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저 더럽다니까요?”
“안 더러워.”
단언하는 도지완을 보며 기가 막혔다.
평소에는 얼마나 깔끔을 떠는지 먼지 한 톨만 어깨에 내려앉아도 샤워를 하는 사람이, 샤워를 하고도 피 묻은 나를 끌어안는 것이 이해가 안 됐다.
하지만 그의 고집을 이길 수 없었던 나는 마음대로 하라는 듯이 몸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야, 저것 봐.”
“도문 길드장이랑 연호진이…….”
방금 이동 토템을 써서 베이스캠프로 넘어왔기에 주위에는 사람이 많았다. 모두가 두 사람을 보며 수군거리는데 시선이 느껴졌다.
살짝 시선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눈을 돌리자 거기에는 낯이 익은 얼굴이 보였다.
‘아…… 그 사람이네.’
그의 가슴에서 번쩍이는 금색 새 브로치를 보자마자 전에 협회 강당에서 이야기를 나눴던 사람이란 걸 깨달았다.
그가 시선을 주든 말든 중요하지 않았기에, 나는 곧 시선을 돌렸다. 연호진과 눈빛을 나눌수록 도지완의 팔에는 힘이 더욱 들어갔다. 아프진 않았지만 자신에게 집중하라는 뜻이 담겨 있어 나는 반항하지 않았다.
연호진은 체념하는 나와 나에게 기대 비웃음을 날리는 도지완을 보곤 내 팔을 놓았다.
“그럼,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쉬십시오.”
그렇게 말하며 돌아서는 연호진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도지완이 물었다.
“저 새끼랑 무슨 대화했어.”
“사람들이 듣거든요?”
의심 가득한 목소리에 나는 한숨부터 쉬었다. 도지완은 붙들고 있는 내 몸을 흔들었다. 당장 이실직고하라는 뜻이었다.
“에휴, 몰라요. 말하려는 찰나에 형님이 왔잖아요.”
“아닌 거 같은데…….”
도지완은 여전히 의심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사실 연호진이 하고 싶은 말이 끊기긴 했어도 거의 다 들었기에 알고는 있었지만, 도지완에게는 말할 수 없었다.
‘말했다가는 큰일 난다.’
연호진이 나한테 접근하는 것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따로 만나자고 속삭인 것까지 들킨다면 파멸뿐이었다. 모른 척하는 나를 그가 유심히 바라봤지만, 내가 태연한 척 구니 어쩔 도리가 없었는지 그는 이번만 넘어가겠다는 얼굴로 나를 놓아주었다.
“이번만 두고 보겠어.”
“……감사합니다?”
이걸 감사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알 수 없어 의문형이 되어 버렸다. 그러다 이제야 제 몸에 묻은 핏자국을 봤는지 얼굴을 찡그린 도지완은 나를 끌고 샤워실로 갔다.
샤워실 앞에는 찜질방처럼 갈아입을 수 있는 옷과 수건이 비닐에 포장되어 쌓여 있었다. 이건 작업복과 달리 개인 물품이 아니었기에 세탁 주머니에 넣을 필요가 없었다. 이것 외에도 샴푸나 비누 같은 건 샤워실에 비치되어 있어 그냥 들어가서 씻으면 되었다.
“씻고 나와.”
샤워실은 방수 천으로 칸을 나눠 간이 샤워부스처럼 되어 있었다. 그래서 딱히 서로의 알몸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이 있었다.
혹시나 이전처럼 도지완의 알몸을 보고 내 주니어가 흥분해 버린 걸 다른 사람들이 본다는 상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해졌다.
갈아입을 옷의 비닐을 뜯어 물이 튀지 않을 곳에 올려 두고, 그 비닐 안에는 더러워진 작업복을 넣었다. 이따가 세탁 주머니에 넣을 거지만 그냥 들고 다녔다가 갈아입은 옷에 피가 묻거나 하면 기분이 좋지 않을 테니 말이다.
샤워를 하고 나오자 다시 씻은 모습의 도지완이 밖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호다닥 달려 옆자리에 서니 내 몸에서 나는 냄새랑 똑같은 냄새가 도지완의 몸에서 났다.
“헤헤…….”
왠지 좋아서 웃으니까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도지완이 말했다.
“앞으로 그놈이랑 같이 있지 마.”
그놈이 누군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
“저는 그 공격대의 어시스트인데요?”
잊은 건 아니죠? 하고 물으니 도지완은 인상을 팍 썼다
“그럼 둘만 있지 마. 놈이 다가오면 소리를 지르고 주먹으로 때려.”
“그랬다가는 미친놈이라는 소리를 들을 거 같은데.”
내가 떨떠름하게 답하니 도지완의 눈이 번쩍이며 안광을 뿜었다. 아앗, 또…… 나를 압박하는 그 눈빛에 나는 벌써부터 피곤해짐을 느꼈다.
“여기서 나 말고 잘 보일 상대가 있어?”
“없어도…… 그냥 욕 듣는 것보다는 안 듣는 게 좋죠.”
“욕하는 놈들 내가 다 고소해 주면 될 거 아냐?”
그랬다가는 진짜 미친놈 취급당할 거 같은데……. 연호진을 보고 비명을 지르고 때리기까지 해서 미친놈이라고 수군거렸더니 고소까지 한다?
내가 생각해도 정말 미친놈 완전체가 따로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지완은 제정신이 아닌듯했다. 그러니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지껄이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어이가 없어진 내가 물끄러미 바라보자 그는 도리어 성을 내며 내 대답을 재촉했다.
“왜 그렇게 반항적인 눈으로 봐?”
“…….”
“아무튼 내 말 알겠어?”
“…….”
“모르겠어? 다시 말해 줘?”
“알겠어요…….”
나는 꿍얼꿍얼 대답했다. 어차피 도지완이 나를 따라다니며 감시할 것도 아닌데, 내가 일하는 동안 연호진과 둘이 있든 셋이 있든 그가 알 게 뭔가?
그런 생각으로 대충 대답했더니 도지완은 의심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놓아주었다.
* * *
도지완이 없을 때 연호진이 말을 걸면 비밀로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그 뒤로 연호진이 나에게 다가와 말을 거는 일은 없었다.
왜 말을 안 거는지 조금 답답하게 생각하는 나와 달리 그가 나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자 도지완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아주 잘 하고 있어.”
“네에…….”
대답하며 입을 삐죽 내밀었지만 도지완은 킬킬 웃으며 머리만 흐트러트렸다.
어느덧 바깥 시간보다 네 배가 느린 던전 안에서 20일 정도가 지났을 때였다. 일을 나가기 전 가볍게 서로 대화하는 시간에 팀장인 장원영이 말했다.
“어제까지 이 던전의 반절을 공략 완료했다고 합니다.”
“오!”
“어제까지 던전의 반절을 공략했다면 40일쯤 되면 클리어한다는 소리 아닌가? 그럼 바깥 시간으로 10일 만에 완료하게 되는 건가?”
“진짜 빠르긴 하다. S급들이 있어서 확실히 빠르네.”
원래라면 헌터들의 멘털을 위해 던전 시간으로 일주일 공략을 하고 쉬었다가 다시 공략을 하는 식으로 진행했겠지만, 우리는 공략이 끝날 때까지 나가지 못하고 숙식해야만 했다.
그러니 지금처럼 빠르게 공략이 진행된다는 것은 곧 바깥세상으로 나갈 수 있다는 말이었으니 다들 기뻐할 수밖에 없었다.
“야, 넌 밖으로 나가면 뭐부터 할 거냐?”
“사우나 가서 몸 지진 후에 국밥 먹고 호텔에서 잘 거야.”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던 나도 그 말에는 혹했다. 아무리 땅바닥보다 간이침대가 좋다고 해도 일반 침대보다는 못한 편이니까. 뜨거운 물을 못 쓰는 것도 좀 아쉬웠다. 그러다 전에 도지완이랑 여행 갈까 이야기했던 것이 생각이 났다.
‘여행 한번 가는 것도 좋겠다.’
이렇게 개처럼 일했으니 조금은 쉬어도 되지 않을까……. 세진리교가 나타나도 뭐 어떠랴. 내가 다 신성력으로 조져 버리면 되는 것을.
‘그래. 여행을 가자.’
그렇게 나가면 할 것들을 하나하나 마음속으로 곱씹으며 우리는 오늘의 일터로 향했다.
일주일쯤 지나자 이동 토템을 사용할 때의 시야 변경에도 별 느낌이 안 나게 되었다. 그렇게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툭 하고 쳤다.
“어?”
“안녕하세요?”
돌아보니 실실 웃는 얼굴이 보였다. 예전에 봤던 금조 길드의 사람이었다.
이동 토템이 설치된 곳이 두 구역의 경계에 있으면 이런 식으로 다른 공격대와 마주칠 가능성이 높았다.
내가 D급이란 걸 알고는 떠났던 사람이 아는 척을 하니 이상해서 바라봤지만, 그는 그때 일은 잊었는지 살갑게 말을 걸어왔다.
“에이, 그때 왜 소속이 없다고 하셨어요?”
“네?”
이 사람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소속이 없으니 없다고 한 건데 뭘 오해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연호진은 헌협 사람이니까 아닐 테고, 도문 길드 소속이었어요?”
“어……. 도문 길드 소속은 아닌데…….”
그는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인상을 찌푸렸다. 나로서는 황당할 따름이었다.
‘아니, 진짠데……. 내가 자길 속여서 무슨 이득을 본다고?’
황당해서 쳐다보니 그는 인상을 다시 펴고 나를 보면서 다 안다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에이, 도문 길드장이랑 엄청 친해 보이던데……. 나이 차이가 있으니 친구는 아닐 거아니에요?”
그렇게 말하는 그의 눈에 탐욕이 가득했다. 나는 감정을 잘 모르지만 이렇게 뚜렷하게 보여 주면 모를 수가 없었다.
‘이 사람은 나를 통해 도지완과 닿고 싶은 거구나.’
예전에 비서 형이 자신을 통해 그와 접선하고 싶어 하던 사람들이 많다고 했었다. 그런 일을 내가 겪게 되니 기분이 이상했다.
나는 뭔가 속에서 올라오는 것을 꾹 참아 내며 그에게 말했다.
“전 도문 길드 소속은 아니에요.”
“아, 진짜…….”
“헌터 일을 안 하거든요. 그냥 길드장 소속으로 사무 일이나 여러 가지 일을 이것저것 하고 있어요.”
그 말에 상대가 드디어 납득했다. 내가 왜 계속 길드 소속이 아니라고 했는지 말이다.
“그, 그래도 뭐 길드장 소속이면 도문 길드 소속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길드장이 곧 길드인데.”
“…….”
“에이, 제가 조금 말을 그렇게 하긴 했지만 친해지고 싶어서 그런 거니 넘어갑시다아. 응?”
그는 머쓱한 얼굴로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대충 그걸로 날 몰아세운 걸 흐지부지하게 넘기려는 거 같기에 맞장구도 쳐 주지 않았다. 그런데도 뻔뻔하게 붙기에 그날의 일을 상기시켜 줬다.
“그날 화장실 간다고 하고 안 오시기에 저랑 별로 친해지고 싶지 않은 줄 알았는데요.”
“아……아! 그거어……. 그때 화장실 갔다가 길을 잃었지 뭐예요. 그래서 이리저리 헤메다가 겨우 찾아서 들어갔더니 깜깜해서 자리가 잘 안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아쉽지만 빈 데 앉았지. 내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기가 막힐 정도로 뻔뻔한 대답에 나는 그저 헛웃음이 났다.
“저랑 친해져 봤자 뭐 좋을 것도 없는걸요. 헌터도 아니고, 등급이 높은 것도 아니라서…….”
“에이……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요. 친하게 지내다 보면…… 같은 사람 밑에서 일할 수도 있고?”
이제야 제 탐욕을 내보이는 남자였다. 자기 길드 자랑을 그렇게 하더니 도문과 닿을 수 있는 끈인 나를 보자 제 길드도 별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나 보다.
생각보다 끈질기게 구는 남자를 어떻게 떼어 낼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찰나 누군가 나에게 다가왔다.
“제 공대원은 아닌 것 같은데 누구십니까?”
연호진이었다. 그는 내가 난처해하는 걸 봤는지 제 등 뒤로 나를 보내면서 남자에게 말했다. 남자는 연호진의 등장에 깜짝 놀라더니 선망 어린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연, 연호진……! 저, 정말로 존경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금조 길드의 심…….”
“죄송하지만.”
남자가 연호진에게 자신을 소개하려고 할 때였다. 그의 말을 끊은 연호진은 단호하게 말했다.
“이제 이동해야 할 때라서요. 금조 길드원들도 이동하는 것 같은데요?”
“어……아? 아앗! 잠, 잠시만요!”
뒤를 돌아보다 자신을 놓고 가는 길드원들을 발견한 남자는 허둥지둥했다. 그러더니 연호진에게 꾸벅 인사하고는 제 길드 쪽으로 달려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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