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그나저나 언제까지 시시풍덩한 잡담이나 나눌 요량이신 게지?’
녹빈은 내실 문에 대었던 귀를 떼었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다가 손가락에 침을 발라 문에 발린 종이에 갖다 대려던, 그 순간이었다. 난데없는 발소리가 울렸다. 고개를 휙 돌려 보니 검은 정복 갖춰 입은 키 큰 사내가 눈이 백치처럼 흐늘흐늘 풀려서는 이쪽으로 비치적비치적 걸어오고 있었다. 어디서 본 얼굴이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녹빈은 뒤늦게 허벅지를 탁! 쳤다. 지난번 매화 숲에서 보았던 맛나게 생긴 향선이 아닌가!
“맞지?”
향선은 지척으로 다가와서는 다짜고짜 재우쳐 물었다. 짙은 눈썹과 날카로운 콧대와 붉은 앵순이 그야말로 단순호치(丹脣皓齒, 붉은 입술과 하얀 이의 미인)였다.
“눈동자에 하늘이 담긴 아름다운 여인과 홍의 놈이 손 붙잡고 이쪽으로 들었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 방으로 들어간 게 확실하지?”
“나리, 어인 말씀이신지요?”
“모르쇠 잡지 마라! 빌어먹을 홍의 놈! 연홍에 이어 이제는 그 여인까지 앗아가려고?”
해운은 흠뻑 만취하여서 일전에 매화 숲에서 마주쳤던 시종 녹빈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녹빈은 놀란 것도 잠시, 머릿속으로 빠르게 상황 파악을 마치고는 시치미 뚝 뗀 얼굴로 눈만 동그랗게 떴다. 잔뜩 성이 나서 씩씩거리던 해운은 장승처럼 문 앞을 지키고 선 녹빈을 거칠게 밀어내고 문고리를 잡았다.
“이러시면 아니 되어요, 나리!”
마치 이렇게 되기를 고대하였다는 양, 우렁우렁한 음성으로 버럭 일갈한 녹빈이 그대로 해운의 등 뒤에 붙어서 철근 같은 두 팔로 해운의 몸을 답삭 끌어안았다. 기함하여 고개를 젖힌 해운의 번쩍 뜨인 눈동자로 얄궂게 접히어 살살 웃고 있는 녹빈의 씽글씽글한 눈초리가 가득 밀려들었다.
“무, 무슨 짓이냐? 이것 놓지 못해?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껄껄. 뉘신지 모르겠으나 다 된 밥에 재 뿌리지 말고.”
해운의 허리를 압박하는 녹빈의 손가락들에는 갖가지 지환이 껴 있어 덜컥, 걸쇠처럼 맞물렸다.
“얌전히 빈이와 함께 월세계로 가시지요.”
온몸을 뒤채며 미친 듯이 반항해 보았으나 술까지 취한 마당에 몸속의 내장까지 죄 짓눌릴 만큼 억세게 죄어치는 팔 힘에는 당해 낼 수 없었다. 발악하는 해운의 몸이 어느 순간 검은 아귀에 빨려들듯 비어 있던 내실로 휙, 끌려 들어갔다.
***
홍의는 태자의 아랫입술을 빨다가 입을 떼어 냈다. 민망스러워 차마 눈을 못 보고 어물어물하다, 다시 양 볼을 잡고 입을 맞물렸다. 부드레한 입술 살들이 입 안으로 훌렁훌렁 잘도 빨려 들었다. 태자는 혀를 넣으란 듯이 입을 좀 더 벌렸다. 홍의는 벌어진 공간의 따스한 훈김을 느끼면서도 차마 그 안을 파고들지 못했다. 입술을 붙였다가 떼었다가 할 때마다 서로의 눈도 감겼다가 뜨였다가 하였다.
‘입은 내가 맞추고 있는데 왜 당하고 있는 느낌일까.’
그도 그럴 것이 홍의는 몸끼리 너무 붙었다 싶어 한 발 한 발 뒷걸음치는데, 그때마다 태자가 성큼성큼 따라붙는 모양새였기 때문이다. 그러다 홍의는 치런치런한 치맛자락을 밟고 비틀거렸다. 태자의 팔이 튼튼히 허리를 지탱해 주었다.
“…….”
“…….”
가쁜 숨을 몰아쉬며 두 사내는 서로를 잠시간 응시하였다. 다 눅여 낸 줄 알았던 취기가 체내 깊숙한 곳에서 다시금 농홍하게 지펴 오르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홍의는 정녕 깨달았다. 자신이 이 자리에 있지도 않은 녹빈을 향해 맹렬한 강샘을 부리고 있었음을.
해괴하였다. 요사스러웠다. 상투 튼 사내가 투명한 속적삼에 비단 치마 두르고 비딱하게 바라보는 꼴이 더욱 앙큼하고 요망하지 않은가. 더구나 이 사내가 누구인가? 도처에 널린 흔하디흔한 귀족이 아니라, 하늘을 대신할 신성한 존재, 장차 만백성의 지아비이자 스승이자 신으로 체현할 벽해 황실의 유일무이한 황통 적장자였다.
“…예, 신이 답을 올리겠습니다.”
홍의가 몸 사리는 기색 없이 똑바로 태자를 바라보았다.
“질투가 맞습니다. 소신이 녹빈이 그 아이를 질투했습니다. 전하께오서 저보다도 그 아이를 더 귀애하시는 듯하여 서운하고, 화가 나고, 시새움이 일었으니, 이는 명백한 질투였습니다.”
“알아.”
태자가 입꼬리를 살짝 당겼다.
“하지만 틀렸어. 나는 너를 더 귀애해.”
읊조리던 태자가 무언가 생각난 듯이 짧게 시선을 들었다가 다시 내려다보았다.
“아, 물론 그 애도 아끼지만 너와는 그 의미도 깊이도 달라.”
홍의는 흔들리는 눈빛을 다잡으며 잠시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그리고 재차 눈에 힘을 주었다.
“허면 정확히 무얼 어찌하고자 여장을 꾸리고 이곳까지 찾아오신 겁니까?”
“네가 사내는 싫다며.”
“…….”
잠시 망연하던 홍의가 귀를 의심하며 재차 여쭈었다.
“허면, 소신이 여인이 좋다 하여 전하께서 스스로 금관을 내리고 꽃단장을 꾸리셨다는 말씀입니까?”
“어.”
너무 대수롭잖게 대답하는 태자 때문에 홍의는 자신까지 머릿속이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갑자기 눈앞의 태자가 낯설었다. 아무리 겸상을 하고 친우처럼 허물없이 군대도 실질적인 두 사람의 신분 격차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황태자가 칠별관 나부랭이의 사심을 얻기 위해 발품을 팔고 체신을 버리고 오욕을 무릅쓰다니, 그럴 리가 없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홍의는 가슴놀이가 답답하기도 하고 달떠 오르기도 하는 이상한 느낌에 짐짓 입술을 감쳐물었다.
“그래도 이는 법도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이번 일이 행여 황후 마마의 귀에 들어간다면 귀뺨 한 대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대체 어찌 이러십니까? 이토록 격식과 절차와 도리는 팽개치고 코앞의 즐거움만을 좇는 제왕이 어찌 만백성을 교화하고 보살피는 성군이 될 수 있겠습니까?”
잔소리. 태자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려고 딴 곳을 보면서 목덜미나 긁적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시큰둥하게 돌아보았다.
“병사 중 한 명에게 면사를 씌워서 나로 위장시켜 태자궁에 앉혀 두었어. 어머님은 이레 후 도착할 사신 때문에 이것저것 준비하느라 근자에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시고… 도경에서 내 얼굴을 아는 사람은 그대뿐이니까, 그대만 입을 다물고 있으면 들킬 염려 없어.”
잠자코 듣던 홍의는 다시 침음했다. 안 그래도 입술에 붉게 번진 잇꽃 연지가 방금 전의 입맞춤으로 반짝반짝 번들거리기까지 해 자꾸 눈에 들었다. 밀고 당기는 수작을 하느라 겉에 걸쳤으나 벌어진 장유며 맨살이 다 비치는 속적삼에 매듭이 풀린 분홍 치맛자락이 난잡스러웠다. 언젠가 신통의 사염이 다향원에서 들놀음을 하며 해어화와 의복을 바꾸어 입고 모두 앞에서 농탕질을 벌였을 때, 그때 그 모습과 지금 태자의 모습이 매우 흡사하여 더 객심스러운 것이었다.
‘…내가 벗긴 것이었지.’
홍의는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끙, 앓는 소리를 내었다. 갑자기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본디 유별하다 싶을 만큼 매사에 무디고 촌스러운 홍의였지만, 결국은 그도 사내였다. 태자가 곱게 여장을 꾸려 색정이 일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이 젊은 묘랑이 품고 있는 도저한 빛,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고결하고 투명한 순정, 그 도리 없는 특별함에 깊이 감화되고 만 것이었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청맹과니의 나이, 청대처럼 푸르고 강건한 사내가 눈앞의 애욕을 이루고저 함에 있어 법도나 격식을 일일이 따지겠는가. 오히려 세상이 정한 법도를 대범하게 이탈할수록 더욱 말초적인 쾌락에 사로잡히는 것이 야릇한 인간의 본성이었다.
“…참말 저를 보려고 여인의 옷으로 변복하고 예까지 오셨다고요.”
“어.”
“저 하나 때문에요?”
“응.”
“…왜요.”
홍의의 얼굴이 붉어졌다. 호흡이 가빠졌다. 계속되는 질문에 태자가 짜증을 내어도 할 말이 없으리라. 그러나 물어야 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술기운이 다시금 북받치는 것일지도 몰랐다. 태자의 대답을 듣고 싶은 마음과 들어서는 안 된다는 불안함이 거미줄처럼 교차했다. 홍의가 혼란스레 지껄이기 시작했다.
“전하는, 참으로, 참으로 별스럽고 이상한 분입니다.”
“…그래?”
“처음부터 이상하셨습니다. 소문으로도 이상하셨지요.”
“…….”
소문 이야기를 하자 태자의 얼굴이 냉랭해졌다. 말갛던 눈빛이 싸늘히 식고 매초롬하던 눈시울이 날카롭게 돌변한 것이다.
“그리고 직접 뵙고 보니 더욱 해괴하고 망측한 짓을, 서슴지 않으셨지요. 소신이 살다 살다 그토록 괴상망측한 꼴은 처음 당했습니다…!”
태자가 한 발 다가왔다.
“계속해.”
“사, 사람 먹는 음식에 몰래 약을 타 놓질 않나, 납거를 하질 않나, 주먹질에 농탕질에…! 미행하여 본가까지 쫓아 든 건 말할 것도 없고!”
태자가 또 한 발 다가왔다. 홍의는 물러났으나, 등에 벽이 닿았다.
“막상 마주하고 뵈니, 항간에 도는 소문보다 더 악질이 따로 없으셨지요! 더군다나, 보십시오, 이제는 황태자가 되어서, 신하에게 잘 보이고자 여장까지 꾸리고 이렇게 난데없이 찾아와…!”
“찾아와?”
“…찾아와…. 소신의 마음을, 뒤흔들고….”
“…….”
가쁜 숨을 몰아쉬던 홍의는 젖은 눈동자를 들었다. 한번 심호흡을 한 후, 감히 황태자를 뚫어져라 쏘아보며 차분히 말했다.
“전하는 항간에 떠도는 소문보다 더한 악질입니다. 인두겁을 쓴 도깨비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태자가 다시 한번 미소 지었다.
“알아.”
마침 어디로부터 한껏 흥이 오른 민인들이 부르는 헌화가(獻花歌)의 노랫소리가 지게문을 뚫고 어렴풋이 새어 들어왔다.
자줏빛 바위 곁에
잡은 손 암소를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신다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태자가 천천히 홍의의 앞섶에 한쪽 무릎을 꿇어앉았다. 풍성한 치맛자락이 공기를 머금고 가득 부풀었다. 꽃잎이 내려앉는 듯했다.
홍의도 천천히 무릎을 굽혀 태자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떨리는 양손을 들어 천천히 태자의 가체를 붙들자, 태자는 수굿이 고개를 숙여주었다. 가체를 내리니 익숙한 상투관과 금이환이 드러났다. 비밀한 장난질을 앞둔 사내아이처럼 묘하게 반짝이는 물빛의 시선이 흘렀다.
“얼른 벗겨 줘.”
초야의 새색시가 내뱉는 언사치고는 영 짓궂어, 홍의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