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색련-54화 (54/111)

#54

쐐애액- 퍽!

바람을 가르는 파공성과 함께 화살이 날았다.

누구도 주인의 허락 없이 틈입할 수 없도록 솟을대문과 후문까지 단단히 빗장을 내린 태자궁의 안뜰이었다. 충성스러운 사냥개들이 미끈한 근육으로 이루어진 검은 몸뚱이로 어슬렁어슬렁 사위를 돌았다. 각자 매실나무와 살구나무의 둥치에 옴짝달싹 못 하도록 꽁꽁 묶인 노수와 사염은 이미 반쯤은 얼이 나간 상태였다.

태자의 얼굴과 표정은 검은 면사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그는 말없이 팔십 간 거리의 사대에 서서 쇠로 만든 커다란 정량대에 살을 걸었다. 그리고 목판으로 된 과녁 대신 둥치에 묶인 인간을 향하여 시위를 겨누었다. 면사를 얼굴에 두르고 사예를 하는 이는 대명천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과녁이 제대로 보이기는 하려는가? 이러다 고슴도치가 되는 거 아니야?’

두려움에 파르르 턱을 떠는 사염의 눈과 코와 입에서 물이 주룩주룩 쏟아졌다. 구석에서 지켜보는 홍의 또한 안색이 허옇게 굳어서 말릴 엄두도 못 냈다. 이미 시위를 당기고 있는 태자를 섣불리 건드렸다가 행여 살을 놓치기라도 하면 어쩐단 말인가? 그리하여 쏜 살이 저들의 몸뚱이에 꽂히기라도 한다면…. 이도 저도 못 하고 그저 신음 같은 소리만 내뱉는데, 정면을 향한 태자의 면사 틈에서 푸른 안광이 번뜩이었다.

쐐애액- 퍽!

“으헉!”

“히익!”

“크윽!”

사염과 노수뿐만 아니라 홍의, 그리고 나머지 궁인들에게서도 외마디 앓는 소리가 동시에 터졌다. 시위를 떠난 화살은 정확히 사염의 귀를 홱 스치며 둥치에 퍽 꽂혀 들었다. 살이 귓전에서 파르르 울었다. 등줄기에 마른땀이 돋았다. 사염은 결국 죽음의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묶인 채로 서서 까무룩 혼절하고 말았다. 입가에는 거품이 물려 있었고 오줌을 지린 바짓가랑이가 축축하게 젖어 들고 있었다.

“전하, 저자들에게 벌을 내리시려거든 그에 맞는 법도와 절차에 준하소서!”

벌써 또 다른 살을 찾고 있는 태자를 보다 못한 홍의가 달려가 필사적으로 아뢰었다.

“빗겨 맞히려다 자칫 즉사 부위에 맞기라도 한다면 그땐 어찌하려고 이러십니까!”

“빗겨 맞히려는 게 아니라, 빗나간 거다.”

태자는 여상하게 답을 하더니 정량대를 화경에게 넘기고 대신 칼을 건네받았다. 배릿한 쇠 냄새를 풍기는 칼날이 서슬 퍼런 빛줄기를 뿌리며 드러났다. 태자는 칼끝을 아래로 늘어뜨린 채 노수에게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노수는 온몸의 터럭이 쭈뼛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그야말로 낮도깨비의 형상을 한 태자가 한 발 한 발 가까워지는데, 차라리 사염처럼 기절이라도 하고 싶었다. 조금 전 홍의를 몰아붙이던 기세는 어디로 갔는지, 노수는 떨리는 잇새로 울음을 삼키며 거의 깔딱깔딱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왜….”

어느덧 사람 형상을 한 괴물이, 신통의 가장 큰 우환이자 재앙으로 통하는 그 무시무시한 태자가 한 보 앞까지 와 있었다. 새파란 칼날이 보였다. 태자의 등 뒤로 시커먼 검둥개도 보였다. 검은 면사 안에서 울울하게 잠긴 저음의 음성이 새어 나왔다.

“왜, 너희들은 늘 이렇게 거슬리게 굴지.”

“사, 살려 주십시오…. 살려 주십시오, 전하.”

“왜.”

“…….”

“왜 네가 살아야 하는데.”

노수는 공포에 질리다 못해 정신이 나가 버렸다. 초점 없는 눈으로 쌕쌕 쇳소리를 섞으며 마구발방하기 시작했다.

“저, 전하께서 아무것도 모르시어 그런 것입니다. 호호홍의는, 홍의는 자, 작위도 없는 천박한 놈입니다…. 장차 신통을 이끄실 전하께서 저런 천잡한 놈의 수작에 넘어가시는 것이 저는 그저 아, 안타까워서….”

“…….”

“저는, 향선 노수, 황후 마마의 여동생인 윤명 공주의 첫째 아들이자,… 어어얼마 전 작첩을 받은, 위소의 오라비이자, 그그, 그리고 전하의, 태태태자 전하의 사촌 형제이옵니다…! 제 말을 들으셔야 합니다! 홍의는 작위도 없는… 천박한…! 아아무것도 모르는 전하를 꾀어내어서… 꾀어내어서…… 제 탐심을 누리려는… 극악! 무도한…!”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칼날이 슬슬 노수의 허벅지를 훑고 올라와 가슴께를 지나서 목덜미에 닿았다. 서늘한 쇠 날이 섬뜩하였다.

“그러고 보니 아까 글줄도 모르는 까막눈이 어쩌고 했었지.”

뾰족한 칼끝이 목덜미의 여린 살갗을 살며시 찔렀다. …힉! 노수는 덜컥 숨이 멎는 기분이었다. 피부를 따라 훑어 내리던 차가운 칼날이 앞섶을 헤치고 들어오더니 드러난 맨살에 무언가 그리기 시작하였다.

“아아악!”

와락 검붉어진 얼굴로 노수가 비명을 쳤다. 날카로운 칼끝이 붓이 되어 한 획 한 획 정확하게 글자를 새겼다.

섬벅섬벅 베인 흔적을 따라 붉은 핏방울이 주르륵 흘렀다. 태자가 싸늘하게 명했다.

“읽어.”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자신의 가슴팍을 내려다보던 노수는, 떨리는 음성으로 글자를 읽었다.

“…여… 염병할 역.”

***

‘솔직히 기분이 나쁘지는 않군.’

조금 더 솔직해져 보자면,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너무 좋아서 어깨춤이라도 한바탕 들썩들썩 때리고 싶은 정도였다.

홍의가 금성에 든 지 올해로 구 년째였다. 대부분 재상의 자제들로 이루어진 다향원은 정치의 축소판이었고, 작위로 등급을 매기는 것도 모자라 가문 인통으로도 신분을 나누었다. 툭하면 내남을 변별한답시고 선을 긋고 편 나누기를 일삼는 그들 틈에서 홍의는 눈에 딱 띄는 튀어나온 못이었다. 날이 갈수록 신통의 위세가 더해져 그들에게 돌림쟁이 취급을 당했다. 지난 구 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말이다.

홍의의 아버지 문성은 일찍이 벽해에 예속된 망국의 자손이었다. 때문에 더욱 완벽한 벽해인으로 거듭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고, 속국 출신으로서 드물게도 관직 끄트머리에나마 오를 수 있었다. 홍의는 아버지의 바람대로 다향원에 들었지만 삶은 더욱 팍팍해졌다. 벽해의 귀족들과 그 끄나풀들이 판치는 다향원에서 속국 출신의 아무런 연줄도 없는 하급 귀족 무동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자닝한 세월이었다. 홍의는 뒷짐 지고 노을 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특유의 유쾌하고 낙천적인 성격이 아니었다면 견디지 못했을 일과 시간이었다.

다향원의 벽선각 맞은편에는 다리 없는 커다란 연못이 있었는데, 홍의는 지금도 그곳을 지날 때면 자기도 모르게 어깨를 웅크리고 만다. 열여덟 살 때 신통의 선진들 손에 끌려가 두 시진을 내리 빠져 있었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하, 꼭 뭍에 쓸린 붕어 새끼 같구나. 저 입 구멍 빠끔빠끔하는 것 좀 보라지!’

물을 쥔 채 허우적대다가 숨을 쉬기 위해서 얼굴을 물 밖으로 내밀기라도 하면, 날카로운 칼끝으로 이마를 찌르며 낄낄 웃던 우뚝한 그림자들, 그 시커먼 괴물의 형상.

‘속국 출신 나부랭이! 천박한 무지렁이 병신!’

온몸이 새파랗게 질려 보라색으로 물든 입술을 덜덜 떨던 열여덟의 홍의는, 그 밤에 달래에게 찾아가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지지 마세요. 흔들리지 마세요. 누가 뭐라고 한들 당신은 다향원의 일원이자 돌아가신 어머님의 자랑이 아닙니까?’

따뜻한 물수건이 홍의의 차게 식은 몸에, 난도질당한 자존심에 보드랍게 내려앉았다. 그때 홍의는 이를 악물고 눈물을 훔치며 다짐했다. 다른 이들은 그 더러운 구정물을 헤엄쳐서라도 신통에 섞이길 원하지만, 자신만은 그리하지 않겠다고. 출신과 가문을 뛰어넘어, 반드시 스스로를 증명하고야 말겠노라고.

그해에는 전쟁이 났다. 벽해에 정벌된 망국의 잔당들이 자신들이 추대하는 왕의 핏줄을 선두로 세워 꺼져 가는 심지에 마지막 불꽃을 당겼다. 예리한 급습에 만산성은 함락되었지만 당시 부제 향선이었던 미함의 진두지휘로 가파르게 승세가 올랐다. 그렇게 서로를 찌르고 찢고 갈라 죽이는 피의 바다에서, 아직 소년이었던 홍의는 붉은 홍라 휘날리며 겁도 없이 선봉으로 달려 나갔다. 죽음을 각오한 자야말로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웠다. 이를 눈여겨본 미함이 자신의 재량으로 홍의를 천거하였고, 그때 처음으로 인정받은 홍의는 다음 해 당당히 향선이 되었다.

미함이 원주를 계승한 뒤부터는 신통들도 예전처럼 대놓고 설치지는 못한다지만, 여전히 인통과 출신으로 인한 차별과 멸시는 일상 속에 깃들어 있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십 년 묵은 체증이 한 방에 쑥 꺼진 것처럼 속이 다 시원한 것이다.

거적때기처럼 힘없이 하느작거리는 노수와 사염을 한데 똘똘 말아서 태자궁 바깥으로 휙 던져 버리고 다시 궁문을 잠갔다.

면사 벗은 태자는 아까부터 연신 딴 곳을 보면서 홍의의 시선을 회피하고 있었다.

“전하.”

“…….”

홍의가 찻종을 내려놓으며 지그시 불렀다. 태자는 아예 옆으로 돌아앉고는 제 손톱 끝이나 유심히 보는 척했다.

“전하, 노을이 참 좋지요?”

홍의는 한갓진 표정으로 말을 돌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에 무심코 태자도 하늘을 보았다. 노랗거나 빨갛거나 합하여 주황색이 된 노을이 하늘을 흐르던 구름의 꼬리를 잡고 온 세상을 붉디붉게 넘놀고 있었다. 태자의 푸른 눈동자로 노을이 섞이어 영롱하게 반짝였다.

“꼭 봄 같다.”

태자는 그 놀빛이 언젠가의 봄 같다고 생각했다.

“헌데 이 좋은 날, 왜 그러셨습니까?”

“…….”

몹시 무서운 봄 같았다.

‘…방심했군.’

평시에는 미끈하게 처져 유순하게 보이는 홍의의 눈매가 지금은 전에 없이 꼿꼿해져 있는데, 한순간의 방심으로 그 눈과 시선이 마주치고 만 것이다. 태자는 피할 겨를을 놓치고 그대로 굳었다. 단호히 감쳐문 입매로 빤히 보던 홍의가 문득, 탁상 위에 올라온 태자의 손등을 잡으려고 했다. 태자는 샥 피했다.

“전하.”

“…….”

“어수를 내어 주십시오.”

홍의는 보살처럼 웃고 있었다. 그게 더 무서웠다.

‘…화경.’

태자는 탁상 밑으로 손을 감춘 뒤, 마침 정자 밑을 유유자적 돌아다니고 있는 화경에게 구원의 눈짓을 보내 보았다. 짙고 고운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얘 좀 어떻게 해 보라는 마음의 소리를 전달하려 노력했다. 그런데 뒷짐 지고 모르는 척이나 하는 것이다. 저런 개씹. 녹봉도 아까운 놈 같으니라고. 태자는 슬슬 위기감을 느끼며 푸른 눈동자를 되록되록 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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