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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한 번 망했다-67화 (67/88)

67화

* * *

주말에 인사를 핑계로 지완에게 문자를 보냈다가 처참하게 씹혀 버린 채우는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지완을 어떻게 꼬셔야 하나 고민하며 출근한 그는 오늘따라 사무실의 공기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뭐지?’

이 달고 말랑한 분위기는? 그 기운은 지완과 지호에게서 풍겨 왔다.

뭔가 첫 연애를 하는 풋풋함까지 느껴져 채우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유는 당연히 자신이 지완과 그런 분위기를 내야 하는데, 애먼 지호가 그 자리에 있으니까였다.

‘설마…… 주말 동안 무슨 일이 있었나?’

채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두 사람을 살폈다. 정말 자신이 없는 사이 무슨 일이 생긴 거라면?

‘별로 좋지 않은데…….’

일이 어떻게 이렇게 흘러가는가 싶어 황당했다.

지완은 마왕의 추종자들이 벌여 놓은 일 때문에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타인을 가까이 두고 연인으로 만들었다면 그들의 계획은 실패였다.

또한 그런 지완이 제 마음에 들인 사람이니,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사귀었을 리가 없었다.

그런 사람을 어떻게 제칠지도 문제였지만, 그 자리를 지완이 다른 이에게 쉽게 내어주겠냐는 문제도 있었다.

‘젠장, 너무 늦게 투입되었어.’

적어도 9사도가 일을 벌이기 전부터 자신이 지완에게 붙었어야 했다면서 채우는 속으로 한탄했다. 때만 기다리다가 이상한 놈에게 다 빼앗겨 버렸으니 말이다.

지완을 설득하느니 차라리 지호를 설득해 그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게 편하겠지만…… 겪어 본 바 지호도 만만치 않은 또라이라 쉽게 설득이 될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초조한 속마음을 숨긴 채 시간을 보내다 지완이 회의를 위해 아래층으로 내려가 둘만 남게 되었을 때 채우가 떠보듯 물었다.

“……주말에, 뭐 좋은 일 있었어요?”

채우의 질문에 지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얼굴을 살짝 붉히면서 생각했다.

‘지금의 상태에 대해 이 사람한테 물어보면 되지 않을까?’

채우는 자격증도 많고 좋은 대학도 나와 똑똑하니까 상식이 부족한 자신과 다르게 답을 잘 내려 주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지완과 그렇고 그런 일을 했다는 게 부끄러워서 입에 쉽게 담을 수 없어 망설이자, 초조해진 채우는 관심 없는 척하기 시작했다.

“아니면 말고요. 그냥 그래 보여서 물어봤는데 내 착각인가?”

그러면서 혹시라도 입을 다물까 봐 연신 힐끗거렸다. 결국 채우의 계략에 넘어가 버린 지호가 입을 열었다.

“그게…… 금요일에, 길드장님이랑 야한 거 했거든요.”

쾅! 채우는 제가 상상만 했던 일이 지호의 입에서 나오자 참지 못하고 책상을 때렸다. 깜짝 놀란 지호가 눈을 둥그렇게 뜬 채 자신을 바라보자 한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채우가 손을 내저었다.

“아…… 잠깐 균형을 잃어서…… 상관하지 말고 계속 말해 봐요.”

“……그랬는데 그 다음 날부터 저한테 막 잘해 주고.”

“으음…….”

“제가 알기론 길드장님이 하는 일이, 사귀는 사람한테 해 주는 거 같은데요.”

자랑하냐? 채우의 이마에 핏줄이 불뚝 섰다. 그냥 죽여 버릴까…… 하며 속으로 갈등하고 있을 때 지호가 말했다.

“그럼 우리 사귀는 걸까요?”

“……네?”

처음엔 사귀게 되었다 자랑하는 줄 알았다. 그래서 죽여 버릴까 망설였는데, 말끝이 의문으로 끝나 채우도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바라본 지호의 얼굴에는 혼란이 가득했다.

“그런데 사귀자는 말을 듣진 못했거든요?”

“…….”

“그리고 야한 거는…… 원래 사귀고 난 다음에 하는 거잖아요? 야한 거부터 하고 사귀어도 되는 거예요?”

놀리는 건가 싶었는데 그 진지한 얼굴을 보니 절대 놀리는 것 같지는 않았다. 황당하게 쳐다보던 채우는 이게 자신에게는 기회라는 것을 알았다.

“……사귀는 게 아닌 거 같아요.”

그 말에 지호가 깜짝 놀랐다. 그 반응에 채우는 속으로 차갑게 미소 지었다. 이런 멍청한 놈에게 지완을 빼앗길 순 없었다.

“아마 길드장님이 잘해 준 것은 어쩌다 야한 일을 하게 됐으니, 미안한 마음에 잘해 준 걸지도 몰라요.”

“그…… 그렇지만…….”

“만약 사귈 마음이 있었으면, 길드장님이 벌써 말을 했겠죠. 그분 성격에 할 말 안 하는 거 보셨나요?”

채우의 말에 지호의 말문이 막혔다. 그의 말대로 지완은 몇몇을 제외하면 하고 싶은 말을 참는 성격이 아니었다. 거기다 지호는 그 몇몇에 들지 않았으니 참을 이유도 없었다.

미미하게 풀이 죽은 지호를 보며 채우는 속으로 웃었다. 지완이 아닌 자신에게 물어보는 것은, 지호도 헷갈려서 그에게 속 시원하게 물어보지 못하는 것이 분명했다.

‘내가 이렇게 말해 놓는다고 해도 얘는 도지완에게 정말로 우리 둘은 엔조이 관계냐고 묻지 못한다는 거지.’

어디 마음고생 좀 해 봐라. 자신이 있어야 할 지완의 옆자리를 차지한 지호에게 유감이 많았던 채오는 속으로 비열하게 웃으며 겉으로는 안 됐다는 듯이 속살거렸다.

“남자는 원래, 이성보다 성욕이 앞설 때가 있잖아요?”

“…….”

“아마도 그때 신지호 씨에게 손댄 걸 미안하게 여겨서 잘해 주는 걸지도 모르죠.”

채우의 말에 지호가 욱한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화낼 상대가 이쪽이 아니란 걸 알았는지 소리 지르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

“그날 뒤에도…… 절 만지고, 끌어안고 그랬는데…….”

점점 자신 없어지는 목소리로 지호가 말했다. 채우의 속살거림이 그에게 의심을 품게 한 것 같았다.

혼란스러워하는 지호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채우가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았다.

“원래 처음 하는 것보다 두 번째 하는 게 쉬운 법이니까요.”

“두 번……째?”

“네. 처음에 손댈 때는 어렵지만 두 번째로 손댈 때는 어렵지 않죠.”

“…….”

“할 때 쟤도 즐겼잖아? 정말 싫었으면 거부했겠지. 이러면서요.”

자신의 말에 충격받아 지호의 얼굴이 창백해진 것을 보고 채우는 바닥을 구르며 웃고 싶은 걸 참아 냈다.

지호의 기분이 가라앉아 채우가 치를 떨던 말랑한 분위기가 사라지고 우중충한 분위기가 그 자리를 메꾸었다.

한참 뒤 회의를 하고 돌아온 지완이 우중충한 분위기를 느끼고 눈을 가늘게 떴다. 모른 척 일하는 채우와 달리 지호는 제 감정을 숨기지도 못하고 있었다.

“무슨 일 있었어?”

“……아무 일도요.”

지완이 지호에게 물었지만 지호는 고개를 저었다. 입을 꾹 다문 지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 같자, 지완이 이번에는 채우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채우도 말해 줄 생각이 없었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 말에도 지완은 의심을 풀지 않았고,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냐고 지호에게 거듭 물어본 후에야 질문하는 걸 멈췄다.

그러나 지완의 얼굴에서는 의심이 거둬지지 않았다. 분명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고, 채우가 지호에게 무엇을 했을 거라는 의심 말이다.

‘재수 없어.’

채우는 서운함에 고개를 숙였다. 지완이 아끼고 위해야 할 상대는 그의 부활을 기다려 온 자신이었다. 저런 멍청한 D급 헌터가 아니라.

‘……빠른 시일 내에 도지완의 집으로 들어가야 해.’

같이 살아야 두 사람이 지지고 볶는 것을 방해할 것 아닌가. 지금이야 지호를 속여 넘겼다지만 오해가 언제 풀릴지 몰랐다.

일단 그의 집으로 들어가야지 유혹을 하고 말고 할 테니…….

그런 채우의 머릿속에 교활한 계책이 떠올랐다. 그 계책대로라면…… 지완의 집 안에 들어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기에 채우는 입을 가리고 작게 미소 지었다.

* * *

‘그렇구나. 우리는 사귀는 게 아니었어.’

윤채우의 말은 나에게 큰 충격을 주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사귀면 어떻고, 사귀지 않으면 어떻단 말인가?

도지완이 넘치는 성욕을 주체 못 해서 바깥을 나돌아 다니다가 마왕의 추종자에게 덜미라도 잡히게 되면 큰일이었다.

그러니 도지완이 원한다면 내 몸으로 만족시켜 주는 게 제일 베스트였다.

‘그리고 생각보다…… 괜찮았으니까.’

미지에 대한 두려움이 조금 있긴 했지만 기분 좋았던 것도 사실이었기에. 물론 다른 사람과 할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도지완이 다른 사람과 하는 것도 기분이 나쁘니 웬만해선 나만 이용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이런 걸 말했다가, 내가 너무 밝힌다고 생각하거나, 자신과 사귀길 원해서 이러는 거라 생각해서 기분 나빠하면 어쩌지.’

그러니까 도지완에게 말하진 못했다. 아무튼 그가 다른 놈이랑 할 기미가 보이면 내가 어떻게든 막아 낼 예정이었다.

천년만년 신지호로 살 것도 아니고, 내 목표는 도지완이 마왕이 되는 걸 막는 것뿐이니까 그냥 욕심내지 않기로 했다.

그냥 흔하게 사람들이 말하는 엔조이 관계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물론 그간 느꼈던 설렘도 사라져 더 이상 동요하지 않게 되었다. 도지완이 상냥하게 굴어도 소름은커녕 죄책감 때문에 저러나 보다, 하는 마음이 들었다.

* * *

퇴근하여 콩설이 코에 뽀뽀를 하고 있었는데 도지완이 또 소파와 내 사이를 비집고 들어 앉아서는 내 몸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면서 뭔가 테이블 위에 올려 두기에 힐끗 보니 다이아가 영롱하게 빛나는 반지가 크게 찍혀 있는 카탈로그였다.

“한번 봐 봐.”

나에게 보라고 하기에 나는 콩설이를 옆자리에 내려놓고 카탈로그를 손에 들었다. 그리 두껍지 않은 두께였지만 내용만큼은 번쩍번쩍했다.

알이 굵은 투명 보석부터, 색색의 화려한 유색 보석까지 여러 가지 디자인의 악세사리들이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맘에 드는 거 있어?”

도지완이 내 귓가에 속삭이며 귓불을 살짝 물었다. 나는 그제야 그가 이걸 왜 보여 주는지 눈치챘다.

‘미안해서 이러는 거구나.’

미안해서, 그 대가로 이런 물질적인 걸 안겨 주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이런 걸 모으는 성격도 아니었고, 딱히 관심도 없었다.

“글쎄요…….”

내가 관심 없다는 듯 대꾸하자 내 귓불을 만지던 도지완이 멈칫했다. 등 뒤에 있어 그가 무슨 얼굴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살피는지 숨이 차분했다.

“마음에 드는 게 없어?”

“뭐 그렇기도 한데……. 반지는 너무 거추장스러울 거 같아요.”

그 말에 내 귓불에서 도지완의 손가락이 떨어졌다. 그는 한참을 고민하는 듯하더니 다시 물었다.

“그럼…… 반지 말고 다른 건?”

“음…….”

“목걸이나 팔찌는 어때?”

“으음…… 그러니까, 그걸 매일같이 끼고 빼야 하는 게 거추장스럽다고 해야 하나…….”

내 대답에 도지완은 한숨을 쉬었다.

“안 빼면 되지.”

“그래도…… 그러다가 망가지면 어떡해요.”

“그럼 또 똑같은 거 사면 되지.”

뭐가 걱정이냐는 듯한 말투에 나는 조금 기분이 이상해졌다.

‘계속 사 주겠다는 건가?’

하지만 그런 걸 사 주지 않아도 나는 계속 도지완의 곁에 있을 건데? 나는 카탈로그를 내려놓았다.

“괜찮아요. 이런 거 없어도.”

미안해서 사 주는 거라면 필요 없었다. 나는 그냥 그의 가슴팍에 팍 기대앉으며 필요 없다는 걸 어필했다.

그런데 뭐가 마음에 들지 않은 건지 도지완은 내 턱을 붙잡아 올려 자신의 시선을 맞추게 했다.

“뭔데 그래?”

“예?”

“왜 기분이 상했어? 내가 뭐 잘못했어?”

그렇게 묻는 도지완은 미미하게 초조함이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자신이 무언가 실수를 해서 내가 기분이 상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도지완은 잘못한 게 없었고, 이건 내 마음가짐의 문제였기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무것도요.”

“그런데 왜……. 아니야. 네가 아니라면 아닌 거겠지.”

도지완은 따지려는 걸 그만두고선 붙잡았던 턱을 놓아주었다. 그러고는 내 어깨에 턱을 올린 채 중얼거렸다.

“어렵다. 정말…….”

그 목소리에 서운함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도지완이 어려운 건 나도 마찬가지였기에 나는 손을 뻗어 내 배를 껴안고 있는 도지완의 손 위에 내 손을 포갰다.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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