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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 바벨의 도서관 (머리말) (1/24)

INTRO. 바벨의 도서관 (머리말)

난 가끔씩 눈을 뜨면 정말 이상한 곳에 불려와 있다.

미리 말해두지만 이건 내 의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단순히 의지만으로도 내가 있을 장소를 직접 선별할 수 있다면 구태여 이런 선택을 할 리가 없다.

만약 그런 게 가능했다면 나는 지금쯤 남태평양 휴양지의 아름답고 따사로운 모래사장에 얹힌 하얀색 비치베드 위에 드러누운 채, 한가로이 선탠이나 즐기고 있을 터였다. 그리고 옵션으로 미니우산이 꽂힌 주스 칵테일 따위나 쪽쪽 빨아먹고 있겠지.

자다 깬 뒷머리를 벅벅 긁어내리며 이제는 익숙하기까지 한 주변 풍경을 슬그머니 둘러보았다. 휴우- 한숨이 절로 터져 나온다. 남들은 어느 날 갑자기 눈을 떠보니, 하늘에서는 요정과 용들이 날아다니며 땅에서는 손에서 불과 물을 내뿜는 마법사들과 환상적인 모험이 가득한 세상 속으로 잘도 뚝 떨어지던데, 난 왜 항상 이 모양인지 통 알 수가 없다.

그게 아니라면 어쩐지 옆모습이 쓸쓸해 보이는 어느 금발의 미남자가 우연하게 내 앞에 불쑥 나타난다든지. 그런데 알고 보니 그 미남자께서는 성과 미들네임을 합쳐 전체 이름이 족히 스무 글자가 넘는 고귀한 신분의 황제라든지. 그리고 그 황제가 세상 어느 누구에게도 더 이상 자신의 마음을 열지 않는 차가운 얼음 심장을 가지게 된 뼈아픈 과거가 있다든지.

뭐 그런 거 있잖은가.

하지만 이 융통성 없는 딱딱한 공간에 존재하는 것이라곤 오직 ‘그것들’뿐이었다.

나는 적막한 분위기 속에 갇힌 채 중력의 법칙을 완전히 무시하는 허공 위를 데굴데굴 굴러다니다가 꽥, 사자후, 아니, 오리후를 내질렀다.

아 사연 많은 황제 같은 건 바라지도 않을 테니 차라리 투명 드래곤이라도 제발 좀 나타나줘.

너 혹시 투명해서 내 눈에 전혀 안 보이는 거니.

주변은 온통 어두웠지만 묘하게도 모든 것이 뚜렷하게 보였다. 사실 난 이 장소를 무척이나 잘 알고 있었다. 그야 이번만 해도 벌써 수십 번째 방문이기 때문이다.

이 장소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딱 한 가지.

장소가 나에게 원하는 것을 그대로 해주면 된다.

내 움직임과 이동 방향에 따라서 점진적으로 윤곽이 드러나는 저 길고 긴 서가들이 마치 물결처럼 출렁였다. 현재의 방문객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다. 그저 그들의 모습이 내 눈에만 제대로 보이지 않을 따름이지 주위를 유심히 살펴보면, 서가로부터 하나둘씩 방출되는 책들이 유령같이 투명한 물질의 움직임에 의해 책장이 넘겨지거나 혹은 다시 서가에 꽂히고 있었다.

상하좌우, 눈 닿는 곳이면 어디로든 끝없이 이어지는 이 도서관의 내부는 그야말로 우주의 보고寶庫였다. 이곳엔 별의별 이야기들이 존재하며 잠시도 쉬지 않고 모든 것들이 실시간으로 저장되고 있다. 방대한 지식들과 아직까지도 세간에 발표되지 않은 수많은 이야기들. 또는 이미 세상에 공표되어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거나 냉담하게 잊힌 것들. 아니면 지금 당신의 머릿속에서 아무런 의미 없이 스쳐 지나간 어느 티끌같이 작은 생각들까지도 말이다.

재미있는 점은 단순히 현재나 과거뿐 아니라 미래에 대한 이야기들까지 기록되어가며 이 도서관의 크기가 점점 무한대로 팽창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령 이곳에선 내 운명에 대한 심도 깊은 저술서나 미래에 대한 예언서 같은 것들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그렇지만 아직까진 그러한 책들을 전혀 읽어보지 않았다. 왠지 두렵게도 느껴졌지만 설령 내 운명이라는 것을 전부 미리 알아버리게 된다면, 분명 앞으로 살아가는 날들이 하염없이 시시해질 테니까.

어쨌든 이 기묘한 장소는 때때로 나를 불러와선 내가 자신의 품에 숨겨진 이야기들을 찾아내어 그것을 읽어주길 바랐다. 하필이면 왜 내가 이곳에 선택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 장소에 불려온 자가 오직 나 하나가 아니듯이 이곳엔 나와 같은 소임을 맡게 된 수많은 방문자들이 있었고, 나 또한 저들 중의 한 명일 따름이었다. 어쩌면 우리들 누구나 항상 이 장소를 방문하고 있음에도 기억을 전혀 못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책등마다 각각의 제목들로 적혀 있는 저 문자들은 분명 내가 알고 있는 언어 체계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임에도 이상하게도 나는 그것을 정확히 읽어낼 줄 알았다.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냐고 생각하겠지만, 정말로 난생처음 보는 이 기괴한 문자의 조합들을 그저 눈으로 보는 순간 내 머리에서 이미 파악해버린다.

손가락 끝을 책등에 가져다댔더니 형광물질처럼 빛나는 표식들이 반짝거렸다.

이 책은 벌써 누군가가 나보다 한발 앞서 읽었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 찾아야 할 것은 아직 아무도 읽지 않은 새 책이다.

일찌감치 다른 이들의 손이 탄 것은 아무리 읽어봤자 도서관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듯했고, 내가 이 장소에 체류하는 기간만 더 늘어날 뿐이다.

한참이나 허공을 부유하며 육중한 서가 사이를 오가던 중, 문득 어떤 책을 발견했다.

같은 칸에 꽂힌 어떤 책은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읽고 갔었는지 내가 잠깐 손을 대기가 무섭게 책등 위로 셀 수 없이 많은 표식들이 떴다. 더군다나 내가 발견한 책 제목이 저것의 제목과 거의 흡사한 걸 보니 아마도 서로 간에 무슨 큰 연관성이 있는 듯했다. 일전의 경험상으로 유추해보건대 아마 패러디라든가,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다든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숨을 깊게 들이쉬며 나는 아직 아무 표식도 나타나지 않은 그 깨끗한 책을 누가 발견할세라 서가에서 얼른 끄집어냈다.

사실대로 고백하자면 나는 원래 있던 곳에서 글을 쓰는 작가이다.

아직 작가라는 칭호를 붙이기엔 부족한 점이 많지만 그래도 내 필명으로 세상에 나온 책들이 제법 되는 편이다.

하지만 좀 더 솔직하게 털어놓건대 나는 그저 번역가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이 도서관에서 읽은 책들은 나의 언어와 시선을 통해서 어떤 방식으로든지 세상 다른 이들에게 전해줘야 하는 것이 바로 이곳의 규칙이었다.

나는 그렇기에 입때껏 발간했던 내 책들이 모두 이 우주도서관에서 읽었던 이야기들의 번역본일 따름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이야기들을 반드시 발표하지 않는다고 한들, 나에게 어떤 물리적인 제재나 처벌이 들어오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만약 이곳에서 책을 읽고 난 뒤 나 혼자서만 오랫동안 알고 있으면 책 속의 내용들이 머릿속을 떠다니며 일상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로 날 괴롭혀대기 일쑤였다.

토해내, 네 머리에 든 걸 어서 다 토해내라구.

그걸 세간에서는 창작 욕구라고도 부르는 모양인데 어쨌든 전부 다 게워내지 않으면 정말로 곤란하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시간이 없거나 귀찮아서 번역 작업을 차일피일 미뤄가며 계속 내 머릿속에서만 꽁꽁 묵혀두었던 그 책의 내용이, 어느 날 나와 같은 책을 읽게 된 또 다른 번역가에 의해서 세상에 공개되는 것을 느닷없이 지켜보는 기분은 생각 외로 끔찍하다.

[…….]

나는 두툼한 책장을 소리 나게 덮었다.

내가 고른 이 책은 상당히 재미난 이야기였다.

도무지 숨 쉴 틈조차 주지 않는 흡인력으로 인해 글을 빠른 속도로 읽어 내렸지만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나는 뼈저리게 절감했다.

그래, 번역은 제2의 창작이라고 하지 않던가.

아까도 잠시 언급했지만 책에 적혀 있는 언어는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절대 설명하기 힘든 체계이자 기묘한 표현 방식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책뿐만이 아니라 이 광활한 도서관 서가에 꽂혀 있는 모든 책들이 전부 이와 같은 방식으로 쓰여 있었다. 내 짧은 표현력으로 말하자면 마치…… 우주의 언어랄까.

그 이상은 나도 잘 모르겠다. 이 우주적인 묘사법의 가장 큰 장점을 꼽자면 책 속의 모든 캐릭터들과 상황 자체가 마치 내 눈앞에서 실제로 살아 움직이는 듯한 놀라운 생동감을 부여한다는 점.

아까 책을 읽는 도중, 주인공 일행이 미처 함정임을 예상치 못하고 방대한 양의 팔딱거리는 생선더미를 머리 위에서부터 발끝까지 홀랑 뒤집어쓰는 장면이 나왔었다. 그러자 축축하고 미끌미끌한 감촉의 살아 있는 수많은 생선들이 진짜 내 몸에라도 닿은 듯이 순식간에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이윽고 콧속으로 짭짤한 바다 냄새가 뒤섞인 생선 비린내가 역하게 풍겨오는 것 같은, 그런 착각마저 들었다.

나는 결국엔 책을 읽다 말고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생선 비린내를 맡기 위해 몇 번이고 코를 킁킁거렸으며, 피부 위로 오들오들 솟아오른 닭살을 달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손바닥을 펼쳐 양 팔뚝의 소름을 연달아 쓸어내리기까지 했다.

그리고 마침내 최종장에서 ‘그것’ 과 맞닥뜨렸을 때의 그 충격은…….

흡사 내가 책을 보는 것이 아니라 펼쳐진 책장 안에 블랙홀이 열려서 나를 그 속으로 강력하게 빨아들이는 기분이었다.

그러니 이걸 대체 어떻게 번역해야 내가 책을 읽으며 고스란히 받았던 그 느낌과 감정들을 백만분의 일이라도 제대로 표현할 수가 있을까.

때론 생각한다. 내가 좀 더 뛰어난 번역가였으면 참 좋았을 텐데.

앞서 번역했던 다른 책들도 그랬지만 매순간 번역이 쉬웠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대사와 문장들을 일일이 내가 사는 곳의 언어로 고쳐야 했고, 또 내 경험과 판단에 의거해 말의 뉘앙스 자체가 아예 달라지는 경우도 있었으니까.

그러다 보면 결과적으로 원래의 양상에서 조금 멀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래도 가급적이면 원작을 훼손하지 않는 방향으로 힘껏 노력해보지만, 길고 긴 번역 작업 중, 내 주관적인 감상이나 사상이 묻어나는 것만은 나도 어쩔 도리가 없다.

사실 주인이 누군지 도통 모르겠는 이 도서관 측에서는 그런 점을 전혀 터치하지 않는 것 같지만, 번역의 질에 대해 고심하는 것은 내게 있어 언제나 흔히 있는 일이다.

그렇지만 내 서툰 번역 실력으로도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바로 내가 그랬듯이 부디 즐겁고도 가슴 벅찬 여행 속으로 발을 들일 수 있길 바랄 뿐이다.

마지막으로 이 우주의 도서관은 좋은 글이든 나쁜 글이든, 재미있는 글이든 재미없는 글이든, 흥미진진한 글이든 지루한 글이든, 완성작이든 미완성작이든지 간에, 확률적으로 나올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편견 없이 전부 내포하고 있는 곳이다.

그러니 굳이 이 책을 선택하여 번역까지 감행하게 된 책임감에 내 두 어깨가 자못 무겁다.

그렇기에 나는 이 번역물이 얼마나 흥미롭고 재미있을지 솔직히 전혀 장담하거나 자신할 수 없다.

판단은 오로지 지금 이 글을 읽고 있을 당신의 몫으로 남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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