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색련-107화 (107/111)

#107

황제가 다가와 황자와 황후 사이를 막았다. 돌연히 비친 그림자에 황후가 눈물이 범벅된 얼굴을 들었다.

“저희는 살아야겠습니다.”

황제의 감파란 안광이 어느 때보다 돌올했다.

“어머니를 버려서라도.”

황후의 눈물이 멈췄다.

“…난 도저히 당신을 용서할 수가 없어요.”

이어지는 목소리가 가라앉고 가라앉아, 땅을 울릴 것만 같았다.

“당신은 내 아비의 음식에 독을 탔고 내 형의 몸에 불을 질렀습니다. 그리고 나와 준명을 가두었지요. 이십여 년간, 어머니는 우리 형제 남매를 하루도 빠짐없이 당신의 새장에 처박았습니다.”

뜻밖에도 자신의 이름이 거론되자 놀란 준명은 망연히 황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하지 마라, 아무것도 될 수 없다,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입을 막고 숨통을 틀어쥐고 끊임없이 지옥으로 몰았습니다. 우리에게 혈육들과의 정사를 강요하며, 당신조차 그 이유로 이런 괴물을 낳았음에도 꼭 같은 일을 목도하게 했습니다. 그리했다면, 다시 나와 같은 아이가 태어나 세상을 원망했겠지요. 많은 이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고 웃어도 웃는 것이 아니고 울어도 우는 것이 아닌 허상의 삶을 배겨 내야 했겠지요.”

“…그래서?”

황후가 홀연히 되물었다.

“네놈이 지금, 나를 탓하겠다고?”

“…….”

“은종을 죽인 것이 나라고 온 나라에 발고하겠다고? 그리하여 이 어미의 사지를 찢고 목을 베어 홍살문에 머리를 꽂겠다고…?! 하하, 여운아, 우습다. 참으로 우습구나. 우리 어여쁜 아드님, 황제 폐하, 제발 착각 좀 그만하시옵소서.”

황후가 과장되게 웃으며 빈정거렸다.

“네가 이긴 것 같으냐?”

“…….”

“천민들에게 밭뙈기 몇 결 나눠 주고, 반반한 낯짝을 드러낸 것으로 정녕 만백성이 너를 우러를 것이라 여긴 것이냐? 자, 귀족들은 어찌할 테냐? 현재 벽해의 실권을 장악한 것은 누가 뭐래도 신통, 그 신통을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자는 온 누리에 나 하나뿐. 그간 우리 신통 가문의 원조를 받아 온 나머지 수백, 수천의 귀족들은 또 어찌할 테냐? 향청마다 네놈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비를 세운다고? 교지…? 나를 폐하겠다고?! 그깟 돌덩이와 종잇장으로 진정 이 옥명의 숨통을 죌 수 있으리라 여긴 것이냐? 참으로 미련하고 가련하구나. 너는 사자들의 이빨도 뽑지 않은 채 한 울타리에 밀어 넣고는 이겼다며 자만하는 관을 뒤집어쓴 원숭이와 다르지 않도다. 네놈도 네 아비와 똑같아. 똑같이 나약하고, 지리멸렬하고, 제 손으로 밥술조차 못 올리는 어리광쟁이에, 쓸모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한심한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아! 깔깔! 깔깔깔깔!”

“…….”

“내가 너를 버리겠다.”

황후는 천장을 향해 미친 듯이 배를 잡고 웃다가 돌연히 얼굴의 생기를 도려내었다. 그야말로 생귀신 같은 작태에 지켜보던 준명이 두려움에 물러날 정도였다.

“나를 용서할 수 없다고? 아니, 내가 네놈을 용서치 않을 것이다. 역사는 권력에 의해 쓰이는 것이요, 이 나라의 정점에 선 것은 네가 아니라 나다. 정녕 모르겠느냐?”

콰앙! 고요하던 황후궁 안뜰에 별안간 군부와 신통의 병사들이 파죽지세로 들이닥쳤다. 둘레를 지키던 왕조오의 병사들과 정통의 무동들이 줄줄이 베였다. 순식간에 황후궁을 장악한 군우령 대윤이 피가 뚝뚝 흐르는 장검을 끌고 내실 문을 박차며 들어섰다. 그에 미함과 화경이 칼을 뽑으려 했고, 황제가 손을 들어 저지하였다. 대윤이 다가들려 하니 황후도 손을 들었다. 두려움에 온몸을 떠는 곱사등이 황자를 가만히 지켜보던 준명이 얼른 다가가 치마폭으로 그의 몸을 가렸다.

인간으로 꽉 찬 내실 안, 무거운 대치의 침묵을 맨 먼저 깬 것은 황제였다.

“기어이 내란을 원하는 겁니까.”

“먼저 칼을 뽑은 건 네놈이다.”

황후가 똑바로 서 턱을 치켜들었다.

“보아라. 여전히 벽해는 내 발아래 있어.”

황제가 묵묵히 바라보았다.

“내가 네놈을 반석에 올렸다. 정무는 뒷전이고 허구한 날 색을 구걸하던 파렴치한 은종을 대신하여 지금의 정권을 이룩했다. 호시탐탐 찬탈을 노리는 요사한 뒷방 늙은이에게서 너를 지켰다. 툭하면 아프고, 쓰러지고, 경기를 일으키는 네놈을 살린답시고, 몇 날 며칠 한잠도 자지 않고 탕약을 달이고, 가슴 졸이고, 마음 끓여 가며…! 네놈이 기억하지 못하는 그 수많은 나날에 이 어미의 세월이 눅어 있거늘! 말해 봐라, 네놈이 어찌 황제가 될 수 있었느냐? 네놈이 어찌 태어난 순간부터 황태자로 떠받들리며 사람들을 호령하고 살았느냐? 내가 악착같이 황후의 위에 올랐기 때문이다. 뼈가 바스러지는 고통 속에 네놈을 낳았기 때문이다! 평생을 바쳐 네놈을 지켜 왔기 때문이다!!”

“아니야.”

시선을 똑바로 맞춘 채 황제는 짧게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황후에 오른 건 당신의 욕심 때문이었어. 누구를 위해서 아닌, 옥명, 바로 당신을 위해 당신 스스로 저지른 일이야.”

“네가 내 삶의 무얼 알아?”

황후는 처음으로 사람이 사람에게 하듯 황제에게 물었다.

“내가 깔아 둔 탄탄대로에서, 내 피눈물을 갈아 일구어 놓은 반석 위에서 온실 속 화초처럼 곱게만 자란 네놈이 대체 무얼 안다고 이리 마구발방을 해?”

“당신이야말로 내 삶의 뭘 알지? 나는 당신 치마폭에서 단 한 순간도 행복한 적이 없었어.”

“행복…?”

옥명은 난생처음 들어 본 단어인 양 그 말을 곱씹더니 황망히 보았다.

“행복이라고 했느냐? 여운아 네가 지금 ‘행복’을 꿈꾸는 것이었더냐? 응? 정말 그러한 게야?”

옥명은 황제를 중심에 두고 사위를 빙빙 돌며 느리게 재우쳤다. 바닥을 휘도는 붉은 치맛자락의 둥근 궤적을 응시하던 황제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네 주제에?”

어느새 코앞에 멈춰 선 모후의 눈동자가 텅 비어 있었다.

“나는, 너희들을 회임한 이후, 단 한 순간도 행복한 적이 없었는데.”

“…….”

“내 삶을 구렁텅이에 처박은 네놈이 감히, 행복을 꿈꾼다고…?”

냉랭히 모후를 내려다보던 황제는,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거대한 벽을 본 듯한 절망감을 느끼며 쓰리게 고개를 돌렸다. 그 몸짓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한 황후가 입술을 깨물며 용안을 붙잡아 자신을 보게 하였다.

“정을 알았구나.”

확신하는 말투에 황제는 얼굴을 굳혔다.

“네놈이 사람 간에 나누는 정을 너무 깊이 알아 버린 게야. 홍의, 그놈 때문이지?”

황제의 뺨이 얇게 경련했다.

“그 이름.”

“…….”

“함부로 입에 올리지 마.”

황후가 사나운 눈빛으로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나는 네가 정이란 것을 모르고 살았으면 했다. 정, 애욕, 사랑이란 이름의 그 깜찍한 감상들은 말이다, 사람을 솎아 먹는 끔찍한 괴물이란다. 정을 알면 기대하게 되고, 기대는 좌절을 부르지. 도무지 웃지 않는 여인 포사를 웃기려 거짓 봉화를 올리고 나라를 말아먹은 주나라의 유왕도, 아마 행복했을 테지? 어리석은 사랑에 취해 파멸하는 순간에도 기어이 사랑하는 여인의 웃는 모습을 볼 수 있었으니, 그것으로 충분타 하였을 테지?”

황후는 웃음을 줄여 미소 지었다. 생의 고단함이 묻어나는, 고비늙은 노파의 미소였다.

“내게도 있었다. 그리 애틋하고 애절했던 순간이. 권력, 정쟁, 가문 따위는 관심도 없었던 싱그러운 소녀의 한때 말이다.”

누군가의 이름자만 듣고도 분에 겨워 날뛰는 처절한 젊음이, 그 치기 어린 생기가, 옥명의 오래된 기억을 들깨운다. 흑단처럼 새카만 귀밑머리와 옥설처럼 새하얀 뺨을 지녔던 소녀가 있었다. 보드라운 흰 발로 소보록한 풀잎을 밟기를 즐겼던 천진스런 열여섯.

“나와 네 외할머니는 본디 정통 가문의 노비였다. 정확히는, 너의 친할미, 화소의 화풀이 대상이었지.”

황후는 오랜 꿈을 헤아리듯 허공을 보며 읊기 시작했다.

***

어린 날의 기억은 모지라진 그림처럼 선명하지 않구나. 막 글을 읽기 시작한 여덟 살 무렵이었을까? 나는 그날도 우리 어머니와 함께 황후궁을 소제하러 들었단다.

나의 어머니가 화소 황후 곁에 붙어 앉아 그녀의 머리를 빗기는 동안, 나는 너른 황후궁 침전에 납작 붙어 기어 다니며 물걸레질을 했지. 당시 화소 황후는 늙은 황제의 후궁들과 그들의 딸까지 재차 시녀로 부려 가며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기를 즐겼는데, 무심스런 황제가 그나마 총애했던 온순한 나의 어머니는 그에 딱 알맞은 먹잇감이었어.

짝, 하는 마찰음이 울렸다. 나는 놀라 고개를 들었지. 막 뺨을 맞은 어머니의 입에서 주르륵 피가 흘러내렸어. 징그러울 만큼 기다란 손톱을 벼르며, 소름 끼치도록 엄격한 표정으로 거만하게 내려다보던 화소의 화려한 자태가 아직도 눈앞에 생생하구나.

‘이 발정 난 신통의 암캐야. 네년의 서툰 빗질로 내 머리칼이 상하여 끊어졌으니 대가로 네 어린 딸년의 발목을 비틀어야겠다.’

그때 정말 발목이 잡혀 비틀렸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천성이 순하고 모질지 못했던 어머니가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며 구걸한 탓에, 우리 모녀는 금성에서 밀려나 민가의 초가삼간으로 쫓겨나는 것으로 목숨을 연명할 수 있었지. 쫓겨난 이유라면 단 하나, 당시 정통의 수모였던 화소 황후의 머리칼이 엉켜 있었다는 그 얄팍한 이유였다.

어릴 땐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나튼 이후엔 알았다. 머리카락은 구실일 뿐이고, 사실은 남편의 총희를 아량으로 돌보지 못한 화소 황후의 강샘이었음을. 날 때부터 유달리 총명했던 나는 어머니의 입장도, 화소 황후의 입장도 모두 이해가 되었단다.

너의 외할머니는 차라리 잘됐다고 말하더구나. 노비 가문의 여식으로 태어난다는 건 그만큼 팔자가 사납다는 뜻이라던가? 특히나 장녀인 나는 날 때부터 빼어난 외모를 타고났으니, 차라리 도경의 변경에 처박혀 살다가 순박한 농사꾼에게 시집을 가야 순탄할 것이라 하더구나.

그때부터 어머니는 절구에 보리를 찧고 삯바느질을 하여 나와 여동생 윤명을 키웠다. 어머니에겐 미망이나 욕심은 추호도 없었어. 그저 하루하루 귀여운 딸따니들과 더불어 오붓이 살면 그만이라 하셨지. 바보 같은 양반, 사실은 그게 가장 힘든 일인 줄을 모르고. 아름다운 여인으로 태어나 평범하게 산다는 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절대 불가능한 일이 아니겠느냐?

나는 어머니가 황제의 첩이자 황후의 노비였다는 사실도, 내가 황제의 딸이었다는 사실도 열 살이 넘어서야 정확히 알았단다. 심약한 어머니는 언제나 화소를 두려워했어. 황제의 부름으로 침전에 든 다음 날에는 꼭 수순처럼 황후궁에 불려가 울면서 매타작을 당해야 했으니까. 그때 나는 본디 황후의 자리라는 것이 조바심, 강샘, 그리고 매질로 점철된 자리인가 하였단다. 그리하여 시기하고, 짓밟고, 가문마다 인통이라는 굴레를 씌워 핏줄을 나누고 격을 가르는가 하였구나.

‘왜 황제 폐하는 어머니를 지켜 주지 않았나요?’

‘…폐하께서는 나랏일이 원체 다망하시니, 본디 아녀자들의 일에 간섭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란다.’

‘사랑하는 여인이 매질을 당하는데 가만히 두고 보는 것이 원칙이라고요? 세상에 그리 바보 같은 원칙이 어디 있담!’

‘들어 보렴, 옥명아. 나도, 나의 어머니도, 또 나의 어머니의 어머니도 모두가 정통에게 색공을 하였다. 그녀들의 의지가 아니라, 운명이었지. 그것이 모계 혈통으로 내려오는 신통 여인들의 잔인하고도 슬픈 운명이란다. 인간의 운명은 본디 천신의 소관, 아무리 황제일지언정 어찌 천명을 거스를 수 있었겠니?’

너의 외할머니는 그런 말로 머뭇머뭇 너의 친할아버지를 변호했지만, 어린 내 눈에 그는, 돌아가신 선선황제는 그저 욕심 많은 허깨비일 뿐이었다. 그의 낙은 언제나 가정이 아니라 방외색에 있었거든. 씩씩거리며 구들을 지키던 조강지처가 눈이 뒤집히면 그제야 이크, 허둥지둥 꽁무니를 빼곤 하였지. 그에 분노의 살을 맞는 건 황제가 아니라 오롯이 그에게 몸을 바친 여인들의 몫이었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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