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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한 번 망했다-20화 (20/88)

20화

지완은 조금 뒤틀린 성장 배경을 가지고 있어 누군가를 자신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을 어려워했다.

다만 세상은 자본이 지배하고 있기에 그에게 풍족한 돈으로 사람들을 회유하여 제 곁에 두었다. 어찌 보면 물건을 사듯이 말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 방법은 효과적이고 편했다. 마음 줄 것 없이 돈만으로 관계가 유지되니까. 배신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지완이 상대에게 마음을 주지 않았으니 배신은 배신이 아니었고, 자본에 휘둘리는 배신자 후보생은 더 큰 자본으로 묶어 두면 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방법을 신지호에게 쓸 순 없지.’

지완이 봤을 때 지호는 정말 특이한 인간이었다. 입으로는 돈이 필요하다고 말하면서도 행동을 보면 크게 구애받지 않았다.

그가 정말 곤궁한 처지인 것을 뒷조사로 알아내지 못했다면 지완은 지호가 자신에게 접근하기 위해 돈이라는 변명을 썼으리라 의심했을 터였다.

하지만 지호에게는 대물림된 빚이 있었고, 하필이면 그것도 사채였다. 돈이 필요한 건 정말 사실이었다.

그런데 의아한 것은 왜 지호가 그런 능력을 가지고도 어시 생활을 하느냐는 것이었다.

‘그전에 그 정도 회복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D급이 맞는 건가?’

거의 1세대 헌터나 다름없는 지완이 보기에도 지호의 힐러로서의 능력은 굉장했다. 지완의 공대 힐러보다 더 능력이 뛰어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힐러의 다른 이명이 여분의 목숨일 만큼 던전의 꽃이나 다름없었다. 어시스트 일을 하느니 힐러로 일하는 것이 돈을 더 벌 수 있을 텐데…….

‘싸우는 게 무섭다고 해도 힐러는 거의 후방에 있으니 전투에 참여할 일이 없지.’

그러니까 굳이 어려운 길을 가는 지호가 이해될 리 만무했다. 그러나 지호의 행동 덕분에 그를 만나게 된 건 의도치 않은 행운이라 볼 수 있었다.

지호에게 미안하지만 지완은 그에게 이런 걸 스스로 알려 줄 생각은 없었다. 누구 좋으라고 말인가?

힐러를 하면 돈을 더 벌 수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지호는 힐러가 되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이미 공대에 힐러가 존재하고 오랫동안 함께해 손발이 맞는데 지호로 교체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호가 공대의 힐러가 되면 자신 말고 다른 사람들을 힐해 줘야 하는 것이 굉장히 싫었다.

지호가 오직 자신만을 치유해 줬으면 좋겠다고 지완은 생각했으니까.

‘아…….’

그래서 그런지 지완은 가끔, 아니 자주 꿈속에서의 생활을 떠올렸다.

지금 와서는 그게 자신을 먹어 치우려던 함정인 걸 알지만 그래도 그때만큼 마음이 부풀어 생활한 적은 없었으니까.

완벽한 내 편. 꿈으로써 제 모든 것이 지호에게 까발려진 것은 조금 수치스럽긴 했지만 그건 큰 문제가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신지호를 내 곁에 둘 수 있지?’

지완의 스페이스엔 지호 한 명뿐인데 지호의 스페이스엔 지완 말고도 여럿이 존재했다. 그중에서 가장 거슬리는 것은 정호였다. 신 씨가 아닌 이 씨면서도 지호가 가족처럼 대하는 것이 가장 마음에 걸렸다.

“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지호에 관한 생각에 지완은 한숨을 쉬었다.

돈으로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은 지완에게 가장 어려웠고, 그래서 꺼려질 수밖에 없었다. 지완은 주위를 통제하고 싶었고, 그가 쓸 수 있는 강력한 무기는 돈이었다.

무력도 있었지만 무력은 쓰는 순간 감정이 상한다. 강제로 몸을 곁에 묶어 둔다 해도 감정이 상해 버리면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리고 그런 지완의 숨통을 그나마 틔워 주는 것은 지호의 빚이었다. 정말 그것마저 없었으면 지호가 지완의 곁에 있을 이유가 아무것도 없으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그런 일도 있었지.”

지호의 사채 빚을 생각하다 보니 전에 지호가 뺨이 시퍼렇게 멍들어서 왔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는 별생각이 없었는데 나중에 알아본바, 사채업자가 지호를 협박하면서 생긴 일이란 걸 알게 되었다.

지나간 일이지만 이제 제 영역 안에 들어온 사람이 겪었던 일이라고 생각하니 지호의 과거에 잠시 있었던 원한도 지완의 것이 되었다.

생각이 난 김에 처리하자고 지완이 판단을 내리자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1시간도 지나지 않아 그의 눈앞에 지호를 때렸던 사채업자가 무릎 꿇은 상태로 배달되었으니까.

사채업자는 지완이 어째서 자신을 끌고 온 건지 몰라 겁에 질려 벌벌 떨었다. 이런 별거 아닌 인간이 지호의 앞에서는 거드럭거리면서 강자 유세를 부렸다고 생각하자 지완은 조금 열이 받았다.

“저, 저…… 저기…… 왜 저를 부르셨는지……?”

지완을 향해 비굴하게 히죽거리면서 데굴데굴 눈치를 보는 눈 안에 공포가 가득했다. 처음에는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생각했지만 전형적인 강약약강의 모습에 흥미가 식었다.

그나마 남아 있는 그의 쓸모가 사채업자의 수명을 늘렸다.

“고객 중에 신지호라고 있는데, 아십니까?”

“신……지호요?”

지완의 질문에 비굴했던 사채업자의 낯빛에 의문이 서리더니 눈빛에 교활함이 담겼다.

과연 도지완이 신지호에 대해 묻는 이유가 무엇인지 머릿속으로 열심히 유추하는 듯했다. 그런 사채업자를 힐끗 본 도지완이 그에게 물었다.

“신지호의 채무를 전부 사고 싶습니다만.”

“채무…… 전부를요?”

그 말에 사채업자의 낯에서 공포가 사라졌다. 지완이 왜 지호의 채무를 사겠다고 나서는지 고심하는 것이 눈에 뻔히 보였다.

‘채무를 사는 경우는 두 가지인데…….’

그 사람을 완전히 나락으로 보내기 위해서……. 혹은 도와주기 위해서.

이 업계에선 전자의 경우가 월등했지만 눈치를 보건대 이번에는 전자보다는 후자 같았다. 사채업자는 조금 황당함을 느꼈다.

‘그 신지호를 도지완이 왜? 신지호가 도지완을 물주로 잡은 건가?’

사채업자가 아는 지호는 개털도 없었다. 가진 게 몸뚱이뿐으로 거지나 다름없었다.

적어도 헌터 등급이나 적성이 좋았으면 재기라도 노려봤을 텐데 등급은 D에 적성은 강화계였다. 100명 중 89명꼴로 나와 흔하디흔하다는 말을 듣는 적성에 낮은 등급까지…….

‘……그렇다고 얼굴이 예쁜 것도 아니지.’

헌터가 되면서 외모 보정이 되는 경우도 있다지만 지호에게는 그런 행운도 없었다. 그냥 멀끔하고 모나지 않게 생겼지만 연예인을 하거나 하다못해 화류계로 보낼 만한 얼굴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쪽이 더…….’

골몰하느라 공포를 잊은 사채업자의 눈이 도지완의 얼굴을 훑었다. 지호와 다르게 이쪽은 현직 아이돌 뺨을 왕복 열 번 쳐도 모자랄 만큼 외모가 출중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사채업자는 혹시 신지호가 도지완의 스폰을 받기로 한 건가 의심하던 것을 던져 버렸다. 저 남자가 뭐가 아쉬워 신지호와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된단 말인가?

어이없음에 작게 웃는 사채업자를 보며 지완은 혀를 찼다. 자신을 보며 품평하는 듯한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 그의 심기가 상한 듯하자 사채업자의 얼굴에 다시 공포가 옅게 서렸다. 하지만 돈 앞에서 공포는 무력했다.

“그, 신지호가 가진 채무가 꽤 큽니다만…….”

“…….”

“23억 정도인데 알고 계십니까?”

고작 20대 초반의 청년이 지기에는 큰 액수의 채무였다. 물론 그가 사치를 일삼아 나온 채무가 아닌, 부모로부터 대물림된 채무였다.

어떻게든 사업을 되살리고 싶어 발악하던 부친이 결국 몰리고 몰려 당도한 곳이 사채꾼의 사무실이었던 것이다.

물론 시작할 때는 이 정도의 액수가 아니었다. 법의 한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며 이것저것 붙다 보니 금액이 부풀었다.

아무 힘 없는 지호라면 모를까, 권력을 가진 지완이 걸고넘어지면 꽤나 난처한 상황이라 사채업자는 긴장했다.

그를 바라보며 아무 말 없던 지완은 선고를 내리듯 입을 열었다.

“빚은 100원 한 장 깎지 않고 전부 내겠습니다.”

휴, 사채업자는 지완이 난처하게 굴지 않아 안도했으나 지완의 말은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졌다.

“대신 일을 하나 해 줘야겠습니다..”

“일…… 말씀이십니까?”

“네. 여태까지 했던 것처럼 신지호에게 돈을 받아 내도록 하세요.”

지완의 말에 사채업자의 눈이 둥그렇게 떠졌다. 도와주기 위해 채무를 사는 것이 아니었나?

‘그것보다……. 그럼 나를 고용하겠다는 소리인가?’

사채업자의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다. 지금도 조직 내에서 꽤나 요직을 맡고 있지만 그래 봤자 뱀 머리 아래 있는 꼴이었다.

자신의 소속이 건달패들이 만든 조직에서 대기업의 후계자 밑으로 변한다는 것은…….

‘꼬리가 되더라도 용 꼬리가 되는 거지!’

사채업자의 얼굴에 환희가 어렸다. 음지에서 양지로 나오는 걸로 모자라 그대로 천상계까지 올라가는 것이다.

더 이상 그의 얼굴에 지완을 향한 공포는 없었다. 지완은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그가 모셔야 할 윗사람이었으니까.

“예, 길드장님! 견마지로를 다하겠습니다!”

사채업자는 바닥에 넙죽 엎드리며 외쳤다. 그런 그를 무심하게 바라보던 지완이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그에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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