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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한 번 망했다-50화 (50/88)

50화

천계였다면 손끝에 가시만 박혀도 치유를 했겠지만 인간계에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어차피 천천히 나을 상처인데 괜히 신성력을 낭비했다가는 그걸 다시 채우기가 힘들었으니까.

다만 그 사실을 모르는 도지완이었기에 내가 아까워서 치유를 안 한다고 한다면 어떤 표정을 할지 훤했다.

‘미쳤냐고 생각할지도…….’

휴식하면 차오르는 체력처럼 이능력도 회복된다. 아까울 일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머뭇거리니까 도지완의 표정이 점차 어두워졌다.

“안 되겠다. 병원 가자.”

그러더니 나를 덜렁 드는 게 아닌가? 나는 그의 품 안에서 버둥거렸다.

“이 꼴을 하고 어딜 가요! 그리고 안 고친 건…… 그냥 귀찮아서라고요!”

그 말에 멈춰선 도지완이 이상한 표정을 했다. 자신이 들은 게 맞는가 하는 얼굴로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을 받기 어려워 고개를 돌렸다.

“그냥…… 놔두면 어차피 사라질 건데…….”

“……하.”

꿍얼꿍얼하며 말하자 기가 막힌다는 듯이 한숨을 토해 내는 그에게 나는 다시 외쳤다.

“그러니까 병원 안 갈 거라고요!”

무슨 멍 든 걸로 병원을 가나……. 도지완은 너무 과보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긴 그의 앞에서 두 번이나 피를 토했으니 나를 병약하게 보는 것도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병원은 가기 싫고, 그렇다고 스스로 고치는 것도 싫다 이거지.”

“…….”

“그래 그럼…… 맘대로 해. 나도 맘대로 할 거니까.”

그렇게 말하고 나를 내려놓은 도지완은 밖으로 나갔다. 내가 옷을 입기도 전에 나간 거라 쫓아갈 수도 없었다.

“이 사람이! 위험한 것도 모르고!”

그렇게 혼자 남은 집에서 성질을 내고 있었더니 한 20분 뒤쯤 도지완이 돌아왔다. 손에 마트 장바구니 같은 걸 들고선 말이다.

도지완은 얼쩡거리는 나를 끌고선 자신의 방으로 데리고 가더니 내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잠! 잠깐만요!”

왜 옷을 벗기는지 몰라 반항해 봤지만 도지완의 무력에 나는 풍선 인형처럼 흔들렸다. 손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상의가 벗겨지고 하의가 벗겨졌다.

팬티 바람이 된 내가 부끄러움에 몸을 웅크리자 도지완은 나를 침대에 밀어 눕혔다.

“왜, 왜 이러시는 거예요…….”

얼굴이 시뻘게져서는 물었지만 도지완은 대답이 없었다. 오돌오돌 떨고 있는 나를 바라보지도 않고 장바구니를 뒤져 무언가를 꺼냈다.

그런데 그게 침실에 어울리는 물건이 아니라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한우?”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멍 빼는 데는 소고기가 좋다더군.”

그러더니 안에서 얇게 썰린 고기 조각을 꺼내서는 내 몸 위에 찰싹 붙였다.

“아얏, 차가워!”

“투 플러스 등급이니 금방 빠지겠지?”

그는 진지한 얼굴로 그런 바보 같은 소리를 했다.

자기도 멋대로 할 테니 나보고 멋대로 하라고 한 것이 이런 이유였나 보다.

그 후로도 도지완은 찰싹찰싹 고기 조각을 내 몸 위에 붙였다. 빈틈없이 세심하게 붙이는 도지완의 표정만 봐선 고기 붙이기 무형 문화재 장인과도 같았다.

‘아까워…….’

비싼 한우를 먹지도 못하고 몸에 붙이고 있는 것도 아까웠지만 스멀스멀 올라오는 비린내에 아찔해졌다.

그러나 한마디 할라치면 눈을 부라리면서 “병원?” 하고 되묻는 도지완 때문에 항의도 할 수가 없었다.

“우욱…….”

그렇게 나는 생고기 조각을 얹은 채 도지완의 침대에 누워 있어야 했다. 소고기가 떨어져 이불을 더럽힐까 봐 움직이지도 못하고 말이다.

“왜 안 낫지?”

도지완은 한 번씩 고기 조각을 들춰 보면서 내 멍이 사라지지 않는 걸 의아해했다. 고기 조각을 얹어 놓으면 멍이 쑥 빠질 거라고 생각하기라도 한 건가.

미신이나 민간요법 같은 건 쳐다도 보지 않을 것처럼 생겨 놓고선 저리 어리숙하게 구는 모습이 이상하게도 웃기기보다는 귀엽게 느껴졌다.

“당연하죠. 소고기니까요. 전설의 영약 그런 게 아니라고요.”

이런 거 한번 안 해 봤냐고 놀리려다가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의 어렸을 적을 봤기에 도지완에게 이런 것을 해 준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혹시라도 내 말에 그가 상처받았을까 걱정했지만, 오히려 도지완은 내 말을 듣고 뭔가 생각난 듯했다.

“아, 그게 있었지.”

그러더니 곧바로 근처 서랍을 뒤져 병 하나를 꺼냈다.

“영약을 쓰면 될 것을 바보같이…….”

“으악! 됐거든요!”

영약을 가지고 다가오는 도지완을 보고 나는 파드득 몸을 떨며 일어났다.

미친 게 아닌가? 멍든 데에 무슨 영약이란 말인가? 내가 몸을 일으키자 붙어 있던 소고기들이 도지완의 침대 위로 떨어져내렸다. 그러자 도지완의 눈썹이 꿈틀했다.

장인 정신으로 붙여 놓은 소고기가 떨어져 기분이 나쁜 건지 혹은 소고기가 제 침대 위에 떨어져서 기분이 나쁜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다급하게 내 몸을 손으로 훑었다. 물론 그냥 훑은 게 아니고 신성력을 두르고 훑었기에 내 몸에 있던 멍들은 곧 사라졌다.

“이제 됐죠?”

아……. 내재되어 있던 신성력이 대폭 줄어들었다. 나는 아까움에 눈물이 다 날 것 같았다.

그럼에도 아쉬운지 도지완은 나에게 영약을 마시게 하려고 했지만 나는 펄쩍 뛰며 거듭 거절했다.

“아까운 짓 하지 마시라고요!”

내 몸에서 떨어진 한우만 해도 아까워 죽겠는데 비교도 할 수 없는 영약을 먹이려 하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이건 돈이 남아돈다고 해도 비상식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도지완은 진짜 고집이 셌다.

“내 물건을 내가 알아서 쓰겠다는데 뭐가 아깝다는 거지?”

“아니, 그러니까 그냥 길드장님 드시라고요!”

내가 먹는 것보다는 그게 나을 테니까. 하지만 도지완은 끈질겼다. 소소한 나의 반항 따위는 무시한 채 나를 붙잡았다.

“으그그그극……!”

커다란 손으로 내 양 뺨을 짓눌러 강제로 입을 열게 하려는 도지완의 얼굴에서는 진중함이 느껴졌다. 나를 괴롭히며 희열을 느끼려는 것은 아니었다.

붕어처럼 튀어나온 입을 필사적으로 다물고 있으니 도지완은 영약 병째로 주둥이에 밀어 넣으려는지 한 손으로 끼릭끼릭 병뚜껑을 열고 있었다.

“으븝브브……! 횽뉨!”

“……뭐?”

“횽늼……! 하지 마세요!”

마법의 단어라도 되는 건지 형님이라고 외치며 거부하자 손아귀 힘이 풀렸다. 덕분에 도지완에게서 두어 발자국 멀어진 내가 떨어져서 눈치를 보자 도지완은 멍하니 나를 바라보다가 인상을 썼다.

“너…… 내 말 잘 듣는다며.”

“그렇지만…… 영약은 진짜 너무 아까운걸요.”

멍은 이미 신성력으로 다 없애 놨으니 먹으면 피로 회복제 이상의 의미는 없을 테다. 그러니 무작정 먹는 것은 정말 아까운 짓이었다.

차라리 정말 아픈 사람에게 주면 모를까…… 지금의 내가 마셔 봤자 다음 날 화장실에서 이별하게 될 뿐이었다.

“그냥 마셔. 넌 너무 약해 빠졌어.”

“싫어! 싫어요, 형님!”

나를 붙잡으려는 도지완을 피해 외치자 그가 다시 멈칫했다.

“어차피 멍도 다 없어졌는데 이제 마셔 봤자 뭐 해요! 진짜 낭비예요. 형님!”

나는 몸을 내밀며 말했다. 아직 남아 있던 소고기 조각 한 점이 몸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 고기 조각을 따라 멍하니 내 몸을 훑어보던 도지완은 얼굴을 확 붉혔다. 그리고 손으로 이마를 짚더니 크게 외쳤다.

“알, 알았으니까. 옷 입어!”

“찝찝하게 이 위에다 옷을 입을 순…….”

“아, 그럼 씻고 입어!”

그러면서 나를 욕실로 밀었다. 내 방에도 욕실이 따로 있는데 굳이 자기 방에 있는 욕실로 말이다.

입술을 쭉 내밀고 이상한 사람이라고 흉을 본 나는 입고 있던 팬티를 벗고 박박 씻었다. 도지완이 말 안 해도 피비린내가 나서 빨리 씻고 싶던 차였다.

다 씻고 보니 입고 나갈 옷이 없어 도지완의 샤워 가운을 빌렸다. 내가 두 명은 더 들어갈 수 있을 법한 크기라 입었다기보다는 둘렀다는 느낌이 더 컸다.

욕실 밖으로 나가니 소고기투성이었던 방은 어느새 정리되어 있었다. 비린내도 더 이상 나지 않았다.

품이 큰 탓에 크게 움직이면 흘러내릴까 봐 종종걸음으로 거실로 나가자 도지완은 소파에 앉아 있다가 나오는 나를 보고 일어났다.

그러더니 내가 걸치고 있는 제 샤워 가운을 보고 턱을 매만졌다. 기분이 나빠 보이진 않았지만 그의 의사를 물어보지도 않고 멋대로 쓴 건 맞아서 사과부터 했다.

“죄송해요. 옷이 없어서요…….”

“……괜찮아. 쓰라고 있는 건데, 뭘.”

묘하게 만족감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옷을 입기 위해 방으로 가야 하나 고민하다가, 도지완이 할 말이 있어 보이는 것 같아서 먼저 그에게 다가갔다.

그게 맞았는지 다가온 나를 내려다보던 도지완이 말했다.

“신지호.”

“네.”

“나를 돕기 위해 그랬다는 거 알아. 하지만 나한테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같은 행동은 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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