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색련-35화 (35/111)

#35

홍의는 자기도 모르게 단말마의 비명을 치며 벌떡 일어서고 말았다.

“이러지 말아 주십시오!”

“…….”

당황스러웠다. 스스로 당황스러운 이유를 알 수가 없으니 더욱 그러했다. 홍의는 귀뿌리까지 벌겋게 달아올라서는 이성을 잃고 횡설수설했다.

“대, 대낮부터 사내들끼리 그런 짓거리를 하였다가는, 마른하늘에서 불벼락 떨어질 것이고, 천신이 노하시어 사해가 들끓을 것이고 또한, 또한….”

그토록 서툴고 어설픈 대응이 어째 말 조리로는 삼한 제일이라는 홍의답지 않았다.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홍의 또한 이런 낯선 감정과 욕망에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여서 맞고 틀리고를 따질 겨를이 없었다. 홍의가 또 엄부럭을 피우며 유난스럽게 반발하자 그새 불뚝성이 인 태자의 눈초리도 차츰 사납게 들뜨기 시작했다.

이럴 거면 엊그제 접문은 왜 받아 주었는지? 사내들끼리 혓바닥을 엉기는 건 괜찮고 성교를 나누는 것은 더럽다는 고 가당찮은 논리는 어디에서 기인하였는지! 묻고 싶은 말도 따지고 싶은 항목도 많았으나 그동안 변변찮은 말동무 하나 없이 홀로 지낸 지 워낙 오래된 터라 말재간이 부족한 태자는 그저 답답한 듯 인상을 찡그릴 따름이었다.

‘…대체 이게 어찌 된 노릇인가.’

와중에도 홍의는 계속 혼란스러웠다. 자신의 거절에 태자는 또 말없이 분노하는 중이었다. 헌데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내내 여전히 당황스러운 마음 한구석에 살며시, 얇고 희미한 쾌감이 슬슬 피어오르는 것이다. 이토록 아름답고 잘난 사내가 짙푸른 애욕을 품고 서툴게 보채는 모습이 아까부터 오묘하게 머릿속을 흔들고 가슴속을 옥죄고, 야릇한 뿌듯함까지 일게 하고 있었다.

‘군주께 이런 저급한 마음을 품다니, 이리 불경스러울 데가 있나…! 맙소사, 왜 전하가 이토록 달라 보이는 거지?’

이런 복잡다단한 감정은 난생처음이라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아아, 이 자리에 잠시라도 더 있다간 못 이기는 척 저 손을 맞잡을지 몰랐다. 정말 그리될지도 몰랐다.

“아, 아뢰옵기 망극하오나 소신은 여인이 좋습니다. 같은 사내와는 도저히…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

“옥지에게 목욕물을 갈무리하라 이르겠습니다. 허면 소신은 이만.”

태자가 이런 식으로 덤벼든 것은 이미 여러 번의 일이었지만 정신적으로 이토록 충격을 받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홍의는 이도 저도 아닌 매작지근한 거절의 뜻을 비치고는, 간신히 몸을 일으켜 허둥지둥 소매를 내리고 부리나케 장막 너머로 빠져나갔다. 기다란 복도를 달음질치는 소리가 고요한 가운데 쿵쿵 울려 퍼졌다. 주변이 온전한 고요에 잠겼을 때야 비로소 태자가 굳어 있던 눈꺼풀을 풀고 망연히 허공을 바라보았다.

“또….”

실패다. 마지막 말은 속으로 읊조리며 그대로 물속으로 얼굴까지 푹 담가 버렸다.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자 애꿎고 짜증스러운 마음이 뽀그르르 포말이 되어 퐁퐁 솟아올랐다.

“크으, 홍의 님 정말 쉽지가 않습니다. 녹록지가 않아요.”

내내 입욕실 구석에 장막을 치고 그 안에 숨어들어 있던 녹빈이 끌끌 혀를 차며 불쑥 기어 나온 것도 그때다. 이윽고 물 밖으로 나온 태자가 손바닥으로 얼굴의 물기를 훔치고는 냉랭한 표정으로 녹빈을 바라보았다.

“너, 사내 잘 녹인다는 것도 다 공갈이었지?”

녹빈은 답답하여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런 것이 아니라 홍의 님이 지나친 목석간장이옵니다! 세상에, 그렇게 홀딱 벗고 덤벼드는데도 무너지지 않고 앙버티는 사내는 빈이도 생전 처음 보옵니다. 혹 홍의 님이 고자인 것은 아닌지요?”

“아니거든.”

“앗, 전하께서 그걸 어찌 아시나이까앙?”

“…몰라, 너 나가.”

태자는 다 싫고 짜증스럽다는 듯 힘없이 욕조 난간에 볼을 기대었다. 새하얀 등 근육이 물기를 머금은 채 등불 아래 반짝거리자 지켜보던 녹빈은 입맛을 쩝쩝 다셨다.

‘아이고… 저 파리가 앉았다가 낙하할 미끈미끈한 피부 결 좀 보게. 나라면 벌써 속곳이고 뭐고 확 벗어 던지고 저 사랑스러운 알짬을 골백번은 더 잡아먹었겠구먼. 홍의 님도 참 멋모르고 맛 모르지.’

그렇게 오매불망 그림의 떡을 그리며 고대로 덮쳐 버리고 싶은 욕망을 꾹 눌러 참고 있는데, 문득 뇌리를 번뜩이며 기막힌 묘안이 떠올랐다. 녹빈은 허둥지둥 욕조로 다가갔다.

“전하, 홍의 님께서 분명히 본인의 입으로 자신은 여인이 좋다, 해서 도저히 사내인 전하와는 이어질 수 없다, 그러셨지요?”

“어…. 이제 그냥 힘으로 밀어붙일까.”

태자가 자포자기 심정으로 중얼거리자 녹빈은 껄껄껄 웃었다.

“아이고 전하, 힘으로 몸은 얻을 수 있을지언정 맘까지는 얻을 수 없는 법이옵니다. 더군다나 홍의 같이 대쪽 같은 사내에게는 언감생심 긁어 부스럼만 낼 뿐이라고요.”

“마음?”

“예에, 마음이요.”

“그게 뭔데. 부처님이야? 내가 눈에 뵈지도 않는 마음 같은 거 얻어다가 무엇 하는데?”

지금 같은 기분으로는 이래도 흥 저래도 흥이었다. 태자가 잔뜩 시르죽은 표정으로 덧없이 굴자 녹빈은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아직 따뜻한 물을 손 바가지에 담뿍 담아 태자의 등골에 쏟아 주었다.

“우리 전하는 걱정 붙들어 매시고 고 어여쁜 옥경이나 잘 달래 주시어요. 빈이가 또 기발하고 기깔 나는 묘책을 떠올렸으니 말예요.”

“…묘책?”

홀로 입을 막고 음산스럽게 큭큭거리던 녹빈은 주변에 듣는 귀도 없는데 손과 입을 가져와 태자의 귓가에 소곤소곤 속닥속닥하였다. 처음엔 무표정한 얼굴로 가만히 듣기만 하던 태자의 두 눈으로 차츰 놀란 기색이 들어찼다. 이윽고 고운 미간을 와락 찡그리며 정색을 하였다.

“아, 그런 짓을 어떻게 해.”

“아니, 사랑을 쟁취하려는데 가시덤불이라고 못 헤쳐 나갈까요?”

“…….”

“빈이가 색주가를 구른 햇수만 어언 십 년이어요, 십 년! 마지막으로 속는 셈 치고 한 번만 더 믿어 보시옵소서! 껄껄껄!”

태자는 인중까지 물에 푹 담그고는 계속 반신반의하였고, 녹빈은 허리를 젖히고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막 정리를 하러 입욕실에 들어선 옥지는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할 따름이었다.

***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고 삼 계절 농사의 씨뿌리기가 이어지는 망종(芒種) 날 해 질 무렵이었다. 도경의 색주 거리에 어여쁜 연등이 꽃처럼 별처럼 알록달록 내걸렸다. 오색 빛깔 접선 살랑살랑 부치는 귀족들은 미끈한 양마와 화려한 꽃가마에 올랐고, 손을 맞잡은 민인들이 아름다움으로 더욱 번성하여 풍족해질 벽해의 풍년을 축원하며 탑을 돌고 풍등을 띄우고 기도를 올렸다.

화양각의 거대한 내정으로 지체 높은 귀족들과 묵객들이 앞다투어 몰려들었다. 술과 시와 놀이를 즐기며 술시에 열릴 도경 미인들의 미색을 겨루는 경연을 앞두고 모두가 멋과 흥에 들떠 올랐다. 고운 비파 소리 끊이지 않고 매실주와 산해진미의 향취가 퍼져 나가니, 심지를 밝힌 오색 등롱 불빛들이 벽해의 아름다운 밤을 어느 때보다 영롱하게 빛내고 있었다.

마침 전각 내부의 화려한 연회장에서는 포도주 가득 부어 놓고 벌이는 마장과 바둑 등 실내에서 즐기는 만냥판 또한 한창이었다. 그때 시끌벅적한 연회장으로 원주 미함의 지휘 아래 각각 인통을 뜻하는 단색의 정복을 맞춘 젊고 아리따운 향선들이 줄지어 입성하기 시작했다. 비파를 타던 유녀들도, 술과 음식을 나르던 시비들도, 흥취 오른 신선놀음으로 얼굴이 벌겋게 물든 귀족들조차 모두 일시에 하던 짓을 멈추고 감탄에 환성을 연발하였다.

“저길 봐, 미함 공이야!”

달뜬 흥분을 채 감추지 못한 한 유녀가 주렴 뒤에 서서 잔뜩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자 막 단장을 마치고 뒤를 따르던 유녀들도 우르르 몰려와서 주렴을 걷고 빼주룩이 눈을 내밀었다.

“어디, 어디? 어마마, 참말이네! 평소 술과 여색을 멀리하여 기루 출입을 등한시한다던 분께서 아주 날을 잡은 게로구나?”

“아아, 하룻밤 풋정이라도 좋으니 저 실팍한 가슴에 폭 안겨 봤으면!”

다향원에서 가장 높은 혈통을 지닌 미함은 원주이기 이전에 정통 가문 대모인 태후의 막내아들이자 폐하의 동복아우로서, 공주와 왕자 다음으로 치는 현군(縣君)의 위에 책봉된 바 있었다. 때문에 제아무리 난다 긴다 하는 신통의 귀족들도 그 앞에서 만큼은 영 기를 펴지 못하고 눈치껏 재주껏 강퍅한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애썼다. 그토록 상하에 덕망이 높고 문무에 빼어나고 청렴결백을 실천하니, 다향원의 창설자인 도선 공의 현현이라는 찬사가 실로 아깝지 않은 호걸이었다.

“에게, 암만 정백한 후덕군자이면 뭐하니? 애초에 주색을 낮잡는 목석간장에게 들이대 봐야 육전 한 푼 못 받고 몸뚱이만 상한다. 게다가 한물간 정통계 나부랭이라니! 차라리 벽해의 벌열이자 대세인 신통 향선들과 어우러지는 것이 몇 곱절은 더 이득인걸?”

한 유녀가 딴죽을 걸자 다른 유녀들의 시선이 곧 검은 정복 갖춰 입은 미끈한 사내들 무리로 꽂혀 들었다.

“하긴, 저 요염한 미청년들을 좀 봐. 신통 향선들은 하나같이 옥골선풍이라, 얼굴은 뽀얗고 어깨는 떡 벌어져서 눈웃음 살살 치는 것이 보고만 있어도 오금이 저릿저릿하다니까? 특히 그 수장 격인 해운의 빼어난 국색이야, 타국 사신들까지 앞다퉈 칭송할 지경이라니 말 다 했지!”

“흥, 그럼 뭘 해? 신통의 사내들은 하나같이 성질이 괴팍해서 여인들을 씨암말 취급하고 홀케 굴린다는데. 애초에 곰핀 나무는 믿어서는 안 되는 법이야.”

“…그럼, 저기 저 사내는?”

내내 유녀들의 쑥덕공론을 겉귀로 들으며 지금껏 말이 없던 유녀 산월이 향선 행렬의 끄트머리를 느긋하게 따르는 사내를 짚어 내었다.

“저기, 붉은 정복을 입고 있는 향선은 어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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