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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멸망(5) (279/283)
  • 44. 멸망(5)

    대던전은 공략하러 들어온 사람을 뿔뿔이 흩어놓는다. 지호 역시 대던전에 들어와 홀로 남았다.

    ─ 신지호.

    대던전에 발을 딛자마자, 처음 듣는 목소리가 지호를 부른다. 목소리는 지호를 향한 분노와 희열에 가득 차 있다. 제 일을 방해한 이에 대한 분노. 그리고 곧 신지호를 찢어 죽일 수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희열.

    지호는 목소리가 들리는 쪽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목소리는 지호를 부르며 끌어당기고 있었다.

    대던전이 가만히 지호를 기다릴 것이라 생각하진 않았다. 이 이상 대비할 시간을 줄 만큼, 대던전의 주인인 리크레스가 어리석진 않을 테니까.

    ─ 와라.

    서늘한 목소리에 지호가 피식 웃었다. 직접 대면하는 건 지호 역시 바라던 바였다. 그리고 목소리에 저항하는 대신 기꺼이 몸을 맡겼다.

    새카만 어둠이 지호를 휘감았다. 어둡고 서늘한 기운이 지호의 전신을 스쳐 지나간다. 지호는 그 속에서 지금까지 역사 속에 스러진 멸망을 보았다. 열심히 살아가던 자들이 갑작스레 들이닥친 멸망에 속수무책으로 죽어 나간 과거를 보았다.

    천천히 눈을 떴을 때, 지호는 대던전의 중심에 서 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이 위태로운 바닥과 중앙에 살점과 뼈로 만들어진 흉측한 왕좌가 보였다. 그것보다 인상적인 광경은 술렁이는 하늘이었다.

    언뜻 보면 어둠 내린 밤처럼 검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건 대던전에 의해 죽어 버린 망령이었다. 수를 헤아리기 힘들 만큼 수많은 죽음이 안식조차 얻지 못한 채 아우성을 질렀다.

    그때 옥좌의 위로 검은 오물 같은 것이 모여들었다. 그것은 천천히 쌓여 인간과 유사한 형상을 만들었다.

    덜 만들어진 이목구비를 가진 그것이 입을 열었다.

    ─ 멸망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카랑카랑한 쇳소리로 상대가 말했다. 쇳소리에는 여러 목소리가 섞여 있었다.

    리크레스. 세계를 멸망시키기 위해,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제 모든 것을 불살라 대던전이라는 미증유의 재앙을 만들어 낸 자들. 원념의 집합체는 일제히 말을 쏟아냈다.

    ─ 멸망을 막아서지 마.

    ─ 이 우주에 산 자는 필요 없어.

    ─ 살아 있는 자들은 다툼을 낳을 뿐이다.

    ─ 차라리 멸망하는 것이…….

    다수의 원념이 지호를 향했다. 충분히 각오하고 이곳에 온 지호조차 가슴 서늘해질 만큼 음습하고 집요한 악의였다.

    그때.

    ‘멸망의 대적자’가 당신과 함께 있습니다.

    안심시키듯 다정한 전언이 지호에게 내려왔다. 직접 강림하지 않아도 이 대던전에 존재하는 시스템 자체가 ‘멸망의 대적자’의 산물이었다.

    그의 말대로 함께 있다. 늘, 함께 있었다. 과거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든든한 존재 덕분에 딱딱하게 굳은 지호의 얼굴이 조금이나마 풀어졌다.

    “자연스럽긴 뭐가 자연스러워. 너희가 죄다 죽이고 있으면서.”

    영생을 바라는 건 아니다. 삶이 유한하기에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죄 없는 삶들이 인위적으로 찾아온 멸망에 부딪혀 져 버렸다. 그리고 안식을 얻지도 못한 채 이곳에 남아 울부짖고 있다.

    ─ 아무것도 모르는 자의 말.

    하늘에서 수많은 망령이 비처럼 쏟아졌다. 흠칫 물러나는 지호를 직접 덮치는 대신, 그들은 지호의 앞에 과거를 불러냈다.

    대던전을 극복한 세계라고 해서 영원하지는 않았다. 던전이 일상이 되고 나면, 강한 힘을 부여받은 이들은 어느새 자신의 이득을 위해 싸우기 시작한다.

    외부에서 개입할 때보다 내부에서의 균열이 더 치명적이다. 가장 약한 이들부터 수탈당하며 죽임당한다. 상대를 죽이기 위해 무기를 만들고, 죽이고 또 죽여서, 결국에는 제 손으로 모든 걸 망쳐 버린다.

    “본인이 한 일의 결과는 본인의 책임이지. 너희가 저지르는 건 침략이고. 완전히 다른 일을 똑같은 문제인 것처럼 말하지 마.”

    멸망을 불러일으키는 놈들이 보여 줘 봤자, 이제 와서 지호의 마음을 흔들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내가 너희를 막을 거야.”

    흐흐, 그것이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더니 오만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 네 뒤의 ‘멸망의 대적자’조차 하지 못한 일이다.

    “그렇지.”

    하지만 ‘멸망의 대적자’는 감히 지호가 바라볼 수도 없는 거대한 존재와 맞서 싸울 기반을 쌓아 두었다.

    “너희는 전능하지만 전능하지 않아. 어느 세계든 나타날 수 있지만 단 한 번뿐이야.”

    반칙으로 찾아온 두 번째 세상. 하지만 그들이 아무리 강하다 한들, 시스템이 적용되는 이상 영원히 머물 수는 없었다.

    이 세계를 포식하거나, 또는 공략당해야만 그들은 지구에서 사라질 수 있다.

    지호는 그 어느 쪽도 할 생각이 없었다.

    대던전을 공략하기 위해 모인 헌터들에게도 말해 두었다. 일단 선발대가 갈 테니, 48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면 그때 대던전으로 들어오라고. 그들은 지금쯤 대던전에서 쏟아지는 몬스터를 상대하고 있을 것이다.

    물론 지호는 48시간 후에 그들은 대던전 안으로 들일 생각이 없었다. 그 전에 모든 일을 끝낼 생각이었으니까.

    “너희는 지구에 갇히게 될 거야.”

    이제 이 세계에서 나갈 수 없다. 지호는 영원히 대던전을 이곳에 묶어 둘 생각이었으니까.

    ─ 그런 게 가능하리라 생각하는 건가.

    “왜 안 돼? 시스템도 영원히 지속되고 있는데.”

    어떤 형태로든 인간을 이루는 껍데기를 깨고, 영원을 살아간다는 가정 하에 가능한 일이지만…….

    시스템은 영원히 지속되는 힘이다. 지호가 거기에 편승한다면 얼마든지 영원을 기약하는 게 가능했다.

    “내 모든 걸 바친다면 너희를 영원히 막아 두는 건 일도 아니야.”

    지호는 떨리는 목소리를 억누르며 자신만만한 척 웃었다.

    * * *

    신지호가 자유자재로 시스템을 다루게 된 순간부터 녹스는 가장 큰 무기를 잃었다.

    직접 손을 쓰는 대신 녹스는 외부에서 억압하기로 했다. 헌터 협회를 움직여 어떻게든 일을 방해하는 쪽으로. 하지만 신지호의 마지막 퀘스트가 뜬 순간, 그의 협력자가 등을 돌렸다.

    ‘미안하구나, 경현아. 네 말대로 하기엔 이미 여론이 지나치게 기울었어.’

    손경현은 아버지라고 부르는 남자의 말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지금까지 유용히 쓴 게 무색하게도, 가장 중요한 순간에 그는 효용을 잃었다.

    ‘게다가 네 말대로 신지호를 억압해서 얻는 게 뭔지 모르겠구나. 지금은 초유의 사태야. 네가 지호가 잘못될까 걱정하는 건 알겠다만…….’

    그놈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헛소리를 지껄였다. 그러더니 되레 경현을 위로하듯 등을 두드렸다.

    ‘지호는 잘할 거다. 원래 그런 애잖냐. 이원이도 도와줄 테고…….’

    ‘…….’

    그 순간, 녹스는 상대를 죽여 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녹스가 가장 원하지 않는 것이 바로 신지호가 주이원의 도움을 받아 자신을 떨쳐 내는 것이었다.

    결국 녹스는 대던전에 들어왔다. 온갖 기운이 혼란했다. 하지만 신지호는 머리 위의 태양처럼 강렬한 힘을 발산하고 있어서 찾기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그곳까지 가는 게 마땅치 않단 점이다. 시스템의 힘을 쓰지 못하는 곳에서 손경현은 평범한 헌터 수준에 불과했으니까.

    “리크레스.”

    녹스는 자신의 오랜 협력자를 불렀으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곳은 그들의 본거지인 대던전 안. 평소보다 훨씬 기민하게 상황을 파악할 수 있을 텐데도 반응이 전혀 없었다.

    너도 이용당한 거야, 바보야.

    낭랑한 목소리가 던전 안을 울렸다. 익숙한 기운에 녹스는 인상을 찌푸리며 상대를 노려보았다.

    그곳에 있는 건 작은 고양이였다.

    서리. 그의 조각에 불과한, 작고 작은 파편.

    하지만 그건 더 이상 초라한 존재가 아니었다. 제대로 말도 하지 못해서 늘 대화창을 띄워 말을 걸던 녀석이, 머릿속으로 또렷한 말을 전달했다.

    물론 성장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서리의 전신에서 이전과는 다른 기세가 느껴졌다.

    어쩌면 이제 조각은 자신 쪽일지도 모른다.

    “건방진 고양이 새끼가…….”

    건방진 게 아니라 자신만만한 거야. 너는 지호에게 버려졌고, 나는 지호가 사랑해 주는걸!

    서리가 녹스를 약 올렸다. 어찌나 신이 나는지 서리는 꼬리를 바짝 치켜세우고 바르르 떨었다.

    녹스는 음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서리를 노려보았다.

    서리가 저렇게 강해진 이유는 하나뿐. 신지호가 서리에게 그만한 권능을 내렸기 때문이다. 애초에 녹스는 관리자를 보조하는 존재에 불과하니까.

    저 고양이와 만난 순간부터 녹스는 자신의 힘이 서리에게로 조금씩 흘러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신지호는 아예 자신을 지워 버리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친구였으니까, 마음 약한 신지호는 그런 수까지는 쓰지 못할 줄 알았는데.

    바보야, 왜 그랬어?

    “…….”

    지호의 친구였잖아. 지호는 너도 충분히 아꼈을 텐데.

    선을 지켰다면, 어느 순간 멈추기라도 했다면, 이렇게 극단적인 방법을 쓰지 못했을 텐데. 아무리 바뀌었어도 신지호는 여전히 무르니까.

    녹스가 눈엣가시인 서리로서야 잘 된 일이지만, 같은 입장으로서 녹스의 심정을 생각하면 조금은 불쌍해졌다. 그들에게 관리자는 삶의 의의나 다름없으니까.

    “그 정도로는 부족해.”

    녹스는 탐욕스럽게 중얼거렸다.

    “내가 처음이어도 모자라. 적어도 주이원의 자리를 뺏어야 했어.”

    나도 그 자리는 뺏고 싶긴 한데, 지호의 뜻은 존중해 줘야지.

    “존중할 거면 시작도 안 했지.”

    그래, 그래서 내가 너를 잡으러 온 거야.

    서리가 몸을 낮추고 엉덩이 쪽을 바짝 치켜들었다. 고양이의 사냥 자세였다.

    언뜻 보기에 같잖아 보이지만 맹렬한 기세로 서리가 녹스에게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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