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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한 번 망했다-81화 (81/88)

81화

그리고 채우가 예상치 못했던 두 번째 일이 일어났다. 조금 더 뒤에나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한 지완이, 천사 덕분에 빠른 클리어를 하여 그날 바깥으로 나온 것이다.

지완이 나오기 전까지 천천히 제 멀쩡한 상태에 대해 조작하려던 채우였지만, 일이 꼬이고 꼬여 멀쩡한 그대로 지완과 마주하게 되었다.

* * *

“많이 다쳤다면서요?”

윤채우가 다쳤다는 소식에 나와 함께 병원에 오게 된 도지완이 윤채우를 훑어보며 말했다.

사람의 위아래를 훑으며 말하는 것이 썩 좋아 보이진 않았으나 그의 인성이 쓰레기라서 그런 행동을 한 것은 아니었다.

‘뭐야…….’

천사인 나도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윤채우의 위아래를 훑어봤으니 말이다. 전화로 그의 상태를 전해 들었을 때는 사경을 헤메는 것 같더니 실제로 확인한 그는 너무나도 건강했다.

여차하면 신성력이라도 써서 몸을 낫게 해 줄 생각으로 따라왔던 나는 아까운 신성력을 쓰지 않게 되었음에도 입을 삐죽 내밀고 윤채우를 천천히 살폈다.

‘이상한데?’

내가 윤채우에게 조금 사감이 있긴 하지만 그의 무사함을 안도할 수만은 없는 건 묘한 찜찜함 때문이었다.

같은 사고를 당해 응급실에 입원한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도 윤채우의 상태가 가장 좋았던 것이다. 습격당한 사람으로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걸 도지완도 느낀 건지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 아니! 많이 다쳤어요!”

어디가? 하는 도지완의 눈빛에 윤채우가 몸의 이곳저곳을 가리키며 쫑알쫑알 말했다.

“여기도 생채기가 났고요, 여기도 까졌잖아요!”

“…….”

“……차가 좀 튼튼한 데다 운이 좋아서예요! 습격당해서 제가 얼마나 놀랐는 줄 아세요?”

그러면서 가련하게 눈물을 흘리며 두려워하는 윤채우였다. 그 모습이 징그러울 법도 하지만 솔직히 예쁜 얼굴이라 의심하는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흑……! 무서워요…….”

자신을 추궁하던 분위기가 반전된 것을 눈치챈 건지 윤채우는 눈물을 훔치며 도지완에게 기대 왔다. 그 모습에 속에서 뭔가 울컥했지만 금세 나아졌다. 도지완이 안아서 위로해 주거나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저한테 기대어 우는소리를 내는 윤채우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그는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아무래도 일을 그만두셔야겠군요.”

“……예?”

도지완의 말에 윤채우의 우는소리가 멎었다. 그러더니 제가 들은 게 맞나 하는 얼굴로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에……? 저는 그만둘 생각이 없는데요?”

“하지만, 겪었다시피 나를 노리는 무리가 있어서 말입니다. 제 주위에 있으면 또 이런 일을 당할지 모릅니다.”

윤채우가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뻐끔거렸다. 그의 퇴사가 결정되려는 순간 정신을 차린 윤채우가 소리를 질렀다.

“저 그만 안 둘 거예요!”

“하지만…….”

“어떻게 들어왔는데 제가 그만두겠어요! 이, 이게 위험하다면 이 사람도 마찬가지잖아요!”

그렇게 말하며 윤채우가 가리킨 것은 나였다. 나? 나는 손가락으로 스스로를 가리키면서 입 모양만 움직여 되물었지만, 윤채우는 내 말에 대답이 없었다.

“그렇게 치면 신지호 씨도 위험한 거 아닌가요?”

그 말에 도지완은 어떻게 나와 그를 비교하겠냐는 얼굴을 했다. 왠지 모를 뿌듯함에 웃음이 나왔다.

“여기서 신지호가 왜 나오는지 모르겠군요. 확실히 위험한 건 마찬가지지만 적어도 얘는 등급이 낮아도 헌터입니다.”

아무리 내가 등급이 낮아도 일반인인 윤채우와 비교할 순 없었다. 아차 한 얼굴이 된 윤채우를 보며 나는 코웃음 쳤다.

‘저 사람이 나를 우습게 보고 있긴 했구나.’

태도가 묘하게 느껴질 때가 많았는데 기분 탓이 아니었던 것이다. 기분이 조금 상해 한 발짝 물러나 윤채우의 떼 쓰기를 구경하고 있을 때였다.

“그러니까 저는…… 신지호 씨처럼 길드장님이 저를 지켜 주신다면…….”

우물쭈물하며 눈치를 보던 윤채우는 갑자기 입을 꾹 다물더니 원망 어린 얼굴을 했다.

“저에게 이러셔도 되는 거예요?”

“……뭐가 말입니까?”

“제가…… 큰 걸 바라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저 저도 신지호 씨 같은 대우를 바란다는 건데.”

“…….”

“습격은 제가 뭘 잘못해서 일어난 게 아니잖아요? 그저 길드장님께 도움이 되고 싶어 열심히 일한 것뿐인데…….”

서러운 목소리로 웅얼거리던 윤채우는 급기야 태도를 바꿨다.

“고모할머님께서 제가 이렇게 다친 데다 다친 이유로 해고까지 되었다는 걸 아시면 가만히 계실까요?”

“윤채우 씨!”

갑자기 선을 넘는 윤채우의 모습에 내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친척, 특히 할아버지인 도문그룹 회장의 말에 약한 도지완을 은근하게 협박하고 있었으니까.

윤채우의 일이 고모할머니라는 사람의 귀에 들어가면 당연히 그녀는 제 오라비인 회장에게 안 좋은 말을 할 것이 분명했다.

그에 내가 참지 못하고 나섰으나 윤채우는 나를 잠시 째려보다가 원망 어린 눈으로 도지완을 올려다봤다.

그를 바라보는 도지완의 얼굴에선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화가 났다거나 기막혀한다거나 그런 것도 없었다.

‘어떡하면 좋지.’

윤채우가 도지완을 난처하게 하는 건 싫었다. 그러나 그가 원하는 대로 해 주는 건 더 싫었다. 아마 지금의 내 상황처럼 도지완이 하루 종일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붙어 있어 주기는 바라는 것일 테니 말이다.

‘비서 형이라면 몰라도 윤채우는 싫어.’

두 사람 다 비서 일을 하는 사람인데 왜 싫은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속으로 끙끙 앓던 나는 갑자기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아!”

내가 소리를 내자 두 사람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윤채우는 왜 방해하냐는 시선이었고, 도지완은 궁금하다는 얼굴이었다. 나는 대뜸 윤채우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윤채우 씨의 요구는 형님이 당신을 24시간 지켜 줬으면 좋겠다 이거죠?”

“……그렇죠?”

“그건 아침에 일어나서 같이 출근하고 일하다가 같이 퇴근해서 집으로 돌아가는 걸 뜻하는 거죠?”

“네…… 맞긴 한데…….”

내 질문에서 무언가 불길함을 느낀 건지 윤채우는 말끝을 흐렸다. 나는 방긋 웃으며 손뼉을 쳤다.

“그렇군요! 알겠어요, 형님! 윤채우 씨가 원하는 대로 해 주죠!”

“뭐?”

얘가 왜 나를 도와줘? 하며 미심쩍은 얼굴을 하는 윤채우와 달리 도지완은 인상을 팍 썼다. 그에겐 내가 그의 의사를 무시하고 윤채우의 편을 드는 것처럼 보였을 테니 말이다.

“신지호!”

“같이 출근하고 퇴근하는 데 굳이 같은 집에 살 필요는 없잖아요?”

“……네?”

윤채우는 그 말을 듣고 처음에 이해하지 못하다가 이내 얼굴을 굳혔다. 내가 말장난을 하고 있는 거라고 착각한 듯했다.

“지금 출퇴근만 같이하고 지내는 건 저희 집에서 지내라는 소리인가요?”

놀림받았다고 생각한 건지 윤채우의 얼굴에 슬슬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그럼 제가 저희 집에 혼자 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면 어쩔 건데요!”

“아뇨? 당연히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되니까 윤채우 씨는 이사해야죠.”

내 말에 무슨 꿍꿍이냐는 듯이 윤채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도지완은 내 배신 아닌 배신에 얼굴이 굳어 있다가 이제야 내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이해하고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렇게 하면 되겠어.”

“……대체 뭐예요?”

자신만 이 대화를 따라가지 못해 불안했는지 윤채우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나는 그에게 상냥하게 설명했다.

“형님 집의 앞집이 비어 있어요.”

“…….”

“그리고 그 집은 제집이죠. 다른 사람이면 모르겠지만 윤채우 씨니까 집을 빌려줄게요. 편하게 쓰세요.”

“허…….”

“가까우니까 무슨 일이 일어나도 바로 형님이 달려갈 수 있고, 출퇴근도 같이 할 수 있죠. 완벽하죠?”

이쯤 되자 도지완은 흘러가는 이야기가 재미있었는지 작게 웃었다. 어쩌다 한 방 먹고 멍한 얼굴을 한 윤채우가 고소하다는 얼굴이었다.

곧 윤채우는 정신을 차리고 나에게 반격하려고 했지만 이제는 도지완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앞집에 살면 굳이 같이 살아야 할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요.”

“하지만……!”

“그리고 손님방은 하나뿐이라서…… 안됐지만 같이 지내게 되면 윤 비서는 거실에서 지내야 할 것 같군요. 그래도 좋습니까?”

아무나 들락날락할 수 있는 거실에서 지내야 하는 데도 같은 집을 고집한다면 정말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본인도 그렇게 판단한 건지 결국 윤채우는 항복했다.

“……알겠어요.”

“그럼 그렇게 논의된 걸로 알겠습니다. 혹시 모르니 며칠간은 병원에서 쉬도록 하세요. 검사도 받으시고…… 이사는 퇴원하고 합시다.”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윤채우를 뒤로한 채 우리는 병원을 나왔다.

볼일은 더 없었기에 주차해 둔 차로 향하는데, 도지완이 내 머리 위에 툭 하고 손을 얹더니 손바닥으로 마구 쓰다듬었다.

“으악! 뭐예요!”

“기특해서.”

도지완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해 정말로 기분이 좋아 보였다. 작게 소리 내어 쿡쿡 웃더니 그가 말했다.

“솔직히 난감하긴 했어. 대체 뭐 때문에 나한테 붙어 있으려나 싶기도 했고.”

“…….”

“그래도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건 질색이라 이번에 회장님의 신뢰를 잃더라도 끊어 내려 했는데, 어떻게 보면 잘된 거 같아.”

도지완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가 나에게 물었다.

“이상하지?”

“예…… 뭐.”

그가 이상하지 않냐고 묻는 대상은 당연히 윤채우일 터였다.

“세진리교와 관계가 있는 걸까? 아니면 단순히 나에게 붙어 있고 싶어서 그런 걸까?”

도지완은 잘생기고 인기도 많았기에 굳이 세진리교가 아니라도 그에게 붙어 있고자 하는 사람이 많아 헷갈렸다.

쉽게 결론을 낼 수 없었던 우리는 차를 타고 말없이 집으로 돌아갔다.

현관 안으로 들어서자 도지완이 말했다.

“자, 그럼.”

“…….”

“조금 밀려나긴 했지만 우리 할 말이 아직 남았지?”

드디어 그 시간이 와 나는 긴장에 침을 꿀꺽 삼키며 그를 돌아보았다.

* * *

지완은 살면서 경험해 본 것보다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이 많았다. 그리고 헌터 일을 하며 세상에는 상식 밖의 일도 존재함을 알았다.

그러나 지호가 말하는 것들은 상식을 파괴해 재조립하는 것이었다.

“신? 그러니까…… 부처님 같은 거?”

“인간들의 잣대로 판단하기 어려운 분이시죠. 인간이 인지할 수 없는 가장 높은 차원에 기거하시며 굽어 보시는 분이세요.”

“그러니까 그……분이 계시다…….”

지완은 헛웃음을 흘렸다. 방금도 그것이라고 말하려다가 지호를 의식해 그분이라고 높여 말했을 정도로 그는 신 같은 것을 믿지 않았다.

비단 지완 자신의 일이 아니라도 세상은 너무 불합리한 일들로 가득했기에, 정말로 신 같은 지고한 존재가 있다면 그것을 가만 두고 볼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만약에 신 운운하는 것이 지호가 아니었다면, 지완은 헛소리 말라고 냉정하게 말하며 내쫓았을 터였다.

“그래…… 그, 분이 있다고 치자. 그분은 아무것도 안 하시는 건가?”

“예. 그분은 그저 지켜보는 존재시니까요.”

“어째서?”

지호는 조금 화가 난 듯 보이는 지완의 얼굴을 보면서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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