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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한 번 망했다-32화 (32/88)

32화

시간이 되어 파티의 주최자이자 생일의 주인공인 도문그룹 회장이 나타났다. 연예인이 나타난 것처럼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완은 조금 떨어져서 지켜봤다. 회장에게 잘 보일 필요가 있는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그의 눈에 들길 바라며 저곳에 가 있었지만 그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의 힘은 그룹에서 나오는 게 아닌 길드 그 자체였고, 그룹과 자신의 사이가 멀어지면 아쉬운 건 도문그룹이었으니까.

다가오지 않는 지호 때문에 다른 웨이터가 들고 있던 쟁반에서 술잔을 집어 든 지완은 사람들이 어느 정도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저 도떼기시장 안으로 들어가 봤자 회장과 같이 피곤해질 테니 말이다.

“지루하신가 봐요?”

그때 그에게 누가 말을 걸었다. 힐끗 고개를 돌려 상대를 확인한 지완은 다시 가면을 뒤집어썼다. 말을 건 상대가 다름 아닌 아까 소개받았던 채은이었다.

“하하, 설마요.”

“흐음, 내 눈엔 그렇게 보였는데…… 아닌가?”

은근히 말을 놓으며 눈웃음치는 모습에서 유혹이 넘쳐흘렀다. 이런 수작은 많이 겪어 봤기에 지완은 속으로 혀를 찼다.

꺼지라고 하려던 그는 살짝 놀랐다. 채은 때문이 아니고 지호 때문이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시선 하나 주지 않던 그가 채은이 옆에 있으니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 봐라?’

지완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내리누르며 지호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지호가 있는 방향의 한쪽 뺨이 간질간질했다.

질투하는 건가? 방금까지만 해도 채은은 귀찮은 수작질을 하려는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아니었다. 지호의 질투를 이끌어 낼 수 있으면 이 정도 번거로움은 별거 아니었다.

“글쎄…… 아마, 가끔은?”

지완이 제 말에 대답하자 채은은 입술을 끌어 당겨 웃었다. 빨간 입술을 매만지던 그녀는 손가락으로 살짝 지완의 소매를 붙잡았다.

“우리…….”

“저, 저기요!”

채은이 은근하게 유혹하려고 할 때 지완과 그녀의 사이로 지호가 불쑥 끼어들었다.

난데없이 방해받은 채은의 얼굴이 일그러지자, 지호가 말했다.

“회, 회장님이 부르시는데요!”

그러고선 눈을 부라리며 지완을 노려봤다. 지호의 얼굴을 보던 지완이 시선을 돌려 회장을 바라봤지만 그는 다른 사람이랑 대화하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이것이 지호의 거짓말이란 걸 바로 눈치챘으나 그가 난처해지는 걸 원하지 않았기에 지완은 그에게 달라붙는 채은에게서 살짝 떨어졌다.

“회장님께서 부르신다니, 가 봐야 할 것 같군요.”

“아, 저…….”

채은이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지완은 그녀의 말을 듣지 않고 몸을 돌렸다.

회장에게 다가가는 지완의 뒤를 지호가 쫓았다.

“저기요오…….”

“…….”

“……길드장님?”

뒤에서 부르는 지호의 목소리에 반응하지 않자 지호는 끙끙거리며 계속해서 지완을 불렀다.

“……도지완 씨? ……도련님?”

“내가 왜 도련님이지?”

“글, 글쎄요?”

어이없어 물었더니 자기도 이유를 모르는지 지호는 눈알만 떼굴떼굴 굴렸다. 그렇게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다시 지완에게 말을 걸었다.

“저 사람이랑…… 친해요?”

“누구? 민채은?”

“이름은 모르겠고…… 아까 그 여자요.”

“글쎄……. 많이 친하지.”

전혀 친하지 않았고 오늘 처음 본 상대였지만 지완은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그에 지호가 깜짝 놀라더니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끙끙거렸다.

“……친하게 지내지 않으면 안 돼요?”

지완은 지호의 말에 웃음이 터질 뻔했다. 갑자기 이렇게 귀엽게 굴다니? 항상 지호의 곁에 있는 사람들을 질투하던 지완이 반대의 상황을 겪게 되자 즐거워 미칠 것 같았다.

웃음기에 떨리는 목소리를 내리깔면서 지완이 물었다.

“내가 왜? 왜 민채은이랑 친하면 안 되지?”

“그……건…….”

우물쭈물하던 지호는 그냥, 이라고 말하며 말을 길게 끌었다.

“그냥…… 좀 이상한 사람 같아요.”

그렇게 말하고선 자신도 이상했는지 입을 꾹 다물어 버리는 지호를 보며 지완은 입술을 깨물었다.

대답이 없는 그에게 재차 민채은과 친하게 지내지 말라며 지호가 징징거렸지만 지완은 여전히 침묵하며 회장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어느 정도 가까워졌을 때 그의 접근을 눈치챈 회장이 고개를 돌리고선 그를 바라보았다.

“오, 지완이 아니냐.”

“생신 축하드립니다. 회장님.”

말하며 고개를 꾸벅 숙이는 그를 보며 회장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지완을 따라 졸졸 쫓아가던 지호는 눈치를 보다가 슬쩍 어디론가로 사라져 버렸다.

지완의 등장에 즐거워하는 회장과 다르게 그의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지완을 어렵게 생각했다.

그야 그럴 것이 흠집 나고 더러워져 자신들의 상대가 안 될 거라고 생각하던 것이 스스로 제 몸을 깎아 빛을 내기 시작한 이후로 그의 광채에 그들이 묻혀 버렸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거기다 할아버지, 아버지라고 부르며 최대한 친근한 척하던 자신들과 다르게 사무적으로 회장님이라고 부르는 게 고까웠다. 그 때문에 친척들의 눈초리가 나빠지는 가운데 회장은 지완을 붙잡아선 제 곁으로 당겼다.

“그래, 바쁜데 여기까지 와 줘서 고맙구나.”

“아닙니다.”

겉치레로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알아챈 건지 친척들의 눈이 더욱더 날카로워졌다.

어떻게든 지완에게 향한 회장의 시선을 돌리고 싶었는지 모두가 입을 열어 자기 자랑을 늘어놓았다. 회장도 눈치가 없는 게 아닌지라 그들의 자랑을 허허거리면서 하나하나 들어주었다.

“아버지! 저희 집에 경사가 생겼습니다.”

“으응? 무어냐?”

“곧 아버지께선 첫 증손주를 보시게 될 겁니다.”

그렇게 말하며 며느리의 등을 미는 사람도 있었다. 며느리는 시선이 몰리는 게 부끄러운지 살짝 손으로 볼을 가렸다.

그녀는 지완의 사촌 중 가장 먼저 결혼한 사람의 아내였다. 아직 다들 젊어서 약혼만 올리거나 막 결혼한 상태였다.

증손주란 말에 회장의 얼굴이 밝아졌다.

“손주! 안에 도씨 집안 사람이 있다는 게냐?”

아직은 납작한 배에 회장이 눈길을 주자 며느리는 수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옛날 사람답게 아이란 말에 좋아하는 회장이 뭐가 가지고 싶냐며 며느리에게 묻자 그녀의 시아버지 되는 친척은 의기양양해졌다.

지완에게서 회장의 시선을 빼앗아 온 게 아주 기분이 좋은 듯했다. 그러나 그 얼굴은 얼마 가지 못했다. 회장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지완에게 다시 시선을 주었던 것이다.

“참, 그러고 보니 지완이는 아직 약혼자도 없지?”

회장의 관심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자 친척들의 얼굴이 굳었다. 그들의 약혼에는 한 번도 참견하거나 관심을 두지 않았던 회장이 지완에게 관심을 가지자 그들의 질투심이 불타올랐다.

그들의 반응이 그리 좋지 않은 것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회장은 계속해서 지완에게 말을 했다.

“그래, 아직 짝이 없는 아가씨가 있던가?”

있다면 바로 중매라도 서 줄 것같이 굴기에 모두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지완을 노려봤다.

‘성격 나쁜 노인네 같으니.’

이러다간 친척들의 눈빛에 찔려 죽게 될 것 같으니 노인네의 장난은 이쯤에서 멈추는 게 좋았다.

“괜찮습니다. 회장님. 저는 아직……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

“허어, 결혼은 나중에 하더라도 약혼은 해 두면 좋지.”

하지만 회장은 끈질겼다. 지완은 헛웃음을 참고 말했다.

“아닙니다. 저도 사업하는 사람이니 비싸게 팔 수 있는 건 비싸게 팔아야죠.”

“으응?”

“제가 제일 비싸게 팔 수 있는 것은 저 자신이니까요.”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아는지 회장은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약혼에 급급해서 저를 싸게 팔아넘기느니, 가장 훌륭하고 비싼 조건을 들고 오는 사람에게 저를 파는 것이 더 낫습니다. 저는 아직 젊은 데다 헌터라 기대 수명도 일반인보다 기니까요.”

“하하! 그렇지! 헐값에 파는 것보다는 가장 비싸게 팔 수 있을 때 파는 게 좋지! 네가 참 영리하구나.”

회장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더 이상 약혼에 대해 말이 나올 것 같지 않자 지완은 안도했다.

그리고 지완을 견제하기 위해 다른 이들이 회장에게 이것저것 말을 하는 틈에 지완은 몰래 그 틈을 빠져나왔다.

‘이 정도 얼굴을 비쳤으면 된 거겠지.’

오래 있을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눈도장만 제대로 찍는 게 목표였으니 방금 그것으로 달성이었다.

그럼에도 지완은 파티장을 떠날 수가 없었다.

‘바보 같은 신지호.’

그냥 집에서 얌전히 기다렸으면 되었을 것을. 파티장에 스태프로 묶여 있는 지호 때문에 지완은 가기가 어려웠다.

‘그냥 데리고 나가 버릴까?’

그런 생각을 하며 지호를 바라보자 멀뚱히 서 있던 지호가 자신이 사람들 틈에서 나온 걸 보고 다가오려고 하는 게 보였다.

그런데 하필 또 누군가가 지호를 붙잡았다. 다가오던 지호가 그와 무어라 이야기를 나누더니 지완에게 오는 걸 포기하고 그의 뒤를 따르는 걸 보며 지완은 헛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더럽게 일을 열심히 하는군.’

못마땅함에 혀를 차고 있을 때, 다시 지완에게 접근한 사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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