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색련-101화 (101/111)

#101

대윤이 다급히 다가들었다.

“독살을 눈치챘단 말입니까?”

“예. 대체 언제부터였는지.”

혼란스럽게 눈을 굴리던 황후가 대윤의 옷깃을 붙들었다.

“지금으로선 그 시비를 정녕 죽였는지, 아니면 어디론가 빼돌려 숨겨 두었는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대윤의 옷깃을 붙든 황후의 손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대윤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황후는 이내 이를 갈며 잔뜩 살의에 찬 얼굴로 이맛살을 찡그렸다.

“아마 빼돌려 두었을 테지요. 나의 약점을 쥐기 위해.”

“황후 마마, 그렇다면…”

황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비명처럼 소리쳤다.

“태자가 진정으로 내게 척을 졌습니다, 나를 배반했어요!”

혼란을 이기지 못한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팔을 움켜쥐었다. 대윤은 그녀의 어깨를 붙들고 강강히 아뢰었다.

“침착하십시오. 아직 기회가 있습니다. 여론이 태자에게 우호적이지가 않아요.”

“이대로라면, 이대로라면 내 목숨이 끊어지게 생겼는데, 내 어찌 침착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때였다. 번병의 알림도 없이 내실 문이 열리고 해운과 사염이 헐레벌떡 내실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어머님, 큰일이옵니다!”

해운이 안색이 창백하게 질린 채로 소리쳤다. 대윤이 나서며 소리쳤다.

“무슨 일이냐!”

“지금 장안에 이런 그림이 떠돌고 있다고 하옵니다!”

해운이 파르라니 떨리는 손으로 내미는 종이를 받아 든 황후는 가슴이 들썩거릴 정도로 가쁘고 깊게 호흡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심상찮은 반응에 마찬가지로 그림을 살펴보던 대윤이 곧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읊조렸다.

“이것은….”

“태자입니다.”

구겨진 화선지에 그려진 그림은 단순한 용모파기 수준이 아니었다. 실제로 태자가 종이 위에 현현한 양 사소한 모모마저 똑같이 묘사되어 있었는데, 특히나 빛을 머금은 듯한 벽안이 유독 섬세하게 돋보였다. 황후는 쥐고 있던 종이의 모서리를 구겼다.

“현재 이 그림이 장안에 떠돌고 있다는 말이냐?”

“예, 장안의 만담꾼들이 육주비전에 모여 퍼뜨리는 바람에 이 그림을 보지 못한 백성이 없을 정도라고 하옵니다.”

해운이 입술을 감쳐물며 어머니와 눈을 맞추었다.

“또한, 또한 이 그림과 함께 말도 안 되는 가담항설이 퍼지고 있어….”

“…가담항설이라니?”

“이 책을 보십시오. 홍안 상점이라는 음기구 상점에서 민인들에게 공짜배기로 나누어 주고 있다는 책인데, 일단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황후는 한 장 한 장 서책을 넘겨 보았다. 내용을 대충 추리자면 이러하였다. 죽어서 용이 된 벽해의 시조 진성 황제가 백성들의 치성에 감읍하여 돌로 된 용알 두 개를 매화숲 여운소 앞에 물어다 놓았고, 용알 중 하나는 깨졌으나 하나는 말짱하여 열 달이 지난 후 곱디고운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여운소에 붉은 꽃이 필 때쯤 아이는 액운이 다하여 용의 허물을 벗고 진정한 신이 되어 푸른 천안으로 하여금 만파식을 실현하리라 하였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빠르게 책장을 넘기던 황후가 왁살스레 책을 던져 버린 후 해운을 쏘아보았다.

“이 그림과 이야기가 민인들 사이에 퍼진 지 얼마나 되었느냐?”

“이레는 족히 넘었다 하옵니다.”

“…….”

황후는 잠시 아찔한 멀미증을 느끼고 이마를 짚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점멸하여 순간적으로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러나 차츰 시야가 밝아지며 호흡이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가장 혼란할 때에야말로 냉정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심학의 가르침이 떠올랐다.

“…즉위식을 막아야 한다.”

황후의 뇌까림에 부자가 놀라서 쳐다보았다.

“백성들이 태자의 얼굴을 보아서는 안 돼. 이 초상화와 똑같은 얼굴을 지닌 태자가 만인 앞에 선다면, 이 말도 안 되는 번설이 정설이 되고 말아.”

“…….”

“군우령 대윤은 지금 즉시 병부로 가 소집 가능한 병사들을 모두 총동원하세요. 그리고 해운, 너 또한 신통 향선들과 무동들을 한 명도 빠짐없이 동원하여 광장으로 향하라.”

“예, 황후 마마!”

황후궁 앞으로 군부의 병사와 신통 향선들이 모여 결연한 표정으로 시립하였다. 황급히 모은 병사들이라 수가 적긴 하였지만, 지금 당장 기를 잡지 못하면 어떤 진퇴양난으로 빠질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황급히 양마에 올라탄 대윤의 호령 아래 막 대궁을 빠져나가려는 때였다.

“모두 멈추시오!”

우렛소리와도 같은 고함과 함께 대궁 문이 열리며 왕조오가 나타났다.

문지기로 있던 병사들은 이미 목이 베여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황후 마마, 이미 구지 앞이 왕조오의 사병들로 포위되었습니다.”

“…….”

황후는 천천히 팔을 내리고 물끄러미 저 멀리 말에 올라타 있는 왕조오를 바라보았다. 해운의 통보대로 금성을 둘러싼 구지 앞을 전부 에워싼 이 만의 병사들로 금성 둘레 전체가 포위된 상태였다. 급박히 추려 낸 병사의 수는 왕조오의 사병 수에 비해 월등히 적었다.

둥! 둥! 둥!

즉위식을 알리는 북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

즉위식 한나절 전, 도경 외곽의 객잔.

매콤한 골동면과 고소한 만둣국으로 아침밥을 야무지게 때우고 부른 배를 두드리며 고개를 들던 삼덕의 표정이 단숨에 썩어 들었다. 마주 앉은 홍의의 얼굴이 시켜 놓고 손도 대지 않아 퉁퉁 불은 골동면과 만두만큼이나 탱탱 부어 있는 탓이었다.

“아재.”

“왜.”

“아재 얼굴 식후에 보기 영 괴란해.”

“닥쳐….”

홍의는 새벽 내리 한숨도 자지 못해 꺼칠한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음식이 입에 맞지 않으십니까?”

막 골동면 두 그릇을 해치우고 만둣국 한 그릇을 쓸어 넣은 참인 화경이 그제야 머쓱한 표정으로 물었다.

“잠을 설쳤더니 입맛이 좀 없네. 신경 쓰지 말고 자네 많이 들게.”

탱탱 불어 흐늘거리기 시작한 제 몫의 만둣국을 화경 앞으로 밀어 주었다. 화경은 소탈하게 받더니 순식간에 국물까지 말끔히 비웠다.

홍의는 탁상에 턱을 괴고 앉아 객잔의 창밖을 바라보았다. 삼덕이 그 모습을 응시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어린 삼덕에게 ‘어른’이란 대개 장죽을 물고 거드름을 피우며 헛기침을 하는 사람으로 정의되었다. 그런 면에서 홍의는 참으로 어른 같지 않은 어른이었다. 아랫사람들에게 이유 없이 벌컥벌컥 성질을 내지도 않았고 툭하면 무얼 시키지도 않았고 필요한 것이 생기면 부탁하는 어조로 되레 머쓱해하며 청했다.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도, 또 자신의 시간에 방해를 받는 것도 싫어하였다. 그러나 삼덕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즉각 반응해 주었고, 시시때때로 웃어 주었다. 삼덕은 이윽고 알았다. 홍의는 어른답지 않은 게 아니라 실은 누구보다 ‘좋은 어른’임을.

홍의는 이따금 사색에 잠겨 일각이고 한 시진이고 말문을 닫을 때가 종종 있었다. 웃음기를 거두고 입을 싹 다물면 날카로운 턱선과 되똑한 콧날이 어우러져 일견 냉정해 보이기까지 했다. 키도 크고 몸도 좋고, 면식 없이 지나치던 사람도 꼭 한 번씩은 꼭 돌아보게 만드는 잘생긴 풍류 공자님이었다. 그러나 홍의의 육신은 여기 있되, 정신은 다른 곳에 있는 것 같았다.

‘그건 슬픈 일이야.’

똘똘한 삼덕은 자신이 겪은 어린 경험에 빗대 생각한다. 마음과 몸과 정신이 각기 놀고, 밥술조차 제때 올리지 못할 지경이라는 건 사랑하는 무언가를 잃었을 때라고. 자신도 아버지가 죽었을 때 삼 일 동안 누군가 목구멍을 틀어쥔 듯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으니까.

한참 골똘하던 삼덕은 곧 식후 간식으로 나온 분홍 찹쌀떡에 정신이 팔렸다. 묵묵하던 홍의가 입을 열었다.

“화경.”

“예, 홍의 님.”

“즉위식을 너무 서두르는 것이 아닌가? 내 새옹에게 전해 듣기로, 현재 금성에서 전하의 여론이 좋지 않다고 들었네만.”

그러자 화경이 씩 웃었다.

“전하께오서 결행하는 일에 여론이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소인은 하나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우리 전하는 무슨 일이든 잘 해내실 거예요.”

홍의는 잠시 말을 잃고 보다가 천천히 물었다.

“자네 전하를 모신 지 얼마나 되었나?”

“아, 햇수로 십육 년쯤 되었습니다.”

“그것은 오래 모신 군주를 향한 믿음인가? 충절인가? 전하의 결단이라면 그게 무엇이 되었든 믿고 따르마 한다는 그 자세 말이야…. 그런 자세를 갖기도 애초에 쉽지는 않겠지만, 무엇보다 어려운 건 의심을 완벽히 거두는 일이지.”

“…….”

“몸으로는 명을 따르면서도 머릿속의 의심까지 깨끗이 거둘 수는 없는 법이야. 믿고 따르겠으나 불안하고, 믿고 따르다 죽어도 좋으나 걱정은 거둘 수는 없고…. 그것이 매사에 독단적인 상전을 둔 아랫것들의 숙명이 아니었나? 한데 자네는 어찌 의심하지 않지? 어찌 한 톨의 걱정 없이 지고지순 따를 수 있는 게지?”

홍의는 진정 궁금하여 물었다. 이어지는 화경의 대답은 그가 걸어온 삶처럼 우직스럽고 한결같았다.

“저는 단지 전하의 마음을 저의 마음으로 여겨 받듭니다. 전하의 뜻을 저의 뜻으로 삼아 따릅니다. 세상에 자신의 마음을 의심하는 것만큼이나 어리석고 한심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상한 화경의 대답이 홍의의 가슴을 뜨겁게 관통했다.

‘너는 나를 믿지 못하는군.’

이제야 인정한다. 자신은 태자를 믿은 적이 없다. 황후와의 대척에서 그가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지 않았고, 혹여 험악한 여론 세태가 태자를 위태롭게 할까 두려운 마음을 접지 못했고, 끝끝내 아주 만날 수 없는 것은 아닌지 불안한 심정을 다독일 수 없었다. 애초에 완전한 믿음이란 게 있을까? 그것은 끊임없이 기리고 벼리고 덜어 내야만 얻을 수 있는 어떠한 경지와 다르지 않다. 더군다나 사랑이라는 요사로 일신이 마비된 상태에서는 더더욱 닿기 어려운 고지였다.

‘홍의야.’

불안할수록 그의 눈동자가 그리웠다. 두려울수록 나지막한 성음이 절실했다. 설령 모질게 탓하고 상처 주는 말일지언정, 그의 시선과 음성을 현실로 느끼고 싶었다.

홍의는 스스로 태자를 떠나온 것을 가슴 깊이 후회했다. 하지만 아무려면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즉위식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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