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색련-2화 (2/111)

#02

해운은 눈을 부릅뜨고 침을 꼴깍 삼켰다.

“인삼, 백복령, 백출, 길경, 호랑이 부속… 좌우지간 남자 정력에 좋다는 것은 모조리 갖다가 빻아 만든 미약이란 말일세. 냄새는 좀 역할 수 있으나 명약 중의 명약이라, 이것만 먹으면 불알이 비대해져 숨이 깔딱깔딱 넘어갈 때까지 맘껏 박지를 수 있게 되는 것이네.”

얼결에 받아 들긴 했지만 여전히 미심쩍긴 마찬가지였다. 해운은 뱁새눈을 떴다.

“내게 협잡질을 하려는 게 아니고?”

“협잡이 아닐세. 불알이 하도 커져 땅에 끌린 이도 있었네.”

“설마.”

“난 불알로 걸어 다닌 적도 있네.”

표정이 사뭇 진지하고 말투가 무덤덤하여서 아주 다 거짓부렁은 아닌 것 같았다. 해운은 집중하는 표정으로 혀를 빼어 물고는 꾸러미를 열어 안에 든 가루를 거듭 확인하였다.

“거 사람 의심은 많아서. 자. 이것도 받게나.”

홍의는 읊조리면서 반대편 소매를 뒤적거렸고, 뒤이어 들려 나온 것은 손바닥보다 조금 클까 말까 한 크기의 붉은 책이었다. 붉은색 화첩. 제목도 안 적혀 있는. 저것은 소매가 아니라 화수분인 모양이지. 얼른 화첩을 받아서 한 장 한 장 넘기느라 정신없는 해운에게, 홍의는 먼 산을 보며 읊었다.

“여인네를 곡진하게 품을 수 있는 비결을 모두 때려 넣었다는, 춘화집의 대가 우립 선생의 마지막 역작일세.”

“우립 선생? 그 최근에 장안에서 얼굴 없는 화공으로 구설에 올랐다는 변태 영감 말인가?”

“…영감은 아닐 것이다. 내 건너 듣기로….”

홍의가 어쩐지 빡친 얼굴로 뇌까리며 돌아보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해운이 해사하게 미소 지었다.

“흠흠. 이 귀한 걸 받았으니 나 또한 자네에게 보답을 해야겠지. 그래. 자네는 내게 원하는 바가 뭔가? 보석? 채전? 아니면 내 특별히 아끼는 준마를 내어 줄까?”

“되었네.”

홍의는 다 귀찮다는 표정으로 손사래를 치고는 바위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손바닥으로 의복에 묻은 흙먼지를 탁탁 털어 내며 중얼거린다.

“여인의 맘을 얻는 데 중한 것은 비대해진 불알 따위가 아니라 했네. 이대로 다향원에 돌아간다면, 그 해어화에게 모욕을 주고 거칠게 대한 것을 사죄하라고.”

홍의는 왼쪽 입꼬리는 놔두고 오른쪽 입꼬리만 들어 올리며 바람 타고 노니는 냉정한 풍류랑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해운은 눈시울이 축축이 젖어 드는 줄도 모르고 감격에 겨워하였다.

***

궐내 돌아가는 사정이야 보지 않고도 헤아릴 수 있을 만큼 훤했다. 신통 귀족의 득세, 분별없는 색탐, 그 모든 부조리를 지극히 당연하다 여기는 권력의 개들. 하지만 힘없는 분노는 아무 소용없는 법이다. 홍의는 그들에게 동화된 것은 아니었지만 딱히 그들을 거스르지도 않았다. 성정은 올곧은 데 반해 귀찮은 일에 휘말리는 것은 또 몹시 질색하기에 대충 무지렁이 시늉을 하며 살았다. 그저 조용히 먹고 자고 싸고, 좋은 사람들과 즐길 것 즐기다가 늙으면 가는 것이 인생인 거다.

“청유는 즐거우셨습니까?”

홍의가 다향원의 처소로 돌아가자 막 소제를 마친 휘하의 무동들이 왁자지껄 몰려들었다. 그에 질색할 만큼 피로를 느낀 홍의는 부관인 새옹만 남기고 나머지 무동들은 전부 처소로 돌려보냈다.

“왜들 저리 소란이라니.”

“말해 무엇해요. 청유에서 돌아온 해어화들이 앞다투어 주군의 영웅담을 늘어놓는 바람에 그렇습니다. 연홍을 구하셨다면서요? 해운 님과는 무슨 이야길 나누신 겁니까?”

“해운이 고자란다.”

“헉.”

“너만 알고 있어라.”

“해운 님이 고자라니!”

새옹은 허를 찔린 미친놈처럼 침상을 두드리며 발악하듯 웃었다. 우는 것 같기도 했다. 비밀이란 본디 이런 식으로 이 손아귀에서 저 손아귀로 옮겨 타는 것이렷다. 말해 놓고도 잠시간 흠칫했지만 그래도 새옹은 주워듣는 이야기들을 속으로 삭여 내는 걸 몹시 잘하는 편이라 딱히 걱정은 되지 않았다.

“해서, 내가 양물 없이도 여인과 화락할 수 있는 비법을 전수해 주었지.”

홍의는 의복을 훌훌 벗어 빨랫감을 모아 둔 목통에 던져 넣었다. 바닥을 휩쓸면서 겔겔거리던 새옹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얼굴과 팔을 침상 위로 턱 걸쳤다.

“주군께서는 말짱한 양물을 지니고 계시는데, 어찌 양물 없는 사내의 맘을 헤아릴 수 있다는 겁니까?”

“네가 내 양물을 두 눈으로 보았느냐? 보지도 않고 말짱한지 아닌지 어찌 알아? 속단하지 말아라.”

“또. 또. 뜬구름 잡으시기는.”

“아 물론 내가 방사에 능한 것은 사실이야.”

홍의는 묻지도 않은 제 자랑을 담담하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내 어릴 적 일찍이 성에 눈을 떠,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펼쳐 본 오진보성이라는 책에서 처음 색사의 기초를 다졌다. 이어서 다양한 방중술을 섭렵하기에 이르렀지. 현미심인, 삼봉단결, 청성방결, 대도현지, 방호외사 등등. 하아… 참으로 즐거운 공부였어.”

“한마디로 방사를 글로 배우신 거네요.”

“…그리고 그토록 방대하고도 독보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나만의 개성 넘치는 춘화집을 만들어 내기에 이르렀다. 그저 여인네를 벗겨 놓기에 급급한 여타의 저질스러운 춘화집과는 그 깊이가 다른, 우아하고도 섬세한 춘화집을 말이야.”

“이보시오, 우립 선생. 그 우아하고도 섬세한 춘화집을 사간 놈팽이들이 이렇게 안 야한 춘화집은 처음이라며 다 같이 농성을 벌인 걸 잊은 겁니까? 아주 그냥 이름값이 똥값이 되셨습니다요, 우립 선생.”

“…소제 상태가 왜 이리 엉망인 거야?”

홍의는 결국 말꼭지를 돌리며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처소를 트집 잡기 시작했다.

삐걱.

그때 돌쩌귀가 맞부딪는 소리가 울렸다. 누군가 난데없이 문을 열고 들이닥친 것이다. 속잠방이 차림으로 쪼그리고 앉아 먼지가 묻어 나오는 곳을 손가락으로 훑고 있던 홍의는 그 자세에서 고개만 배주룩이 들어 문간을 쳐다보았다.

“네가 칠별관 문성의 아들인 홍의인가?”

“…군우령께서 어찌.”

매사 느긋한 성미였던 홍의조차 지금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들어선 이는 이 나라 군사를 총괄하는 군우령 대윤이었다. 이렇게 직접 찾아오리라곤 상상조차 못 할 만큼 위세가 대단한 인물이라, 홍의는 속잠방이 차림이 무색하도록 벌떡 일어나 예 아닌 예를 갖추었다.

아무래도 사달이 난 것 같았다. 무엇보다, 군우령 대윤은 해운의 아버지였던 것이다. 서서히 목을 죄어 오는 불안함에 눈 둘 곳을 모르고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무는데, 처소 내부를 무심히 훑어 살핀 대윤의 냉랭한 시선이 이윽고 홍의에게로 꽂혀 들었다.

“조용히 따라나서라.”

***

사소했던 오지랖이 물꼬를 텄다. 그리고 초대형 사달이 잇달아 터지기 시작했다.

‘해운 그놈이 작당을 한 것이 틀림없어. 은혜도 모르는 쭉정이 같으니라고.’

홍의는 정복 차림으로 몸피를 갖추고 가타부타 정황도 듣지 못한 채로 대윤을 따라나서야만 했다. 대윤은 다향원 내정의 커다란 연무장을 가로지르는 대신 궁장의 뒷길이나 샛길만을 골라 은밀하게 이동했는데, 바로 그 점이 더욱 홍의를 살 떨리게 만들었다. 목을 딸 때 따더라도 어디서 딸 건지 미리 귀띔이라도 해 주면 좋을 터인데, 대윤은 그저 성큼성큼 나아가고 있을 따름이다.

한참을 이동하던 그가 황후궁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제야 목적지를 깨달은 홍의는 일순 발목에 힘이 풀려 휘청거렸다. 황후궁이라니. 해운의 아버지에게 이끌려 가는 곳이 해운의 어머니가 계신 황후궁이라니. 어쩐지 혼자 잘 놀고 있는 아이를 심심풀이 삼아 괴롭힌 뒤 낄낄거리며 돌아섰다가 그 아이의 부모와 맞닥뜨린 기분이 들었다. 이쯤에서 홍의는 주변에 개구멍은 없는지 둘러보기에 이르렀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했거늘, 실상은 개미 새끼 하나 기어나갈 틈도 없었다.

‘아 나랏일에나 힘쓰면 될 것이지 왜 애들 일에 끼어들고 지랄이야. 고자라고 좀 놀려 먹었기로 부모가 쌍으로 날 죽이겠다는 거야 뭐야. 그냥 지금 뒤통수를 후려치고 탈주할까? 후려쳐? 진짜 쳐?’

지나친 두려움이 기어이 홍의의 이성을 제정신이 아닌 구역으로 밀어 넣었다. 홍의는 엄지손톱을 득득 물어뜯으며 대윤의 뒤통수를 후려치기에 맞춤한 돌조각이 없나 둘러보기 시작했다.

“네 황후궁은 처음이겠구나.”

그때 별안간 군우령이 온후한 음성을 내며 뒤를 돌아보았다. 홍의는 손바닥 뒤집듯 만면에 살가운 미소를 가득 담았다.

“예. 대윤 공. 황후궁은 역시 맵시부터가 달라 아름답기 그지없네요. 저 날아가는 새들이며… 꽃과 나비….”

황제께서 기거하는 대궁은 연회 때 종종 들락날락하였으나 황후궁에 든 것은 기실 처음이긴 했다. 너른 정원은 발에 채는 것 없이 걷기에 편안했고, 갖가지 물오른 나무와 해사하게 피어난 꽃들이 만발을 이루었다. 대윤은 전각 내부로 들지 않고 곧장 후원으로 향했다. 화려한 비단 관상어가 헤엄치는 연못의 다리를 건너니 알록달록 어여쁜 단청 아래 화려한 누각이 드러났다. 그 천상의 선계처럼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홍의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심정으로 후들거리는 무릎에 꾹꾹 힘을 주며 돌계단을 올랐다.

“네가 문성 공의 아들 홍의로구나. 어서 자리에 앉아 차를 들어라.”

화려한 가체에 금관을 들어 올리며 황후는 기탄없이 웃어 보였다. 이 높고 큰 여인을 이토록 가까운 곳에서 마주한 것은 처음인지라 홍의는 잠깐 본인의 처지를 잊은 채 넋을 놓았다.

벽오동으로 짠 탁상 위에는 담연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산 차와 꿀을 쳐서 만든 살구편이 먹음직스럽게 놓여 있었다. 홍의는 황후가 부추기는 대로 차를 마시고 살구편을 먹었다. 보통 망나니가 목을 치기 전에 자기한테 한 품지 말라고 입으로 술을 뿜어 준다는데 그와 비슷한 맥락인 것 같아 두렵긴 매한가지였다.

황후는 예리한 눈으로 그런 홍의를 살피다가 툭 말했다.

“수려하구나.”

홍의는 씹던 살구편이 목구멍에 걸려 콜록대었다.

“목선이 유려하고 안광이 형형하구나.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목소리도 잔잔한 것이 참으로 재목은 재목이구나.”

‘…뭐래.’

홍의는 차마 받잡지 못하고 눈만 깜빡거렸다. 미(美)를 숭상하는 나라의 일원으로서 몸의 아름다움을 인간의 으뜸가는 덕목으로 치는 건 이해하는 바였으나, 거의 납치하듯 사람을 끌어와 놓고 다짜고짜 외모 칭찬 일색이라니.

“내 너를 황후궁으로 부른 이유는….”

황후는 어쩐지 여러 차례 말을 고르다가 한참 만에 다시 이었다.

“내가 아들인 해운에게 듣기로 너는 차기 부제향선(副第香仙, 다향원의 주인이 될 자)후보로 거론이 될 만큼 무동들의 중망이 두텁다던데, 그것이 사실이냐?”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그러하옵니다.”

뭐 사실은 사실이었다. 차츰 사고 회로가 정상으로 돌아온 홍의는 짧은 순간 상황을 정돈해 나갔다. 그러니까 해운이 뭔가 작정하고 제 어미에게 홍의를 헐뜯거나 비약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현재 황후에게서 적대나 분노는 한 톨도 보이지 않으니 말이다.

“또한 너는 풍류랑으로서 그림이나 무예에도 아주 출중할 뿐 아니라, 성의학(性醫學)에 있어서도 그 조예가 남다르렷다?”

“…조예까지는 아니온데….”

말끝을 흐리던 홍의는 잠시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이를 바득 갈았다. 해우운….

“우리 황족들에게도 대대로 색사의 이치를 올바르게 인도하는 정모가 있느니라. 그들이 전수한 음양의 비술을 토대로 우리는 황족의 신성을 유지할 수 있었지. …한데 말이다.”

마흔 줄에 가까운 나이에도 잔주름 하나 없이 매끈하던 황후의 액상이 그 순간에 지긋이 좁아졌다.

“가문 대대로 정모를 역임해 온 그녀들조차 황태자의 옥체를 다스리지 못한다니, 이것이야말로 재액이 아니더냐?”

황후의 구중에서 ‘황태자’라는 단어가 나온 순간 홍의의 등줄기에 찬결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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