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색련-83화 (83/111)

#83

나흘간 이어지던 사신연이 파했다. 궁인들은 얼얼한 무르팍을 두들기며 그제야 한숨 돌렸고, 정통 향선들의 주도 아래 무동들과 광대들이 모여 인파가 휩쓸고 간 자리를 깨끗이 청소하였다. 돌림쟁이 취급도 여전했고 시도 때도 없이 꽂히는 뭇시선들이 심기에 거슬렸으나 홍의는 생시침을 떼고 조용히 자리를 지켰다.

또한 평시 낯가리기로는 벽해 제일이요, 잡기나 주색, 몰려다니기에는 추호의 관심도 소질도 없었던 태자는 어쩐지 왕조오와 어울리는 데 주력을 쏟았다. 그의 청이라면 만사를 제치고 응하여 함께 청유를 나가고 술잔을 기울이고 마장을 돌리고 사냥을 다녔다. 궁인들 보기에는 몹시 희한스러웠으나, 황후는 흡족해하였다. 왕조오의 뜻은 곧 예국 황제의 뜻이니, 얼마 뒤 보위에 오를 태자의 위치를 공고히 하는 데 큰 힘이 되어 주리라는 기대 덕이다. 하지만 그조차 태자가 왕조오를 만나고 돌아오면 몹시 피곤하고 예민한 얼굴로 늙은이가 말도 많고 취향도 고루하다며 뒷담을 줄줄 늘어놓는 것을 몰라서 하는 소리였다.

황후는 장안에서 가장 흥한다는 홍안 상점에 시종장을 보내 갖가지 귀물을 들여오기에 이르렀다. 이달에 있을 양궁의 귀숙일을 기리기 위해서였다. 그러한 와중 황후의 명으로 홍의를 대신하여 태자궁의 지밀에 든 향선 사염은 침전에 들자마자 집채만 한 구렁이와 마주쳤고, 그대로 졸도하여 위병 등에 업혀 나오는 바람에 가뜩이나 부푼 태자에 관한 헛소문에 크나큰 일조를 했다.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기절하면서 어김없이 싸개질을 하는 통에 옥지가 질색을 했던 것은 여담이로다.

새옹은 홍의의 명을 수행하느라 백두 척간을 외줄 타는 기분으로 준명궁을 감시하면서 외로운 살얼음판을 걷는 중이었고, 어쨌거나 홍의는 오늘도 뒷담과 악담과 멸시와 경시의 한복판에서 팔짱 끼고 호기롭게 웃어 보였다.

“욕먹으면 오래 산다지 않더냐? 핫핫하, 하하!”

“…….”

그러다 보니 미함과 약속한 날이 왔다.

***

“전하께서 저와 군신의 관계를 맺길 원하신다면, 연회가 파한 뒤 남산 누마루로 오십시오.”

으슥한 밤이었다. 옥지는 오늘따라 태자의 나들잇벌에 신중을 기했다. 지금 남산 누마루에 가득 핀 백일홍과 연꽃에 비하여 색감이 너무 튀어서도 죽어서도 안 된다고 유난이었다. 그리하여 눈부시도록 새하얀 비단에 금박과 은박이 반짝이며 교차하는 삼족오 문양이 깃마다 새겨진 고운 포를 떨쳐입은 태자는 완벽한 우아미를 선보이며 침전을 나섰다. 마침 회랑 앞마루에 앉아 대기하고 있던 홍의는 태자와 맞닥뜨리자마자 예의 불보살이 어쩌고 하면서 자기가 장님이 되면 책임지실 거냐는 둥 볼멘소리를 하여 옆에서 가뜩이나 고행하는 자들의 욕지기를 돋우었다.

황후의 눈을 피해 행차하느라 단촐하게 나섰다. 언제나 그렇듯 충성스러운 돌치와 깜치가 앞장을 서고, 연꽃 등을 밝힌 옥지와 화경이 뒤를 따랐다.

그런데 막상 남산 누마루에 가 보니, 미함은 간데없이 정통 향선들이 자리를 잡고 신선놀음을 즐기고 있었다.

“미함 공은 어딜 가고 저 치들이 와 있지?”

네 사람은 누마루 뒤 고목에 붙어서 머리만 다닥다닥 내놓은 채 바깥 상황을 염탐했다. 이윽고 옥지가 비장한 고개를 쳐들었다. 상전들을 돌아보는 그녀의 창백한 낯빛이 오늘따라 차가운 달빛을 머금고 더욱 음산하였다.

“앞은 소인이 다 처리할 테니, 믿고 기다리시옵소서.”

세 남자는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차례 심호흡을 한 옥지는 이윽고 곱게 땋아 내린 머리를 산발로 풀어헤쳤다. 물가의 습기를 머금은 머리칼은 삽시간에 기괴한 모양으로 부풀어 올랐다. 옥지가 들고 있던 등의 연꽃 막을 내리고, 호롱불을 턱 밑으로 슥 가져가자, 세 남자가 기겁하여 동시에 뒷걸음쳤다. 그야말로 오뉴월 서리를 머금은 처녀 귀신의 등판이었던 것이다. 새삼 옥지의 기발한 재기에 감탄한 홍의는 불뚝대는 심장을 억누르며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이야말로 몹시 신속하고도 정확하게 저 버러지들을 몰아낼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었다.

옥지는 호롱불을 잘 받쳐 잡고 스르륵, 소리도 흔들림도 없이 누마루로 나아갔다. 얼마 안 가 사내들의 자지러지는 비명 소리가 울렸다. 다들 엄마 찾고 난리였다. 어쩐지 미안스러워진 홍의는 한동안 께름칙한 표정으로 누마루 쪽을 올려다보았다.

허겁지겁 꽁무니 빼는 소리와 사내들의 비명 소리, 울음소리로 왁자하던 주변이 얼마 안 가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전하아, 이제 오르소서어.’ 옥지가 평소보다 목소리를 음산하게 늘이며 아뢰는데 아무래도 배역에 깊이 심취한 것 같았다. 어째 기에 눌린 세 남자가 헛기침을 하며 일렬로 줄줄이 누마루 계단을 올랐다.

맨 먼저 누에 오른 홍의는 우선 주변을 둘러보았다. 향선들이 놀다 간 흔적으로 제철 과일과 술병들이 쌓인 교자상과 고릿적 시구가 적힌 종이와 붓들이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었다.

“허어, 아무리 미함 공이라지만 감히 태자 전하를 벌세우는가?”

약조는 지키라고 있는 것이거늘. 홍의가 대놓고 혀를 찼다. 그러거나 말거나 누마루를 둘러싼 꽃나무에 시선을 빼앗긴 태자는 난간에 양팔을 받치고 상체를 빼어 가경을 살피느라 바빴다.

그때였다.

“네 이년!”

누 아래쪽에서 우렁우렁하고도 익숙한 음성이 버럭 울려 퍼졌다.

“귀신이면 물러가고 사람이어도 물러가라! 훠이! 감히 예가 어느 안전이라고!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세상 모든 담을 넘어 하늘마저 밟고 날아다닌다는 다향원의 육대 원주…”

“미함 공.”

“아악.”

홍의가 난간을 짚고 쑥 상체를 내려다보니 미함은 양팔과 한쪽 다리를 같은 방향으로 접어 올리며 그 상태로 굳었다. 그런 미함 앞에 우두커니 서 있던 옥지가 이내 호롱불을 내리고 공손히 읍을 올렸다.

“전하께오서 거둥해 계시니 어서 누마루로 오르시지요.”

“…….”

이어서 헛기침 소리만 요란하였다.

***

“계하기에 앞서, 좌우의 신하들을 모두 물리치시길 청하옵니다.”

태자와 마주 앉은 미함이 묵묵히 간하였다. 다관을 늘어놓고 차를 달이던 옥지와 화경, 그리고 태자의 옆에 무릎 꿇고 앉아 있던 홍의가 당황하여 고개를 들었다. 태자는 잠시 망설이다 이내 홍의를 향해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모두 누를 내리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태자가 먼저 찻종을 쥐니 그제야 미함도 차 맛을 보았다.

“전하, 그간 별고 없으셨습니까?”

슬슬 미함이 운을 떼었다. 태자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현군도 별고 없었는가.”

“흠, 제 신변은 언제나 낙락하지요. 너무 낙락해 문제지요. 아시려는가 모르겠으나, 황후 마마의 하교로 연회 내내 금성에 발을 붙이지 못하고 사택에 머무르다 오늘에야 입궐한 참이라 더욱 그러했지요.”

‘어쩌라는 건지.’

태자는 무시하고 손등을 위쪽으로 하여 찻종을 입가에 가져갔다. 불만 있으면 황후에게 말하지 왜 저한테 지랄인가 싶은 것이다.

“근자에 사신 왕조오와 사적인 왕래가 잦으시다 들었습니다.”

“아. 그자가 누구 못잖게 말이 많아 벗으로는 되레 언중한 자를 선호하더군.”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오르듯, 언중한 자야말로 속내는 천길 물속만큼이나 어지러운 법이더이다. 전하께오서도 외딴 꿍꿍이 없이 누군가와 어울릴 분이 아니라고 사료됩니다만.”

여전히 말을 삼가는 기색이 없다. 태자가 묵묵히 잔을 내려놓았다.

“왕조오는 예국의 실세 중의 실세이며, 현 세태에서 대의를 도모하고자 한다면 그만큼 힘을 실어줄 인물도 둘은 없을 테지요. 그에 전하께오서 비밀히 꾸려온 백전계(百全計, 안전하고 빈틈없는 계책)를 미리 엿본 듯 감격을 감출 수 없었나이다.”

“해서, 지금 나의 행로에 슬쩍 발을 담가보겠다는 건가?”

“신은 도박에는 자신이 없습니다. 아니, 외려 잡기 따위에 안중을 두거나 현물을 쏟는 일이 치가 떨릴 만큼 싫습니다. 허나, 이번 한 번만 태자께 이 나라의 장차를 걸어 보겠다는 것입니다.”

“왜지.”

태자는 미묘한 각도로 윤색한 두 눈을 내리떴다.

“나의 무얼 믿고 이 나라의 미래를 걸겠다는 거지? 현군은 내게서 무엇을 보았나?”

“분노를 보았습니다.”

미함은 똑바로 태자를 마주 보며 말을 이었다.

“이 나라의 제도와 법도를 향한 분노, 기득권의 지배와 규제 아래 제대로 숨조차 쉬지 못하고 착취당하는 백성들을 그저 바라만 봐야 하는 현실을 향한 분노, 가문 인통에 얽매여 꼭두각시와 다를 바 없이 살아온 스스로를 향한 분노. 또한… 자식을 한갓 끄트럭으로 여겨 입맛대로 권력의 희생양으로 삼는, 어머니를 향한 분노.”

태자가 움직임을 멈추고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미함을 바라보았다. 그는 상대를 빗대어 교묘히 스스로의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었다.

미함의 어머니인 화소 태후는 옥명 황후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은 권력욕의 화신이었다.

“…얼마 남지 않았다.”

두 자나 되는 길이의 손톱을 평생토록 자신의 목숨처럼 부지하던 태후는, 그 욕심의 산물이 세월을 못 이겨 산산조각으로 깨어지고 나서야 막내아들의 뺨을 쓰다듬어 주었다.

“나에게도, 황상에게도, 시간은 언제나 부족하구나. 나의 사랑스러운 아들, 고약한 나찰녀의 꾐에 넘어가 이 나라의 산제물이 되어버린… 가엾은 너의 형님을….”

어머니는 욕심 많고 잔인한 여인이었다. 병권과 세를 잃고 나서도 지독한 욕망의 불씨는 도통 수그러들 줄 몰랐다. 한때 그녀의 손짓 한 번에 멸문하는 집안이 부지기수였다. 혀 끄는 소리에도 줄초상이 났다. 그러한 그녀의 욕망과 권력을 고스란히 빼앗은 사람이 지금의 옥명 황후였고, 사람만 바뀌었을 뿐 상황은 악화되었다.

미함은 맞은편의 청년을 잠자코 주시했다. 홀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황후의 허수아비, 연치유충에 까막바보에 추악한 외모로 저문한 그이지만 실제로 본 황태자는 무엇도 그와 같지 않았다. 얼어붙은 바다처럼 연푸른 눈동자 아래, 서늘하고 오만한 제왕의 결기를 단단히 가두고 있었다. 참으로 정려한, 강렬한 자존의 열기를 거침없이 내쏘는 천진한 눈이었다. 미함은 자신의 비범함으로 태자의 비범함을 알아챘다. 자신의 외로움으로 태자의 외로움을 눈치 챘다. 그가 아무도 모르게 홀로 걸어왔을 모멸의 삶을 마치 나의 것처럼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모후를 닮아 야욕이 넘치는 사내였군.”

묵직한 한마디에 미함이 허를 찔린 듯 박장대소하였다.

“그 말씀 그대로 전하께 돌려드려도 되겠습니까?”

“…….”

“참으로 다행이지 않습니까. 모리배와 멍청이가 판치는 벽해, 이에 숨죽이고 빈틈을 노리던 이가 나 하나뿐이 아니었다는 사실 말입니다.”

미함은 소탈하게 웃고는 태자를 향해 거풋한 몸짓으로 큰절을 올렸다.

“신, 원주 미함, 화소 태후와 규종 공의 장자이자 다향원의 주인으로서 벽해국의 황태자 전하께 군신의 주청을 올리나이다. 앞으로 전하께오서 가시는 어떤 길에든 신이 동행하겠습니다. 부디 무엇에도 꺾이지 않는 성군이 되시길.”

그리고는 소맷부리에서 서신 한 장을 꺼내어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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