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디서 이런 애들만 모아다놨을까
나는 가부좌를 틀어 앉은 채로 내 눈앞에 놓인 작고 신기한 생명체를 멀뚱히 지켜보았다. 보아하니 맨바닥에 앉는 것이 그리 익숙지가 않은지 몸 어딘가가 사뭇 불편해 보이는 눈치였다. 처음에 앉아 있던 자세가 어느덧 다섯 번이나 바뀌었으니까.
하지만 태생적으로 타인에 대한 배려 자체가 워낙에 부족한 나로서는 무엇을 달리 어찌해줄 방도가 없었다. 다 식어빠진 차를 말없이 홀짝이는 수밖에는. 그저 눈꺼풀이 나른하게 진 저 고양이 같은 눈매가 내 얼굴을 가만히 쏘아보는 것이 약간 곤란할 따름이었다.
아무러면 손님용으로 마련된 방석까지 도합 세 개의 폭신한 비단깔개가 모두 내 둔부에 깔려 있는 것 때문에 저러는 건 아닐 테지. 여기 바닥은 그냥 앉기에는 너무 딱딱하단 말이다.
녀석이 다시 한 번 몸을 뒤틀며 따분하다는 기색을 표했다.
물론 기껏 사람을 불러다놓고 벌써 약 반 시진 가까이 내가 입 한 번 벙긋하지 않았으니 지금쯤 온몸에 좀이 쑤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로서도 당장 무슨 얘기부터 꺼내야 될지 전혀 모르겠는 입장이었다.
원래도 타인에게 싹싹하고 곰살궂게 구는 성격은 아니었으나 현 상황에선 소진과 장의 뺨치는 현란한 언변의 달인을 불러다놔도 내 쪽에서 먼저 입을 열기가 저어되는 형편이었다.
사실 오늘은 나와 함께 서쪽으로 떠나게 될 다른 동료들과 만나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라는 것을 내가 알게 된 시각은, 불과 당일 새벽.
부지런한 닭들마저도 아직은 곤하게 잠들었을 이른 새벽, 자다가 아돌프의 급작스러운 호출을 받고 눈곱도 안 뗀 채로 서둘러 이 요사寮舍 안에 위치한 접객실에 들어서기 직전이었다.
접객실 앞에서는 새벽 내내 잠을 설쳤는지 몹시 피곤한 얼굴의 비구니 하나가 관음존자의 전언이 담긴 서신을 들고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 이건 꿈일 거야. 아무리 겨우 이거 하나 건네주려고 이 꼭두새벽부터 날 깨웠을 린 없…… 아니, 절대적으로 깨우고도 남겠지.
나는 그녀가 건넨 서신을 펼쳐 화선지 위에 먹으로 잔뜩 휘갈긴 악필을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그냥 멀쩡한 종이에다가 볼펜으로나 쓸 것이지 꼭 이렇게 준다니까. 한자도 진짜 더럽게 못 쓰면서.
‘그 새ㄲ…… 아니, 그분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삼장께서 뭐라 물으시든 피곤하니까 절대로 깨우지 말라고 전하셨습니다.’
‘그럼 그분께서 어제 언제쯤 잠자리에 드셨는지 혹여 아십니까.’
‘평소보다 일찍이요. 아, 이 얘긴 안 물어보실지도 모르지만 꼭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관음존자의 시중을 드는 그 비구니는 이젠 이골이 났다는 얼굴로 심드렁하게 말했다. 나는 휑한 접객실로 들어가 내부에 마련된 세 개의 방석을 하나로 긁어모은 뒤, 차갑고 평평한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와 딱딱함을 원천봉쇄하고서 그 위에 앉았다. 바닥이 하도 얼음장이라서 잠시라도 앉아 있다간 입이 옆으로 돌아갈 것 같은 냉기였다. 그럼에도 잠이 쏟아졌다.
하지만 지켜보는 눈도 있고 여기서 대놓고 잘 수는 없기에 앉아서 명상하는 척하면서 잠깐 졸고 있었는데, 잠시 후 비구니가 손님이 왔다고 몸을 뒤흔들었다.
그리고 그다음부턴 계속해서 이런 멋쩍은 상태가 이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아까 말했다시피 남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거는 성격도 아니었지만 내 어두운 성격 탓인지 다들 기분 나쁘게 흘끔흘끔 쳐다보기만 할 뿐 먼저 다가와서 말을 거는 이들도 거의 없었다.
게다가 서쪽으로 떠나게 될 이번 임무는, 본인 목숨을 담보로 걸 만큼 위험천만한 일임은 물론이거니와 따지고 보면 완전히 무보수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그러니 미치지 않고서야 대체 어느 누가 자발적인 참여를 하려 했겠는가. 전부 다 관음존자에게서 협박 같은 명령이나 받았을 터였다.
허나 정작 이 어색한 만남을 주선한 관음존자는 아예 나타나지도 않았고, 졸지에 내가 이 떨떠름한 자리를 이끌어나가야 하는 대리인의 입장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그나마도 세 명 중 한 명은 아직도 수용소에 갇혀 있었고(서신에 의하면 내가 직접 데리러 가야 한다고) 다른 한 명은 접견이 예정된 시각에서 벌써 한 시간이 넘도록 아예 코빼기조차 비치질 않고 있었다.
그러니 나를 제외한 남은 참석자는, 마치 바다처럼 파랗게 출렁이는 두 개의 큼직한 눈동자를 가진 저 조그마한 생명체뿐. 양인에 대한 편견 같은 건 별로 없었지만, 우리와는 확연히 다른 생김새 때문에 속에서 왠지 모를 거부감이 드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아무리 혼혈들이 즐비한 세상이라곤 하나 결과적으론 대종말을 일으킨 원인이 되었던 그 사건들로 인하여, 첫 감염이 일어난 지역이자 전 세계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서쪽 구역의 저주받은 피는 아직도 공공연한 배척의 대상이었다.
물론 이미 세월이 많이 흘러 바이러스 자체가 사라졌고 당시의 끔찍했던 일들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도 많이 옅어진 건 사실이지만, 겉으로 확연하게 티가 나는 서구 쪽 유전자와는 대부분 후사를 남기길 꺼려하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일부러 검은색 컬러렌즈를 착용하거나 머리카락을 짙은 색으로 염색하여 자신의 출신 성분 자체를 속이는 일들도 많았다.
게다가 저 녀석은 예전 석가여래 시절의 까까머리 종단 승려들이나 할 법한 짧게 깎아 올린 반 삭발의 소유자였다. 다만 까슬까슬하게 자라난 백금발의 머리카락 아래로 곱상하게 빚어진 놈의 이목구비가 꽤나 모순적으로 보였다.
주변에 비슷한 머리를 한 낮은 품계의 비구니들도 많았기에 비록 머리를 저렇게 해놨지만 그들과 비교했을 때 남자치고도 무척 예쁘장한 얼굴이라는 걸 쉽사리 알 수 있었다.
흑마법사 오조라고 했나.
저 앳된 얼굴의 소년은 현재 환영제야단과 아주 살벌한 적대 관계에 있는 태서의 마법 교단인 룸버린에서 넘어온 자였다.
그곳에서도 상당히 높은 위치에 있었던 자였으나 지금은 조국으로부터 매국노간신배배신자새끼 등등의 다채로운 별명으로 불리는 둥 치욕스러운 낙인이 찍힌 듯하다.
그야 아돌프의 꼬드김에 넘어가서 자신이 이때껏 소속되었던 룸버린을 등진 걸로도 모자라, 지난번 습격전에서는 적인 우리에게 주요 본거지이자 가장 큰 물자 저장고인 자히르나를 내어주는 일에 아주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원래 자히르나는 일전에도 우리 쪽에서 엄청난 손실을 보며 대패했던 전적이 있을 만큼 군사적으로도 매우 강력한 구역이었다.
대체 무엇 때문에 룸버린을 배신하고 이곳으로 망명했을까?
나는 예전에 빨간 딱지가 붙어서 종단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금지되고 있는 성경이란 책을, 누가 하지 말라면 오히려 더욱 하고 싶어지던 질풍노도의 사춘기 시절에 다른 이의 눈을 피해가며 몰래 열독했던 기억이 있었다.
관음존자와 오조, 저 둘 사이에서 어떤 모종의 거래가 오고 갔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일급 금서인 성경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따먹게 만든 그 뱀의 요사하고 간드러진 혓바닥이 필경 아돌프의 입 안에도 달려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담 뱀에게 속은 뒤 신에게서 벌을 받아 마침내 벌거벗은 수치심을 깨닫게 된 인류의 먼 조상들처럼, 어쩌면 저 녀석도 지금쯤 자신의 어리석은 과오를 깨닫고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을까.
속으로 그런 생각들을 머금고 있던 찰나, 계속되는 긴 침묵을 견디다 못했는지 저 고양이 눈매의 마법사가 버럭 짜증을 내며 볼멘소리를 내질렀다. 마침 나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팔짱을 낀 채 대기 중이던 뚱한 표정의 비구니에게 뜨거운 찻물 좀 채워달라고 더 이상 찻주전자를 흔들기도 난감해지려던 차에 잘된 일이었다.
“지금 설마하니 나하고 묵언 수행이라도 하자는 거야?”
내 귓가로 들려오는 말이 극도로 짧았다. 그야 아직 어린 나이에 서쪽에서 넘어온 지도 얼마 안 지난지라 이곳 사정이나 동양의 예의범절 자체를 잘 모를 것이니 저런 실수 정도야 누구라도 충분히 할 수 있었다. 그러니 저 무지몽매한 중생의 실수는 자비로운 부처님을 받들어 모시는 불자로서 전부 다 이해해주는 것이 옳았다.
나는 모든 걸 이해한다는 목소리로 차갑게 대꾸했다.
“……경고하는데 나한테 함부로 반말 지껄이지 마.”
아마도 내 이해심이 부글부글 끓다가 잠시 뚜껑을 연 사이에 그만 다 흘러넘친 모양이었다. 새파랗게 어리다 못해 눈까지 파란 녀석이었다.
살아온 세수도 그렇거니와 법랍출가하여 스님이 되고 난 후부터의 햇수. 세수는 실제 나이를 뜻함의 짬부터가 다를진대 이번 한 번만 보고 말 사이도 아닌 이상 위계질서는 처음부터 확실히 해두는 것이 좋았다.
뭐 원래 오래된 집단일수록 내부적으로 썩어 문드러져서 보수적인 성향도 강하고 실력을 중시하기보다는 나이나 신분을 앞세워서 자라나는 새싹을 꾹꾹 밟아주는 아름답고 고리타분한 전통이 있는 법이다.
무엇보다도 어려 보이는 걸로 치면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외모의 소유자인 아돌프를 수장으로 하는 곳이기에 속 좁은 그놈답게 어떠한 하극상도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 것이 이곳 종단의 우선 철칙이었다.
하지만 상대방은 말간 눈동자를 깜빡이며 살짝 의외라는 듯한 얼굴을 해 보였다.
“어, 너 벙어리 아니었네?”
정황상 말의 뉘앙스는 왠지 비꼬는 것 같았는데 들려오는 목소리는 그걸 정말 이제야 알았다는 듯이 순수하게 들렸다. 놈의 웃음을 집어 삼킨 입꼬리가 나른하게 휘는 눈매와 묘하게 뒤섞였다. 그 얼굴에는 특유의 나른한 표정이 서려 있는데 그것이 일견 졸려 보이면서도 눈매 탓인지 퇴폐적인 인상을 주었다.
“역시 이곳에서도 그런 쓸데없는 걸 많이 따지는 모양이야.”
“…….”
“내가 듣기론 법계가 삼장이라고 했었나.”
오조는 해사하게 웃어 보이며 자기 입술을 우물거렸다.
“음, 그게 뭐 하는 건진 나도 정확히 모르겠는데, 그 관음존자께서 날 너희 편으로 끌어들이기 전에 선심 쓰듯이 웬 직책 같은 걸 하나 던져주더라고.”
“…….”
“그게 무슨 금신나한金身羅漢인가 하는 진짜 이상한 이름이던데 나한테 그걸 주면 여기에서 내가 룸버린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대우받으면서 하루하루 편하게 지낼 수 있다고 말했어. 근데 넌 혹시 그게 뭐 하는 직책인지 들어봤어?”
보기보단 아주 여우였다. 그것도 이빨이 오톨도톨하게 자라고 있는 새끼 여우. 하지만 분명히 자기 잇속을 다 챙겨가며 하는 말인데 이상하게 조금도 밉지 않게 들렸다.
어쨌든 상하관계는 따질 필요도 없이 명백했다. 저쪽이 우세한 쪽으로.
나는 생긋 웃으며 아까 내뱉은 말을 재차 정정하기로 했다.
“그럼 호칭은 서로 편하게 부르는 걸로.”
물은 한번 흘리면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다지만 말의 경우는 한번 흘려도 적당하게 회수가 가능했다. 모양새가 심하게 안 좋아질 뿐이지.
오조는 그런 내 말에 바로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 성격이 되게 나쁜 것 같아.”
나는 내 성격에 대한 적절한 평가에 반박하지 않았다. 상황이 불리할수록 말을 아껴야 하는 법이었다. 내가 녀석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놈도 얌전히 시선을 맞춰온다. 시야의 테두리 안에 불쑥 넣어진 오조의 모습은 어느새 찰나의 경계선을 넘어서 생각의 상자 안으로 담겼다. 많아봐야 한 스무 살 남짓이나 됐을까. 그런데도 금신나한이라니.
통상적으로 모든 곳에 존재하는 무수한 불상들은 어떤 상징적 의미로 인하여 황금으로 만들거나 표면을 황색으로 도금하기 마련인데 그것은 황금 사원으로 불리는 이곳 티뷸라 궁도 마찬가지였다. 사원의 모든 것은 금빛으로 번쩍였고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경외의 대상이기도 했다.
황금색은 아주 오래전부터 무한한 신성함과 위엄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색상이었다.
인공적으로는 만들어지기가 힘든 신비한 자연의 색이자 우주의 근원과도 맞닿아 있다고 믿는 것이 바로 이 황금색이었다. 그 때문에 부처의 몸을 금신金身이라 하였으며 어떤 사람들은 금을 먹으면 자신의 몸이 영원한 불사로 접어드는 금신으로 뒤바뀐다고도 여겼었다.
오조에게 부여된 금신나한金身羅漢은 황금색으로 빛나는 부처의 몸을 가진 존귀하고 고결한 자에게나 적합할 만한 칭호였다. 종단의 품계와 계율이 누구 씨 이후로 제아무리 뒤죽박죽 곤죽이 되었다지만, 비록 그것이 이름뿐인 직책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이제 서쪽에서 갓 망명한 파란 눈의 애송이에게 어울릴 만한 것은 아니었다.
딱히 내가 삼장 칭호를 받기 위해 지난날 아돌프의 수족처럼 살아왔던 나의 안타까운 세월들이 이제 와 피 토할 만큼 억울해서 이런 얘길 꺼냈던 건 아니고, 나는 그저 금신나한이 굉장히 중요한 직책이라는 것을 꼭 강조하고 싶었을 뿐이다. 진짜 저 녀석이 나보다 높은 직위라서 배 아파서 그러는 게 절대로 아니다.
사촌이 땅을 산 듯한 통증을 배에서 느껴가며 내 눈앞에 떨어진 행운의 낙하산을 고깝게 바라보자 오조 녀석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얘기했다.
“그럼 앞으로 널 삼장이라고 부를게. 너도 나를 오조라고 편하게 불러도 돼.”
느릿느릿하니 질질 끄는 말투. 얘는 뭔가 어른스러운 구석이 있는 듯하면서도 전혀 그 또래답지 않은 천진함이 있었다. 알았다는 대답을 하지도 않았는데 놈은 얘기를 꺼낸 즉시 벌써 자기 용건이 다 끝났다는 듯이 유연하게 웃었다. 그리곤 하품을 쩝 하더니 더 이상은 내게 말을 걸거나 관심을 보이지 않고 앉은자리에서 두 눈을 꼭 감고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현재 시각이 아직도 때 이른 아침녘이긴 했으나 잠시 황당함에 머리가 멍해졌다.
몇 년 전부터 종단 내에서 뜬구름같이 떠돌았던 무성한 이야기들이 오조의 잠든 얼굴 위로 둥둥 스쳐 지나갔다. 무릇 소문이란 것은 주둥이라는 아궁이에서 뻥 튀겨져서 전혀 종잡을 수 없는 방향들로 과장되는 습성이 있다지만, 이건 이야기가 좀 심각하게 왜곡되지 않았나 싶었다.
놈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의 적이었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거의 철벽의 방어를 자랑하던 자히르나 연합군 주둔지의 수비벽이 원체 견고했던 까닭은 바로 저 오조라는 녀석이 그곳의 핵심 전력이었기 때문이다. 일단 실력 없는 놈들이라면 버러지와 동급으로 여기는 아돌프가 아니던가.
그런 관음존자가 코웃음을 치며 항상 호구처럼 취급하는 상대편 진영에서 유독 얘한테만 눈독을 들여 거기서 빼내 왔다는 사실로도 이미 그 실력은 입증된 거나 다름없었다.
비록 지금은 관음존자에게 단물과 영양가를 쪽쪽 빨아 먹힌 채 장기간 방치된 상태였지만, 그간 군부 소속이 아닌 내 귀에까지 잔인한 악명을 떨쳤던 오조의 유명세가 들려왔었으니 확실히 예사 인물은 아니라는 거였다.
그러니 더욱더 눈앞의 인물과 소문 속의 남자가 매치가 안 되었다.
확인되지 않은 소문들은 다 차치하고서라도 본래 소속이었던 룸버린을 배신한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좀 더 기회주의자적인 풍모를 예상했었다. 하지만 실제로 대면해보니 무슨 반반한 계집애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데다 어딘지 모르게 순진한 구석까지 남아 있는 어린애였다.
거기다가 변절자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대체 얼마나 낯짝이 두껍기에 서쪽으로 떠나는 원정길의 진입로와 주요 핵심 구역들을 친절하게 안내해줄 길잡이 역할까지 맡게 된 것일까. 며칠 전 바벨의 도서관에서 자기가 현지인을 섭외했으니 지도 같은 종이 쪼가리 대신에 훌륭한 인간 내비게이션이 되어줄 거라며 호언장담하던 아돌프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좌우지간 도무지 알다가도 모를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평화로운 얼굴로 곤히 잠든 녀석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나는 그 이유를 어렴풋이나마 조금 알 것도 같았다.
모자란 애라서.
내 살다 살다 저렇게 생각 없는 놈은 처음이었다.
그때 접견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지각생치고 방 안으로 당당하게 걸어 들어오는 걸음걸이가 가뜩이나 예민해진 신경을 긁어 내렸지만 저 인간은 본래부터가 뻔뻔함을 빼면 걸어 다니는 시체였었다. 얼굴은 철면피에 몸통은 능구렁이.
그의 참가 여부를 진작부터 알고 있었던 나완 달리 녀석은 앉아 있던 내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다분히 충격받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는 나를 내려다보며, 정확히는 가슴께에 위치해 있는 내 그것을 지그시 주시하며 기가 차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몇 년 안 본 사이에 심하게 출세했네.”
이 녀석은 오조와는 달리 빈정대는 뉘앙스가 엄연히 비꼬는 것처럼 제대로 들려왔다. 무심한 빛깔의 짙은 눈동자가 아무런 미동도 없이 한참 동안 나에게 고정되어 있다가 이내 궤도를 이탈했다.
긴 손가락이 습관적인 동작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자 정돈되지 않은 머리카락 사이로 놈의 반듯한 이마가 드러났다. 여자는 두루두루 섭렵할수록 좋다며 종단 비구니들부터 시작해 여염집 아낙네들까지 후리고 다녔던 그 잘난 낯짝만은 여전했지만, 그 시절 무관 출신으로서 휘하에 수십만의 장병을 거느리던 걸출한 기개만은 사라져버린 지 오래였다.
그동안 뭘 하며 어떻게 지냈는지는 몰라도 일단 옷차림부터가 수행자의 복장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저 팔다리가 들어가는 구멍 뚫린 옷들을 대충 아무렇게나 꿰어 입은 모습이 마치 거리를 배회하는 한량 무뢰배들 중 하나처럼 보이기도 했다.
불현듯 장신에 체격까지 좋은 그가 군사 제복을 말끔하게 차려입고서 부하들을 호령하던 과거의 모습들이 떠올랐다. 심약한 이들은 차마 그 근처에 다가가지도 못할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던 시기가 있었더랬다.
그럼에도 지금의 저 남자에게서는 도저히 과거의 영광을 회상할 만한 그 어떠한 흔적도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놈에게서 그나마 유일하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여전히 입가에 걸려 있는 저 여유로운 웃음뿐이었다.
가급적 티 내지 않으려 해도 내 시선에 걸려 있는 불순한 생각을 눈치챘는지 그를 빤히 쳐다보던 내 눈동자를 가만히 마주하던 녀석의 입에서 갑자기 픽 하고 바람 새는 소리가 났다. 놈이 내 옆으로 태연자약하게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듣기엔 요즘 관음존자가.”
“…….”
“얼굴이 아주 예쁜 강아지 한 마리를 키우는데.”
“…….”
“제 주인을 닮아 성격이 아주 병신이라더니.”
“…….”
“……그게 바로 너였었구나.”
파오.
난 이 남자가 오래전부터 정말 싫었다. 그리고 농담이건 진담이건 간에 언제나 천연덕스럽게 지껄여대는 저딴 말투도 싫었었다. 여자라면 가리지 않고 능글능글하게 구는 것도 불쾌했지만 특히나 야하고 끈적끈적한 성희롱 대사를 늘 입에다가 줄줄이 달고 살았다.
타고난 여자 밝힘증 환자라 남자들에겐 꽤 엄하게 구는 편이었는데, 하필 나에게는 여자들에게나 할 법한 징그러운 말들을 자주 지껄였기 때문에 먼발치에서 이 자식의 실루엣만 보여도 그대로 몸을 틀어 가던 길의 정반대 방향으로 되돌아갔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나저나 연달아가며 내 성격에 대한 지적을 두 번씩이나 받을 줄은 몰랐다.
“절 아직까지…… 기억하실 줄은 몰랐습니다만.”
“그야 기억 못하면 서운하지. 거시기에 불알 두 쪽 달린 놈들이라면 엔간해서는 어느 누구나 다 통과한다는 그 간단한 입단 시험조차도 너는 자그마치 열다섯 번이나 떨어졌잖아! 군부 역사상 정말 그런 지진아가 드물었다니까. 제발 내치지만 말아달라고 울며불며 사정하던 널 결국 골방에 틀어박힌 샌님으로 만들었던 장본인이 나였었는데 생각 안 나?”
열다섯이 아니라 정확히 열네 번이지만 그래도 참겠다.
“그 살벌한 눈빛을 보아하니 날 아직까지 잊지 못했던 건 되레 네 쪽인 것 같은데. 뭐 날 너무 원망하진 말라구. 결과적으론 내 덕분에 출세한 거 아닌가. 게다가 그때의 너는 허약 체질의 표본격인 상태라 도저히 계집애들 냄새만 맡아도 아랫도리가 불끈 솟아오르는 그 혈기왕성한 철부지들 사이에다 던져놓을 수가 없었어. 그 시커먼 놈들에 비해 넌 너무 하얗고 가녀린데다 당시의 너한테선 젖비린내가 유독 암내처럼 심하게 풍겼었거든.”
외향적으로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그 저속한 언변은 하나도 변한 게 없었다. 이런 상황은 이미 예상했던 일이라 그리 놀랍지도 않았다. 관음존자가 나와 같이 서쪽으로 떠나게 될 명단을 보여줬을 때에도 왜 하필이면 이놈도 포함된 것인가를 나 혼자서 진지하게 고민해야 했으니 말이다.
농을 치듯 사람을 도발하는 저 화법에 조금씩 말려들었다간 공연히 아까운 기운만 쏙 빠질 테니 지금은 그저 입 다물고 가만히 있는 게 상책이었다. 종단 윗대가리들과 특히 군부 쪽에 몸담은 녀석들은 하나같이 아랫사람을 갈구는 덴 다 도가 튼 놈들이었다. 밥 먹고서 심심하면 하는 일이라곤 단지 그것밖에 없으니까.
하긴 저래 봬도 놈은 종단 49사단을 거짓말 좀 많이 보태서 손가락 하나로 통솔하던 천봉대원수의 직위까지 올랐던 사람이었다. 환영제야단의 모든 일에 총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관음존자는 일단 논외로 치고서, 군부 쪽에서 탁상공론이나 일삼는 뒷방의 허울 좋은 인사들을 모두 제외하면 실제 전장에서 가장 큰 영향력과 힘을 가졌던 것이 당시의 천봉대원수였던 저 파오였다.
(사실 아주 옛날에는 이렇게까지 군사 권력이 한곳으로만 쏠려 있지 않았었는데 그게 웬만큼 생각 있는 놈들이라면 전부 다 아돌프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하나둘씩 저승 문턱을 넘어섰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들 중 아직도 살아 있는 자가 남아 있다면 대부분 다섯 개의 검 수용소에 투옥되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랬던 사람인데 이제는 종단에서 방출된 파계승이 되어 과거에 잠시라도 그를 알았던 사람이 지금 모습을 본다면 당장이라도 눈살을 찌푸릴 몰골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놈이 천봉대원수직에서 잘린 이유래 봤자 그리 별건 아니다.
여자 따먹다가.
그런 한심한 이유로 정녕 대장군급의 인사를 파직시킨다는 것이 말도 안 되는 일 같겠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아무리 종단 규율이 내가 곧 법이니라 미소 짓는 관음존자의 손아귀에서 놀아난다지만, 천상천하유아독존인 아돌프마저도 엄중하게 금하는 단 한 가지 불문율이 존재했다.
불음不淫.
바로 음란한 짓, 즉 음행하지 말지어다.
보통, 환영제야단에 완전히 귀속되지 않은 재가자들에겐 정해진 상대 외에 부정한 관계를 맺지 않는 사음정도만을 금하였지만, 종단으로 출가한 수행자들에게는 단지 머릿속에서 음욕을 품는 것만으로도 장차 커다란 업을 짓는 죄악의 행위로 분류했다.
부처의 위대하신 가르침들 중 가장 큰 죄악에 속하는 살생마저 지금은 아무렇지 않게 저지르는 시대인데 고작해야 그런 것이 무슨 대수인가도 싶을 것이다. 하지만 호흡을 연마하여 정기신精氣神을 통일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는 수행 체제에 있어서 이성에 대한 호기심과 욕망은 자신과의 고독한 싸움인 수행이라는 긴긴 항해 일정을 방해하는 걸림돌이자 한낱 암초에 불과했다.
만일 그 암초를 간신히 피했다 쳐도 그 위에 걸터앉은 매혹적인 세이렌의 아름다운 노랫소리, 그리고 풍만한 젖가슴과 잘록한 허리 라인을 보게 되는 순간. 그것에 홀려서 수행이고 뭐고 눈앞의 욕망에 급급한 채로 중도하차해버린 놈들이 부지기수였다.
정, 기, 신은 일반적으로 몸과 마음과 정신을 뜻하였고, 서양의 마법이든 동양의 주술이든지 간에 모든 수행 체계가 이 세 가지를 삼위일체하여 마나, 혹은 기라고 불리는 강력한 에너지를 얻는 것을 기본 목표로서 가장 우선시했다.
특히나 남자의 정액은 정精의 응축으로써, 한번 방사하게 되면 말 그대로 애써 모아두었던 정력이 모조리 소모되어버린다.
그렇기에 여자의 말랑거리고 향긋한 육신을 한 번 품는 대가로 정기신의 삼보三寶가 흐트러져버리거나, 심할 경우엔 수행 도중 애써 차근차근 모아왔던 에너지들까지도 하루아침에 말짱 도루묵이 되어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그렇기에 그것을 행하는 대상이 자기만 아니라면 불교오계살생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음행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술 마시지 말라뮤트(?)의 반대인 살생, 도적질, 구라, 음주 등 모든 것들을 적극 권장(?)하는 아돌프마저도 남은 하나, 음행만은 철저히 금했다.
가끔 환영제의식에서 일장연설 중인 관음존자가, 행여나 수행 중에 딸 치는 놈들은 자기가 손모가지를 뚝 부러뜨린다고 반쯤 진담 섞인 얘길 꺼낼 때마다 다들 낄낄거리며 그냥 웃어넘기려는 분위기였지만, 아마 속으로 뜨끔하는 녀석이 한둘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파오는 예쁘고 젊은 여자들만 탐했던 게 아니라 치마만 두르면 장땡이라며 사람을 가리지 않는 변태로도 유명했었다. 부모님께서 물려주신 저 잘난 얼굴로는 어느 정도 외모를 따져가면서 사람을 만날 법도 한데 아무래도 안목보다는 성욕이 좀 더 우위에 있었던 모양이었다.
참고로 종단 내 비구니들은 이미 처녀의 씨가 말랐다는 소문까지 돌 정도였고, 오죽하면 관음존자도 천봉대원수 시절의 파오와는 그다지 말을 섞으려 들지 않았다.
여하튼 놈은 높은 승려 신분으로도 그 멀끔한 얼굴로 이 여자 저 여자 번갈아가며 잘도 후리고 다녔는데, 내 기억상 표면적으로 크게 터진 스캔들만 해도 열 손가락을 넘지만 그때마다 아돌프의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쉬쉬하면서 다들 눈감아주는 분위기였다.
당시엔 능력적으로 뛰어난 인재가 파오를 제외하곤 거의 다 개죽음을 당했기에 녀석까지 파계당할 경우 마땅히 그 자리를 대체할 인물이 없었으니까.
그러나 결국엔 아돌프에게 뒷덜미가 잡혀서 즉각 파계되었고 종단에서 쫓겨난 후로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그 소식조차 깜깜했었다. 하지만 썩어도 준치라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능력을 내심 아깝게 여기던 차에, 워낙에 자원 재활용을 좋아하시는 우리의 관음존자께서 파오를 다시 한 번 종단으로 불러들였다. 바로 죽어도 그다지 상관없을 멤버들로 구성된 이번 서쪽 여행에 합류시키기 위해서 말이다.
아돌프의 평소 말버릇들 중 하나가 인간쓰레기들은 하루빨리 뒈져서 땅의 밑거름이 되는 편이 지구에도 훨씬 이롭다였으니, 아마 소기의 목적 달성을 위한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자신을 파계시킨 관음존자와는 앙숙까진 아니라도 사이가 좋지는 않았을 텐데 도대체 파오가 이번 일을 순순히 수락했던 조건이 뭐였을까. 바람둥이에 대외적으로는 가벼워 보이는 이미지이긴 해도 자존심도 센 편이고 매사 그렇게 호락호락한 인간은 아니었는데.
설마 종단 복직인가? 아님 절세미녀 백 명과의 소개팅? 아니, 쟨 애당초 여자 얼굴 자체를 잘 안 보는데. 굳이 여자에 대한 기준을 나누자면 아마도 잤던 여자와 안 자본 여자일 거다. 그렇담 뭣 때문에 눈에 빤히 보이는 이런 미끼를 덥석 문 거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동안, 파오는 내가 건네준 관련 서류들을 가볍게 훑어보다가 마침 근처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오조를 힐끗거리며 내게 물었다.
“랜드리올에 참전했던…… 흑마법사 오조…… 라는 녀석이 진짜 저거라고?”
오조의 입에서 어느 투명한 실이 바닥의 침 웅덩이와 연결되어 있지만 않았어도 참 좋았으련만. 파오에게 쯧 하고 혀 차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뭐 딱히 내 알 바는 아니었다.
랜드리올은 녀석이 천봉대원수직에서 파계되기 직전 마지막으로 참가했던 전장이었다. 그곳에서 종단 사상 난생처음으로 연합군에게 막대한 손실까지 입고서 전투에서 크게 패하게 되었는데, 그 때문에 화가 머리끝까지 난 관음존자가 그저 단순한 화풀이의 대상으로 당시 사령관이던 파오를 잘랐다는 근거 없는 설들마저 떠돌았었다.
아니, 내가 옆에서 다 지켜봐서 아는데 쟤는 그냥 여자 꼬시다가 잘린 거다.
여하튼 오조의 잠든 얼굴에 집중된 파오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리는 듯했으나 이내 시선을 거두고선 다시 종잇장으로 주의를 돌렸다. 따지고 보면 다름 아닌 그 ‘랜드리올전’이니 놈 입장에선 오조가 별로 달갑지 않을 수도 있겠으나, 어차피 벌써 몇 년도 더 지난 일이니 큰 상관이야 없을 것이다.
한참 동안 서류에 정신이 못 박힌 듯이 계속해서 잠잠하던 파오에게서 낮게 중얼거리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천도 프로젝트라…….”
손우경이라는 죄수에 대한 기록을 읽다 말고 그가 순간 아연한 기색을 보였다. 파오는 서류를 바닥으로 툭 던져놓더니 나를 슬쩍 건너다보며 이야기했다.
“우아, 완전히 거물이네, 이쪽은.”
감탄사를 사용한 것치곤 마치 불경을 읽듯이 무미건조한 음성이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강아지야, 너 천도 프로젝트라고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냐? 세상에나, 네 무서운 주인님께서 그런 것도 설명 안 해줬어?”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지나간 과거의 굴레에 얽매이지 마라,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들을 미리 걱정하지 마라, 그러니 지금 현재를 살라, 그것이 세존께서 말씀하셨던 불자의 기본 정신이자 가르침이 아니던가요. 전 무엇보다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든지 간에 아무 관심 없습니다.”
애써 관심 없단 투로 말했지만 사실 불자의 기본 정신이고 뭐고 그건 전부 핑계였다. 나 역시 지난번 관음존자에게 천도 프로젝트에 관해서 넌지시 물었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다음과도 같았다.
넌 알 거 없어.
그 한마디로 기각되었다.
괜히 쓸데없는 호기심을 부리다가는 금세 넘어선 안 될 선을 밟게 될 것임을 잘 알기에 그 후로는 계속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중이었다. 파오는 자기 도발에 여간해선 쉽게 넘어가주지 않는 나를 보며 얄밉게 빈정거렸다.
“그래, 너 같은 말단 애송이가 자세히 알 만한 사안이 아니긴 해. 강아지는 강아지답게 주인님한테 열심히 꼬리나 흔들면서 가끔씩 던져주는 뼈다귀나 받아먹으면 되는 거지 뭐.”
“……그보단.”
“그보단 뭐?”
“저를 강아지라고 부르는 것은 이제 삼가주십시오. 가급적이면 옛 천봉대원수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이야 해드리겠지만 갈수록 도를 넘어서는 것은 참아주기가 힘들군요. 지금 당신의 처지와 신분을 결코 망각하지 마십시오. 먼저 예의를 갖춰주시기만 하면 저도 그에 합당한 대우 정돈 해드리겠습니다.”
그럼에도 전직 상관에 대해 존경심을 표출할 마음 따윈 들지 않았다. 아침에 잠을 못 자서인지 내 목이 뻣뻣하게 굳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오는 내 말엔 아랑곳없이 일부러 작위적인 콧소리까지 내가며 날 놀리듯이 말했다.
“오, 참, 그랬지. 이젠 나 같은 놈이 차마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대단한 몸이 되셨으니까. 그래, 강아지가 싫으면 뭘로 불러줄까? 더 귀엽게 멍멍이는 어때, 응?”
말이 좋아서 강아지지, 아까부터 아돌프의 수구 노릇을 하고 있는 나를 개로 비하하며 대놓고 힐난하는 발언이었다. 다른 놈들이면 모를까, 자기가 무슨 자격으로 저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를 어릴 적 꼬마 시절부터 보아온 사이이니 저런 반응이 전연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때 여태껏 쿨쿨 졸고 있던 오조 녀석이 부스스하게 눈을 치켜뜨며 잠에서 덜 깬 목소리로 되물었다.
“멍뭉이가…… 어딨어.”
자다 깨서 발음이 뭉그러진 목소리가 저야말로 무슨 멍뭉이 같았다. 오조는 주변을 연신 두리번거리다 멍멍이가 없단 사실을 깨닫자 바로 실망한 표정으로 풀이 죽었다. 하지만 실망도 잠시였으니, 이윽고 꿈속으로 또다시 푹 빠져들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파오는 관자놀이 부근을 굽힌 손가락 마디뼈로 꾹꾹 짓누르며 안에서 솟구치는 여러 감정들을 가다듬는 듯했다.
과거 랜드리올전에 참전했던 기수들은 녀석이 통솔하던 군사들 중에서도 파오 본인이 손수 공들여가며 몇 년에 걸쳐 키워냈던 정예군이었다. 정예라곤 하나 적지 않은 숫자였고, 사제 관계에 입각해 있었지만 사실상은 다들 파오를 마치 친형처럼 따르는 충성스러운 녀석들이었다.
랜드리올전은 시작부터 환영제야단의 커다란 승리를 장담하며 대대적인 규모로 진행되었고, 랜드리올을 접수한 뒤에 그 기세를 몰아서 앞뒤로 붙어 있는 자히르나까지 연달아 진격하기로 내정되어 있었다. 환영제야단이 룸버린과 로고스 연합군을 상대로 나날이 파죽지세의 연승을 올리던 시기였기에, 그만큼 파오 스스로도 커다란 자신감이 있었고 어느 누구도 나쁜 결과 따윈 예상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대승을 예측하던 당시 분위기는 단 한 명의 흑마법사의 등장으로 인해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환기마법을 통해 이계로부터 소환된 역겨운 괴생명체들.
이미 적들은 모두 안전한 곳으로 피신한 다음이었고, 그것들은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들이라면 그 어떤 것도 가리지 않고 제물로 삼아 피를 흡수했다.
그날은 바로 난데없이 등장한 흑마법사 오조의 첫 데뷔전이었고, 종단 측에서는 처음으로 전멸에 가까운 굴욕을 맛보게 된 채로 모든 상황은 ‘깔끔하게’ 종결되었다.
모쪼록 깔끔하다는 표현이 가장 적합할 것이다.
수천여 구의 시체가 상처나 찢긴 흔적도 없이 몸 안의 수분이 모두 증발해버린 껍데기만 남은 채로 땅 위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어릴 적의 내가 파오에게 열네 번씩이나 퇴짜를 맞고 골방에 틀어박혀서 경전을 공부하지 않았더라면 나 또한 그 말라비틀어진 시체들 중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파오는 복잡한 기분이 드는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꼭 혼잣말을 하듯 얘기했다.
“……이것 참 재밌는 조합이네. 처음에 관음존자에게서 전령을 받고서 달랑 네 명으로 갑자기 적의 본거지에 쳐들어가라니 뭔 개거지 같은 헛소린가 했는데……. 과연 미친 또라이의 머릿속에서나 나올 법한 황당한 생각이야.”
그 말엔 나 역시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였다. 허나 관음존자에 한해선 알아도 모르는 척, 봐도 못 본 척, 싫어도 좋은 척이 언제 어디에서나 생활화된 터라 이번에도 가만히 입 닥치고 있었다.
“농담하는 거 아냐. 저 자식은 랜드리올의 저승사자, 룸버린이 자랑하던 그림리퍼Grim Reaper, 죽음의 신. 서양의 사신을 뜻함. 보통 검은색 로브를 온몸에 휘감고 거대한 낫을 들고 다니는 음산한 해골의 이미지로 형상화된다. 오조가 지나가는 곳마다 시체가 쌓여서 이런 별명으로 불렸는데 실제로도 이런 비슷한 차림으로 돌아다닌다라구. 그리고 너, 지금 천도 프로젝트의 관계자라는 말이 어떤 의민지나 알고 있냐?”
“일단 모르겠지만 설령 그걸 안다고 해도 제 상황이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애당초 그 결정권은 나한테도, 당신에게도 없으니까요.”
파오는 다시 한 번 내 가슴에 달려 있는 배지를 노려보듯 주시하며 씁쓸한 얼굴을 했다.
“많이 독해졌구나, 너.”
남들 눈에 가장 잘 띄는 곳에 노예의 인장이 찍힌 것일 뿐. 당연히 자랑스러울 것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한들 파오의 비난 섞인 시선에 의해 난도질당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나는 입을 열었다.
“어차피 저들도 그분께서 움직이시는 꼭두각시입니다. 죄수건 배신자건 파계승이건 제겐 하나도 중요치 않습니다. 굳이 얘기하자면 저한테는 그런 존재들 가운데 당신이라는 사람이 더해지는 바람에 최악의 화룡정점을 찍었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그 난장판인 과거 속에서 차라리 반란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죽는 편이 더 명예로웠을 겁니다. 적어도…….”
“…….”
“비겁자인 당신에게는.”
파오가 약지 끝으로 귓구멍을 후비며 개의치 않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네 말엔 뼈가 너무 많아서 귓구멍이 막 따가워지려고 하네.”
“아직 그 손우경이라는 자가 이번 전력에 얼마나 보탬이 될지 가늠할 수 없지만, 만약 생명이 위태로운 순간이 닥쳐와도 장담컨대 그쪽만은 반드시 살아남을 겁니다. 어떤 위기 상황 속에서도 악착같이 살아남는 것이 주특기가 아니었던가요.”
랜드리올에서도 죽은 부하들의 시체를 놔두고서 자기 혼자서만 살아 돌아왔고, 그보다 더 심하게 시체 썩는 냄새로 들끓었던 관음존자의 티뷸라 궁도 그는 아무렇지 않게 안녕을 고하고선 미련 없이 떠났었다. 그런 그의 불명예스러운 이번 귀환을 나는 조금도 환영해줄 수가 없었다.
파오는 허공을 손바닥으로 가로막으며 휴전을 요청했다.
“……좋아, 거기까지만 해. 구차하기로 따지면 피장파장인 인간들끼리 서로 아픈 상처를 후벼 파내는 짓은 이제 그만두자고.”
파오가 심장이 있는 왼쪽 가슴을 손으로 꽉 움켜쥐며 아프다는 시늉을 했다. 그간 안 본 사이에 능청스러운 몸짓만 더 늘어서 돌아왔다.
“왜…… 다시 돌아온 겁니까.”
“그걸 너에게 말해줘야 할 의무가 있던가?”
“의무는 없습니다. 하지만 묻겠습니다.”
“그거야 너랑 같은 이유에서겠지. 지금으로선 관음존자의 입김이 닿지 않는 곳이라야 봤자 고작해야 염라대왕 면전뿐이니까. 뭐 예전이라면 폼 잡고서 거부하는 흉내라도 내보겠는데, 이젠 목숨 걸고서 날 지켜주겠다던 그 충성스러운 부하 놈들이 다들 황천행 아니면 이미 관음존자의 말 잘 듣는 졸개들로 전락해버려서 말야. 세상은 넓고 아직 여자는 많은데 이대로 이승을 하직하기엔 너무 억울하다구.”
놈은 혀 짧은 목소리로 덧붙여 말하길 ‘시져, 시져, 난 절대 아돌프를 못 이길 거얌’ 하고서 귀여운 척을 했다. 어처구니없어하는 내 표정을 보며 그가 갑자기 한쪽 눈을 찡긋거리기에 순간적으로 애꾸눈을 만들어주고 싶은 강렬한 욕구가 불끈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뒤처리가 귀찮으니까 일단 참았다.
“……살아생전에 지은 업이 많아 분명 팔열지옥으로 떨어지실 테니 부디 평소처럼 목숨 보전을 끈질기게 해두시는 편이 좋을 겁니다.”
“야, 안 그래도 얼마 전에 연락 왔더라. 지옥 지하 칠층에다 내 특별 귀빈석을 마련해뒀으니 좋게 말할 때 빠른 시일 안에 뛰어오라고. 이왕이면 너랑 나랑 우리 둘이서 사이좋게 손 붙잡고 가면 될 것 같은데?”
“제안은 감사하지만 저한테도 초청장이 날아오면 그때 가서 다시 고려해보죠.”
“솔직히 말해서 나도 이따위 귀찮은 일에 개입할 바엔…… 차라리 다른 생산적인 일들을 하고 싶어.”
놈의 눈동자가 반짝거리기에 나는 약간의 막연한 기대감을 품고 되물었다.
“……이를테면?”
“관음존자 말로는 까닥하다간 또 반세기 전 있었다던 그 세계 멸망 코스를 밟는다면서? 그렇다면 나는 이 세상이 멸망하는 마지막 날까지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여자를 만나고 싶다구! 종말의 날 새로 꼬신 그녀와 둘이 오붓하게 뒷산으로 남이 심어놓은 사과나무를 구경하러 가는 거야.”
그다음엔 사과나무 밑에서 죽기 직전까지 운치 있게 떡 좀 쳐볼까 하고.
파오가 능글맞게 제 입술을 찢었다.
“제 버릇 남 못준다더니 정말 여전하시군요. 어쨌거나 이번 일을 수락하신 이유는 그게 전부입니까?”
“음, 그거 외에 뭐가 더 필요하지? 혹시 그가 나에게 복직이라도 제안했을 것 같나?”
“…….”
“뭐 비슷한 얘기가 오간 건 사실이지만 그거라면 진즉에 거절했어. 파계되고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종단으로부터 지긋지긋한 감시를 받는 입장이라서 말야. 분에 넘치는 관심은 정말 고맙지만 이제 그만 나 좀 제멋대로 살게 내버려둬달라고 부탁한 것 외엔 진짜로 아무것도 없는데? 대체 뭐가 그리 궁금하실까, 우리 삼장법사님은.”
파오는 자기에 관한 것들을 끝까지 숨길 모양이었다. 당연하게도 방금 전 그의 말은 거짓말이었다. 세월이 흐르긴 했어도 적이든 아군이든 교섭 자체를 언제나 자기가 유리한 쪽으로 이끄는 데 능수능란한 재능을 가졌던 영리한 파오가 설마 맨입으로 이런 귀찮은 일을 떠맡을 리는 만무했다.
나 또한 아돌프에게서 개인적으로 따로 지시받은 사항들이 있었기에, 영악할 정도로 머리가 잘 돌아가는 관음존자가 굳이 이런 기묘한 조합을 꾀한 데에는 으레 각자의 능력에 걸맞은 역할들이 부여됐을 것이라고 예상됐다.
그러니 말을 아끼려 드는 저 녀석의 행동이 완전히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서로를 잘 안다지만 벌써 몇 년간의 공백 기간이 있었고, 그의 표현을 잠시 빌리자면 관음존자의 충성스러운 강아지에게 자기 속마음을 전부 드러낼 정도로 어수룩한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어쨌든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는 않으니 슬슬 자리에서 일어나는 게 좋겠어.”
파오가 내 주의를 환기시켰다. 신이 버린 장소이자 그들도 신을 등져버린 광란의 땅, 룸버린과 로고스 연합군의 점령 구역인 서쪽 대륙. 우리가 그곳으로 떠나야 되는 출발 시간은 정확히 나흘 뒤였다. 다만 방금 전 파오의 말은 나흘 후의 출발 일정을 뜻한 게 아니라 오늘 오후, 다섯 개의 검 수용소로 손우경이라는 자를 만나러 가는 일을 상기시킨 것이었다.
아돌프는 수용소 측에서 손우경을 인도받는 과정이 별다른 문제가 없을 거라며 단언했지만 나는 여간해선 그 기분 나쁜 장소를 방문하는 것이 영 내키지가 않았다. 수용소와 어느 정도 떨어진 곳에 사는 그 지역 주민들마저도 가급적 그쪽 방향으로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으려 한다고 들었었다.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데 정작 서두르자는 식으로 말을 꺼낸 파오는 요지부동의 자세로 움직일 생각조차 없는 듯했다. 놈은 입안에 마르지 않는 샘이라도 있는지 여전히 침을 줄줄 흘리며 퍼자고 있는 오조를 꽤나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는데 저를 빤히 쳐다보는 내 시선을 느꼈는지 손을 휙휙 저으며 지껄였다.
“너 아직도 안 가고 거기서 뭐하냐?”
“같은 말을 그대로 되돌려주고 싶군요. 안 일어나실 겁니까?”
“야아, 난 거기에 같이 안 갈 거야. 그리고 참고로 얘도 안 갈 거고.”
“그건 어째서입니까.”
파오가 후안무치하게 처웃으며 손목에 박힌 초록색 인증석을 보란 듯이 흔들었다.
“정확하겐 안 가는 게 아니라 못 가는 거지. 이따 오후부터 통행 허가증을 새롭게 갱신받아야 하거든. 너도 알겠지만 이거 최신 버전으로 업데이트 받으려면 꼬박 반나절이나 걸린다구. 그렇다고 내 팔목을 무슨 도마뱀 꼬리처럼 뚝 잘라놓고 움직일 수도 없고 말이지.”
팔목을 자를 수 없다면 대신에 저놈의 모가지를 뚝 잘라버리고 싶었다.
“……잘 알겠습니다. 요 몇 년 사이에 녹색으로까지 전락해버린 그 인증석이라면 확실히 필요한 정보를 갱신하고 자격을 인증받는 데 정말이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군요. 뭐 그런 당신의 인증석이라면 저 역시도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만, 옆에 있는 저 아이는 통행 허가증같이 번거로운 것들이 전혀 필요가 없습니다. 당장이라도 그 손목을 확인해보면 알겠지만 이곳에 망명하는 대가로 귀한 신분을 얻었으니까요. 참고로 저도 그런 건 아무런 필요가 없으니 나중에 국경 지대와 검문소를 통과할 때 공연히 동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면 이 기회에 제대로 갱신받아두십시오.”
내가 이 정도까지 자존심을 긁어내렸는데도 놈은 안색 하나 돌변하지 않았다. 물론 몸에서 싸늘하게 풍겨 나오는 기백으로는 벌써 사람 하나를 죽이고도 남았지만.
점점 싸늘하게 식어가는 온도 탓인지 고개를 꾸벅거리던 오조의 머리가 급속도로 무게 중심을 잃고서 잠에서 깨어났다. 시야가 가물가물한지 멍한 눈동자로 허공에 초점을 맞추다가 이윽고 자기 입가에 고드름처럼 길게 매달려 있는 침방울을 손등으로 쓱 훔치려는데, 그 순간 파오의 손이 그 가느다란 턱을 들어 받치며 행동을 저지했다.
“못써. 지지야.”
지지 말고 얜 뭐지? 라는 표정으로 눈이 동그랗게 변한 오조를 대신하여 내가 파오에게 서둘러 일갈했다.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 건데.”
“…….”
“엄연한 남자애니까 허튼수작 따윈 부리지 마십시오.”
그러자 파오는 틀어쥐고 있던 턱을 자기 쪽으로 당겨 이리저리 돌려 살펴보더니 결국 시큰둥하게 손을 떼고 말았다.
“야, 그런 건 진작 말해줘.”
“애당초 룸버린의 그림리퍼가 여자일 리가 없잖습니까. 늦어도 저녁 예불 전엔 꼭 돌아올 테니 그때까지 제발 이 자리에서 꿈쩍도 말고 얌전하게 계시길 바랍니다.”
파오가 한쪽 어깨를 으쓱였다.
“살다 보니 내가 너한테서도 이런 어린애 같은 꾸중을 듣게 되는 날이 오는군.”
파오와의 영양가 없는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오조가 불쑥 끼어들었다.
“……삼장 너 어디 가는데?”
“남은 한 명 데리러.”
“아아, 그럼 잠시만 있어봐.”
그렇게 말하더니 또 눈을 감고서 금세 조용해졌다. 다시 선잠이 든 건지 혹은 정신 집중을 통해 변성 의식에 들어선 건지 구분할 수 없었지만 오조의 눈꺼풀이 파르르하게 떨려오는 걸 보니 후자인 듯했다. 잠시 후 눈을 뜬 오조가 기분 탓인지 나를 약간 동정하는 시선으로 눈여겨보더니만 조금 주저하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으음, 나도 같이 가주고 싶지만 거기 엄청 위험하니까 니 일엔 절대 끼어들지 말래.”
“누가…… 그래?”
“상위자아…… 아니, 아니, 그러니까 내 수호천사가.”
“…….”
아돌프처럼 확실하게 미친 또라이는 그간 많이 봐왔었지만 얘처럼 곱게 미친 놈은 처음 본다. 만약 저 얘기를 파오가 지껄여줬다면 나는 얼마든지 놈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말을 쏘아붙이고선 기분 좋게 내 갈 길을 떠났을 텐데, 차마 이 오조라는 녀석에겐 함부로 입을 열수가 없었다. 새끼 여우라서 그런가.
오조 녀석은 두 개의 큰 귀를 가진 괴상한 동물의 머리뼈가 달린 지팡이를 머리 위로 휘리릭 흔들어대며 뭔가를 심히 고민하는 눈초리였다. 그 지팡이에 달린 머리뼈는 그 뾰족한 주둥이 사이로 날카로운 이빨들이 돋아나 있었다. 근데 뭘 고민하는 걸까.
“손 줘봐.”
어물쩍거리던 오조 녀석이 내 손을 억지로 잡아 빼더니 어디선가 튀어나온 하얀색 초크 같은 걸로 내 손등 위에다 무언가를 그려댔다. 나는 사람 형태를 최대한 단순화시킨 것처럼 보이는 오조의 그림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뭔데?”
오조가 내 손등 위 동그란 얼굴 안에 눈코입을 삐뚤빼뚤하게 채워 넣으며 마무리에 박차를 가했다.
“이건 내 서비터Servitor, 마법사가 자신을 마나나 인격을 부여해서 창조하는 인공 정령. 불(살라만더), 물(운디네), 바람(실프), 땅(노움)처럼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원소 정령들과는 다르게 자신을 만든 마법사의 에너지에 기생하여 살아가며 그들에 비해 힘도 약한 편이다. 주인의 명령은 절대적이며 여러 가지 작은 임무들을 수행한다야. 손등에 잠깐 부착해뒀으니 이따가 네가 만약 죽기라도 하면 피부에서 떨어져 나와서 네 사망 소식을 제일 먼저 나한테 전해줄 거야.”
“…….”
파오의 유쾌해진 웃음소리에 더럭 짜증이 났지만 얘 자체는 아무런 악의가 없는 눈이었다.
근데 네 수호천사가 아까 뭐라고 그랬었는지 일단 자세하게 좀 말해볼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