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네가 무어기에 감히 태자 전하의 말씀을 가로막느냐?”
“…….”
“말해 보아라. 대명천지 어느 시비가 상전의 심중을 대신 토로하면서 역성을 드느냐? 네까짓 게 정녕, 태자 전하의 심중을 온전히 헤아린다는 말이냐?”
화가 나도 단단히 난 홍의의 음성은 잘 쌓은 성벽 같아서 개미 새끼 한 마리 파고들 새도 없었다. 그러나 댕돌같은 홍의의 질책에도 시비는 눈 하나 깜짝 않고 차분하게 대꾸하였다.
“저희 전하께서 낯을 많이 가리셔서 그렇습니다.”
“…낯을 가려?”
“많이 가리십니다.”
“허. 낯을 많이 가리시는 분이라, 그리 지나가던 향선을 똥물에 집어 던지셨다는 것이냐?”
“본의 아니게 낯이 드러나 적이 당황하셔서 그리한 것입니다.”
“…….”
“낯을 많이 가리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많이.”
마지막 말에 힘주어 대꾸하며 슥 눈을 까 올리는 시비의 서슬이 퍼렜다. 홍의는 흠칫하여 한 발 물러났다. 홍의가 성벽이었다면, 시비는 철벽이었다. 개미 새끼가 아니라 바늘 하나 파고들 새도 없었다. 말문이 막힌 홍의는 헛숨을 쏟다가 이내 다시 태자를 흘겨보기 시작했다. 여전히 면사에 가려 표정을 살필 수 없으니 복장이 많이 터지는 것 같았다. 많이.
“이미 볼 장 다 본 사이에 더 가릴 낯이 무어가 있다고 그러시는지 소인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사오나 어찌 되었든 놀라셨다 하시니 그저 송구할 따름이옵니다.”
“…….”
“버르장머리 없는 바람 따위에 어찌나 당황하셨기에 죄 없는 소인에게 그 분풀이를 하셨는지 그 심중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는 않사오나, 어찌 되었든 송구하다는 말씀이옵니다. 녜.”
홍의는 두 손을 모으고 머리를 조아린 채 주절주절 읊었다. 태자는 별반 동요하지 않고 물끄러미 그런 홍의를 건너다보기만 하였다. 물끄러미 보는지 게슴츠레 보는지 면사에 가려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이윽고 태자가 면사 안쪽에서 입을 열었다.
“너는 어머님의 사람인가.”
지난번에는 경황이 없어 잘 듣지 못했지만 태자의 목소리는 보통 사내보다 낮고 어딘지 냉랭한 편이었다. 그래서 괜히 더 흠칫하는 걸까. 홍의는 잠시 침묵하였다가 차분히 대꾸하였다.
“아닙니다.”
“아니면 해운의 사람인가?”
“그도 아닙니다. 저는 본디 신통 사람들과는 연이 없었습니다. 지금까지는 말입니다.”
“…….”
“제 아비는 칠별관 문성 공이고, 저는 평시 다향원에서도 신통 향선들보다 정통 향선들과 도탑게 지내 왔습니다. 소인의 출신 성분이 수업을 진행함에 있어 크게 문제가 될는지요?”
문제가 된다면야 홍의는 쌍수 들고 환영이었다. 그런데 태자는 잠시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가 손가락을 들어 올려 무언가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건 뭐야?”
“…….”
뭐가 뭐냐는 말인가. 홍의는 의아하여 태자의 시선을 좇다가 아까부터 제 손에 들려 있었던 꾸러미를 발견했다. 아아, 박 터지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주억거린 홍의는 다시 양손을 가지런히 모으면서 사근사근 나긋나긋 대답하였다.
“이것은 정력제이옵니다. 전하.”
“…….”
“사실 전하와 제가 외따로 수업을 진행할 필요도 없이, 이것만 젓수시면 만사형통이옵니다. 아실는지 모르겠으나 전하의 동복형인 해운도 이 정력제 덕을 보고는 사기가 탱천하여 세상이 달리 보인다 하였습니다. 하하하. 이 뭐 저로 말할 것 같으면 본디 고환 보행의 달인으로서….”
물 만난 고기처럼 신나게 입을 터는 와중에 홍의의 손에 쥐여 있었던 꾸러미는 어느새 태자의 손으로 옮겨 가 있었다. 태자는 면사 덮은 얼굴을 모로 기울인 채 호기심이 동하였는지 그 꾸러미를 열어 안에 든 가루를 유심히 바라보는 것 같았다.
낚여라! 낚여라!
먹어라! 먹어라!
홍의는 속으로 기차게 외치며 눈을 시퍼렇게 번뜩이고 있었다.
“이것을 먹으면 정말로 정력이 증강해?”
“그렇사옵니다.”
“아무나 보고 벌떡벌떡 세운다고?”
“하하, 제가 거기까지는 설명드리지 않았는데 전하께오선 역시 하나를 보면 열을 아시는군요. 예. 벌떡벌떡 세웁니다. 모르긴 몰라도 송장한테 먹여도 세우지 싶습니다.”
한참 동안 꾸러미를 들여다보던 태자에게서 별안간 피식하고 웃는 소리가 나지막이 새어 나왔다.
“…재밌겠네.”
그리고는 손안에 든 꾸러미를 꾹 세게 쥐셨다. 곁에 서 있던 시비에게 건네고는 홍의를 향해 툭 말하였다.
“격일.”
“…?”
저건 또 뭐라는 것인가. 홍의가 의아해하는 와중, 잠자코 서 있던 시비가 불쑥 말을 낸다.
“전하께서 앞으로 격일 수업으로 받겠다고 하십니다. 홍의 님께서는 글피부터 이경이 울리면 태자궁으로 건너오시면 됩니다.”
“…….”
참으로 가지가지 한다는 심정이었다. 황망히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는데 태자는 더 볼일 없다는 듯 몸을 휙 돌려 담을 따라 슬렁슬렁 걸어가 버렸다. 그 뒤를 소리 없이 쫓는 시비를 보며 홍의는 세상 다 산 얼굴로 허탈하게 한숨을 쉬었다. 좌우지간 상전이고 아랫것이고 쌍으로 괴이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래도 정력제를 받아 갔으니 일이 쉽게 풀리려는가?”
홀로 남은 홍의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다가 이내 에라 모르겠다, 뒷머리를 긁적였다.
***
“지랄이 지랄을 낳았구나.”
“…….”
홍의는 무릎끼리 꼭 붙이고 앉아 흠칫흠칫 상대의 눈치를 살피며 마루 위에 손가락을 빙빙 돌리고 있었다.
“항간에 요즘 네가 신통 사람들하고 어울리면서 황후 마마의 산하로 들어갔다는 이야기가 돌기에 그저 말도 안 되는 번설인 줄 알았더니, 그게 사실이었단 말이냐?”
“그것이… 제가 원해서 그리된 게 아니라요… 이게 다 그놈의 정력제 때문에….”
“의원도 약장수도 아닌 놈이 아무에게나 그따위 흉약을 팔러 다닌단 말이냐! 향선이 되어서는 천박한 환쟁이 흉내를 내고 다니는 것도 못 본 척 눈감아 주었거늘, 이제는 그런 삿된 약까지 만들어서! 향선의 위신을 깎아 먹고! 이걸 그냥 콱!”
에고고. 지금까지의 정황을 모두 들은 미함은 결국 벼락처럼 소리를 질렀고, 홍의는 곧바로 꼬리를 말고 깨갱깨갱 하였다.
그러니까 그놈의 삿된 약, 정력제를 짚어 보자면, 사실 홍의가 처음부터 방중 비술에 의의를 두고 배워 익힌 것은 아니었다. 정확히는 선도의 장생불로를 익혀 병든 어머니를 어떻게든 구완하고자 하다 보니 성의학에까지 그 분야가 뻗친 것일 뿐. 본디 선도의 수행법이란 의학과 성(性)의 방술을 하나의 술법으로 묶어 육신과 정신을 동시에 건강하게 하는 데 취지를 두었는데, 어머니의 병은 천신도 구제 못 할 중병이라 어떤 저명한 의원의 약재도 효험이 없었다. 그래서 살아계시는 동안만이라도 기운을 차리시도록 혈기를 돋는 약을 만들어 왔던 것이 지금의 정력제로 발전한 셈이다.
“그래도 미함 공, 그것이 절대 흉약은 아니옵니다. 이미 숱한 뭇사람들에게 혈기를 전해 준 바 있는 명약 중의 명약.”
“닥쳐라. 발로 찬다.”
“…….”
“내가 너를 다음 원주로 점찍어 놓고 귀애했는데, 난데없이 태자의 색신이 되었다니 이게 웬 당나귀 이빨 까는 소리냐?”
“…….”
“태자에 대한 흉흉한 소문을 듣지 못한 게냐? 나중 일은 어찌 감당하려고 그래? 나는 신통 세력이 주를 이루는 작금의 세태가 싫어 그래도 가장 믿을 만한 홍의 너와 후일을 도모하려 하였다. 헌데 네놈이 배신을 때리고 신통의 산하로 들어가? 네놈이?”
분을 이기지 못한 미함은 급기야 발을 들어 올렸고 홍의는 삭 피하려다가 이미 한 수 앞을 보고 반대편으로 날린 미함의 왼발에 이마빼기를 정통으로 걷어차였다. 귀애 같은 소리 하네. 이렇게 툭하면 부하들에게 폭력을 일삼는 무뢰배가 원주로 있으니 다향원이 이 모양 이 꼴인 게 아닌가.
“허면 어찌합니까, 어째요! 거절하면 죽일 기센데.”
“흐흥, 한번쯤 죽어 보는 것도 그리 나쁜 경험은 아닐 터인데.”
“제가 제 의지로 신통의 산하에 든 것도 아니고, 그저 잠시 잠깐 이러다가 말 것입니다. 약의 효험도 확실하니 태자는 곧 양기를 되찾을 거고 저 또한 금세 제자리로 돌아올 텐데, 왜 사서 걱정입니까?”
“태자가 고자라던데?”
“…….”
“정통 사람들에겐 일전부터 태자가 제대로 된 성생활을 영위하지 못한다면서 구설이 많았다. 자고로 하늘을 봐야 별을 따는 법인데, 이미 시르죽은 양물한테 방중술은 가르쳐 뭣에 써?”
“보지도 않고 서는지 안 서는지 어찌 안답니까.”
“본 것처럼 말하는구나?”
“물론 직접 본 것은 아닙니다만.”
“네놈은 그저 황후 손에 놀아나는 게야.”
미함이 작정을 하고 딴죽을 걸자 홍의도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현재 궐내에 떠도는 소문 중에 정설이 있었습니까? 공께서 말하는 태자는 고자네 어쩌네 하는 소문도 결국 허무맹랑한 억측이 아닙니까.”
“태자의 열 보 안전에 서면 귀신이 든다던데 그건 어찌할 테냐?”
“…….”
“태자에게서 나는 악취가 하도 심해서 그가 지나가면 꽃이 잎을 말면서 죽고 날벌레가 꼬인다던데 그건 또 어찌할 테냐?”
결국 홍의는 헛웃음을 쳤다. 아주 그냥 다 같이 지랄로 염불을 왼다 싶었다. 태자에게서 악취는커녕 향긋하고 정갈한 난향만 났었다. 하지만 미함에게 그런 세세한 부분까지는 토설할 수 없어 그냥 입을 다물었다. 이를 테면, 그 눈동자의 색 같은 것 말이다. 어둔 곳에서 봤을 때는 부드러운 청록색으로도 보였는데 햇빛 아래에서 보았을 땐 진청색으로도 보였다. 눈동자 속에 세상에 존재하는 예쁘고 청량한 색은 모조리 가져다가 담아 다니는 듯한, 기이하고 믿을 수 없고 숨 막히게 아름다웠던… 흠. 잠시 사색에 잠겼던 홍의는 제 풀에 머쓱해져 괜히 헛기침을 했다.
아무리 겁을 줘도 홍의가 눈 하나 깜짝 않으니 미함은 한숨과 함께 모쪼록 조심해라, 한다. 사후 약방문이었다. 이미 홍의는 자신의 앞날이 범상치 않음을 예감한 지 오래였다.
‘기왕 이렇게 된 것, 내 반드시 태자가 힘차게 파정하는 것을 확인하고 말리라.’
어째서 이런 식으로 귀결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파정만 시키면 되는 것이다. 파정만. 홍의는 허공을 노려보며 심기일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