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무슨 수작질인가 의심하면서 다가간 나는 체크 카드를 내밀었다.
당연히 돈 받으러 온 줄 알았는데 사채업자는 우습게도 내가 내민 체크 카드를 보고 펄쩍 뛰었다.
“아, 아니! 돈은 입금받기로 했잖아.”
그렇게 하기로 했지만 변덕을 부려 현금을 받으러 온 건가 했는데 아닌 듯했다. 그런데 돈 받으러 오는 걸 제외하면 그가 날 찾아올 이유가 없었기에 대체 뭐 때문에 왔는지 아리송했다.
내가 물끄러미 바라보자 사채업자는 작게 욕설을 뱉으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말을 꺼내기가 어려운 듯싶었다.
“하…… 씨…….”
“…….”
“야.”
“네.”
“너 나 때리고 싶냐?”
“예?”
이상한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갑자기 때리고 싶냐고 사채업자가 물은 것 같았는데……? 그런데 내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나 때리고 싶냐고.”
“아니요? 제가 왜요?”
사채업자가 싫은 건 맞지만 때리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사채업자는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답답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야, 내가 너 저번에 뺨을 쳤잖아.”
“그렇죠?”
“그런데도 나 때리고 싶지 않아?”
“그런데요?”
그건 이미 지나간 일이니까. 나는 그날의 일을 다 잊었고, 내가 뺨 맞았다고 돌려줄 이유는 없었다.
천사였던 내가 인간이 되었다지만 그런 자그마한 원한을 두고두고 담고 있을 이유도 없었다.
그런데 내 대답을 들은 그의 얼굴이 답답하다는 듯이 일그러졌다.
“하…… 넌 화도 안 나냐?”
“뭐…… 화는 나죠?”
“근데 왜 나를 안 때리고 싶은데? 왜? 열받지 않아? 복수하고 싶지 않아?”
“뭐, 이미 지난 일이고요. 그리고 제가 때린다고 하면 가만히 있을 거예요?”
내가 때리면 때리는 대로 보복이 들어올 텐데 괜히 일을 벌일 생각은 없었다. 그냥 피차 서로 할 일을 하고 더 이상 엮이지 않는 게 나에게 더 이득이었으니까.
그런데 사채업자가 이상한 소리를 했다.
“가만히 있겠다면…… 때릴 거야?”
“예?”
“그냥 가만히 서서 네가 때리는 대로 맞아 주겠다고. 아, 맞고서 보복도 안 할 거야.”
이 사람이 미쳤나? 왜 갑자기 맞지 못해 안달이 난 건가 싶어 내가 의문 품은 눈으로 바라보자 괜히 성질만 부렸다.
“야! 너는 사내새끼가 밸도 없냐!”
“…….”
“아! 몰라! 나는 기회 줬다? 나중에 가서 딴말하면 죽을 줄 알아!”
“……저기요!”
씩씩거리며 돌아가려는 사채업자를 잡으니 그의 얼굴에 화사한 미소가 담겼다. 그런데 입에서 나오는 말은 전혀 화사하지 않았다.
“왜? 마음 바뀌었어? 때리고 싶어?”
“아뇨……. 안 때릴 건데요…….”
“에이 씨! 그럼 왜 불렀는데!”
“대체 왜 이러는 건지 궁금해서요.”
나는 그가 이러는 이유가 궁금했다. 그러나 사채업자는 입을 꾹 닫고 답을 해 주지 않았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떠 그를 바라보았다. 혹시…… 이게 마왕 숭배자들이 깔아 놓은 덫은 아닐까?
‘그래, 맞아……. 보복은 하지 않겠다 했지만 신고하지 않겠다는 말을 하진 않았어.’
헌터가 폭력 범죄를 저지르면 죄가 무기를 든 수준으로 가중된다. 왜냐하면 헌터는 급이 낮아도 힘이 세니까.
일반인은 무기를 들어도 맨손의 헌터를 웬만해선 이기기 힘들었다.
‘내가 천사란 걸 알아챈 거구나. 그래서 나를 도지완에게서 떼어 놓기 위해 이러는 거야…….’
어떻게 나를 찾아낸 건지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면 사채업자의 태도는 말이 되지 않았다. 폭력 사건을 일으켜 감방에 가게 되면 당연히 자연스럽게 도지완에게서 멀어질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러면 임무는 그대로 실패였다. 세상은 또다시 멸망의 길로 접어들 수밖에 없었다.
‘나 외에 다른 천사들이 인간계로 내려올 리가 없으니까.’
이건 기회일지도 몰라. 나는 눈을 빛냈다.
사채업자를 통해 마왕 숭배자들의 꼬리를 잡게 될지도 몰랐다.
‘전생에서는 마왕 숭배자들이 워낙 자기 정체를 꽁꽁 숨겨 둔 채로 활동해서 그들이 누군지 알 수 없었는데, 차라리 잘됐어.’
꼬리부터 머리까지 천천히 파괴해 줘야겠다 생각하며 나는 사채업자가 도망치지 못하게 그의 팔을 붙잡았다.
“당신에게 명령한 사람이 누군가요?”
“뭐, 뭐라는 거야? 명령한 사람 따윈 없어!”
“명령을 받은 것도 아닌데 저에게 맞고 싶다고 찾아왔다고요?”
“그래! 생각해 보니 너무 미안해서 마음의 짐을 덜고 싶어 그랬다!”
사채업자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며 대답을 회피했다. 역시 말로는 통하지 않았다.
나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면서 천천히 신성력을 깨웠다.
「말하라. 그대 뒤에 있는 자가 누구인가.」
내 목소리에 신성력이 담겼다. 강제로 진실을 끌어내는 언령이 발동되자 사채업자가 움찔 떨었다.
말을 하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절로 열리는 입에 당황한 눈치였다.
“내, 내 뒤에 있는 사람은…… 도지완…… 아앗! 아니……지 않아! 도지완이 맞아!”
“……도지완?”
“아니……인 게 아니야! 그래, 도지완이라니까? 으악! 내 입이 왜 이래!”
거짓말을 하려고 하지만 그런 순간마다 진실이 입에서 튀어나오자 사채업자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도지완……? 그 사람이 왜?”
“…….”
「도지완이 왜 내가 당신의 뺨을 때리길 원하는 거지?」
“에이 씨! 그건 나도 몰라! 그냥 네가 한 대 때리고 싶어 하면 맞아 주라고 했단 말이야!”
언령을 썼음에도 대답이 저런 것을 보면 모른다는 말은 진실인 듯했다.
내가 그간의 사정을 묻자 사채업자는 반쯤 포기한 듯했다. 자기가 대답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내가 또 언령을 써서 강제로 진실을 뽑아낼까 봐 두려워하는 듯했다.
“며칠 전에 그분 앞에 불려 갔는데……. 너를 도와주고 싶은지 네 채무를 전부 사 갔다.”
“…….”
“아무래도 너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은지 수금은 여전히 내가 맡게 되었지만 말이야.”
뺨을 맞으러 온 것은 다른 계략이 있어서가 아니고 충성심을 어필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내가 이렇게 당신의 말을 잘 듣는다는 식으로 말이다.
나는 머리가 어지러워 정신이 없었다.
‘도지완이? 왜……? 왜 내 빚을?’
나야 신지호의 몸을 빌리게 되었으니 그의 채무를 책임질 이유가 있었다. 그런데 신지호와 완전한 타인인 도지완이 왜 내 채무를 샀다는 걸까?
가슴이 이상하게 술렁거렸다.
멍해진 내 손이 스르르 벌어지자 잡혀 있던 사채업자가 빠르게 손아귀에서 빠져나갔다.
“야! 내가 오늘 말한 거 절대로 그분한테 말하면 안 된다?”
다 불고 나서 부끄러웠는지 벌겋게 익은 얼굴이 된 사채업자가 거듭 당부하고는 자리를 떴다.
사채업자가 사라지고 난 후에도 나는 어지러운 머리와 마음 때문에 한동안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 * *
결국 머리가 복잡한 채로 시간만 흘러 다시 던전 공략에 들어갈 차례가 되었다.
회사 차를 타고 던전으로 가니 첫날에는 빨리 왔던 길드원들이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것이 평소와 같아졌다.
시간이 지나며 점점 길드원이 나타났고 입장 바로 직전에야 도지완이 나타났다.
그를 보자 갑자기 마음과는 달리 몸이 굳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말을 건네려고 했지만 도지완은 평소처럼 무심하게 내 앞을 쓱 지나갈 뿐이었다.
‘어?’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완전히 예전으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여태까지 친근하게 굴었던 것이 꿈이었다는 듯이 말이다.
그래도 어떻게든 말 붙일 수 있는 타이밍은 찾아왔다.
오늘 치의 공략이 끝나 베이스캠프로 길드원들이 돌아오자마자 나는 물주머니를 들고 간이 샤워장으로 향했다.
평소에 하던 일인데도 먼저 들어가 있던 도지완을 보자 갑자기 심장이 두방망이질 쳤다. 예전처럼 나를 보고도 아무 말 하지 않는 그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나는 물주머니를 들고 발판 위로 올라가 자리를 잡았다.
한동안 우리 둘 사이에는 그저 물 흐르는 소리만 들렸다. 도지완은 나에게 할 말이 없어 보였고, 나는 언제 말을 걸어야 하나, 어떤 말을 물어야 하나 고민하느라 바빴다.
그러는 사이 시간이 흘렀고 결국 샤워가 거의 마무리될 때쯤에야 안달이 난 내가 물었다.
“저에게…… 화나셨어요?”
내 말에 눈을 내리깔고 있던 도지완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물에 젖어 더욱 짙어진 속눈썹에 물방울이 방울방울 맺혀 있는 것이 보였다.
홀린 듯이 그 눈을 바라보고 있는데 도지완의 입이 열렸다.
“아닙니다.”
그의 말대로 도지완은 화나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 이 거리감은 무엇인가 싶어 초조함을 느낄 때 나는 깨달았다. 도지완이 나에게 존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가 그어 둔 선을 넘어갔다 생각했는데, 다시 그어지는 선에 나는 당황을 감출 수 없었다.
‘왜…… 왜 또 이렇게 된 거지?’
감정을 배워 나가는 나에게 도지완은 너무 어려운 상대였다. 겨우 틈을 만들어 비집고 들어갔는데, 알고 보니 안으로 들어간 게 아니라 다시 바깥으로 나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의 철벽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사이 샤워를 끝낸 도지완이 가운을 입고 나가려고 하는 것이 보였다. 이대로 그를 내보내면 안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나를 움직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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