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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한 번 망했다-5화 (5/88)

5화

“왔습니다. 무슨 일이신가요?”

내가 묻자 도지완이 나를 위아래로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쳐다보나 싶어 우물쭈물하고 있자 그가 물었다.

“처음 보는 얼굴 같군요. 신입입니까?”

“앗, 네……! 맞습니다! 이번에 새로 들어온 신지호라고 합니다!”

“…….”

“제가 뭘 도와드리면 될까요?”

의욕을 가지고 물어봤지만 도지완은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왜 저러는지 몰라 간이 쪼그라드는 기분을 느끼고 있으니 천막 안으로 허겁지겁 정호 형이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길드장님. 얘가 처음이라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렇게 말하는 정호 형의 손에는 가운과 물주머니가 있었다. 아티팩트로 만들어진 물주머니는 실제의 100배 되는 양의 물을 담을 수 있었다. 당연히 중량 조절 마법도 걸려서 무게도 가벼웠다.

정호 형은 나에게 다가와 말했다.

“길드장님께서는 전투 후에 피를 씻어 내시거든.”

그러면서 자기가 할 테니 나가 보라고 고갯짓하는 형의 손에서 나는 오히려 물건들을 빼앗았다.

“형은 피 보는 거 싫어하잖아요. 물 섞인 피도 마찬가지 아니에요? 그냥 제가 할게요.”

“……짜식.”

자신을 배려해 그러는 거라 생각했는지 정호 형의 눈이 촉촉해졌다. 이러다 일을 빼앗길까 싶어 나는 그의 몸을 밀어서 밖으로 내보냈다.

도지완은 표정 변화 없이 우리가 하는 꼴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다리셨죠? 도와드리겠습니다.”

간이 샤워실이라고 해도 샤워기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인간 샤워기가 되어야 한다는 소리였다. 도지완은 나보다 키가 컸기에 나는 한쪽 구석에 놓여 있는 작은 발판 위로 올라갔다. 내가 올라가자 도지완이 갑자기 옷을 벗었다.

“힉!”

깜짝 놀란 내가 소리를 내자 옷을 벗다 말고 도지완이 나를 돌아보았다. 생각해 보니 샤워를 하려면 옷을 벗어야 하는 건 당연했기에 부끄러워진 내 양 볼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도지완의 표정이 조금 흐려졌다. 못 미더워하는 모습에 내가 눈을 부릅떴더니 또 인상을 찌푸렸다. 믿어 달라는 듯 초롱초롱 바라보자 그는 한숨을 쉬고는 남은 옷을 벗었다.

도지완은 얼굴과 목소리뿐만 아니라 몸도 조각이었다. 훌렁 벗은 도지완이 다가오자 갑자기 숨이 가빠지며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다.

무욕이었던 천사였을 때는 누가 벗고 있으면 벗고 있구나, 하고 넘겼는데 감정을 알게 되고 부끄러움을 알게 되자 이상하게 눈을 어떻게 둬야 할지 몰랐다.

천사 시절처럼 그냥 보고 있자니 이상한 사람 취급받을 것 같았고, 그렇다고 시선을 바깥으로 돌리자니 물이 제대로 끼얹어질까 싶었다.

“뿌, 뿌리겠습니다?”

들고 있는 물주머니를 기울이자 도지완의 머리 위에 촤악, 하고 물이 흘러내렸다. 그러자 검은 머리칼 사이에서 흐릿해진 붉은 물이 새어 나왔다. 옅어진 핏물은 그의 목덜미와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다.

‘으아아…….’

왜 이렇게 부끄러운지 모르겠다. 오줌이 마려운 것 같기도 하고…… 기분이 이상했다. 그래도 침착하게 물을 뿌리던 중이었는데, 물에 젖은 도지완의 속눈썹이 팔랑거리며 눈이 열리더니 나를 올려다보았다. 물론 나를 보려고 했다기보다는 그냥 샤워기를 바라본 것이겠지만 그 까만 눈에 당황한 표정의 내가 보이자 심장이 덜컹하여 나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으앗!”

하지만 내가 딛고 있는 것은 작은 발판이었고, 물러날 곳은 없었다. 삐끗하며 쓰러지는 나를 보고 도지완은 눈을 크게 뜨더니 넘어지는 나를 끌어안았다.

와당탕!

결국 우리는 땅바닥에 넘어졌다. 그 와중에 물주머니는 내 가슴팍 위에 얹어져 물을 흥건히 뱉어 내고 있었다.

성질이 난 건지 도지완이 미간을 찌푸리며 인상을 썼다. 그것도 잘생겨서 심통이 났는데, 순간 도지완의 시선이 이상해졌다.

‘어딜 보는 거야?’

내 아래쪽을 보고 있는데 그 시선이 좀……. 그러다 화들짝 놀랐다. 나의 주니어가 반쯤 성을 내고 있었다. 일어난 주니어가 도지완의 명치 쪽을 콕 하고 찔렀다.

‘오 마이 갓.’

분위기가 야릇하긴 했지만 내가 도지완의 몸을 보고 주니어를 깨웠다고?

그럴 리가 없었다. 물론 나는 성향에 대한 편견 따윈 없었다. 다만 신지호는…… 연애 경험은 없었지만 명명백백한 이성애자였다. 그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나였기에 알 수 있었다.

‘그럼 도지완을 보고 주니어가 섰다는 것은…….’

신지호는 결백하니 내 문제라는 소리였다. 그렇다면 나는 게이였던 것인가! 천사였을 때는 알지 못했던 사실을 어쩌다 보니 알게 되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당황하고 있는 나를 보며 얼굴을 찌푸린 도지완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어이없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일어난 도지완은 물주머니를 들어 제 몸에 뿌렸다. 깔끔해진 그는 나한테 물주머니를 거칠게 던지고는 혀를 찼다.

“변태 새끼.”

경멸 어린 눈으로 나를 흘겨보고 나가는 도지완이었지만 나는 거듭되는 충격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생각해도 내 알몸을 보고 사내새끼가 주니어를 키운다면…….

‘……변태 맞지, 뭐.’

흠뻑 젖은 몸이 추위에 오스스 떨려 왔다. 물에 젖어 몸이 식은 건지 싸늘한 눈빛에 마음이 식은 건지 분간되지 않았다.

난장판이 된 샤워실을 정리하고 나오자 물에 흠뻑 젖은 나를 보고 정호 형이 깜짝 놀랐다.

“뭐야? 물에 빠졌어?”

“아뇨……. 물주머니를 놓쳐서요…….”

“에이, 조심하지 그랬어.”

어시스트 대기실에 가서 옷을 갈아입으라면서 정호 형이 내 등을 밀었다. 새 옷으로 갈아입고 나오자 저 멀리 도지완이 보였다.

어쩌다 보니 눈이 마주쳤는데 내 얼굴을 보자마자 도지완이 인상을 찌푸리고는 고개를 팩 돌렸다. 욕이 나왔지만 내 탓이니 어쩔 수 없었다.

* * *

던전 공략은 쉽게 이루어졌다. 길드장 직속 공격대였기에 강하기도 했고, 길이 거의 일직선이라 헤맬 필요가 없어서였다.

나는 첫날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열심히 뛰어 봤지만 도지완의 싸늘한 눈빛은 거둬지지 않았다. 그렇게 말 한 번 제대로 건네 보지 못한 채 도지완은 공략이 끝나자마자 바로 차를 타고 사라져 버렸다.

‘이런 시발.’

욕이 절로 나왔다. 그나마 ‘저 자식 자르고 내 눈앞에서 치워!’라고 하지 않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내가 도지완에게 주니어를 세웠다는 것은 그와 나밖에 몰랐다. 나로선 입에 담기 힘든 말이고, 도지완도 언급하지 않아서인지 다들 도지완의 태도를 이상하게 여겼다.

“길드장이 왜 저러지? 왜 너한테만 저렇게 날을 세우냐?”

뭐 잘못한 거라도 있냐고 정호 형이 물었지만 나는 둘러댔다.

“그냥…… 제가 샤워실에서 실수해서 그런가 봐요.”

그 실수를 물을 쏟았다는 걸로 알아들은 정호 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참 나. 어차피 샤워하면 물 뒤집어쓰는 건 당연한 건데 되게 까다롭게 구네.”

투덜거리는 정호 형을 보며 그저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던전 안에서의 시간은 바깥보다 빠르게 흐른다. 그 때문에 작업을 마치고 나왔을 때는 고작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다. 안에서 10일가량 보낸 것치고는 밖의 시간은 많이 흐르지 않은 것이다.

“내일 하루 쉬고 모레 2차 공략 갑니다.”

아직 던전을 클리어한 것이 아니기에 한 번 더 들어가야 했다. 뭐, 한 번이 될지 세 번이 될지는 끝까지 가 봐야 알겠지만 말이다.

하루의 휴가를 얻은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어시스트들도 회사 차량을 타고 회사로 복귀했다.

“자, 받아라.”

돈이 급한 나는 월급이 아니라 건별로 돈을 지급받기로 했기 때문에 사장이 나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봉투는 꽤나 두꺼웠다.

“감사합니다.”

“어어, 모레 보자.”

휘휘 손을 내젓는 사장을 뒤로한 채 사장실을 나서다가 김건규와 마주쳤다. 잘 가라고 인사한 김건규가 사장실 안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 나는 대충 짐작했다.

‘내가 어떻게 했는지 물어보려고 하는구나.’

김건규가 계속 나를 주시하는 것 같더니, 아무래도 사장에게 내가 어떻게 일하는지 지켜보라는 밀명을 받은 것 같았다. 김건규보다는 나와 내내 붙어 있던 정호 형에게 물어보는 편이 더 낫겠지만 나를 데려온 사람이니 내 편을 들어 줄 수도 있어서 정호 형은 배제된 것 같았다.

‘뭐…… 도지완 쫓아다닐 때 빼고 열심히 했으니 괜찮겠지.’

별걱정은 되지 않았다. 밖으로 나가니 정호 형이 차를 대기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지호야!”

손을 흔드는 정호 형에게 다가가 그의 차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아, 맞다. 일당.’

나는 주머니에 넣어 둔 봉투를 꺼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자 정호 형의 눈이 봉투로 향했다.

“일당 받았구나.”

“예.”

얼마나 나왔는지 궁금해진 내가 봉투를 열어 돈을 꺼내 보았다. 노란색의 5만 원짜리 지폐가 40장 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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