔다. 어깨를 움츠리고 여전히 날 무서워하는 박철우의 뺨을 탁탁 두들기며 정신을 차리게 만들었다.
“난 관음존자께서 연구 중간 상황을 보고받기 위해 파견한 사람이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따로 물어볼 것이 있어서 박철우 씨를 찾아왔습니다.”
“거, 거짓말하지 마세요! 아까도 식료품 배달원이라고 날 속였잖아요!”
“그런 식으로 속이지 않았으면 문을 열어주지 않았을 것 아닙니까.”
“그럼 그 제복과 배지는 뭐냐구요! 이, 이건 신종 괴롭힘이 틀림없어!”
집 안이 너무 지저분한 상태라 앉을 곳이 마땅치 않았지만 나는 나무 의자 위에 쌓여 있는 잡동사니들을 싹 걷어내고서 우선 박철우를 그 위에 앉혔다. 남자의 두 어깨에 양손을 올리고서 눈을 일직선으로 마주하며 흥분해서 안절부절못하는 그를 안심시키려 들었다.
“몇 가지 질문에 대답만 똑바로 해주면 당신을 더 이상 성가시게 하지 않고 얌전히 돌아가겠습니다.”
“이젠 절대로 안 도망친다구요! 제 충성심을 이런 방식으로 시험하려 들지 마세요!”
아, 이거 생각보다 훨씬 심각하네. 슬슬 짜증이 나서 한쪽 어금니를 꽉 악물었더니 관자놀이 부근이 실룩였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나는 애써 상냥하게 미소 짓던 안면 근육을 완전히 무장 해제시키고서 원래의 무표정한 얼굴로 되돌아갔다. 그다음 주먹에 있는 대로 힘을 주고서 남자의 얼굴을 빡 휘갈겼다.
의자에서 굴러 떨어진 남자가 바닥으로 픽 쓰러졌다. 그는 자신의 뺨을 매만지다가 마치 비련의 여주인공 같은 몸짓으로 나를 홱 올려다봤다. 그러더니 눈시울을 글썽거리며 입을 열었다.
“거, 거봐! 결국엔 때릴 거면서…….”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당신이 유독 누군가에게서 자주 맞는 이유가 있다면 그건 반드시 타인에게만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닐 거라고.
노선을 다시 원상복귀시켜 거만하게 소파에 기대앉은 나에게 박철우가 무릎을 꿇고서 손수 타 온 홍차를 두 손으로 공손하게 내밀었다. 나는 뽀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차를 우아하게 마시려다가 문득 찻잔을 다시 박철우에게 돌려주며 얘기했다.
“야, 이거 네가 먼저 마셔봐.”
관음존자 밑에서 굴러먹은 지도 어연 십오 년차였다. 아돌프가 자신을 보필하는 수행 비구니들을 놔두고서 굳이 나에게 차를 타 오거나 물을 가져오라는 둥 자잘한 심부름을 시킬 적마다, 나 혼자 얼마나 맘 졸여가며 찌질한 짓들을 벌였는지 남들은 아마 모를 것이다. 하긴 관음존자도 그걸 여태 몰랐으니 내가 지금까지 잘 살아 있는 거겠지. 여하튼 걸레 빤 물 섞기, 침 뱉기, XX 타기, YY 타기 등등. 그중 녹차에 XX을 탔던 건 내가 생각해도 좀 심했던 것 같다.
어쨌든 그런 나의 제안에 박철우가 흠칫 놀라며 나와 찻잔을 번갈아가며 조심스럽게 바라보더니, 마침내 자기가 잠깐 정신이 나가서 죽을죄를 지었다며 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렸다. 내 발목을 부여잡고 신발이라도 핥을 기세길래 얼른 만류하며 발을 빼냈다. 물론 놈의 등에 방금 붙잡혔던 신발을 문질러 닦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왕 연기하기로 마음먹은 거, 더없이 싸늘한 말투를 가장하며 박철우에게 얘기를 꺼냈다.
“연구 진척은 대체 얼마나 되어가고 있지?”
“사실…… 한 달 전하고 크게 다를 바가 없어요. 현재 배양 중인 호문쿨루스들은 추위에 너무 민감해서 조금만 온도가 떨어져도 금방 다 죽어버리는걸요.”
듣도 보도 못한 얘기가 나오고 있었지만 나는 원래 다 알고 있었다는 듯이 행동하느라 애를 먹었다.
“그 실험을 성공시키는 게 바로 네 녀석들의 역할이잖아.”
박철우가 깊은 한숨을 토해내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하지만……, 하지만 인간과 엇비슷한 형태의 호문쿨루스를 제조하는 것은 가능해도 그 빈껍데기 안에 영혼까지 부여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에요. 제조하는 과정도 남자의 신선한 정액을 40일간 증류기에 넣고서 부패시켜야 하는데 그 안에서 열에 아홉은 차마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는 끔찍한 괴물들이 태어난다구요. 한밤중에 바닷가에 몰래 갖다 버리는 것도 한두 번이지…….”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 들었다. 여기 연금술사들은 아돌프의 명령으로 자신에게 불로불사의 몸을 가져다줄 ‘현자의 돌’에 대해서 연구하는 것이 아니었나?
내가 말이 없자 박철우는 그간의 연구에 따른 괴로움 속에서 허우적대다 자기 멋대로 폭주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자기 말을 들어줄 상대가 필요했던 모양이었다.
“천도 프로젝트 때부터 느낀 거지만 대체 관음존자님께서 무슨 생각을 가지고 계신 건지 모르겠어요. 차라리 죽지 않는 영약을 만들라거나 돌멩이를 황금으로 바꾸는 기술을 연구하라고 하시면 제 연금술 인생을 전부 다 걸고서라도 마그누스 오푸스연금술사들은 현자의 돌을 만드는 작업을 ‘마그누스 오푸스’, 즉 위대한 걸작이라 불렀다를 완성시키겠는데…… 이건 정말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한 처사인 것 같아요…….”
남자는 고개를 번쩍 치켜들더니 극적인 자세를 취하며 말을 이어갔다.
“인간의 영혼을 만들어서…… 그 영혼을 추출하라니요. 그건…… 신의 영역이에요. 우리 인간의 손으로는 결코 만들어낼 수 없다구요…….”
듣고 있는 내내 귀가 멍멍했다. 너무 생각지도 않은 얘기가 흘러나와서 이게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사정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인간의 영혼을 만들어낸다고? 그걸 만들어서 어디에다가 쓸 건데?
티뷸라 궁의 그 빨간 눈을 가진 악마의 머릿속에선 지금 어떠한 음모가 가동되고 있을지 쉬이 짐작조차 되질 않았다. 내가 당황해 있는 틈을 타서 조용히 눈치를 보던 박철우가 의아해진 눈초리로 나를 쳐다봤다.
“근데 오늘 오신 감시자분은 이때껏 오신 분들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네요. 보통은 두 분씩 오시는 데 반해…… 별로 때리지도 않고…… 게다가 이렇게…….”
나를 쳐다보는 박철우의 얼굴이 새빨갰다. 내가 일자 눈을 만들어 보이며 놈을 뚱하게 응시하자 박철우가 얼른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가 입을 열었다.
“좀 물어볼게 있는데, 너 천도 프로젝트 생존자잖아?”
박철우가 수줍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왜 그러냐, 너.
“혹시 손우경이라는 이름의 남자, 누군지 기억해?”
놀랍게도 박철우의 반응은 몹시 호의적이었다.
“아! 혹시 그 갈색 피부를 가진 청년 말인가요? 그럼요. 알다마다요!”
목구멍으로 침이 꿀꺽 넘어갔다. 이제야 진짜 본론으로 들어섰다.
“어떻게 기억하고 있지?”
“그야 뭐…… 감시자분도 그곳 관계자니까 잘 아시겠지만 저희들은 어린 나이에 거의 납치되다시피 강제로 끌려와서 매일같이 실험실에 갇힌 채 연구나 했잖아요. 뭐, 지금도 크게 다를 바는 없지만요…….”
당연히 처음 듣는 사실이다.
“천도 프로젝트 시절은 사실 반노예나 다름없는 나날이었는데 어느 날, 그 청년이 불쑥 쳐들어와서 연구실을 마구 박살 내더니 완성 직전인 호문쿨루스 배양 장치의 전원을 모두 꺼버렸어요. 우릴 감시하던 검은 제복의 사람들을 차례대로 죽이기에 저도 이대로 꼼짝 없이 죽는구나 했었는데, 놀랍게도 그 청년이 우리 연구원들을 전부 자유롭게 풀어줬죠. 뭐 한 삼일 만에 다시 꼼짝없이 붙잡히긴 했지만, 분위기가 무섭긴 해도 확실히 나쁜 사람은 아니었어요.”
파오가 손우경의 정체가 무지하게 수상하다며 내 등을 떠밀어 보낸 것에 비하면 완전히 역효과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거 말고는 그자에 대해서 더 생각나는 점은 없어?”
박철우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눈알을 굴려보더니 이제야 하나씩 기억난다는 듯이 뜸을 들여가며 이야기했다.
“한 오년 전 기억이긴 하지만…… 그래요, 굉장히 잘생긴 청년이었죠. 저야 연구실 안쪽에 숨어서 지켜보긴 했지만, 무언가를 찾고 있는 것처럼 아주 다급한 표정이었는데…….”
나도 걔가 잘생긴 거 알거든?
내가 고작 이런 얘기나 들으려고 박철우를 찾아왔나 싶었는데 녀석이 불현듯 기억이 떠오른 듯한 눈초리로 충격적인 사실을 내뱉었다.
“그때 온몸이 사람의 피로 빨갛게 물들어가는 와중에도…… 어딘지 울 것 같은 표정이라 인상 깊었네요. 우수에 젖은 미남이랄까…….”
울 것 같은 표정의 손우경이라니 도무지 상상이 안 갔다.
나는 박철우에게 물었다.
“그게 다야?”
박철우는 부자연스러울 만큼 큰 동작으로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오늘 이곳에 와서 건진 거라곤 천도 프로젝트가 호문쿨루스들을 배양하여 인위적인 영혼을 만들어내려던 계획이라는 것과 당시 손우경이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는 게 전부였다. 허나 전자의 엄청난 이야기보다 차라리 후자 쪽의 숨겨진 사연이 더 궁금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 뒤 출구 쪽을 향해 걸어 나가려고 했다. 아직 저 연금술사에게 좀 더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많이 남았지만 슬슬 오조의 점심을 챙겨주지 않으면 안 되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뒤에서 누가 내 다리를 덥석 잡아온다.
박철우였다.
“버, 벌써 가시려고요?”
아까는 겁에 질려 벌벌 떨던 주제에 심경의 변화가 빨라도 너무 빨랐다. 내가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갈게. 따로 생각할 것도 있고.”
그리고 내 애완 여우한테 밥도 줘야 하니까.
하지만 박철우가 내 한쪽 발을 물고 늘어지며 구저분하게 굴었다.
“가실 땐 가시더라도…….”
놈이 진드기처럼 매달려왔다.
“마지막으로 감시자님의 신발이라도 핥게 해주세요!”
……뭐어?
“그, 그게 안 되면 그 구둣발로 저를 사정없이 거칠게 걷어차주세요!”
잠시 미간을 짚으며 깊은 회의를 느꼈다. 어째서 나한테는 허구한 날 이런 변태 같은 놈들만 꼬이는 걸까.
어쨌거나 나는 박철우의 소원대로 녀석의 몸을 구둣발로 신나게 걷어차주고 나서야 간신히 그 집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숙소로 돌아와 오조와 근처 식당에서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서 서둘러 파오의 행방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뭔가 쀼루퉁해진 새끼 여우의 말에 의하면 녀석은 아침부터 아부-게르다의 중심부 쪽으로 나갔다는 것 같았다. 하루라도 인간 자판기에 출근 도장을 안 찍으면 거시기가 썩기라도 하는 건지 진심으로 이가 빠득빠득 갈린다.
듣기로는 관음존자가 내어준 내 법인 카드 말고도 각자에게 조금씩 여행 경비를 제공하긴 한 모양인데(근데 이것들은 왜 같이 다니면서 지들 돈 한 푼 쓸 생각을 안 하지?) 그래도 아부-게르다에서 매일같이 유흥비나 탕진할 만큼 그리 큰 금액은 아닐 터였다. 아돌프가 어떤 놈, 아니, 분인데. 여하간 인간 자판기를 이용하는 일회 비용은 일반적인 매춘 업소에 비해서 곱절 이상은 비쌌다. 그러니 파오 녀석은 대체 무슨 돈이 나서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같이 홍등가를 방문하는 건지 참 의아할 노릇이다.
아니, 애당초 파오가 가는 곳이 꼭 홍등가라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아침부터 공연히 날 찾아와 박철우를 들먹여가며 다른 곳에 정신을 팔게 만들어놓고 정작 자신은 어딘가에 놀러 다니고 있다는 이야긴데. 월척은 박철우가 아니라 파오의 보이지 않는 낚싯대에 걸린 나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더러운 기분이 들었다.
겁쟁이 연금술사에게서 오늘 들었던 그 이야기들을 파오와 다시 의논해보려던 계획은 이로써 전면 수정에 들어갔다. 그리고 관음존자와 관련된 사안이라면 더더욱 말조심을 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게다가 어차피 아돌프가 불로불사의 약을 만들든, 인간의 영혼을 만들든 뒤에서 구린 짓거리를 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크게 변함이 없다. 내가 고민한다고 뭐가 달라지는 것도 아닐진대 일단은 흘러가는 대로 지켜보면 될 일이었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말이 있긴 해도 감히 티끌 주제에 태산을 걱정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 우선은 그냥 내버려두자…….
그 순간 머리가 지끈거려왔다.
아니, 실은 신경이 쓰여서 미칠 노릇이었다. 관음존자가 무슨 목적하에 그런 짓을 꾸미고 있는지 더 샅샅이 파헤치고 싶었고, 손우경이 천도 프로젝트에 개입하게 된 이유가 궁금했다. 나한테 맨날 알쏭달쏭한 말을 지껄이는 손우경의 정체를 비롯해 아돌프와의 관계까지도 전부 의문스러운 것투성이였다.
머리 안에 너무 많이 방치해둔 실타래가 저들끼리 뭉치고 꼬여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내기가 참으로 어려웠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초심으로 돌아가는 주문을 외웠다.
지금 나한테 가장 중요한 게 뭐지.
그 대답은 항상 정해져 있었다. 백점짜리 모법 답안이다.
관음존자가 내린 명령을 완벽하게 수행하는 것.
그렇다면 그 명령에 제일 방해가 되는 것이 뭘까.
……손우경?
고개를 가로로 저으며 나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나에게 지금 방해가 되는 것은 손우경이 아니라 그 녀석에게 향하고 있는 내 마음이었다. 설사 놈의 진짜 정체를 알게 된다고 해도 네가 뭘 어쩔 건데.
피식, 내 입에서 자조 섞인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 * *
이튿날 연금술사 박철우의 집을 재차 방문했다. 내가 철판 벽을 쾅쾅 두드리기도 전에 방어막이 바닥으로 스르렁거리며 꺼져들었다. 키가 너무 커서인지, 혹은 자세가 나빠서인지 허리가 구부정한 박철우가 어제에 비해 꽤나 멀끔해진 모습으로 나를 맞이했다.
“감시자님이 오시길 아침부터 기다리고 있었어요!”
나는 다시 여길 오겠다는 일언반구의 말도 안 꺼냈기에 박철우의 저 당연하다는 반응이 선뜻 이해가 가질 않았다. 허나 그 의문이 곧 풀렸다.
“보통 다른 감시자님들은 일주일도 넘게 머무르시면서 실험의 결과물들을 꼼꼼하게 훑어보고 가시는데, 어제는 너무 일찍 돌아가셔서 저도 당황했지 뭐예요.”
어제는 나도 경황이 없던 까닭에 미처 눈치채지 못했는데 이 남자는 나이가 서른 이상은 족히 되어 보이는 반면 말투는 어째 어린아이 같았다. 어린 나이에 거의 납치되다시피 연구실로 끌려왔다더니 사회성이 많이 결여된 느낌이 들었다.
그는 어수선한 집 안 곳곳을 누비며 지하에 위치한 실험실 안으로 나를 안내했다. 지하는 위층의 집 크기에 비해 더 큰 장소와 방들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숨이 턱 막혀왔다. 지하실의 공기치고는 마치 한여름의 기온처럼 후덥지근한 온도였다.
연금술사의 실험실 안에는 크고 작은 플라스크들과 유리병, 증류기와 여과기, 양초와 램프, 망치, 아타노르 등이 각각 알맞은 위치에 안배되어 있었고, 광물이나 동식물의 고체 및 액체 등으로 이루어진 연금술 배합 재료들이 표면이 유리로 된 벽장 안에 일렬로 늘어놓여 있었다.
그러나 이 실험실에서 최고로 눈에 띄는 부분은 역시 수십 개의 증류기 안에서 배양되고 있는 작은 호문쿨루스들이었다. 인간의 형태라고 보기엔 아직 무리가 따랐지만, 꼬물꼬물하는 게 살아 있는 생명체라는 인식을 주었다. 박철우가 그런 나의 관심에 약간은 뿌듯해진 얼굴로 내게 저 작은 것들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지난번 실패작들 이후로 약 한 달 정도 배양한 놈들이에요. 앞으로 열흘 남짓 지나게 되면 2차 성장이 있을 예정인데 그 고비만 잘 넘기면 연구소 당시의 수준까지는 도달할 수 있을 거예요.”
나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유심히 들여다보다가 박철우에게 물어봤다.
“어제 남자의 정액을 주재료로 사용해서 호문쿨루스를 배양한다고 말했는데 그건 다 어디에서 공수해 와?”
연금술사가 두 볼을 발그레한 홍조로 물들이며 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정액은 제 걸로.”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박철우에게서 일정 거리를 유지했다. 어린애 같은 말투를 사용해도 일단 남자니까 할 건 다 하나 보다. 하기야 내 신발 좀 핥게 해달라는 변태 새끼였는데 재고할 만한 일말의 가치도 없었다. 첫 등장부터 제발 자길 때리지만 말아달라던 놈이 발로 배를 퍽퍽 걷어차는데도 엄청난 희열을 느끼는 표정을 짓던 것이 떠올라 목덜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왔다.
실험실 내부를 구경하던 중, 한 가지 특이한 것을 발견했다. 원형 플라스크에 담겨 있던 그것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붉은 빛이 감도는 작은 눈동자로 나를 쳐다봤다. 피부색이 투명할 정도로 새하얘서 눈의 화신이라고 속여도 믿을 정도였다. 칠흑같이 검은 머리카락이 다리 끝까지 길게 내려와서 하얀 피부색을 더 도드라지게 해주었다.
박철우가 뒤로 다가와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기분이 아주 나빴다.
‘이 아이는 제 걸작 중 하나예요. 영혼을 추출하기 위한 방식이 아니라 파라켈수스1493~1541년에 실존했던 연금술사. 연금술의 대표적 인물로서 연금술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그는 인간의 정자와 말똥을 40일간 가열하면 인공적인 작은 사람을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호문쿨루스는 라틴어로 작은 사람이라는 뜻가 후대에 남긴 정석적인 호문쿨루스 제조법에 따라 만들어낸 아이로 이름은 메이라고 붙였답니다.’
사람의 손바닥 크기도 안 될 것 같은 작은 여체형 호문쿨루스가 천 쪼가리 하나 걸치지 않고서 플라스크 안에 버젓이 전시되어 있었다. 지금 내 등 뒤에 있는 말라깽이 연금술사가 점점 더 위험한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적으로 상종할 마음이 들진 않았으나 아직 놈에게서 빼 먹어야 할 요소가 많았다. 내가 나직하게 물었다.
“이 호문쿨루스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은데 그와 관련된 자료 같은 거라도 있어?”
박철우가 살짝 머뭇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한 층 더 내려가면 제 개인적으로 일궈놓은 서재 겸 도서관 하나가 있긴 한데……, 거기엔 제 연금술 인생의 오의를 총망라해둔 작업 일지들도 섞여 있는지라…….”
연금술 인생의 오의가 어쩌고를 들먹이는 게 별로 낯설지가 않았다. 그야 내 주변에도 그것과 비슷한 얘길 하는 여우 한 마리가 있기에.
헌데 녀석의 낌새가 영 심상치 않았다. 이윽고 박철우가 다시 바닥으로 엎드려서는 내 발을 붙잡고서 통사정을 해댔다.
“어제처럼 절 마음껏 걷어차주시면 감시자님께 얼마든지 제 도서관을 공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쯤 되니 손우경이 어서 빨리 돌아왔으면 하는 마음이 더 간절해졌다. 비록 같은 변태라도 급이 달랐다.
* * *
머릿속이 무척이나 혼잡했다. 며칠 동안 너무 낯설고 다양한 정보들이 한 번에 뒤섞여 들어와 뇌에 과부하라도 걸렸는지 오히려 더 멍청해진 느낌이었다.
박철우의 지하 도서관엔 대개가 연금술과 관련된 서적들밖에 없었지만, 잘 찾아보니 천도 프로젝트 당시의 몇몇 파편들마저 함께 꽂혀 있었다. 혹시라도 손우경과 관련된 사안을 발견할 수 있을까 해서 문서 하나하나를 신중하게 뒤적여보았다. 그러나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어느덧 날이 저물었다.
내일도 해가 밝아오는 즉시 연금술사의 작업실에 찾아갈 작정으로 나는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어찌 된 일인지 요즘은 하루하루가 유독 길어지는 추세였다. 내가 만 하루를 더 길게 느끼는 연유는 바로 매일 밤 심각한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럼 내가 불면증인 이유는 대체 뭘까…….
잠을 청해보려고 눈을 감고서 몸을 이리저리 뒤척여봤지만, 쉽사리 곯아떨어지지가 않는다. 너무 피곤하면 오히려 잠이 멀리 달아난다더니.
결국 잠과의 싸움에서 백기를 들었다. 눈꺼풀을 들어 올려 넌지시 천장을 올려다봤다. 마침 아치형의 창문을 통해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시원한 새벽 공기가 반드시 자야 한다는 부담감을 조금이나마 완화시켜주는 듯했다.
아부-게르다 대부분의 건축물은 어떤 종교적인 믿음 때문에 집집마다 유리창이 달려 있지 않았다. 이곳 사람들은 방이 창으로 막혀 있으면 밤사이 자신을 축복해주기 위해 찾아 왔던 수호신들이 그만 유리에 가로막혀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버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포타라카처럼 사시사철 추운 지방이 아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창문 너머로 밤하늘에 뜬 그믐달이 마치 사람의 손톱자국처럼 느껴졌다. 가능하다면 그 자국 위로 내 손톱 끝을 끼워 넣고서 하늘에 부착된 길고 어두운 밤의 시간을 스티커처럼 확 뜯어내고 싶었다.
이지러진 그믐의 달빛은 전혀 밝지가 않음에도 이상하게 내 침대의 옆자리가 텅 빈 것처럼 하얗게 조명되었다. 이대로 침대에 더 누워 있어봤자 제때 잠이 올 것 같지가 않았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무언가에 홀린 듯이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
넓은 창틀에 걸터앉아 두 다리를 모두 올려놓고서 등을 편하게 기대었다. 그런 다음, 잠시 머리를 식히기 위해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일정한 간격의 심호흡을 했다.
연금술사의 지하 도서실에서 너무 오랫동안 책 먼지를 마셨는지 잔뜩 건조해진 입술에서 껍질들이 일어나 있었다. 까슬까슬한 아랫입술을 검지로 슬슬 문지르다 보니 그제야 문득 생각이 미쳤다.
오늘로 며칠째더라.
머리로 지나가버린 날짜들을 헤아리고 있던 내 입에서 그만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요즘 들어 계속 이런 식이었다. 뭔가를 불현듯이 떠올리고 난 뒤 그런 나에게 스스로 조소하는 패턴이 끝없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녀석이 나라카로 떠나고 난 뒤부터 배 속에서 계속 심한 허기가 졌다. 그건 음식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기묘한 공복감이었다. 원인이 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니, 별로 알고 싶지가 않았다.
아주 오래전 기억들이 떠올랐다.
매일같이 장서각에 처박혀 두꺼운 경전들과 눈씨름을 하던 내 지난날들이.
그 지루하고 단조로운 생활이야말로 본디 내 삶의 모습이었다. 생각해보면 정말 우스울 노릇이었다. 내가 언제부터 남과 함께 부대끼며 살아왔다고.
외롭다는 감정을 느낀다든지. 혹은 누군가의 체온이 그립다든지.
그런 종류의 사치스러운 마음은 애초에 나에게는 절대 허락되지 않는 것임을 잠시나마 잊어버리고 있었다. 이번 일만 무사하게 잘 마무리되면 내 모든 것들이 다 정상적으로 회복될 것이다.
다시 포타라카의 황금 사원으로 돌아가서 새벽마다 부처님께 정성껏 예불을 드리고, 조용한 불당에서 좋아하는 나그참파 향을 피워놓고 명상도 하고, 이마에 초보 법사 딱지를 붙이고서 주변 마을로 설법도 좀 다니고, 쉬는 날엔 틈틈이 경전도 읽고, 그리고…….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게 또 뭐가 있더라…….
한없이 간사해진 내 마음이 다시 그때의 그 시절로는 되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달빛이 구름에 가려진 바깥세상이 온통 어두컴컴해져 있었다.
내 마음속의 심연을 바라보듯 나는 깊어진 어둠의 중추를 눈으로 좇다가 다시 방 안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때 여전히 비어 있는 방의 안쪽에서.
“…….”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가 없었다. 설마 내가 지금 헛것을 보고 있나 싶었다. 누가 잠입하는 기척 따위는 전혀 알아차리지도 못했지만 지금은 그런 사소한 것쯤이야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림자에서 짙게 풍기는 피비린내는 상대방이 걸음을 뗄수록 점점 더 지독해져왔다. 왼쪽 가슴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자칫하다간 창틀에서 건물 밖으로 굴러 떨어질 만큼 거센 심장 박동이었다.
나와 서서히 간격을 좁혀오던 녀석이 어째서인지 더 이상은 다가오질 않았다. 걸음을 멈추고 선 곳은 내가 있던 창가에서 조금은 멀찍하게 떨어진 곳이었다.
그렇게 긴 시선이 전해져왔다.
침묵을 지킨 시간이 어쩌면 아주 짧았던 것도 같고, 혹은 엄청나게 길었던 것 같기도 했다.
사나운 눈매가 다정하게 휘었다. 언제나 내게만 보여주는 한정적인 표정이었다.
“이봐, 삼장법사님.”
녀석이 내게로 한 걸음을 더 떼자 내내 어둠 속에 가려 있던 모습이 좀 더 확연하게 드러났다. 그러나 반가움보다 충격이 먼저 앞섰다. 놈의 겉옷에는 거대한 발톱 같은 것에 할퀴어져 무자비하게 찢겨나간 흔적이 남아 있었다. 심지어 몸 곳곳은 대체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핏자국들로 얼룩져 있는 상태였다. 그중에서도 내 눈길을 가장 사로잡았던 부분은.
방금 전, 손우경의 머리카락을 타고서 바닥으로 뚝 하고 떨어진 굵은 핏방울이었다.
녀석은 속으로 경악하고 있던 나에게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혹시 다친 델 치료해주는 능력 같은 건 없어?”
나야말로 다친 곳이 어딘지 당장 따져 묻고 싶었지만, 손우경이 평소처럼 너무나 태연한 분위기로 넉살좋게 말을 걸어와 차마 그런 식의 아는 척을 할 수가 없었다.
“……글쎄.”
내 목소리가 살짝 떨렸던 걸 녀석이 눈치챘을까.
“회복 계열의 능력은 없지만, 너를 저주하거나 미쳐버리게 만드는 능력은 있는데.”
손우경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내가 앉아 있는 창가까지 단번에 걸어왔다. 내게 바짝 들이댄 그의 얼굴에는 장난스러운 기색이 완연했다. 그 모습에 내 심장이 재차 두근거려왔다.
“그거 굉장한 능력이네.”
“…….”
“네가 보고 싶어서 정말로 미쳐버리는 줄 알았으니까.”
“…….”
“진짜 나한테 무슨 저주라도 건 거 아냐?”
놈이 자연스레 손을 들어 올려 내 얼굴을 만지려다가 순간 멈칫하더니 팔의 동작을 멈췄다. 솔직히 얼핏 보기에도 손우경의 손은 그리 깨끗하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출처가 불분명한 핏자국과 더러운 흙먼지 같은 것이 잔뜩 말라붙어서 왠지 모르게 상당히 불결한 느낌을 자아냈다. 아무리 급해도 손은 좀 씻고 오던가, 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더러워서 그런 게 아니라 녀석이 팔 동작을 뚝 멈췄던 순간, 내 마음속 어딘가에서 못내 아쉬움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손우경은 날 만지려다가 동작을 멈춘 게 자기가 생각해도 웃긴지 입가를 픽 찢으며 말했다.
“막상 실물이 눈앞에 있는데 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네.”
“…….”
“내가 봐도 지금 내 꼴이 말이 아니라서 일단은 좀 씻기부터 해야 할 것 같은데.”
“…….”
“잠든 얼굴만 보고 가려던 내 계획을 네가 다 망쳐놨어.”
손우경이 창가 아래로 풀썩 주저앉으며 나를 지그시 올려다봤다. 창문턱이 그리 높은 편이 아닌지라 내 허리 부근에 바로 녀석의 얼굴이 놓이게 되었다. 시선을 어디다가 둬야 할지 애매해진 기분이었다. 대놓고 쳐다보기엔 너무 가까운 거리였다. 그럼에도 아래로 힐끔 눈을 돌렸더니 놈답지 않게 많이 지쳐 보이는 얼굴이다. 어떤 위로의 말이라도 건네고 싶었으나 우리는 표면적으로 그런 낯간지러운 얘기를 나눌 만한 사이가 아니었다.
손우경은 나를 직접 만지는 걸 포기하는 대신 조심스럽게 내 손목을 잡아끌어서 자기 머리 위로 슬며시 올려놓았다.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어서 잠자코 있었더니 갑자기 식겁할 만한 대사를 내뱉는다.
“나 머리 다쳤어. 여기 호 해줘.”
정말 머리를 심하게 다친 게 아닌지 진심으로 걱정되기 시작했다. 하기야 정말 그랬다면 이렇게 이상한 농담이나 하고 있진 않았겠지만, 그래도 계속 신경이 쓰이는 건 마찬가지였다.
어쨌거나 놈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려놓은 채 그 본인을 응시했다. 밑에서 커다란 눈으로 날 뚫어지게 바라보는 손우경 때문에 내가 무슨 대형견 한 마리라도 키우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불현듯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주고 싶은 강한 충동이 일었지만, 이번에도 차마 그런 짓은 할 수 없었다. 그동안 내 그리움 속에서 멋대로 미화된 손우경은 지금 현실과의 괴리가 상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손우경은 그런 속마음도 모르고 보채듯이 내 팔을 뒤흔들며 말했다.
“거짓말이라도 좋으니까.”
“…….”
“내가 보고 싶었다고 말해봐. 어?”
갑자기 어울리지 않는 응석 같은 걸 부리는 녀석에게 도저히 적응이 안 돼서 가만히 눈이나 깜빡이고 있자 손우경은 결국 무반응인 나를 창틀에서 바닥으로 끌어내리고 말았다. 놈의 품 안으로 떨어지자 비로소 현실감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심장이 터져나가면 어쩌나 하고 손가락까지 부들거렸다.
여전히 내 얼굴에는 직접 손을 대지 못하고 고개만 불쑥 들이민 녀석이 강인한 팔뚝으로 허리를 어정쩡하게 감싸왔다.
“……네가 보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어.”
언제나 현란한 말솜씨를 자랑하던 손우경이 계속해서 내가 보고 싶었다는 말만을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었다. 그래서 안심이 됐다. 그 일주일이 나만 그토록 길었던 게 아닌 것 같아서. 사회성이 결여된 어느 연금술사의 말투와는 다르게 녀석이 자꾸 나에게 어린애같이 구는 것이 그리 싫지만은 않았다.
해쓱해진 얼굴의 선이 한층 진해져 있었다. 새삼 이렇게까지 잘생긴 얼굴이었는지 전율이 일었다. 눈에 뭐가 쓰이기라도 했는지 잠시라도 놈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녀석과 뭔가를 하고 싶은데 그게 정확하게 뭔지 잘 모르겠다. 아니, 이것보다는 더 가깝게 몸이 닿고 싶었다. 체온을 나누고 안쪽 깊은 곳까지 그를 느끼고 싶었다.
점점 내 쪽으로 손우경의 고개가 숙여져왔다. 둘의 입술이 닿을락 말락 하며 거의 키스하기 직전에 다다랐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 나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말았다.
내 입술이 죄 터서 그런지 이대로 닿는다는 것이 왠지 부끄러웠다.
손우경과는 관계없이 내가 이런 상태인 채로는 키스하고 싶지가 않았다. 머뭇거리는 내 표정을 조용히 읽어 내리던 손우경이 하 하고 짧은 숨을 토해내며 날 달래듯이 속삭여왔다.
‘나는 그런 거 조금도 신경 안 써.’
넌 역시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거 맞잖아, 라는 생각이 내 머리를 스쳐 지났을 때에는.
이미 굶주린 것처럼 서로가 서로를 빨아대며 입안의 온기를 탐닉하는 중이었다. 손우경과의 키스에 내가 이리도 적극적으로 응한 것은 처음이었다. 잠시도 떨어져 있기가 싫었다. 서로 조심스러워하던 처음의 어색한 분위기와는 다르게 한번 불이 붙기 시작하자 마치 한 몸처럼 엉켜들어갔다.
더 많이 닿고 싶어서 목에 팔까지 두르고 정신없이 손우경의 입안을 핥고 있었다. 고작 키스 하나 하면서도 바닥을 몇 번이나 구르고 자세를 얼마나 뒤바꿨는지. 내 혀를 깨물고 쪽쪽 빨아대던 손우경이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 입술을 떼어내더니 내 손을 잡아들고는 이번엔 자기 심장에 가져다댔다.
“……내가 너 진짜 좋아하나 보다.”
손바닥으로 터질 듯한 진동이 전해져왔다. 심장에서 뗀 내 손바닥을 자기 입에 가져가선 마디마디에 키스를 퍼부었다. 그런 행동 하나, 날 바라보는 눈빛 하나에도 예전에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설렘이 있었다. 녀석을 보지 못한 시간은 고작 일주일밖에 안 되는데, 마치 몇 년 만에 재회라도 한 듯이 모든 것이 낯설고도 새롭게 다가왔다.
손우경이 얼굴과 귓가, 쇄골, 목덜미 등에 다시 영역 표시를 하는 것처럼 일일이 입 맞추며 간지럽게 핥아댔다. 둘 다 지금 몹시 흥분해 있어서 언제든 몸을 섞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상태였는데 손우경은 내 옷을 전혀 벗기려 들지 않았다. 녀석은 그저 날 꽉 껴안은 채로 달콤하게 키스나 해주고 있었다. 대체 왜 그러지. 몸이 더러워서 그런가.
내심 의아하게 여겼지만 놈에게 안겨서 키스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너무 좋았기에 입술에 온갖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숨을 몰아쉴 타이밍이 되자 헐떡거리는 나에게서 입술을 거둔 녀석이 다시 쪽 하고 입을 맞추었다. 손우경은 내 목덜미에 코를 박고 숨을 깊이 들이쉬며 나에게 말했다.
“너한테서 진짜 좋은 냄새 나. 향냄새……. 미쳐버릴 것 같다.”
목덜미를 잘근잘근 깨물어대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손우경이 목에서 고개를 들고서 다시 나를 쳐다봤다. 흥분감에 이지러진 은회색 눈동자가 욕망 어린 빛으로 나를 탐내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나를 뜨겁게 바라봐주는 사람이 과연 이 세상에 몇 명이나 있을까.
그때 손우경이 뜻 모를 얘기를 중얼거렸다.
“너를 실제로 보고서 어쩔 줄 모르겠던 순간이 딱 두 번 있었는데.”
실제로 보고서?
“그중 하나가 바로 오늘이야.”
녀석이 애틋한 손길로 내 얼굴을 가지런히 쓸었다. 나야말로 지금 눈앞에 손우경이 있음에도 마음이 자꾸 욱신거려서 어쩔 바를 모르겠다.
놈이 말했다.
“너랑, 자고 싶기만 한 건 아냐.”
더러워진 손가락이 마치 그래서는 안 되는 것처럼 내 얼굴을 조심스레 건드렸다.
“가능하다면 너하고 같이 다른 것들도 해보고 싶어.”
“…….”
“근데 지금 당장은 널 안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을 모르겠다.”
손우경은 자신의 주도권을 나에게로 양보하려 들었다.
“싫다면 긴고주를 외워서 날 떨어트려놔.”
내가 그럴 수 없다는 걸 녀석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시치미를 떼며 놈이 말했다.
“가능하잖아.”
옷을 벗기는 손길에도 나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웃옷을 걷어내고 하의까지 전부 끌어내린 손우경은, 자신도 완벽한 나체가 된 채 내 위로 타고 올라와 내게 거듭 확인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확실히 하자.”
단단해진 성기가 가랑이 사이에 용의주도하게 맞닿고 있었다.
“너 지금 나한테 정기 때문에 안기는 거 아니지?”
내 대답을 기다리는 손우경에게 나는 망설이다가 말 대신 행동을 취했다. 입술을 슬쩍 맞췄다가 떼어내자 손우경이 멍청해진 표정으로 날 내려다보더니 그만 픽 웃고 말았다.
“……잠깐 못 본 사이에 여우가 다 됐네.”
녀석이 나를 번쩍 안아 들어서 침대 위로 데려갔다. 갈색 피부를 가진 남자의 중심부가 갈라진 내 다리로 뱀처럼 미끄러져 들어왔다. 다리를 아무리 좌우로 벌려도 구멍이 벌어지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손우경은 뒤쪽을 풀어줄 생각도 않고 내 안에 들어오는 것에만 온통 집중하는 듯했다.
푹.
그야말로 억지로 찔러 넣은 셈이었다. 항문 주위가 통증 때문에 마비되듯 저려왔다. 너무 아팠지만 손우경이 다시 키스를 유도하며 천천히 허리를 들썩였다. 나는 녀석의 몸에 양팔과 두 다리를 휘감은 뒤 코알라처럼 매달려서 아래쪽의 감각을 받아들여야 했다.
몸 안에서 무서운 속도로 여의봉이 자라나고 있었다. 손우경의 페니스가 꼬챙이처럼 내 몸을 일자로 꿰었다. 구멍 안쪽을 난폭하게 푹푹 찔러올 때마다 놈을 껴안고 있던 팔다리에 힘이 불끈 들어갔다.
뜨거워진 육봉이 안에서 팽창하며 문질러질 때마다 입에서 음란한 탄성이 나왔다. 이젠 몸 자체가 완전히 손우경에게 길들여진 듯했다. 녀석 특유의 기교 섞인 밤기술이나 섹스 패턴 같은 것들은 말로 자세하게 설명할 수 없었지만 몸으로는 온전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보통 내가 신음을 참거나 소리를 입 밖으로 내려 들지 않으면 녀석은 어떻게든 숨이 달리게 만들어서 애 타는 목소리를 쥐어짜 내게 했다. 나한테서 야한 목소리가 흘러나올수록 삽입 속도가 더 빨라졌다. 지금도 끙끙거리며 아픔을 참아내고 있자니 더 사정없이 아래쪽을 팡팡 쳐대고 있었다. 몸이 흔들리고 머리가 침대 헤드에 쾅쾅 부딪혔다. 눈에서 별이 보이는 것 같았다. 초반부에는 항상 거칠게 박아대는 편이지만 오늘은 어떤 다급함마저 전해졌다.
“아흣! 아흐흐흣! 우, 우경아 너무 빨라!”
섹스 중에는 내가 뭐라고 지껄이는지 기억이 잘 안 난다. 손우경이 강한 허릿심으로 절륜하게 밀고 들어올수록 나는 속절없이 흐느적거릴 뿐이었다. 몸 안이 녹아버릴 듯한 열기였다. 배 속에 불이 붙기라도 했는지 나는 흐느끼다시피 소리를 질러댔다. 발기해버린 성기에서 오줌이 나올 것처럼 조급한 신호가 왔다. 손우경도 피치를 올려가며 미친 듯이 처박아대고 있는 중이었다. 이제 곧 절정의 순간이 임박해오고 있었다.
“아, 악, 아앗!”
나에게서 터져 나온 정액이 아직 위아래로 몸을 움직이고 있는 손우경과 나의 배 사이에서 범벅이 됐다. 곧이어 놈의 목에서도 작은 신음성이 들리더니 내장 안에 요란하게 쏟아내고 말았다. 안쪽에 심어둔 지점에 손우경의 정이 흡수될 때마다 나는 격렬한 쾌감에 몸을 움찔거리며 입을 난잡하게 벌려댔다. 놈이 나를 꼭 껴안으며 뿌리를 힘껏 꽂아 넣었다. 직립한 페니스가 최후의 한 방울까지 모두 뱉어내고는 원상태로 쪼그라드는 것이 배 안에서 고스란히 느껴졌다.
손우경은 사정이 끝난 뒤에도 녀석의 정액이 배 속으로 흡수되는 황홀감을 견디지 못하고 거의 무아지경에 빠져 있는 나를 바라보며 한숨 섞인 불만을 표현했다.
“……그만해.”
“아흐, 흣, 으응.”
“너 때문에 내 심장 망가져버리겠어.”
나는 손톱을 세우고서 놈의 등을 긁어대고 있었다. 손우경이 나를 진정시키기 위해 뺨을 가볍게 물며 성기를 쭉 뽑아내었다. 안을 가득 채우던 감각이 사라지자 허전한 기가 감돌았다. 구멍이 움찔거리며 연신 그 빈자리를 찾아대고 있었다. 녀석이 키스를 해주며 손으로 허리를 감싸왔다. 헐벗은 몸끼리 비벼지자 섹스 후의 나른함이 금방 사라졌다.
손우경은 나를 껴안고서 침대 위에서 엎치락뒤치락해가며 애무하기 편한 자세를 찾고 있었다. 녀석이 손가락을 항문으로 밀어 넣고서 안을 휘저었다. 안에서 예민한 부위를 꾹꾹 눌러대는 통에 놈의 품 안에서 짧은 비명을 질렀다. 손가락 하나에 또다시 발기해버린 내 분신이 창피했지만, 녀석은 내 비명에 발딱 세웠으니 더는 말할 것도 없었다.
손우경은 내 엉덩이를 움켜쥐며 내게 다른 제안을 건넸다.
“이대로 올라타주면 감사하겠는데.”
순식간에 손우경이 침대에 등을 밀착하여 눕고 반대로 내가 놈의 몸 위로 올라가게 되었다. 졸지에 녀석의 배 위에 걸터앉게 된 나는 등에 닿고 있는 녀석의 여의봉을 슬쩍 돌아보며 말했다.
“너, 너무 길어서…… 이 자세로는 안 들어가.”
어느새 내 앉은키와 엇비슷해진 크기였다. 머리 뒤를 두 팔로 받친 손우경은 한쪽 입가를 실룩이며 천연덕스럽게 입을 열었다.
“너더러 넣으라고 한 적 없어.”
금세 얼굴이 붉어진 나를 키득대며 쳐다보던 손우경이 허리를 일으키며 나를 또 껴안았다. 가만히 얼굴을 보며 조용히 속삭여온다.
“왜 이렇게 고분고분해졌어?”
나는 당황했지만 우선은 침묵했다. 그러나 손우경이 꼬치꼬치 캐물어댔다.
“설마 내가 좋아지기라도 했어?”
가슴이 또 마구 뛰었다. 도둑이 제 발 저리는 심정이 바로 이런 걸까. 날 지그시 바라보던 손우경이 슬그머니 입술을 가져다대는 순간, 나는 눈을 감았다. 오늘따라 입을 맞추는 횟수가 부쩍 늘어났다 싶었더니, 아직도 입술 사이의 간격을 유지하던 놈이 생글거리며 그 이유를 이야기했다.
“내가 이렇게 입술을 가져다대면 네가 자연스럽게 눈 감는 게 좋아.”
이젠 과감하게 내 얼굴을 더듬는 손에서 여전히 옅은 피 냄새가 났다.
“너는 지금 네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겠지.”
나는 눈을 치켜들고서 놈을 똑바로 올려다봤다.
“이미 너랑 끝까지 한 상태긴 하지만 좀 더 뭘 어떻게 해버리고 싶다.”
심장이 마구 떨려오는 이유가 단지 이 순간이 설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손우경이 무사히 돌아온데다 몸까지 연결됐는데도 불구하고 내 마음 한구석에서 자꾸만 불안한 마음이 피어올랐다. 녀석이 돌연 진지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한 번도 제대로 말한 적 없는 것 같은데.”
“…….”
“네가 좋…….”
엉겁결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아버렸다. 눈을 크게 뜬 손우경이 잠시 후 자신의 입을 가로막은 손을 걷어내며 조금 섭섭하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고백하려는 사람한테 그 겁에 질린 표정은 뭐야.”
나를 탓하는 말투는 아니었지만, 그 다정한 목소리에 더 가슴이 아팠다. 손우경이 나를 끌어안고서 등을 찬찬히 어루만지며 말했다.
“……뭘 걱정하는지 알아.”
넓은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데 목 놓아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약속하는데 네가 생각하고 있는 그 어떤 일들도 벌어지지 않을 거야.”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네가 어떻게 안다고. 아니, 넌 앞으로 일어나게 될 일들의 십분의 일조차 모를 거다.
“날 끈질기다고 욕해도 상관없어.”
허리를 강하게 옥죄어오는 손길이 지금 이 순간만은 영원히 풀리지 않을 듯 견고했다. 마치 죄를 짓는 기분. 알 수 없는 죄책감이 내 목을 겁박하듯 조여왔다. 녀석이 그런 나에게 선고를 내렸다.
“네 의지와는 관계없이 내가 너 아니면 안 되니까.”
네가 나에게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간신히 마음속 깊은 곳에 봉인해두었던 오랜 두려움들이 풀려난다. 우경아. 나는 네 것이 될 수 없어.
왜냐하면 너보다 먼저 나에게 속박의 언어를 사용한 자가 따로 있으니까…….
날이 밝아오는 것과는 관계없이 손우경과의 섹스는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침대 끝에 걸터앉은 손우경이 날 무릎 위에 태우고서 스프링의 반동을 이용하여 몸을 연신 들썩이고 있었다. 나는 몸이 오르락내리락 할 때마다 손우경의 머리 안쪽에 움푹 패서 엉성하게 봉합된 상처를 발견했다.
아래쪽의 연속적인 반동 때문에 숨을 헉헉 몰아쉬며 내가 물었다.
“이거…… 왜 이래?”
하지만 손우경은 사실 그대로 대답해줄 마음이 없는 듯했다.
“알면 너무 흥분시키지 마. 아물었던 상처가 다시 터져버리겠어.”
거의 침대 끝에서 손우경의 몸에만 의지하여 매달려 있던 나를, 녀석이 머리부터 바닥으로 떨어지게 만들었다. 녀석은 내가 굴욕적인 체위를 감당하는 걸 아주 좋아했다. 손우경은 일어선 채로 내 양다리를 붙잡고서 아래로 푹푹 찍어 눌렀다. 물구나무를 선 자세로 손우경의 거대한 좆을 받아내기가 참 힘겨웠다.
서로의 사타구니 사이에 낀 손우경의 고환이 한 차례씩 꾹꾹 짓뭉개질 때마다 흘러넘친 정액 때문에 살이 쩍쩍 들러붙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귓가에 너무 야하게 들려와 가뜩이나 아래로 피가 쏠리고 있는 얼굴이 금방이라도 풍선처럼 터져나갈 것 같았다.
그 체위 도중에 잠깐 정신을 잃었다가 눈을 떠보니 나는 다시 침대 위에 눕혀져 있었다. 놈은 내 옆에 누워 아직 잠들지 않고 기절해 있던 내 모습을 관찰하는 중이었다. 오늘도 전투를 방불케 하는 거친 정사 끝에 이제 말할 기운마저 없어진 터라 나는 입술만 움직여가며 힘들게 얘기했다.
머리에 난 상처는 어떻게 된 거야…….
손우경은 자신이 다쳤다는 사실을 미주알고주알 떠들기가 저어됐는지 말을 돌리려고 들었다.
“나라카에 도착했는데 그만 던전 입구에서 문전박대 당했어. 여긴 너같이 센 놈이 올 곳이 아니라며 거기 수문장이 막 화를 내더라.”
가물가물한 정신에도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고 말았다. 내가 웃는 걸 보자 손우경이 같이 따라 웃었다. 그러나 내가 계속 머리에 시선을 두자 놈은 별 걱정 말라는 듯이 중얼거렸다.
“이 정도야 뭐.”
섹스 도중이라 자세히 들여다보진 못했지만 꽤 심한 상처였다. 살아서 방금 전까지 이런 격렬한 운동을 한 게 용할 지경으로. 저 녀석이 아무리 초인에 가까운 체력과 힘을 가졌더라도 나와 같은 사람인데 그런 상처가 전혀 안 아플 리가 없었다. 나는 손을 들어 올려서 손우경의 머리 위로 얹고는 다 꺼져가는 음성으로 우물거렸다.
-……이따가 꼭 병원 가서 치료받아.
그런데 그 상처가 분명 실로 봉합되어 있던 것 같은데…….
너무 졸리고 피곤해서 더 이상은 버틸 수가 없었다.
* * *
선장의 저택이자 일층 홀에 모여 있던 모든 이들이 입을 쩍 벌린 채 경탄을 금치 못하는 중이었다. 손우경이 잘라 온 고라토라는 녀석의 거대한 목이 핏물을 흘려대며 홀 안에 고약한 썩은 내를 풍기고 있었다. 얼굴에는 크고 작은 새빨간 눈동자가 마치 석류 알갱이처럼 촘촘하게 박혀 있어 그 징그러운 모습에 이미 심약한 몇몇 사람들이 입을 틀어막으며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게다가 따로 귀나 코 같은 것이 달려 있지 않아서 저것이 고라토의 얼굴임을 알아볼 수 있는 조건이라곤 그저 이빨이 들쑥날쑥 튀어나온 입이 전부였다.
마하데바 호의 선장은 손우경이 정말 약속했던 날짜에 맞춰 고라토의 목을 베어 올 것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한참이나 그것의 목을 보면서도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손우경이 재밌는 걸 보여준다고 자는 걸 억지로 깨워서 데려온 오조가 그간의 상황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저 이냐트라를 진짜 우경이 혼자서 잡았다고?”
오조의 중얼댐으로 추측하건대 저 괴물은 고라토라는 이름이 아니라 아마 이냐트라라는 이계의 존재인 듯했다. 좌우지간 모종의 라이벌 의식이 느껴지는지 손우경의 뒤통수를 열심히 곁눈질하는 오조는 내버려두고서 나는 파오의 반응을 살폈다. 손우경이 고라토의 목을 가져온 대가로 서쪽으로 떠나는 배의 승선이 확정됐으니 파오가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을 거라는 판단이 들어서였다.
그렇지만 녀석은 거만하게 팔짱을 낀 채로 여전히 알 수 없는 미소나 짓고 있었다. 단지 표정만으로도 사람의 심리 상태나 손에 쥐고 있는 모든 패들을 전부 읽어내는 기술이 있다면 좋겠지만, 나는 아무래도 타고난 도박사 타입은 아닌 것 같았다.
손우경이 본인의 키보다 더 큰 고라토의 얼굴 위로 훌쩍 뛰어 올라가 괴물 시체에 한쪽 팔을 쑥 집어넣더니 그 안에서 뭔가를 불쑥 끄집어냈다.
“사막에서 저 눈알 괴물의 머리통 하나를 끌고 오는 것도 힘들었으니 유골의 보관 장소쯤이야 이해해주시길.”
손우경은 선장 앞으로 사람의 유골을 던졌다. 깜짝 놀라서 뒷걸음치는 선장에게 놈이 머리통 위에서 사뿐하게 내려와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어느 번쩍이는 물건을 코앞에서 직접 건네주었다.
그것은 바로 목걸이였다.
“이게 그쪽 동생의 것인지 확실치는 않지만, 던전 안에서 저 유골과 함께 발견한 물건이긴 해.”
손우경에게서 목걸이와 유골을 받아 든 선장이 별안간 무릎 아래서부터 무너지며 가슴 아프게 오열했다. 나이가 지긋한 중년의 남자가 저렇게 큰 소리로 울음을 터트리는 것은 그리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 아닌지라 다들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나는 자길 칭찬해달라는 얼굴로 내게 걸어오는 손우경에게 누가 들을세라 아주 은밀하게 속삭였다. 왜냐하면 이 감동적인 순간의 산통을 깨고 싶지 않아서였다.
‘……야, 이게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손우경이 나와 비슷한 크기의 음성으로 대수롭지 않게 귀엣말을 던졌다.
‘음, 목걸이는 떠나기 전에 똑같이 위조했고 해골은 거기 널린 거 아무거나 가져왔어.’
이놈이야말로 진정 타고난 사기꾼이라고 생각하려던 차에 뒤에서 선장이 대성통곡을 하며 해골을 덥석 끌어안았다. 살짝 양심의 가책을 느끼려고 하는데 그다음 선장의 입에서 나온 말이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목걸이 같은 건 애초에 있지도 않았지만, 오른쪽 손가락뼈가 여섯 개인 걸 보니 네가 정녕 육손이였던 내 아우 라훌이가 맞구나! 오, 나의 라훌아! 너를 두고 혼자 도망쳤던 이 못난 형을 제발 용서해다오!”
허, 살다 보니 이런 일도 생기는구나 싶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고 하던가. 목걸이 얘기가 거짓말이었단 걸 보니 저 선장도 아무튼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정작 우연을 기적으로 만든 장본인께서는 조금도 유쾌해 보이지가 않았다. 매사 장난기로 가득하던 손우경의 표정이 어느새 잔뜩 굳어져서 그야말로 가관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