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세상이 한 번 망했다-88화 (88/88)

88화

“나를 알아?”

“……이 땅에서 당신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호진의 말에 지완이 웃었다. 유쾌해서인지 뭔지 알 수 없는 웃음이었지만, 호진은 그가 자신을 비웃는 것 같이 느껴져 얼굴을 붉혔다.

‘여기가 도지완의 집이었던가…….’

호진은 마음속으로 깊이 동경하던 대상의 집에서 물건을 훔치는 걸 들켰다는 게 너무나도 수치스러웠다.

그가 아무 말도 못 하고 입을 꾹 다물고만 있자 지완은 여전히 웃는 낯을 하고 호진에게 손가락을 뻗었다. 정확히는 그가 쥐고 있는 영약을 가리켰다.

“그거, 내 거 같은데.”

그 말에 호진은 흠칫 놀라며 더욱더 영약을 꽉 쥐었다. 마치 제 물건인 것처럼 지완을 경계하는 그의 모습에 지완도 웃음을 그쳤다. 그러더니 황당하다는 눈으로 그를 위아래로 훑었다.

미약한 경멸이 담긴 시선에 호진은 침을 꿀꺽 삼키더니 겨우겨우 말을 뱉어 냈다.

“이건…… 줄 수 없습니다.”

“그게 내 거라는 건 알고 있는 건가?”

지완은 마치 자신이 강도라도 된 기분을 맛봤다. 입장이 바뀐 것처럼 구는 호진을 싸늘하게 노려보자, 그 시선을 받은 호진이 이를 악물었다.

‘내가…… 도지완에게서 이걸 가져갈 수 있을까?’

안 돼도 해야 한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은 호진이 공격하려고 마음을 굳히자 지완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감히…….”

‘어?’

그러고는 호진의 시야가 뒤집혔다. 어느새 다가온 지완이 호진을 공격했던 것이다.

발길질 한 번에 허벅지 안쪽에서 뭔가 부러지는 소리가 나며 몸이 저절로 휘청였다. 아픔은 뒤늦게 찾아왔다.

“으으…… 악!”

통증에 신음하며 벌벌 떨면서도 호진은 꽉 붙잡은 영약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빼앗길 수 없다는 듯 몸을 말아 엎드린 제 가슴팍 깊숙이 숨겼다.

“……허!”

“제발…… 부탁드립니다.”

“…….”

“분이 풀리실 때까지 저를 어떻게 해도 좋으니…….”

지완에 발치에 엎드린 호진이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호진의 행동이 그저 돈을 노리고 한 도둑질이 아니란 걸 눈치챈 지완의 얼굴에 흥미가 돌았다.

의자를 끌고 와 끅끅 우는 호진의 앞에 앉은 지완이 그에게 명령했다.

“설명해.”

무엇을 설명하라 정확히 말하지 않았지만 호진은 그것이 왜 영약이 필요한지 묻는 거라 판단했다.

“여……동생이…… 많이 아픕니다.”

“…….”

“영약이 있어야…… 살 수 있다고 해서…….”

“…….”

“도둑질하다 들켜서…… 이런 말 하기 송구스럽지만…… 은혜는 평생에 걸쳐 갚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호진은 빌면서도 마음속으로는 큰 기대는 없었다. 호진의 여동생이 죽든 살든 그게 지완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오히려 여동생을 팔아 이 위기를 모면한다고 손가락질 받아도 할 말이 없었다.

호진은 불쌍하다는 생각을 하며 끅끅 눈물을 흘렸다. 죽을지 모르는 여동생도, 그 여동생을 살려 보겠다 도둑질하다가 지완에게 잡혀 버린 저 자신도.

그렇게 반쯤 포기하고 있던 그의 머리 위에 호진이 죽어서도 잊을 수 없는 말이 들려왔다.

“그거 그냥 너 가져.”

“……예?”

잘못 들었나 싶었다. 못된 희망이 그에게 환청을 들려준 건 아닐까? 그런데 아니었다.

“너 가지라고.”

“……예?”

“돌려줄 필요 없으니 그냥 가져.”

눈물로 젖은 얼굴로 올려다보자 지완의 머리 뒤로 후광이 비치는 환각이 보일 정도였다.

그 뒤로 호진의 기억은 드문드문했다. 지완이 나가고 곧 들어온 사람들이 호진을 여동생이 있는 병원으로 데려갔다.

그때까지 꼭 쥐고 있던 영약을 여동생에게 먹이고 나서야 호진은 부러진 다리를 고칠 수 있었다.

“깔끔하게 부러져서 고정만 잘 시키면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의사의 설명에 영혼 없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호진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나에게 영약을 준 걸까?’

돈이 있어도 구하기 힘든 영약을 주면 호진이야 이득이겠지만 지완에겐 전혀 이득이 없었다. 그가 갚겠다는 것까지 거절했으니까.

‘하지만…….’

동정이든 변덕이든 그것이 호진에게 큰 도움이 된 건 사실이었다. 평생을 갚아도 갚을 수 없는 은혜였다.

* * *

여동생의 병은 말 그대로 씻은 듯이 나았다. 후유증이나 재활 없이 건강하게 돌아다니는 여동생을 볼 때마다 지완에 대한 고마움은 날로 커졌다.

몇 번 지완의 근처로 접근해 은혜를 갚고 싶다고 외쳤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그의 경호원에게 막혔다.

“길드장님께서는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하십니다.”

“그때 다리를 부러트렸으니 남은 은원은 없는 거라고 하셨습니다.”

다리 한 번 부러지는 것으로 영약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면, 원하는 사람들을 서울에서 부산까지 줄을 세워도 자리가 모자랄 터였다.

지완의 말은 아쉬웠지만, 그가 자신을 원하지 않는데 계속 따라다니며 민폐를 끼칠 수는 없었다. 그저 마음 깊이 존경하며 언젠가는 꼭 은혜를 갚을 수 있길 기도할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적합자 발견.]

[판정 중…….]

[…….]

눈앞에 이능력자 스탯 창이 아닌 다른 것이 떴다. 당황한 그가 손가락을 이리저리 놀리며 창을 끄려고 할 때 또 다른 창이 하나 더 떴다.

[매치율 100%]

무언가 나쁜 상황인 것 같지는 않아 가만히 보고 있으니 갑자기 정수리 위로 벼락 같은 것이 꽝! 하고 떨어져 내렸다.

“윽!”

“호진아!”

“여기 사람이 벼락에 맞았어요!”

그렇게 쓰러졌다 일어난 호진은 제 인생이 180도 뒤바뀌었다는 것을 체감했다.

재각성자. 로또 당첨보다 더 겪기 힘들다던 일이 그에게 일어난 것이다.

F급에서 단번에 S급으로 성장한 그는 밀려오는 축하와 그에게 어떻게 빌붙어 보려는 사람들의 방문을 받으면서도 얼떨떨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있다가 모두가 돌아가고 나서야 제 눈앞에 뜬 메시지 창을 읽을 수 있었다.

[당신은 용사로 선정되었습니다.

세계를 멸망시키려는 마왕에게서 이 세계를 지켜 주세요.

연약한 당신이 악에 맞설 수 있도록 당신에게 큰 축복을 내립니다.]

아마 재각성은 그 큰 축복으로 일어난 듯했다. 중간에 그만둔 적이 있기는 했지만, 어시스트 일을 한 지 15년쯤 지났다.

호진은 이제 와서 화려한 헌터들의 삶을 살 수 있다는 생각에 기쁘다기보다는, S급이 된 자신이라면, 어쩌면 지완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재각성한 그에게 손을 내미는 곳은 많았지만 그는 마음을 굳혔다. 하나 호진의 생각과 달리 도문 길드는 호진에게 손을 내밀지도 않았고 호진의 가입 요청을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저희 길드는 더 이상 신입 길드원을 받지 않습니다.”

“예……? 하지만…….”

나 정도면 받지 않더라도 예외가 될 수 있지 않나? 호진은 그렇게 생각했다가 얼굴을 붉혔다.

운이 좋아 재각성이 된 거라고 겸손하게 입으로 말하면서도 스스로는 자신이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당연히 거절당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니, 머릿속에서는 자연스럽게 지완과의 재회를 시뮬레이션하기까지 했다.

‘절 기억하십니까? 그때 당신께서 영약을 주었던 그 사람입니다.’

‘어? 그 사람이? 하…… 이런 인연이 있나?’

‘당신 덕분에 저는 이 자리에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은혜를 갚고 싶습니다.’

그렇게 동경하던 사람에게 드디어 닿을 수 있을 거라고, 어쩌면 친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망상은 그저 망상으로 끝이 났다.

도문 길드에 들어가긴커녕 지완의 머리털 하나도 호진은 볼 수가 없었다. 아쉬웠지만 언젠가 도문 길드에서 신입 길드원을 받을지 모르니 다른 제안들은 전부 거절한 채 호진은 거의 솔플을 하게 되었다.

‘아……. 마왕도 없애야 하는데.’

마왕이 혹시나 지완에게 해코지할지도 모르니 호진은 초조했다. 빨리 없애 버리고 싶지만 어디 있는지도 알 수가 없었고, 마왕을 어떻게 알아보냐는 그의 질문에 메시지 창은 자연스럽게 알아볼 것이라고만 말할 뿐이었다.

지금 당장은 헌터로써 경험을 쌓는 게 최우선이었기에 호진은 열심히 던전을 돌았다.

그렇게 솔플로 돌던 호진은 마음이 맞는 몇 명과 공격대를 갖추며 점점 경험을 쌓아 갔다. 그러던 어느 날, 호진은 드디어 마왕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원하지 않던 최악의 모습으로.

* * *

헌터 협회에서 헌터들을 모아 파티를 한다며 호진에게 초대장을 보냈다.

헌터 협회는 예전에는 준국가 기관으로 꽤나 권한이 강했다고 하지만, 이제는 강해진 길드들의 힘에 유명무실해졌다고 들었다.

협회장인 장대영은 예전의 힘을 되찾기 위해 노력 중이라고 하지만…….

‘그게 과연 될까?’

굳이 파티에 갈 필요가 있나 싶어 초대장을 쓰레기통에 버렸던 호진은, 몇 시간 뒤 쓰레기봉투를 뒤져 초대장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가지 않으려고 했던 파티에 지완이 온다는 소리를 들어서였다.

“평소에는 어디 아픈 것도 아닌데 공식 석상에 잘 안 나타났다며.”

“이번에도 안 오는 거 아닌가?”

호진과 함께 공격대를 결성한 동료들이 종알거리는 것을 무시하며 호진은 입구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지완을 향한 호진의 일편단심을 잘 아는 동료들은 혀를 끌끌 찼다.

“누가 보면 짝사랑했던 첫사랑이라도 기다리는 줄 알겠어.”

“으휴 징그럽다. 대장이 사귀는 사람이 없는 건 게이라서 그럴 거야.”

“커밍아웃은 대체 언제할는지.”

“닥쳐! 그런 감정 아니라니까!”

호진이 지완에게 품은 것은 그런 질척한 감정이 아닌 순수한 팬심, 동경심이었다. 자꾸 제 마음을 퇴색시키려는 동료들에게 한 대씩 주먹질해 주자 앓는 소리가 났다.

“아이고오! 여기 S급이 사람 쳐요!”

“합의 따윈 없다. 콩밥이나 먹어라.”

우우, 야유를 뱉으며 그를 놀리는 동료들을 강하게 째려보자 동료들은 깔깔 웃으며 자리를 떴다. 놀리는 건 즐겁지만 맞는 건 아팠으니까.

흩어지는 동료들과 달리 호진은 그 자리에 머물러 저 문을 열고 나올 지완을 기다렸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그는 보이지 않았다.

“……거짓말이었나.”

이번에 지완이 파티에 나온다고 말했던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며 호진은 이를 갈았다. 지완이 없는 파티였지만 동료들과 즐기는 거라고 생각하면 나쁘진 않았다. 그러나 지완을 언급하며 거짓말을 한 건 용납할 수가 없었다.

다음에 만나면 거짓말에 대한 답례를 꼭 해 주겠다고 마음 깊이 다짐하면서 호진이 미련을 버리려고 할 때였다. 그렇게 기다려도 열리지 않던 문이 열리며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

들어올 길드는 거의 다 들어왔다. 그러니 지금 들어올 인물들이라면 딱 한 무리밖에 없었다.

‘도문 길드의 사람들!’

길드장인 지완처럼 도문 길드의 모든 길드원들도 이런 파티나 대외적인 활동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모두가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그렇게 들어오는 길드원들 사이, 존재만으로 시선을 훔치는 사람이 있었다.

“……어?”

그의 모습을 본 호진의 얼굴이 굳었다. 지금 막 들어오는 자의 몸 주위로 넘실거리는 것은 그만이 느끼고, 그만이 볼 수 있는 것이었다.

‘마기……?’

그런데 충격적이게도 그 마기의 주인은 호진이 잘 아는 사람이었다.

호진이 마음 깊이 동경하며 친하게 지내고 싶었던 상대. 바로 도지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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