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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멸망(7) (280/283)
  • 44. 멸망(7)

    허소리는 대던전에 들어가지 않았다. 대신 던전 밖에서 다른 헌터를 지원 중이었다.

    [백곡왕의 긍지]!

    [일격필살].

    허소리가 한 데서 몰려드는 몬스터의 진열을 흩트리면 임승주가 광범위한 공격을 날린다. 그리고 남은 몬스터는…….

    [여우불].

    양호진이 주술이나 스킬을 써서 잡는다. 이 연계에서 빠져나가거나 아직 숨통이 끊어지지 않은 적이 있다면…….

    [에고소드].

    강태주가 마무리했다. 그러고나면 주변에 살아있는 몬스터는 한 마리도 남지 않은 채, 완벽하게 마무리되었다.

    덕분에 어지간한 대형 길드보다 몬스터를 처리하는 속도가 빠르다. 주변에서 힐끔힐끔 감탄과 시기하는 눈빛이 느껴진다. 잠시 숨을 고르며 허소리가 투덜거렸다.

    “이런 상황에 왜 저런담? 저쪽이 더 요란한데.”

    소리가 힐끔 하늘 위를 살폈다. 미르 길드의 길드원들은 이제 거칠 것 없다는 듯, 원래 모습을 드러낸 채 마구 몬스터를 사냥하고 있었다.

    “저쪽은 너무 별세계 같잖니.”

    “호진 씨 귀도 충분히 딴세상 같은데요.”

    “저들보다는 화려하지 않으니까. 게다가 황룡 님쯤 되면 싸울 의지도 없어지지.”

    “……확실히.”

    이번 전투에 참여한 황룡은 SSS급이라는 무위를 증명하듯, 쏟아지는 몬스터를 쓸어버리고 있었다. 황금빛의 비늘을 번뜩이며 군림하는 그 모습은 지나치게 압도적이라, 자신과 비교하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노네임의 길드원은 모두 인간(구미호가 섞여 있지만). 그나마 만만하니 시기의 대상도 되는 것이다.

    “너무 신경 쓰지 말렴. 우리도 충분히 훌륭하니까. 게다가 이번 일이 끝나면 나름 도움이 될 거란다.”

    “도움이요?”

    “길드 홍보가 되지 않겠니? 청람을 누르는 것도 가능하겠지.”

    “오호.”

    눈을 빛낸 허소리가 몰래 찍는 카메라를 향해 씩 웃으며 브이 자를 만들었다. 그러자 렌즈를 보고 있던 각성자는 화들짝 놀라 허겁지겁 군중 속으로 몸을 숨겼다. 소리가 코웃음 쳤다.

    “별로 도움도 안 되는데요.”

    “네가 한 대 패는 줄 알았겠지.”

    “와, 너무하네. 제가 사람 패는 여자로 보여요?”

    임승주의 말에 허소리가 장난스레 투덜대며 주먹을 뻗었다. 몰려들던 몬스터가 충격파에 다져지며, 길이 만들어지는 걸 본 임승주가 혀를 찼다.

    “이걸 보고 있는데 안 무서워할 리가.”

    “얼마나 이어질지 모를 전투야. 힘 배분을 좀 생각해 두렴.”

    “하지만요…….”

    양호진의 충고에도 여전히 세게 주먹을 날리는 허소리의 표정이 어두웠다.

    “길드장님이 괜히 이상한 소리 해서 그래요.”

    대던전을 준비하며 지호는 소리를 찾아왔다. 그리고 하는 말은 몹시 불길하기 짝이 없었다.

    ‘저 없는 동안 길드를 잘 이끌어 주세요.’

    ‘……무슨 말이에요, 그게?’

    소리는 지호의 멱살이라도 쥘 기세로 바짝 다가왔다. 지호가 어색하게 웃으며 한 걸음 물러났다.

    ‘이상한 뜻 아니고요. 여기에 있는 길드원, 소리 씨가 길드장 대리로 잘 이끌어 달라고요.’

    ‘정말 그것뿐이에요?’

    ‘그거 외에 다른 게 있겠어요?’

    지호는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가증스러운 얼굴이 참으로 예뻤다.

    ‘어…….’

    ‘아, 주이원이 부르네. 저 가 볼게요.’

    지호가 바쁘게 가 버리고 나서야 소리는 뒤늦게 제대로 추궁하지 못한 걸 후회했다. 하여간 그 얼굴이 문제다. 익숙해졌는데도 가끔 얼굴에 홀려 넘어갈 때가 있다.

    “아, 진짜……. 우리 길드장님 맨날 몸 막 굴리니까, 이번에도 무슨 일 치를 것 같아서 무섭다니까요.”

    “전형적인 사망 플래그네. 시체로 나오…….”

    호진이 태주의 옆구리를 주먹으로 퍽 때리고 입을 막았다. 어느새 꽤 익숙해 보이는 손길이었다.

    “이런 헛소리는 듣지 말고. 큰 싸움에서 아무 부상도 입지 않고 승리할 수는 없겠지. 충분히 할 법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만.”

    “그건 그렇지만…….”

    임승주의 말에도 허소리는 여전히 마음에 걸리는지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때, 머리 위로 요란한 벼락이 쳤다. 황룡과 함께 날아다니던 흑룡이 허공을 돌던 흑룡은 엄청난 수의 몬스터를 검게 태워 버린다. 그리고 유유히 하강하기 시작했다.

    몸이 바닥에 가까워졌을 즈음, 흑룡의 몸이 작아지는가 싶더니 어린 청년의 몸으로 변했다. 김태용이었다.

    “무슨 일 있어요?”

    잘 싸우던 태용이 갑자기 아래로 내려오자 소리가 주변을 살피며 경계 태세를 취했다. 태용은 고개를 저으며 손가락을 딱 소리 나게 부딪쳤다. 다시 한번 요란하게 벼락이 치며 몬스터가 나자빠진다.

    “아니요, 이곳은 순조롭습니다. 다만 조금 전에 하시는 이야기를 우연히 들었는데, 안에 들어간 지호 님과 이원 님이 걱정되어서…….”

    “……왜요? 김태용 헌터한테도 무슨 말 했어요?”

    태용이 무겁게 고래를 끄덕였다.

    “그…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무슨 이야기요?”

    “저와의 끈이 끊어졌다는…….”

    “……그거 나쁜 거예요?”

    태용은 고개를 저었다.

    ‘너랑 날 잇던 끈이 끊어졌어. 아니지, 완전히 사라졌어.’

    ‘끈이라니, 무슨 뜻입니까?’

    ‘그런 게 있어.’

    궁금하게 해 놓고 지호는 정확히 말해 주지 않았다. 캐물을까 하다가 관둔 건, 그렇게 말하는 지호의 표정이 무척 후련하고… 오히려 이전보다 훨씬 더 태용에게 호의적인 빛을 띠고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지금과는 다른 관계로 좋아졌을지도 몰라. 하지만 나는 지금이 더 마음에 들어.’

    지호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태용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호는 태용에게 있어서 소중한 친우였다. 그가 마음에 드는 일이라면 분명 태용에게도 좋은 일일 터였다.

    ‘지호가 좋다면 저도 좋습니다. 마음에 듭니다.’

    ‘그렇지?’

    지호는 그 말을 바랐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

    ‘처음에는 엉망이었지만 결국 다 잘 맞아떨어졌어. 그러니까 앞으로도 분명 다 잘 될 거야.’

    ‘네, 잘 되실 겁니다. 믿고 있겠습니다.’

    태용은 웃으며 지호를 응원해 주었다. 그가 가는 길, 분명 아무 문제없이 잘 풀리리라 여기며.

    하지만 위에서 우연히 허소리의 말을 듣고 돌이키니, 영 수상쩍게 느껴지는 부분이 많았다.

    왜 꼭 주변을 정리하듯 자기 일을 맡기고, 그간 못했던 말을 털어놓고 갔을까.

    “혹시…….”

    “…….”

    “지호 님은 죽음을 각오했습니까?”

    “서, 설마요.”

    몹시 불길함을 느끼며 소리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영 없을 법한 일은 아닌 게 더 불안했다. 하지만…….

    “야, 쓸데없는 걱정하지 마라. 바퀴벌레 커플 같이 갔잖아? 주이원 그 미친 새끼가 두고 보겠냐고.”

    가만히 듣고 있던 강태주가 혀를 쯧쯧 차며 일행의 가정을 부정했다. 그가 내뱉은 이름 석 자의 파급은 컸다. 지호의 안위 면에서는 당사자보다 주이원이 훨씬 믿음직했다.

    불안하게 내려왔던 태용의 얼굴에도 화색이 돌았다.

    “맞습니다. 그자라면 길드장님의 멱살을 잡아서라도 이곳에 돌아올 것입니다.”

    “그래, 그러니 일단 우리는 이곳에 집중하자꾸나.”

    다른 건 못 믿어도 지호와 관련된 일에서는 분명 믿을 만한 남자니까. 호진은 불길한 마음을 억누르며, 다시 눈앞의 적에 정신을 집중했다.

    * * *

    지호를 찾아, 대던전을 가로지르던 이원의 발이 막힌 건 눈앞에 나타난 꼴도 보기 싫은 적 때문이었다.

    “테네브.”

    “주이원.”

    테네브는 허공에 뜬 채, 위에서 이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신다운 위엄이 느껴지는 오만한 얼굴이었다. 그걸 보며 이원은 과거의 생각이 나서 피식 웃었다.

    “얻어터지고 나가떨어진 새끼가 이제 와서 그래 봤자 웃기기만 하거든?”

    아직 애송이이던 시절에는 두려운 게 아주 많았다. 갑자기 떨어진 이세계에서 그는 대의라는 명분으로 살인을 종용당했다. 살아남을 방법이 그것뿐이라 수락했지만, 처음부터 이원이 손에 피를 묻히는 걸 아무렇지 않게 여겼을 리는 없었다.

    두려운 밤이 이어졌다. 죽이는 것도 두려웠지만 그보다는 죽는 게 더 두려웠다.

    테네브는 무척 강한 왕이었다. 간신히 승리한 순간을 이원은 오랫동안 기억했다. 그래, 오랫동안.

    “철 지난 퇴물이 자꾸 나와서 신경을 긁어, 진짜 좆같네.”

    “너는 날 쓰러트릴 자격이 없었다.”

    테네브의 말에 이원이 눈썹을 들썩였다.

    “뭔 개소리야?”

    “나는 이플리스를 위해 멸망을 계획했다. 그러나 너는 사리사욕을 위해 이플리스를 이용했을 뿐이다. 그러니…….”

    “그냥 닥쳐라, 좀.”

    이원은 한숨을 푹 내쉬며 손을 뻗었다.

    주이원은 이플리스에 애착이 없다. 그 세계에는 신지호가 없으니까. 이용하기 위해 행성을 원만하게 돌아가도록 다스린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멸망하는데 그대로 둘 만큼 아무 감정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좋으나 싫으나 그의 바탕이 만들어진 세상이다. 앞으로 수천 년을 더 살아간다고 해도, 그는 이플리스의 관리자였던 주이원이다.

    그런 세계를 근본부터 없애려고 한 놈에게 들을 말은 아니었다.

    이원의 손에 천천히 한 자루의 검이 생겨났다. 손잡이부터 날까지 모두 새하얀 빛으로 이루어진 검이다. 이원은 가볍게 제 손에 들어온 검을 보며 씩 웃었다.

    [클라우 솔라스].

    지호가 다른 차원에서 가져온 검은 이원에게 전생의 기억 한 조각을 건넸다. 승리를 상징하는 이 검은 이원의 영혼 속에 깃들어 있었으니, 자각을 계기로 꺼내 쓰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제 너한테 신경 쓸 시간이 없거든. 알아서 꺼지고 그만 좀 보자.”

    가볍고 건조한 말투. 아무 사감을 싣지 않을 수 있는 건, 테네브가 이원에게는 그저 과거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원의 눈이 짙은 황금빛으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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