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왜 그러시죠? 무슨 일이 있나요?”
“……아닙니다. 아는 사람을 본 거 같아서요.”
지완은 그가 다시 보이지 않자 자신이 잘못 본 거라고 생각하고 넘기려고 했다. 다시금 광산을 주제로 이야기가 흘러가던 중이었다.
“도 길드장도 나이가 나이인데…… 약혼이 아직이죠?”
“이런, 정말인가요? 웬만해서는 20살 전후로 약혼하는 게 대부분인데…….”
지완은 속으로 픽 웃었다. 정상적인 재벌가의 사람이라면 그랬다. 하지만 그는 고등학교 때쯤 출생의 비밀이 밝혀졌고 서자라는 큰 단점이 있었기에 그에게 약혼을 제안한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물론 도문 길드가 크게 성장하고 나서는 약혼을 제안하는 곳이 몇 군데 있긴 했지만 마음 끌리는 곳은 없었다.
좋은 조건을 가진 약혼 상대 대부분은 이미 제 친척들과 약혼한 지 오래였으니 말이다.
그들도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 이 주제를 언급하는 이유는 지완을 놀리기 위해서는 아니었고 이어질 말을 위해서였다.
“아이고, 남자라면 든든하게 받쳐 주는 가정을 가져야 사업도 잘하는 법인데…….”
“우리 조카가 버클리 음대 다니고 있는데, 아주 참하거든요. 어때요? 생각 있어요?”
“아니, 이 사람이? 도 길드장! 우리 막내 처제도 헌터거든. 등급은 그리 높지 않지만 헌터 쪽 일은 빠삭한데, 말이 잘 통하는 아내가 낫지 않겠어요?”
서로 지완에게 사람을 소개시켜 주기 위해 떠드느라 주위가 금세 어수선해졌다. 다들 목소리를 높였지만 정작 당사자는 생각이 없었다.
혼자서 도문 길드를 이렇게 키워 온 그였으니, 다른 이의 서포트는 필요 없었다.
특히나 모든 걸 온전하게 자신이 쥐고 싶어 하는 지완의 성격 특성상, 제 일에 간섭할 여지가 있는 사람은 더더욱 싫었다.
그러나 지완은 하수가 아니기에 그런 마음은 꼭꼭 숨기고 거절의 의사를 내비쳤다.
“아직은 길드를 더 키울 때라 결혼 생각이 없습니다.”
“하지만…….”
지완이 그렇게 나오자 더 제안하기도 어려웠다. 결국 다들 아쉬운 얼굴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집요한 사람은 어디에나 있었다. 그때였다.
“도지완! 오랜만이야.”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상대는 지완과 같은 고등학교, 그리고 같은 대학을 나온 남자였다. 그는 특출난 능력은 없었지만 집안이 괜찮았다.
그리 까다로운 성미도 아니라 알아 두면 좋을 것 같아서 꼬박꼬박 선배 대접을 해 주었더니 그에 만족하며 가끔 아는 척하는 사이가 되었다.
아무튼 집안 덕분에 초대받았는지 그가 다가와서는 사람들에게 맞춰 주고 있었던 지완을 꺼내 주었다.
“에휴, 노인네들. 말만 많아 가지고. 귀찮지 않냐?”
투덜거리는 상대에게 지완은 애매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혹시라도 긍정했다가는 뒷말이 나돌 수 있으니 애매하게 군 것이지만 상대는 지완이 자신의 말에 동의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오랜만에 봤는데 너는 정말 변한 게 없구나. 더 잘생겨진 거 같기도 하고…….”
“아닙니다.”
“햐, 내가 너만큼 생겼어 봐라. 만나 달라는 여자들 줄이 한강만큼 길 텐데 말이야.”
“하하…….”
그렇게 쓸데없는 농담을 하다가 남자가 바투 붙어 오며 목소리를 낮췄다.
“야, 근데 진짜…… 너 만나는 사람 없어?”
신기한 거 다 보겠다는 눈으로 지완을 위아래로 훑던 남자의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그럼 내가 누구 소개 좀 시켜 줄까?”
“소개요?”
“그래, 소개. 내가 아는 후배가 있거든.”
“아니, 괜찮…….”
“아이, 사귀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소개만 하겠다는 건데, 걔도 우리 학교 나왔거든. 동문끼리 잘 지내면 좋잖아? 이리 와 봐.”
그렇게 반쯤 강제로 끌려간 곳에는 단발머리를 한 이지적으로 생긴 미인이 있었다.
“채은아! 여기야!”
“어머, 선배…….”
채은이라 불린 여자는 살짝 놀라더니 남자의 곁에 있는 지완을 보고 살짝 웃어 보였다. 약간의 난감함이 섞인 미소는 마치 이 일이 자신의 뜻이 아니라는 것 같았다. 지완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조금만 상대하고 가야겠군.’
핑계 댈 거리는 많았으니까. 지완이 그렇게 생각하고 체념하자 남자의 소개가 계속되었다.
“여기는 알지? 그 유명한 도문 길드의 도지완 길드장. 그리고 여긴 민채은. 우리 학교 신문방송과 출신이고, 아나운서야.”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지완이 마주 인사를 하자 여자가 작게 미소를 지었다.
“막상 학교 다닐 때는 한 번도 이야기를 나눠 본 적이 없는데 졸업하고 한참 지나서 이야기해 보네요.”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남자도 반강제로 끌고 온 것치고는 소개만 하고 끝이었고, 여자도 질척이지 않았으니까.
정말로 인맥을 위해 소개한 건가 생각하며 대화를 나누던 지완의 눈에 또다시 보여선 안 될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그래서 그때 말이지.”
“……죄송합니다. 잠시 일이 생겨서.”
“어? 야, 어딜 가?”
대화 중에 빠져나오는 무례를 저지르며 지완이 향한 곳은 파티장의 한구석이었다. 낯익은 갈색 머리통을 한 사람이 쟁반을 들고는 술을 나눠 주거나 빈 잔을 돌려받는 것을 보면서 그는 천천히 뒤를 따랐다.
쟁반 위의 술들이 전부 떨어지자 상대는 구석에 있는 스태프 전용 룸으로 향했다. 그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지완도 재빨리 뒤를 쫓아 그 안으로 들어갔다.
“신지호.”
“힉!”
지완이 말을 걸자 상대가 깜짝 놀라며 쟁반을 던졌다. 지완이 뛰어난 반응 속도로 그것을 잡아채자 눈을 둥그렇게 뜬 상대가 보였다. 지완이 본 대로 상대는 지호였다.
“어, 어떻게……?”
어떻게 알고 쫓아왔냐인지, 아니면 어떻게 쟁반을 받아 냈냐 묻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너야말로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저, 저는…… 알반데요?”
“……알바?”
지완의 눈에 의심이 서렸다. 낮만 하더라도 이 행사의 존재를 모르던 지호가 아르바이트를 하러 왔다고? 지완이 의심했지만 지호는 되레 태도가 당당해졌다.
“예! 알바예요! 그러니까 이러고 있죠!”
“……흠.”
진짜일까? 다시금 피어오른 의심과 지호를 믿고 싶은 마음이 반반이었다.
‘얘는 나를 좋아하잖아.’
그러니까 지완의 일거수일투족을 알고 싶어 하고, 그가 누구를 만나는지 궁금해 감시까지 하고 있으니 이곳에 아르바이트를 하러 온 건 대충 아귀가 맞았다.
다만 이런 아르바이트 자리는 당일 몇 시간 만에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보안을 위한 신상 조사 때문에 며칠 전에 사람을 구해 놓으니까.’
행사를 전혀 모르던 지호였으니…… 설마 누가 그를 이 자리에 들어올 수 있도록 손을 쓴 것일까?
‘그냥 아까 차 안에서 자료를 확인해 볼걸.’
그는 모래처럼 마음 한편에서 까끌거리는 의심이 완벽하게 제거가 되어야 지호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건 그렇고 이곳엔 지완의 적이 많았다. 지호를 그냥 놔두기엔 걱정이 되고, 그렇다고 종일 곁에 두고 보자니 지완의 적들이 지호에게 관심을 가질까 걱정되었다.
그래서 일단 지호를 데리고 이 자리를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의 팔을 붙잡았다. 그 순간이었다.
“너 거기서 뭐 해?”
지호와 같은 웨이터 복을 입은 남자가 지호를 보고 물었다. 살짝 꺾인 통로 탓에 남자는 지완을 보지 못했다.
지완이 말을 하려는 순간 지호가 더 빠르게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싱겁긴…… 빨리 와! 할 일 많아!”
“네!”
지호는 살았다는 얼굴을 한 채 자신을 붙잡은 지완의 팔을 뿌리쳤다. 지완이 그를 부르려고 하자 지호는 양손 검지를 번갈아 입에 가져다 대었다.
조용히 하라는 소리였다. 그러고선 얄밉게 쏙 사라져 버리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지완은 허탈하게 웃었다.
‘대체 뭘 하러 온 거야.’
계속 여기 있을 순 없었기에 지완은 일단 다시 리셉션홀로 돌아갔다.
돌아가자 그를 본 사람들이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그들의 말을 받아 주며 힐끗힐끗 지호가 어디 있는지 살피던 지완은 조금 황당했다.
‘나를 감시하러 온 게 아니고 진짜 알바 하러 온 건가?’
지호는 정말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 얼마나 열심히 하고 있는지, 한 번쯤 눈이 마주칠 법한데 한 번도 그의 고개가 이쪽으로 돌아오는 일이 없었다.
감시한다고 해 놓고 그를 신경 쓰지 않는 것도 황당했지만 성격이 좋아서 그런가, 지호는 오늘 처음 아르바이트를 하는 게 분명해 보이는 데도 스태프들과 아주 친해 보였다.
짧은 대화를 나누며 웃음 짓는 모습도 간간이 보였는데, 특히 아까 지호가 자신을 버리고 쪼르르 도망갔던 상대와 귓속말을 할 때는 주먹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지완은 가까스로 포커페이스를 유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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