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색련-43화 (43/111)

#43

궁저탈(弓楮脫)

이튿날, 남천에는 일제히 웃통을 벗은 무동들이 체련에 한창이다. 이레 후 도착할 사신단의 연회에 선보일 기예를 미리 연습하는 중이었다. 번쩍거리는 금모래를 박차고 허공에 뛰어오르자 빛 알갱이가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마침 근처에 빨래를 나온 아낙들의 방망이질에 맞추어 부리는 한 자락 아름다운 춤사위 같았다. 자세가 흐트러지지는 않았는지, 무동들의 몸짓 하나하나를 면밀히 살피며 대열을 돌던 새옹은 문득 한숨과 함께 뒤를 돌아보았다.

홍의는 빙실에 일 년 묵힌 동태눈을 하고 있었다. 너럭바위에 앉아 검집으로 바닥을 짚고 그 손잡이에 턱을 괸 얼굴이 곧 침이라도 흘릴 기세였다. 화양각에서 돌아온 이후 줄곧 저 모양 저 꼴이다. 새옹은 못마땅한 눈으로 자신의 주군을 훑어 살피다가 한숨과 함께 이내 무동들에게 집중하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홍의는 멍했다. 너무 멍을 때리다 보니 밥을 코로 흡입하였고, 문을 이마로 열고 다녔으며, 아까는 바지춤도 안 내리고 오줌을 싸려고 했다. 무동들이 왜 저러냐며 흉을 보고 지나가던 미함이 혀를 차며 뒤통수를 후려갈겨도 돌부처처럼 무반응이었다. 어쩌면 너무 큰 정신적 내상을 입어 정녕 세속을 등지고 스스로 바라마지 않던 부처가 빙의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 충격적이었다. 정수리를 둔기로 얻어맞은 것 같은 찌릿한 충격.

‘너 진짜… 더럽게 못한다.’

그냥 못하는 것도 아니고 더럽게 못한다니.

…그나저나 더럽게 못한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너무 못해서 기분이 오라지게 더럽다는 의미일까?

홍의는 턱을 얹고 있던 검 손잡이를 무심코 바라보았다. 그러다 천천히 고개를 기울이며 골똘한 눈을 하였다.

“…이상도 하지. 난 분명히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

손가락으로 단단하고 유려한 문양을 훑어 내렸다.

“사내의 최대 성감은 좆이야. 누가 뭐래도 좆이라고. 돌 좆이든 물 좆이든 입으로 빨리면 벌떡 서고 마는 것이 만고불변의 진리인 것을.”

날과 손잡이로 이어지는 이음새를 훑는 손길이 어쩐지 끈적거리고 야릇하였다.

“그것도 머리와 기둥이 이어지는 소대, 그 부분에 성감이 몰려 있다는 것은 칠삭둥이 칠푼이도 아는 사실일걸? 해서 그 부분을 집중 공략했어. 섬세한 계략가처럼, 교활한 한 마리의 뱀처럼. 그래, 섰어. 결국 섰잖아? 기껏 세워 주었더니 나더러 못한다고? 그것도 드럽게 못한다고?! 이런 개아…!”

“…….”

“…….”

외마디 고함을 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던 홍의는 문득 수십 명의 무동들과 눈이 마주쳤다. 그들은 일제히 입을 반쯤 벌리고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망연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제야 제가 이 모든 생각을 속으로 삼키지 않고 말말이 소리 내어 읊조리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홍의는 헛기침을 하면서 정복 자락을 털었다.

“나… 뒷간 좀 다녀오마.”

“좀 가세요. 제발.”

웬만하면 영영 오지 마시고요. 새옹은 빨리 꺼지라는 듯 손사래를 쳤다.

***

홍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터덜터덜 금성의 후문으로 들어섰다. 실처럼 어지러이 뒤엉키는 쓴 속에 한숨이 끊이질 않았다.

지난 아침, 화양각에서 깜빡 잠이 들었다가 눈을 뜨고 보니 태자는 감쪽같이 행방이 묘연했다. 텅 빈 옆자리를 망연자실 응시하다가 바닥을 딛고 일어서니 마침 커다란 가체가 발등에 채였다. 마지막 인사처럼. 태자가 왔다 간 흔적이라고는 그 시커먼 똬리뿐이었다.

복잡한 심경으로 집채만 한 덩어리를 품에 안고 금성으로 터덜터덜 돌아오는데, 환장하게 무거운 것은 가체뿐만이 아니었다. 마음이 천근만근은 되어서 걷다가 앞으로 푹 고꾸라질 뻔하고 오금이 풀려 뒤로 확 자빠질 뻔한 게 여러 번이었다. 초야를 치른 직후 소박맞아 쫓겨나면 이런 기분일까? 못된 말로서 오장육부를 뒤집어 놓고 시침 뚝 떼며 사라진 얄궂은 인간, 비를 몰고 왔다가 비와 함께 사라진 빌어먹을 탕아!

‘그래, 고 어여쁘고 순진한 옥안 뒤에 어지간히 밝히는 난봉꾼이 도사렸던 게야. 뭐? 내자들이 역겹고 싫다고? 말로만 내자들을 싫다 할 뿐이지 실은 밤이면 밤마다 붙어먹으며 농탕을 일삼았던 게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남의 몸을 그리 제 손 다루듯 쉬이 다루나? 입은 비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하라 했거늘, 어찌 그리 쏟아 내는 말마다 순 협잡에 공갈인지!’

홍의는 되레 제 입이 휙 비뚤어진 줄도 모르고 콧김을 쒸익쒸익 뿜으며 종종걸음 쳤다.

햇살이 눈이 부실 만큼 다사로운 날이었다. 빠르게 내딛는 걸음걸음마다 무릎 뒤를 덮는 붉은 정복 자락이 나팔거렸다. 머리를 질끈 올려 묶은 홍라(紅羅)가 바람 타고 흩날렸다. 아물아물 흔들리는 아지랑이와 화사하고 싱그러운 초록 세계, 그 틈으로 속절없이 떠오르는 얼굴, 오롯이 이끌리는 발길.

이토록 가쁘게 차오른 새근발딱한 숨소리가 잰걸음 때문인지, 아니면 머릿속을 가득 메운 그 푸른 눈동자 때문인지, 홍의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쏠라닥질 벌이는 쥐새끼처럼 금성 이곳저곳을 의미 없이 쏘다니다가 무심결에 그가 멈춰 선 곳은 아니나 다를까, 태자궁이었다.

맛도 모르고 멋도 모르는 헌헌장부는 느릿느릿 디딤돌을 딛고 숫보기처럼 조심스레 담장 위로 슥 고개를 뺀다. 마침 뜨락을 가로지르던 깜치는 담장 너머로 솟구친 이마빼기를 발견하고는 또 너냐, 하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가던 길을 갔다. 빼주룩 내밀린 홍의의 눈동자가 번뜩번뜩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던, 그때였다.

“홍의 님?”

느헉. 난데없이 뒤쪽에서 울리는 음성에 응당 기함한 홍의는 당황하여 중심을 잃고 디딤돌 위에서 허청거리다가 그대로 뒤로 넘어가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예서 무얼 하십니까?”

어딘가에서 음식을 싸 오던 길인지 커다란 광주리를 이고 선 옥지였다. 홍의는 꼬리뼈가 시큰거리는 줄도 모르고 허허롭게 웃어 보였다.

“그, 그래, 옥희로구나.”

언제나 무표정을 고수하던 옥지의 미간에 川자가 빠직 패였다.

“아 옥지라고요.”

“…왜 짜증을 내고 그러니.”

아랫입술을 떨며 슬프게 대꾸한 홍의가 엉거주춤 일어서서는 옷자락을 털며 눈치를 보았다. 옥지는 그새 담담한 표정으로 돌아와서는 광주리를 내렸다. 이윽고 마주 서서 빤한 눈길을 보내는 것이 무슨 용건이냐고 묻는 듯했다.

“그게 말이다, 옥지야.”

“예. 홍의 님.”

“…전하는 어디 계시느냐?”

목소리를 낮추어 거의 소곤거리듯 묻고는, 아직 답도 안 올렸는데 괜히 목 뒤를 쓰다듬고 이쪽저쪽 둘러보고 귀까지 홀랑 빨개진 것이 영 수상쩍었다. 십 년 넘게 태자궁의 살림을 도맡아온 옥지는 다년간 벼른 눈치코치로 금세 정황 파악을 하고는 슬그머니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다잡았다.

“전하께오선 해 뜨기 전 화경과 함께 입궐하시어 잠시 오수를 취하시고 한 식경 전쯤 기침하셨습니다. 홍의 님께서 알현을 청하신다고 이를까요?”

“아, 아니다. 아니야. 내 그저 우연찮게 들른 것이니 그럴 필요 없어.”

평소 야무진 모습은 어딜 가고 양손으로 손사래를 치며 필요 이상으로 펄펄 뛴다. 그런 홍의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옥지는 이내 다시 광주리를 머리에 이었다.

“허면 소인은 이만.”

그러나 매몰차게 휙 돌아서서 가던 길 가려는 옥지의 옥색 장유 끄트머리를 소심하게 붙드는 손가락이 있었다.

“…무어 더 하실 말씀이라도?”

옥지가 얕은 한숨과 함께 돌아보았다. 홍의는 목젖을 꼴깍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태자궁을 길게 돌아 인적 드문 궁장 일각에 당도했다. 홍의는 그러고도 누가 들을까 불안한지 연신 목을 자라처럼 빼고 한참 동안 주변을 살펴 대었다. 옥지는 광주리 안의 주전부리가 식을까 슬슬 짜증이 돋는 상태였지만 여느 때처럼 티 내지 않고 무표정하였다.

한참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대던 홍의가 드디어 결의에 찬 얼굴을 들었다. 양 볼이 술이라도 마신 것처럼 발그레했다.

“옥지 너는 말이다.”

“예.”

“내가 전하와 어떤 관계인지 대충 짐작하고 있겠지?”

“예.”

기탄없는 대꾸에 홍의는 허를 찔린 것처럼 잠깐 멍해졌다.

“…안다고?”

“예.”

“…어떤 관곈데?”

네가 정말 안다고? 네가? 어느덧 떠보는 표정이 되어 입술을 비쭉거리는 홍의였다. 그런 그를 한심스럽게 바라보던 옥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줄줄이 읊었다.

“아직까지는 정이 도타운 애인 사이라기보다 군신 혹은 벗의 관계에 적합하며, 간밤에 화양각에서 맺은 육체적 교합으로 인해 슬슬 애증의 기반 위에 연모의 불꽃이 싹트려 하는 관….”

“거기까지, 그래, 내가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다. 홍의는 요란스럽게 옥지의 입을 막으며 뭐 마려운 똥강아지처럼 이리 낑낑 저리 낑낑대었다. 옥지는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고고하게 서 있을 뿐이다.

“연모의 불꽃 뭐시기는 너무 간 듯하지만 일단은, 그래. 네가 거기까지 알고 있다니 구태여 설명할 필요도 없겠구나. 실은 내가 옥지 너에게 물어볼 것이 있다.”

“하문하십시오.”

“전하께오서… 그… 총 네 분의 내자를 거느리고 계시질 않느냐.”

옥지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정비이신 태자비 마마와 서로 님, 이로 님…. 그리고 홍의 님도 아시다시피 작첩만 받고 아직 합방은 이루지 못한 위소 님이 계시지요.”

서로와 이로는 신통 예우령(禮右令, 의례儀禮기관의 총괄자)의 정실과 후실로 두 여인이 친자매지간이었다. 나이는 홍의보다도 서너 살 많았다. 별꼴이라는 생각에 홍의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쳤다.

“허면, 전하께서 위소 님을 제외한 모든 분들과 합방을 이루셨느냐?”

무엄한 질문이라 생각되었는지 옥지의 미간이 살짝 찡그려졌다.

“그것이 무슨….”

홍의는 다급하게 마른 입술을 축였다.

“아니, 그렇질 않으냐. 내 황후 마마께 듣기로 전하께오서 합방 날마다 방중에 뱀을 풀고 도롱뇽을 풀고 온갖 지랄… 이 아니라 별 기이한 행작을 다 부리셨다는데, 옳게 합방이 이루어졌을 리 만무하지. 또한 전하께오서 망극하게도 스스로 내자들을 썩 내켜 하지 않는다고 내게 칙답하신 적도 있으니 말이야.”

“…….”

“옥지 너는 언제나 지척에서 전하를 뫼시니 지밀 간에 벌어지는 대소사를 누구보다 잘 알 게 아니냐?”

이 사내가 지금 강샘을 부리는가. 옥지는 밑도 끝도 없는 홍의의 질문에 당황하여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얼른 입술을 끌어모아 감쳐물었다. 드디어 태자 전하의 노력이 이루어지려나 싶어 웃음이 터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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