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색련-38화 (38/111)

#38

태자가 계속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고 푸른 눈만 뙤록이고 있으니 홍의의 오해는 거듭 불거졌다.

‘녹빈이 내 이놈을 그냥…!’

구중궁궐에서 숫보기처럼 고이 자란 태자 전하께 난행을 가르쳐도 유분수였다. 홍의는 콧김을 슁 뿜고는 태자에게 불쑥 다가가서 아뢰었다.

“감히 신하의 도리로서 상고하건대, 소신은 전하의 그 요상한 취미를 도저히 용인할 수 없습니다. 두 번 다시 녹빈과 어울리지 않겠노라고 전하의 구중으로 약조해 주십시오!”

전에 없이 끌끌하고 강강한 어조에 한참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말끄러미 응시하던 태자는 곧 입을 열었다.

“녹빈과 놀지 말라는 거야, 아니면 여장을 하지 말라는 거야?”

“둘 다요!”

버럭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태자는 귀가 다 쨍하니 울렸다. 무작정 무엇도 하지 말라고 다그치는 으름 조가 새삼 무엄하고 짜증스러웠다.

“싫은데.”

“전하!”

태자는 미간을 지그시 찡그렸다. 아무래도 나고 자라 온 과정이 달라도 너무 다른 두 사내였다. 무엇 하나 닮은 점이 없었으나 하필이면 이러한 연애사의 방면으로는 영 고루한 풋내기라는 점만이 꼭 같았으니, 더욱 답답한 일이었다.

“그대는 매양 다른 향선들과 어우러져 밤을 즐기고 유녀 끼고 술판까지 벌이면서, 왜 나에게는 이토록 하지 말란 것만 잔뜩이지?”

“그것과 이것은 별개의 문제가 아닙니까!”

“별개? 어찌하여?”

“그것은…. 그러니까, 그것은.”

머리를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고 사방팔방으로 굴려 보아도 맞춤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홍의가 입술을 감쳐물고 안절부절못하자 태자는 귀라도 후빈 듯한 표정으로 툭 내뱉었다.

“녹빈은 착하고 가엾은 아이야. 그러니 앞으로도 계속 데리고 있을 거다.”

“…….”

이번에는 홍의가 울컥하여 인상을 찡그렸다.

“허면, 소신은 전하께 무엇입니까?”

“…….”

태자가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느냐는 듯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홍의는 스스로도 어찌하여 이토록 야속하고 서러운 기분이 드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요사한 세 치 혀라는 것이 제멋대로 움직이며 가당찮은 속내를 마구발방 토로하는 것이다.

“소신은 오롯이 전하의 안위가 염려되어 직주한 것인데, 어찌 전하께선 소신의 말을 한갓 개 짖는 소리 따위에 치부하시고 만난 지 고작 이레밖에 안 된 녹빈을 싸고도신단 말입니까?”

“…….”

“자꾸 이러시면 앞으로는 전하께 온전히 신경을 끊겠습니다. 저 또한 해운이든 미함 공이든, 다른 사내들과 더욱 각별히 어울리며 전하께 무슨 변고가 생기든 나 몰라 할 것입니다!”

그러자 태자의 표정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이게 발정이 났나.”

“…예, 예?”

홍의가 귀를 의심하는데 태자가 한 발 다가들었다. 검푸르게 가라앉은 눈빛에 잠시 소름이 돋았다.

“너 원래 그리 경박하고 아둔하냐고 물었다.”

“…….”

“다른 놈들과 더욱 각별히 어울리겠다고? 그럴 거면 애초에 전하께 나는 무엇이냐느니, 전하를 염려한다느니 그따위 얄팍한 수작은 왜 가져다 붙이는 거지?”

순간 말문이 막힌 홍의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발정이라니요, 받잡기 망극한 발언을 부디 거두어 주십시오! 게, 게다가 처첩을 거느린 마당에 그도 부족하여 남창까지 불러들여 이 같은 기행을 일삼는 전하께서 하실 말씀은 아닌 것으로 사료됩니다만!”

“…녹빈은 아무 상관없어.”

‘끝까지!’

계속되는 역성에 홍의의 눈에서 감파란 불꽃이 확 튀었다.

“허면 이 가체는 무엇이고 그 치마는 또 무엇입니까? 장차 황위에 오르실 태자께서 칠보단장에 잠행이라니, 이는 천지가 개벽할 난행입니다. 어디 좀 보여 주십시오! 녹빈이 그놈이 씌워 드렸습니까?”

성질이 머리끝까지 뻗치어 눈에 뵈는 게 없어진 홍의는 다짜고짜 태자가 들쓴 자줏빛 화관을 확 끌어 내렸다. 그리고 아까부터 풍성하게 늘어져 장정 세 사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거추장스러운 치맛자락을 보았다. 어지간히 눈에 거슬렸다.

“또, 이 치마는 누가 입혀 드렸습니까?”

홍의의 오달진 손길이 허리춤에 매인 치마끈을 휙휙 잡아 끌렀다. 태자는 순간적으로 놀라 어어, 하면서 볼을 붉히고 뒤로 조금 물러났다.

“뭐 하는 거야?”

아연실색하며 두 눈을 엄벙덤벙하게 뜬 태자는 치맛자락을 홀랑 빼앗아 왼쪽으로 말아 쥐었다.

“미쳤어? 갑자기 왜 그래?”

“이리 내어 주십시오!”

“이거 내 옷인데.”

“다 찢어 버릴라니까 냉큼 이리 내어 주시라고요!”

그렇게 애써 차린 것을 전부 헤집어 놓고는 종국에는 엄지에 침을 묻혀 태자의 입술에 발린 붉은 연지까지 벅벅 문지르기까지 하는 객기를 선보이는데, 제대로 지워지지는 않고 입귀며 인중으로 해괴하게 번져 나가는 꼴이 검질긴 녹빈의 흔적 같아서 더욱 짜증스러웠다. 그렇게 한참을 애면글면하던 홍의가 어느 순간 멈칫하였다. 태자의 단단한 손에 손목이 콱 붙들렸기 때문이다.

“야, 너 지금 질투하는 거지?”

“…….”

태자는 얄망궂게도 웃을 듯 말 듯한 표정이었다.

홍의는 화가 난 사람처럼 입술을 감쳐물고 손을 빼내려 했다. 그러자 놓아주기는커녕, 뼈마디가 시큰거릴 정도로 더욱 억세게 힘을 주어서 확 잡아당긴다.

홍의는 태자의 품에 폴싹 안기다시피 끌려들었다. 코끝으로 입술이 스쳤다.

“…호칭을 정정해 주십시오. 소신은 전하의 종이기 이전에 나라의 녹을 먹는 관원입니다.”

“네 입으로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감히 황태자의 의복에 멋대로 손을 대?”

곧이라도 입술에 붙여 누를 듯, 상대의 입술이 바싹 다가와 속삭였다. 그 입김이 간지러웠다. 야속하고 속상하고 짜증이 나면서도 이러한 수작 놀음이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맑은 눈동자 속이 바다 같고 하늘 같아, 어지러웠다. 태자의 손이 홍의의 뒷머리를 아프지 않게 움켜쥐었다. 고개가 반쯤 꺾이며 야릇하게 눈이 맞았다.

“입 맞춰.”

“…못 합니다.”

“어서.”

“싫어요.”

“명령이야.”

“…….”

홍의는 순순히 눈을 감고 태자의 입술을 머금었다.

***

한편, 녹빈은 태자와 홍의가 들어간 내실 문간에 붙어 서서 음흉하게 웃고 있었다. 태자 전하께서 이번 일만 잘 성사된다면 은자 한 근이 다 무언가, 닷 근을 내리겠다고 약조까지 단단히 하셨으니 깨춤이 절로 나올 지경이다.

화류계의 삶은 힘겨웠다. 밤새 술 팔고 몸 팔아 봐야 남는 것은 해웃값이 아니라 골병든 삭신뿐이었다. 하지만 쥐구멍에도 볕들 날은 있다고, 은자 닷 근이면 비싼 도경 땅에 아담한 사택 한 채와 논마지기쯤은 장만하여 남부럽잖게 살 수 있었다. 소담한 안채 두고 그림과 매화분도 들이고, 안뜰에는 과일나무 심고 외양간 짓고, 무엇보다 늙은 어미 병치레도 지금보다 훨씬 수월하고 안정적으로 수발들 수 있게 된 것이다. 생각만으로도 기뻐서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호호, 일은 잘 진행되고 있으려나?’

녹빈은 몸을 한껏 옹송그리고 내실 문에 귀를 꼭 갖다 붙인 채 장터의 염알이꾼 못잖게 배릿이 웃어 보였다. 방중에서 투덕투덕 말소리가 오고 가는 걸 보니 아직 일 치르기 전 사랑싸움이 한창인 모양이었다. 새삼 전날 입욕실에서 태자와 나누었던 작당 모의가 떠올랐다.

‘내가 여장을 꾸리면 홍의가 넘어올 거란 보장은 어디 있지?’

‘여기서 중한 것은 여장이 아니어요. 그러니까 요지는 말입니다? 황태자인 전하께서 한갓 하급 귀족의 비위를 맞추겠답시고 여장까지 꾸리고 화양각에 쫓아 들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게 왜?’

‘…그런 게 있사옵니다. 아무튼 지성이면 감천에, 무쇠도 갈면 바늘이 되고, 낙숫물이 댓돌을 뚫는다는 이치만 알고 계시면 되어요.’

상전의 언행 하나하나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일희일비하는 아랫것들 심정을 이 오만한 황족이 알 턱이 있나. 녹빈은 태자의 옷깃을 정돈해 주었다.

‘좌우지간, 전하는 그저 제 말만 믿고 따르시면 된답니다. 천천히 공을 들여 자분자분 야스락야스락 꾀어낸다면 틀림없이 홍의 님을 취하실 수 있을 거여요.’

태자도 드디어 회가 동했는지 연푸른 눈을 반짝였다.

‘사내와는 어찌 일을 진행하지? 여인과의 방사와 적이 다를 텐데.’

‘그도 그러하지요. 여인은 흥분을 하면 몸이 알아서 끈끈 물을 만들어 내지만 사내는 메말라 있어 무턱대고 들이댔다간 꼭 피를 보고 말지요. 어우, 빈이도 그 때문에 여러 번 낭패를 보았습니다.’

‘그럼 나 홍의한테 삽입 못 해?’

태자가 파리하게 묻자 녹빈은 뱅충맞게 낄낄 웃었다.

‘다 방도가 있습니다.’

‘무슨 방도?’

‘윤활제를 쓰시면 되어요.’

‘윤활제? …침?’

‘에그머니나! 빈이는 그러한 들놀음도 참 좋아라하지만, 명색이 전하와 홍의 님의 첫 방사인데 침이나 칵 퉤 뱉어 가며 일을 진행하는 것은 좀?’

‘허면 어찌하라고.’

녹빈은 소매를 뒤지더니 마개 쓰인 작은 병을 꺼내 보였다.

‘난즙을 졸여 멧돼지 기름에 섞은 향유입니다. 이것을 윤활유 삼아 전하와 홍의 님이 쿵기덕 쿵더러럭!’

네발짐승이 먹잇감을 낚아채듯 재빨리 병을 채 간 태자는 눈을 빛내며 들여다보았다. 녹빈은 얼굴에 꽃받침을 하고 간살스럽게 웃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홍의 님은 벽해에 두 명은 없을 의리남 순정남이랍니다. 그런 사내에게 배꼽이나 맞추자고 막무가내로 보채고 사납게 윽박아 질렀다간 공연히 동티가 나고 말지요.’

‘어. 피곤해.’

‘하지만 전하도 실은 그런 대쪽 같이 강강한 성정에 반하여 이토록 안달을 내시는 것이 아닌가요?’

녹빈이 묻자 태자는 잠시 요연한 얼굴을 했다.

‘…아니야. 걔는 강강한 척하지만 실은 다정해.’

그렇게 읊조리는 태자는 봄꿈에 잠긴 소년처럼 양 볼에 홍조를 띠었다. 스물한 살 춘정이 한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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