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색련-79화 (79/111)

#79

손바닥 뒤집듯 바뀌어 버린 사내의 반응에 믿을 수 없다는 듯 한동안 굳어 있던 태자가 이어서 천천히 면사를 벗어 내렸다. 새하얀 이마가 환한 햇빛 아래 투명하게 드러나고, 청신한 산바람이 시원스레 골을 타고 마당을 훑었다. 사내의 시선이 느리게 태자에게로 향했다. 사내는 아직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태자를 바라보고 있었으나, 이전처럼 독살스러운 기운은 온데간데없었다.

사내를 바라보고 있던 태자의 시선이 문득 옆의 홍의에게로 가 닿았다. 그리고 이상스럽다는 듯 고운 눈살이 살짝 꿈틀거렸다. 홍의가 아주 천천히 무릎을 굽히고 몸을 낮추더니, 이내는 쪼그리고 앉은 형태로 전신을 오그렸기 때문이다. 태자가 두 눈을 깜박거리며 황황히 쳐다보았다. 홍의가 그 쪼그려 앉은 자세로 기우뚱기우뚱 열심히 사내 쪽으로 다가갔다. 염려되었던 태자가 움직이려 하자 쇳소리를 내며 돌아본다. 거기 가만히 계시라고, 그 매몰찬 표정이 말하고 있었다.

사내는 홍의가 요상한 모양새로 다가드니 다시 경계심이 일어 온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도로 씨근대기 시작했다. 홍의는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는 바다처럼 깊고 하늘처럼 높은 푸른 눈동자에 지그시 눈을 맞추었다. 사내에게서 왈칵 풍겨 나는 고린내에 인상을 찡그릴 법도 하련만, 되레 입가에 잔잔한 미소까지 띠며 진중하고도 나지막한 옥음으로 이르는 것이다.

“괜찮습니다, 마마. 아무도, 무엇도 해하지 않겠습니다.”

그에 잔뜩 구겨져 있던 사내의 얼굴이 천천히 원래의 형태로 돌아왔다. 홍의는 그런 사내를 지나쳐, 이제는 아주 엉금엉금 기기 시작했다.

‘홍의가….’

지켜보던 태자는 고개를 모로 기울이고 착잡한 얼굴을 했다.

‘미친 걸까….’

그러거나 말거나 마침 다 스러져 가는 마루 아래로 기어간 홍의가 튼튼한 엉덩이를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상체를 내리고 흙바닥에 볼을 바싹 붙였다. 그러자 마루 밑, 어둡고 웅숭깊은 그곳에서 노랗게 번뜩이고 있던 두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

사아악, 동공을 조인 채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는 것은 겁에 질린 삵이었다. 목화송이처럼 보송보송한 아기 삵들을 품 안에 가득 싸안고 마루 밑 깊은 곳에서 홍의를 노려보고 있었다.

***

커다란 가마솥에 닭백숙이 푸짐하게 익어 갔다. 희붐한 연기로 좁은 마당이 가득 찼다.

끼이잉. 끼잉.

검둥개들은 어울리지 않는 가녀린 음색으로 쌕쌕 목으로 울고 있었다. 졸지에 고목 둥치에 묶여 오도 가도 못 하는 신세가 한스러웠기 때문이다. 특히나 잔뜩 앵돌아진 돌치는 그 좋아하던 생닭다리를 던져 줘도 무반응이었다.

“…옥지야.”

그런 돌치 앞에 주저앉아 안쓰러운 표정을 짓고 있던 화경이 문득 뒤를 향하여 불렀다. 마루에 앉아 있던 옥지가 영혼 없이 답하였다.

“예.”

“돌치 삐쳤다.”

“예.”

“…….”

“에그, 어찌 이리 말랐을꼬? 젖을 먹이느라 살이 내렸느냐? 으응? 이것이 먹고 싶어? 어머나, 이도 성치 않은 것이…! 이리 안쓰러울 데가 있나.”

마루에 걸터앉은 옥지는 비쩍 마른 어미 삵에게 야들야들한 닭고기를 발라 먹이며 사력을 다해 돌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목줄에 매인 채로 그런 옥지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깜치가 이내 몸을 둥그렇게 말고 아랫배에 머리통을 숨겼다. 차라리 안 보는 것이 상책이라고 여긴 모양이었다.

쩝, 입맛을 다시던 화경은 훌쩍 일어나 다시 마당으로 향했다. 마침 병사들이 새로운 지붕을 삼겠다며 마당에 볏짚을 펼쳐 두고 새끼 꼬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오래 묵어 썩어 버린 지붕이 마당에 아무렇게나 널려 있었다. 그 위에 사뿐 올라간 어미 삵이 몸을 길쭉하게 늘여 기지개를 켜고는 인형처럼 동그마니 앉아 골골거리며 햇빛을 쬐었다. 처음에는 어미의 품에서 벗어나길 두려워하던 새끼 삵들도 호기심을 못 이겨 꼬물꼬물 마루 밑을 빠져나왔다. 이곳저곳 아무렇게나 널린 지푸라기와 볏짚은 삵들에게 놀이터나 다름없었다. 경계가 한껏 풀린 어미 삵도 팔자 좋게 늘어져 제 몸을 단장하였다. 이 삵은 오래 사람 손을 타서인지 야생성이 무뎌 그야말로 애살스런 고양이와 꼭 같았다. 보아하니 오래전 다리 한쪽을 다쳐 높은 곳에 오르지 못하고, 그를 안타깝게 여긴 사내가 거둬 기른 듯했다.

아까부터 삵의 매력에 홀딱 빠져 버린 옥지는 하아, 한숨 소리를 내었다. 저것 딱 두 마리만 태자궁으로 데려다가 키우면 소원이 없겠다 싶은 것이다. 그릉그릉 목을 울리며 눈을 꼭 감고 꾸벅꾸벅 조는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꼭 감긴 두 눈이 붓으로 그려 뺀 듯 어여쁘다며 옥지는 가슴께를 부여잡고 계속 삵 앞에서 서성거렸다. 그 모습을 멀리서 내다보던 돌치가 앞발로 흙을 파 댔다. 특히나 옥지를 잘 따르고 좋아했던 깜치는 아예 야생 늑대가 동료를 향해 부르짖듯 목을 길게 빼고 애달피 울기 시작하였다.

“얼씨구.”

그 꼴에 병사들이 고개를 설레 저으며 일시에 웃었다.

양손에 퉤퉤 침을 뱉어 기름기를 제거하고 손바닥으로 싹싹 새끼를 꼬던 병사가 문득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전하 곁에 병사 하나 없이 괜찮으실까요?”

화경이 시큰둥이 대꾸했다.

“근위 향선께서 지키고 계시니 염려 말거라.”

그러자 지난번 방문 때 그 자리에 자빠져 소피를 지릴 뻔했던 신입 병사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홍의 님이 함께 오셔서 다행입니다.”

“…맞아. 볼수록 소탈하고 좋은 분이야.”

“암만, 이래저래 홍의 님이 계셔서 참 다행이지.”

물꼬라도 트인 듯 나머지 병사들도 잇달아 맞장구를 치기 시작했다.

“사실 요새 태자궁 분위기도 그렇고 말이야. 이제야 좀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것 같지 않아?”

“그러게. 본디 황후 마마가 태자궁 전체에 내린 함구령 때문에 찍소리도 못 내고 각자 할 일만 했던 게 엊그제 같거늘. 하여 우리 태자궁이 저승사자 소굴이라고 허튼 소문이 난 게 아닌가.”

“하하, 홍의 님 오고부터 태자 전하께서도 어지간히 말랑말랑해지셨지. 엊그제는 맨발로 돌아다니던 아이종을 불러다 손수 가죽신까지 신기시더라니까?”

부하들이 무어라 새살을 까든 새끼 꼬는 데 집중하겠다는 듯 화경은 말이 없었다. 그러나 남몰래 일손을 멈추고 문득 고개를 쳐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의 입가도 사르라니 풀려 있었다.

***

집터에서 내려 조금쯤 산을 헤치자 골짜기를 흐르는 실개울이 나타났다. 홍의는 직접 사내의 손을 잡고 물속에 들어가 땟국이 줄줄 흐르는 굽은 등과 목덜미를 우악스런 손놀림으로 닦아 주었다. 갑작스러운 냉수마찰과 겨드랑이 안쪽까지 푹푹 파고드는 낯선 손길에 사내가 기함하였다. 단말마의 비명을 놓던 그가 도망가려 안간힘을 쓰니, 아예 다리 기술로 몸을 포박하여 물속에 앉혀 놓고 된소리를 퍼부으며 박박 씻겼다.

“아이고, 말세가 따로 없지, 서캐가 한 되에 옴이 한 말이구먼.”

“억. 억.”

“억억거리지 말고 가만히 좀 계십시오! 내 오늘 이놈의 옴 붙은 몸뚱어리 머리부터 발끝까지 번뜩번뜩 광을 내고 말 터이니.”

태자는 너럭바위에 양반다리로 앉아 한쪽 무릎에 팔꿈치를 딛고 턱을 괸 자세로 그 광경을 잠자코 바라보고 있었다. 뭘까.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사내의 온순한 모습이었다.

‘그러고 보면, 너무 갑자기 공격적으로 돌변하기는 했지.’

마치 다른 사람이 된 양, 어느 날 갑자기 짐승처럼 공격해 오는 그에게 참담함을 느꼈던 것이 딱 삼 년 전이었다. 본디는 태자가 찾아올 때마다 기뻐서 어쩔 줄 모르던 그였다. 달에 한 번, 어렵사리 태자가 들를 적이면 투박한 손길로 화관을 엮어 주곤 하였다. 곱은 몸으로 열심히 나무를 타서 새큼한 열매도 따다 주곤 하였다. 그는 이곳에 와 진정으로 행복한 듯 보였다. 몸은 컸어도 머리는 아직 일곱 살 배기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는, 다른 사람들보다 많이 부족한 그였다. 그만큼 순수하였다.

이제 두 번 다시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지 못하리라 여겼었는데. 그런데 그토록 급변한 이유가 고작.

“…겨우 삵 때문이었다고?”

마침 사내의 발을 잡아채어 발가락 사이사이를 녹두 거품으로 문지르고 있던 홍의가 팽 콧방귀를 뀌었다.

“겨우 삵 때문이라니요. 만일 전하께서 말씀도 못 하는 처지에 검둥개들과 더불어 의지하며 살고 있는데, 갑자기 칼 든 병사들이 호랑이 몇 마리를 대동한 채 집에 쳐들어온다면 어찌 반응하시겠습니까?”

“…….”

볼을 받치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가, 입술이 절로 삐죽 튀어 나갔다. 태자는 그 채로 한참 골똘히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훌쩍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가반도 제대로 걷지 않은 채 그대로 물가로 들어왔다.

인중을 쥐여 잡혀서 잇몸을 훤히 까 드러낸 채 죽염 묻힌 홍의의 손가락으로 앞니를 벅벅 닦이며 비명을 지르고 있던 사내가 멈칫하며 태자를 돌아보았다. 홍의도 하던 것을 멈추었다.

지척까지 다가온 태자는 한참 말이 없었다. 물끄러미 사내를 보다가 흐르는 물을 손에 묻혀 툭, 사내의 얼굴을 향해 가볍게 뿌렸다. 사내가 웃을 듯 말 듯 얼굴 근육을 찡긋거렸다.

“말, 안 잊었어?”

“…….”

질문의 의미를 얼마간 헤아리는 듯 곰곰 생각하던 사내가, 이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홍의가 조금 의외라는 듯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벽해 말을 알아들으시는군요.”

“어릴 때도 말을 할 줄은 몰랐지만 들을 줄은 알았어.”

태자는 고개를 조금 기울이고 집요한 눈으로 사내를 보았다.

“삵 때문이었어?”

느리지만 또박또박 선명하게 묻자, 사내는 잠깐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부터 키웠어.”

사내는 손을 들어 올리더니 한참 동안 손가락을 곱혔다가 폈다가 반복하다가 이내 세 개를 펴 보였다. 딱 삼 년이 되었다는 뜻이었다.

태자가 이맛살을 확 찡그리더니 사내를 노려보았다.

“병신.”

“…….”

“병신 꼽추 새끼.”

기함한 홍의가 동그랗게 눈을 뜬 상태에서 눈알만 뙤로록 굴려서 사내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는 사이 이미 태자는 홱 몸을 돌려 물을 헤치고 뭍으로 나아가는 중이었다.

‘서, 설마… 저런 욕설을 알아들으셨을까?’

아니길 바랐지만, 기어이 사내의 입술이 위아래로 삐죽빼죽 뒤집어지는가 싶더니 푸른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완벽히 이해한 모양이었다.

어휴, 허공을 향해 고개를 설레설레 젓던 홍의는 이미 저 멀리 점이 되어 버린 태자의 뒤태를 흘겼다.

‘으이구. 저 더러운 성질머리하고는.’

아무리 그래도 멀쩡한 이에게 병신이라고 욕하는 것과 진짜 곱사등이에게 병신이라고 하는 것은 차이가 있지 않나. 홍의는 착잡하게 사내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숙인 채 눈물 콧물을 질질 흘리며 끅끅 울음을 놓는 모습이 여간 가련한 것이 아니었다.

“괜찮습니다, 황자 마마. 태자 전하께서도 잠깐 노여워 그러신 것이지, 진담으로 하신 말씀은 아닐 겁니다.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버리세요, 예?”

홍의의 마딘 손이 사내의 얼굴을 쓸어 눈물을 훔치고 마지막으로 콧물까지 암팡지게 쏙 뽑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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