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연무장 근처의 한데우물에서 시원하게 등목을 마친 홍의는 상의를 꿰입으며 앞서 걷기 시작했다. 마침 뒤에서 장승처럼 버티고 서 있던 해운이 슬렁슬렁 따라붙는다. 그렇게 다향원 홍살문을 넘어서 후궁들의 별전을 지나 후미진 곳에 당도해서야, 채 매지 못한 요대를 갈무리하며 뚱하게 돌아보는 홍의였다.
“용건이 무언가?”
고목이 우거져 녹음이 짙은 곳이었다. 감나무와 밤나무가 가지를 뻗치고 둘러싼 너렁청한 뜰 너머로 황실의 서고가 외따로 놓여 있어 유난히 고요하였다. 풀잎을 밟는 소리마저 사박사박 울릴 정도였다. 그러한 곳에서 해운과 단둘이 마주하려니, 홍의는 순간적으로 기분이 조금 이상야릇했다. 해운과 태자는 씨가 다르긴 해도 형제였고, 둘 다 외탁을 해서인지 얼굴의 요모조모와 몸집, 풍겨 내는 기운조차 몹시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전하께서 눈동자가 검다면 이런 느낌일까. 그리고 이놈처럼 날 때부터 만인의 귀애를 받았다면 똑같은 개차반이 됐을까.’
분명히 그랬을 것 같다. 신통 가문의 사람치고 성격 좋은 인간을 못 봤으니까. 홍의는 무언가 미심쩍은 눈빛으로 연신 해운의 위아래를 훑어 살폈다. 못 본 사이에 해운의 눈빛이 많이 차분해져 있었다.
“…더는 태자와 척을 지고 싶지 않다.”
해운은 긴 침묵 끝에 말했다. 의외의 발언에 홍의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
간밤의 일이었다. 가문의 중추들이 황후궁의 집무실에 모였다. 노수의 부모인 희종 공과 윤명은 물론, 사염의 부모와 재상들까지 총동원하여 들고 일어날 기세였다.
마침 사가에서 쉬고 있던 대윤과 해운도 족친들의 서슬에 어쩔 도리 없이 앞장을 섰다. 팔불출 대윤은 몰래 황후에게 사자를 두어 이 같은 사실을 예보했다. 그 와중에 윤명은 화장기 없는 소복 차림을 갖춘 채 시종들에게 업혀서 입궁했는데, 곧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비틀대던 그녀가 황후의 안전에 들자마자 수행인들을 밀쳐 내며 육성으로 악다구니를 쓰는 꼴은 제법 흥미로웠다고 할 수 있었다.
‘황후 마마! 꽃다운 노수의 몸에 어찌 그런 이적의 글자가 새겨질 수 있단 말이옵니까? 염병 역이라니요! 나병 역 자라니욧! 태자께서 저희 부부의 귀한 장자를 문둥병자 취급으로 내모는 것과 다를 게 무엇이옵니까!’
‘어허, 존전에서 말씀을 가려서 하시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그리 경박하게 목청을 높이고.’
‘군우령! 지금 자네 아들은 말짱하다고 강 건너 불구경하는가?’
‘그래요! 그 집 장자인 해운이가 이런 기괴한 꼴을 당했어도 그런 말씀이 나오시겠습니까?!’
‘아 물론 귀한 아들이 그리 해괴한 꼴을 당했으니 게거품을 무는 것도 이해하는 바요. 하지만, 이게 황후 마마 탓이오? 다 그 홍의라는 사특한 놈 때문에 벌어진 일이잖소. 그 천박한 놈이 순진한 태자를 부추겨 이 같은 사달을 자초한 것인데, 어찌 이리 떼거지로 몰려와 애먼 황후 마마께 마구발방을 한단 말이오?’
‘하! 그 하잘것없는 칠별관 문성의 아들을 말하십니까? 그깟 미꾸라지 한 마리의 분탕 놀음에 우리 신통의 결속이 흐너진다면, 이 또한 우리 가문의 수모인 황후 마마께서 적시해야 할 사안이 아니던가요?’
‘윤명의 말이 옳아요. 문성의 아들을 마땅히 일벌백계로 다스려야 함은 이미 논할 가치도 없는 별도의 수순과 같소이다. 군우령은 괜히 나서 논점을 흐리지 마시오. 지금 우리가 고변코자 하는 일은 우리 가문의 결속과 권위의 문제이니.’
황후는 계속 차가운 눈빛으로 듣기만 했다. 사염의 아비인 태숙 공이 부복하여 이었다.
‘황후 마마. 이토록 참담한 실정에 경악을 금치 못하는 가신들의 마음을 부디 헤아려 주시옵소서. 아무리 태자의 위가 태산 같다 한들 일말의 절차도 없이 재상의 자제들에게 이리 패악을 부릴 수는 없는 일이옵니다. 지금껏 가문 사람들이 태자의 수많은 기행을 번연히 알고도 모르는 척했던 이유는 오롯이 신통의 존속을 위해서였사옵니다. 헌데 장차 신통의 수장이 될 태자께서 남색이라는 악취미에 빠져 신통을 등지시다니, 이야말로 신통의 앞날이 풍전등화의 처지에 놓인 것과 다르지가 않사옵니다.’
‘마땅히 그러하옵니다! 황후 마마! 이러한 태자께서 향후 옥좌에 오르신다면, 저희들은 누구를 믿고 어디에 충성을 바쳐야 한단 말입니까!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패악? 악취미?’
가신들의 말말에 뒤섞인, 감히 태자를 욕보이는 가당찮은 수식언이 거슬려 황후는 짐짓 이맛살을 찌푸렸다. 물론 황후도 태자궁에서 벌어졌다는 인간 과녁 놀이를 처음 들었을 때는 경악을 금치 못했었다. 그러나 노수와 사염이 먼저 태자의 사람인 홍의에게 시비를 붙였고, 그 과정에서 태자를 모욕하는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고 했다. 배라먹을 것들이 어디서 함부로 주둥이를…! 그에 심기가 뒤틀린 황후는 사염이 오줌을 지리고 노수가 염병쟁이 꼴이 되었다는 사실에 슬그머니 입꼬리를 올렸지만, 어쨌거나 티 낼 수는 없어 숨죽이고 족친들의 행보를 관망하던 중이었다. 결국은 이렇게 황후궁까지 들이닥쳐 과정은 쏙 빼놓고 결과만을 들먹이며 용천지랄을 해 대니 분노의 주먹이 절로 떨리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태자의 역성을 들었다가는 네 자식 내 자식 편을 가르자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황후는 잠시 명상에 잠겼다.
‘…천금보다 귀한 장자가 기괴한 꼴을 당했으니, 그 통렬함을 어찌 말로서 다 표현하겠는가. 내 국모로서 만분 이해하는 바이다.’
엄숙하게 읊조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한 명 한 명 지긋이 노려보았다.
‘허나, 그대들이 간원하는 바가 정확히 무엇인지 헤아리기 어렵도다. 그대들은 정녕 무엇을 얻고자 오밤중에 황후궁까지 쳐들어와 단체로 우네부네하는 것인가?’
윤명은 아득바득 이를 갈며 붉은 눈으로 황후를 쏘아보았다.
‘시간을 되돌리지 않는 한, 이 통렬함이 씻겨 나가겠습니까?’
‘…….’
‘소녀, 황후 마마의 명으로 이팔의 나이에 몸도 다 추스르지 못한 채 젖어멈이 되어 금성에 들어왔습니다. 그 채로 황후 마마의 잉첩이 되어 황제를 모셨습니다. 우리 위소,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소중한 딸아이를 태자께 바치라기에 지체 없이 명을 받들었습니다. 모든 게 다 황후 마마를 위해서였습니다…! 국모로서 이해한다고요? 나를 이해한다고요…?’
윤명의 음성이 떨리기 시작했다. 모두가 숨을 죽였다. 황후의 신색이 얼음장처럼 굳었다.
‘언니는 이해라는 말을 써서는 안 돼요. 내가 언니를 믿지 말았어야 했어요. 자기 자식에게조차 그토록 매몰했던 여인이, 어찌 남의 자식까지 살필 수 있단 말이에요!’
‘그 입.’
‘…….’
‘인두로 지져 주랴?’
황후는 웃고 있었다. 두 눈을 부릅뜬 채 입꼬리만 말아 올린 채 웃고 있었다. 그것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소름이 돋고 정신을 아뜩하게 만드는 기괴한 웃음이었다. 모두가 공포에 질려 순간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윤명조차 함부로 세 치 혀를 놀린 스스로의 아둔함을 깨닫고 안색이 창백해졌다.
‘향선 노수를 대령하라.’
‘예, 황후 마마.’
그 산뜻한 명령에 윤명은 흉중이 쩍쩍하고 갈라지는 것 같았다.
다향원에서 안정을 취하고 있던 노수가 영문도 모른 채 황후궁 안뜰에 끌려오기까지 일각도 걸리지 않았다. 노수의 앞으로 숯과 인두가 놓이는데도 사람들은 갑자기 벙어리가 된 마냥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병사들을 물리고 황후가 직접 인두를 쥐었다. 보다 못한 대윤이 황급히 황후의 앞을 가로막았다.
‘과하십니다.’
‘윤명이 선을 넘었소.’
‘…….’
더 이상의 문답은 무용했다. 황후는 노수의 상의를 벗기게 하였다. 온 얼굴이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질린 노수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불안하게 데굴거렸다. 황후는 뜨겁게 달아올라 붉은 불티를 훨훨 날리는 인두를 친히 들어, 태자의 필체가 고스란한 노수의 가슴팍에 꾹꾹 눌러 지졌다. 귀가 찢어지는 비명 소리와 함께 누린내가 풍기며 생살을 태우는 연기가 검푸르게 솟구쳤다.
‘이게 내 답이다.’
비명을 지르던 노수가 힘없이 졸도하고, 윤명은 얼혼이 빠져나간 얼굴로 풀썩 주저앉았다.
이미 전의를 상실한 희종은 아까부터 눈도 들지 못한 채 온몸을 떨고 있었다. 황후는 찬찬히 가문 사람들을 돌아보며 뇌까렸다.
‘굳이 시간을 되돌릴 필요가 무에 있느냐? 이리 해 놓으니 그 숭한 글자가 보이지 않아 더는 거슬림이 없구나. 헌데도 나를 탓할 말이 남았느냐? 지금 노수 하나 다쳤다고 태자를 폐출하고, 태후와 결속하여 정통 사람을 추대하기라도 하겠다는 것이냐?’
‘마, 망극한 말씀이시옵니다! 저희들이 어찌 감히 태자 전하의 향후를 쟁론하겠나이까!’
해운은 황급히 노수에게 달려가 스러지는 사촌 형제의 몸을 받쳤다. 뒤집힌 흰 자의 실핏줄이 다 터져 있었다. 아닌 척해도 본디는 잔정 많은 성격인 해운의 눈시울로 뜨거운 눈물이 휘적시고 돌았다. 노수의 팔뚝을 부러져라 움켜쥐는 그의 손등에 난생 처음으로 어머니를 향한 분노가 발린 핏줄이 툭툭 불거져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