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멀뚱히 서서 퉁방울눈만 끔적대던 녹빈이 아유, 왜 이리 장사가 안 되나그래, 말꼭지를 태나도록 돌리며 날아드는 파리를 맨 손가락으로 찹찹 잡아 대었다. 그러나 태자가 거론된 이상 허투루 넘어가 줄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홍의는 부산을 떠는 녹빈을 잠자코 잡죄었다.
“어서 바른대로 고하여라. 전하께서 이따위 완롱물이나 파는 허접스러운 가게를 손수 뒤 봐주고 계신다니, 대체 그게 무슨 의미냐?”
“허, 허접스럽다니? 허접스럽다니! 그리고, 전하께서 아끼는 수하가 벽해에 홍의 한 명뿐인 줄 알아요? 나도 만만찮게 전하의 총애를 받는 몸이니 이러구러 집도 주시고 전답도 주시고 가게도 차려 주시고 하신 게지!”
“…대체 네놈이 무어라고?”
이해할 수 없었다. 인상이 절로 찡그려졌다. 애초에 태자가 녹빈을 태자궁의 시녀로 앉힌 것도 수상스러운 일이지 않은가. 태자궁을 활개 치고 다니는 것도 모자라 다향원까지 쏘삭이며 말짓을 해 대는데 가만히 두고 보는 것도 영 찜찜하고 불쾌했다. 그 와중에 녹빈이 입아귀를 비틀더니 헝하고 콧방귀를 뀐다. 표정도 독살 맞게 변했다.
“아 나 진짜 이 나리가 뭘 몰라도 한참 모르시네…. 빈이가 우리 전하께 없어서는 안 될 충복이 되었다는 사실이 그리 고까우셔요? 응? 그러는 나리야말로 전하께 해 드린 일이 뭐예요. 제대로 성교육을 진행하기를 했어, 옥경을 잘 달래 드리기를 했어? 하, 정말이지, 매번 느끼는 거지만 제발 시답잖은 야료 부릴 시간에 뒷물 지고 가래떡이나 잡솨….”
연신 가드락가드락 건들대던 녹빈의 입으로 야무진 돌주먹이 퍽 하고 박혔다. 선지피가 팍 튀었다. 녹빈이 주둥이를 싸쥐고 펄펄 뛰는 동안 시큰둥한 표정으로 주먹을 털어 낸 홍의는 짐짓 콧노래를 부르는 척하며 가판대 위를 살펴보았다. 갖가지 음기구와 춘화도와 약재가 뒤섞여 번잡스럽기 그지없었다.
‘전하께 말씀드려 이따위 가게는 내일 당장 밀어 버리게 해야지.’
녹빈이 들으면 거품 물고 졸도할 생각을 태연하게 해 대면서, 홍의는 새로 나온 춘화집을 훑어보았다. 그러다 문득, 보자기로 꽁꽁 싸매 놓은 종이 뭉치를 발견했다. 얼핏 튀어나온 종이에는 쉬이 의미를 파악할 수 없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만파식(萬波息)…? 이건 무어냐?”
궁금해서 보퉁이를 열어 보려는데, 막 몸을 추스른 녹빈이 달려들어 솔개가 병아리 낚아채듯 보퉁이를 확 가로채었다. 어째 필사적으로 감추려 드는 것 같았다. 수상쩍었다.
“이런 나리 나리 개나리를 보았나! 앵두 같은 내 입술을 짓뭉개 놓고는 이제 물건까지 함부로 뒤지는 거예요? 나리는 빈이 따라다니면서 파흥 놓는 것이 취미여요, 뭐여요?! 아, 나 앞니 흔들려. 웬일이야. 아침부터 피 봤어.”
면경을 들여다보며 질색 팔색을 하던 녹빈은 은근슬쩍 면경과 함께 보퉁이를 가판 아래로 감추었다. 홍의의 눈초리가 슬그머니 얇아지는데, 녹빈은 팔짱을 끼고는 한숨을 폭 쉬었다.
“나리께서도 가래떡만으로는 영 부족하여 이곳까지 온 것이잖아요. 괜한 딴청 부리지 마시고 툭 까놓고 이야기를 해 보시란 말예요.”
“…….”
‘그놈의 가래떡, 돌치가 먹어 치우고 수중에도 없는데 주야장천 타령이구나.’
홍의가 차마 말을 못 하고 돌부리나 걷어차고 있으니 녹빈이 고개를 살래살래 저으며 가판 밑으로 기어들어 갔다. 무언가를 찾는 듯했다. 그러면서 연신 ‘제 눈치가 보통 눈치인 줄 아셔요? 나리는 저 같은 귀인을 만나 운 좋은 줄 아셔요!’ 개코쥐코 떠드는데 콧방귀도 안 나올 따름이다.
이윽고 상체를 일으키는 녹빈의 손에는 향낭 크기의 조그마한 주머니가 들려 있었다.
“열어 보셔요.”
“…이것은.”
주머니 안에는 아까 녹빈이 설명한 면령이 여러 알 들어 있었다. 홍의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녹빈을 바라보았다. 녹빈은 풍류랑의 냉담한 미소를 짓더니, 이내 눈에 잘 뵈지도 않을 만큼 가늘게 뽑아낸 최상급 명주실 뭉치를 들어서 가판 위에 턱 하니 내려놓았다.
도무지 관계성이 없는 두 종류의 물건을 같이 내어놓는 이유가 무엇인고. 홍의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갸웃하는데, 녹빈이 면령 한 알과 명주실 한 올을 각기 잡아 코앞에 들이대었다.
“요 실을, 면령에 꿰는 겁니다. 면령에.”
“…….”
“주렁주렁.”
“…주렁주렁?”
“주렁주렁!”
“…….”
“…….”
의외의 소득이었다.
***
“빨아라.”
“…….”
“있는 힘껏.”
“…….”
“헐떡거리면서.”
나지막이 읊조린 미함이 가리킨 곳에는 어마어마한 양의 빨랫감이 야트막한 동산을 이루고 있었다. 영혼이 빠져나간 얼굴로 망연히 굳어 있는 홍의의 옆으로, 마침 체련을 마친 새옹과 무동들이 아이고, 수고하십니다, 손을 들어 올리며 지나치려 했다. 홍의는 새옹의 정복 끄트머리를 간절하게 움켜쥐었다. 새옹이 신선처럼 인자하게 웃어 보인다.
“본인이 뿌린 씨는 본인이 직접 거두어야 하는 법이지요.”
그래. 네놈한테는 기대도 안 했다. 이번에는 호소력 짙은 눈빛을 쏘며 무동들의 동정심을 자극하려 했지만 모두 티 나게 흠칫거리며 시선을 회피할 따름이다. 배은망덕한 놈들. 주먹 쥐고 부들거리고 있는데 미함이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행여 다른 이에게 도움을 받았다가는 내 손수 네놈을 빨래해 버릴 테니 그리 알아라.”
“…여부가 있겠습니까.”
한숨처럼 답하고 어깨를 축 늘이는 홍의였다. 답도 없는 상황이었다.
딱! 딱! 딱!
무릎 아래까지 바짓단을 꼼꼼히 접어 올리고 소매도 팔꿈치까지 돌돌돌 말아 접은 뒤, 홍의는 힘찬 방망이질을 시작했다. 물을 잔뜩 먹고 무거워진 옷가지를 들어 올리려니 팔뚝에 알통이 울룩불룩 솟았다. 이러려고 키운 몸이었던 것일까. 양손으로 북북 주무르다 보니 갑자기 부아가 확 치밀었다. 자신은 이토록 모진 핍박과 고된 노동 속에 홀로 고군분투하고 있거늘, 이 사달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전하는 어째 기별 한 통 없는 것인가!
‘부숴 버리겠어.’
코 평수를 넓히고 두 눈을 내리뜬 홍의가 일견 찢어 버릴 기세로 빨랫감을 마구 구타하기 시작한, 그때였다. 별안간 주변으로 불쾌한 소음이 번지는가 싶더니, 빨랫감 위로 희멀건 비단 속곳이 휙 날아와 떨어졌다. 방망이질이 시나브로 느려졌다. 숙인 시야로 검은 정복 자락이 얼핏 휘날렸다. 홍의는 잠자코 숨을 몰아쉬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신통 향선들이 다가서고 있었다.
해운은 보이지 않았다. 독살스러운 원숭이 무리의 우두머리가 보이질 않으니 눈앞의 두 향선의 얼굴만 차근차근 헤아려 보았다. 평시 체련보다도 유오를 좋아하고 즐기는 사염은 제 귓불에 주렁주렁 매단 이환을 만지작거리며 떡꼬치를 씹고 있었고, 아무래도 거만하게 팔짱을 낀 채 코를 쳐들고 있는 노수가 속곳을 내던진 장본인인 듯했다. 홍의는 비딱하게 치든 고개로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뭐냐?”
“보고도 모르느냐? 내 잠방이다.”
지근거리에서 낄낄거리는 사내들에게서 역한 술 냄새가 풍겼다. 대낮부터 코가 비틀어진 꼬락서니들이라니. 순간 확 짜증이 일어난 홍의가 슬슬 인상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네놈의 더러운 잠방이를 왜 내게 내미느냐 이 말이다.”
난데없는 상황에 어지간한 자라면 지레 움츠러들 만도 하련만, 굴신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 홍의의 대찬 눈빛에 사염이 피식 조소를 흘렸다. 노수가 한 발 나서더니 비스듬히 내려다보았다.
“반응이 어째 설미지근하군. 자네가 그토록 사내 양물에 환장을 하고 좋아서 사족을 못 쓴다기에 우리가 선심을 쓴 것인데.”
기도 안 찰 따름이다. 홍의는 화가 나기보다 그저 어이없고 한심하여 헛웃음이 다 났다. 잠시 잠방이를 응시하던 홍의는 그것을 방망이로 조심조심 들어 올려 무척 더러운 것을 다루듯 하면서 에비, 노수의 발치에 내던져 버렸다.
“오늘도 불철주야 헛짓거리를 벌이고 다니느라 노고가 많군. 일 없으니 그냥들 꺼져라.”
그리고 하던 빨래를 마저 하려는데, 검은 태사혜가 불쑥 안전에 쳐들어와 젖은 빨랫감을 꾹 밟으며 비벼 대었다.
“개잡놈의 새끼가 어디서 함부로 주둥이를 놀려?”
“…….”
“얼마 전까지만 해도 쥐 죽은 듯 병신 무지렁이 행세나 하던 놈이, 태자와 붙어먹더니 아주 기고만장해 설치는군. 무동들이 홍의 님, 홍의 님, 하며 따른다고 네놈이 정녕 원주라도 된 듯싶은가? 여태껏 칠별관 하급 귀족 나부랭이가 향선이 된 선례는 없었다. 네까짓 게 우리와 같은 정복을 입는 것 자체가 다향원의 수치이자 모욕인 게야.”
홍의는 순간적으로 눈초리를 가늘게 떴다. 평시 점잖은 언행으로 해운에게 아부나 떨면서 딱히 심한 패악을 부린 적이 없었던 노수를 알기에 더욱 기이하다고 느꼈다. 특히나 이토록 광기에 휩싸인 눈동자는 여태껏 본 적이 없었다. 기득권을 침범당한 신통 귀족의 정당한 분노가 채 감추지 못한 탐욕처럼 자락자락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우리 신통은 하늘이 내린 핏줄로 이루어진 씨족 가문이다. 천박한 네놈이 아무리 섞여 들려 해 봤자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고.”
“대체 누가 어디에 섞여 들려 했다는 말이냐?”
“닥쳐라, 이 더러운 놈!”
파르스름한 눈초리와 부들부들 떠는 몸이 마치 밟아 죽여야 할 벌레를 대하는 듯하여 홍의의 얼굴도 차츰 굳었다.
“애초에 신통의 수장 격인 해운에게 접근하여 결국 태자까지 꼬여 낸 것만 봐도 알 만하지 않은가? 그놈의 더러운 궁둥잇짓은 네 상관인 미함에게나 가서 하란 말이다. 신통까지 쳐들어와 분탕 치지 말고!”
노수는 사납게 일갈함과 동시에 바위에 앉아 있던 홍의의 가슴팍을 퍽 걷어찼다. 부지불식간에 속절없이 얻어맞은 홍의가 뒤넘어 구르며 모래밭에 처박혔다. 명치를 정통으로 차이는 바람에 숨을 멈춘 홍의의 안색이 초지장처럼 새하얗게 질려 버렸다.
“허억. 이, 미친 자식들이….”
등을 곱작 구부린 채 간신히 호흡하려는데, 노수가 코웃음을 쳤다.
“아무리 권력이 탐난대도 네놈은 비위도 좋구나. 그 더러운 몰골의, 글줄도 모르는 천치 태자와 붙어먹다니 말이야.”
내내 조용하던 사염이 다가와 흥미롭다는 듯 두 눈을 빛냈다.
“호오. 홍의의 그 취향이란 것이 나보다도 광범위하고 다양한가 보이. 해서 다음은 누구인가? 태자의 검둥개들인가?”
“…뭐?”
“어서 말을 해 보시게. 부끄러울 게 무에 있는가아악!”
“…….”
뭘까. 아주 짧은 찰나였지만 홍의는 분명히 보았다. 평소 외모 가꾸기에 여인보다도 여념이 없고, 다향원의 누구보다도 아름다움에 집착하던 사염의 눈알이 순간적으로 엄청 추하게 한 치쯤 앞으로 툭 불거졌던 것을. 난데없이 웬 방망이가 날아와 사염의 뒤통수를 정통으로 가격했기 때문이었다. 사염은 머리를 싸매고 억억거리다가 외마디 욕설을 내지르며 뒤를 돌아보았다.
“이런 쌍, 어떤 자식이야?!”
그러나 돌아보기 무섭게 파리하게 굳어 버렸다. 노수도 기함하여 얼어붙었다. 머잖은 곳에 태자궁의 궁인들이 각자 팔뚝만 한 빨랫방망이를 든 채 시립해 있었고, 그 틈으로 얼핏 보이는 시커먼 면사가 바람결에 음산하게 나부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