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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멸망(4) (278/283)

44. 멸망(4)

건들면 부서질 것을 대하듯,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접촉이었다. 지호는 아쉬우리만치 짧게 입술을 붙였다가 떼어 냈다. 그러나 멀어지기도 전에 이원이 지호를 붙잡아 당겼다.

“읏…….”

지호가 하려던 말이 이원의 입 안에서 뭉개진다. 순간이지만, 머릿속에 가득 차 있던 생각조차 한 데 녹아내려 자취를 감췄다.

키스가 처음인 건 아니었다. 기억이 온전하지는 않은 이전을 제외하더라도, 이미 몇 번인가 입을 맞췄으니까.

하지만 고백의 직후에 이어지는 입맞춤은 이전과 달랐다. 더욱 달콤하고 부드러운 기분에 자꾸만 온몸에 열이 올랐다. 이원은 품에서 작게 바르작거리는 지호를 놓치지 않았다.

제 품으로 꽉 밀어 넣으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다. 교묘하게 틀어진 각도 덕에 이원의 숨결이 더 깊이 들어온다. 꽉 달라붙은 서로의 몸은 약간의 틈새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지호는 이원이 온몸으로 자신을 덮쳐오는 걸 느끼며 몸을 떨었다.

기분 좋다. 아찔하리만치. 단지 몸의 흥분만 불러오는 게 아니라… 정신적인 만족. 고양감이 상황조차 잊고 지호를 들뜨게 만들었다.

지호는 이원의 손길이 옷을 파고드는 걸 느끼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이원의 입술을 깨물자 그제야 상대가 떨어졌다.

“너무해. 자기도 좋아해 놓고…….”

“하아… 이럴 때가 아니잖아?”

“이플리스로 가면 계속해도 되는데.”

지호가 이원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헛소리하는 이원을 두 쪽 내기라도 할 기세였다. 이원은 지호의 눈빛에 담긴 심정이 뭔지 다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그러면 청혼 무른다는 거지?”

“야.”

살벌한 목소리를 무시한 채 이원이 제 왼손 약지를 들어 보였다. 1년 전에야 준 반지가 이제야 제 손에 들어왔다. 이 순간을 10세기 넘는 세월 동안 기다려 온 이원의 눈이 어린아이처럼 반짝였다.

“그래. 절절매며 청혼할 정도로 내가 좋다는데, 어쩌겠어……. 내가 봐줘야지.”

이원은 마치 지호가 혼자 매달렸다는 듯 잔뜩 으스댔다. 지호는 터무니없는 소릴 하는 이원을 눈으로 흘겼다.

“죽을래?”

“으응, 여보. 그런 말 무서워요.”

여보라니. 지호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자기라는 호칭에도 적응하는 게 한참 걸렸는데 또 바뀐다고? 다시 하얘졌다 빨개졌다를 반복하는 지호를 보며 이원이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 귀엽긴. 자기야, 내가 너그러워서 다행이지 이런 데서 고백하면 차여.”

“……너니까 고백했지.”

“지금 잡은 물고기라고 무시하는 거야?”

“그럼 못 잡은 물고기라도 잡으러 갈까?”

“너무해.”

이원이 입술을 샐쭉였다.

“……됐고, 앞으로 어떻게 할지나 생각하자.”

“어떻게 하긴.”

이원이 바로 옆에 있는 레비아탄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렸다.

“으응, 뭐 쫓아와 봤자 소용없다고 여긴 거 아니겠어? 만만하게 생각해서 쫓아왔다가 울 자기한테 처맞았으니까.”

원래대로라면 테네브는 [신의 저주]로 이원을 약화시켰을 거고, 지호 또한 전투 계열은 아니니까. 나름 만만하게 생각해서 상황을 주도하려 찾아왔을 터다.

하지만 순순히 물러난 게 좋은 신호는 아니었다.

“레비아탄의 위치를 기준으로 대던전이 강림한댔으니까. 꼭 찾아오지 않아도 대던전 강림은 확정인 거겠지.”

“……그렇겠지.”

굳이 찾으러오지 않아도 레비아탄의 죽음은 시간문제이기 때문에.

실제로 레비아탄은 인간 상대로만 날뛰었을 뿐, 이원을 상대로는 별 힘도 쓰지 못하고 기절해서 뻗었다. 살아있는지 죽었는지 구별도 안 되는 몸을 보아하니, 얼마 남지 않았으리라.

“자기야. 지금이라면 안 늦었어. 아직도 철회 안 해?”

이원이 지호에게 슬금슬금 다가와 귓가에 속삭였다. 지호는 몇 번이나 번복하는 이원에게 화내는 대신 손을 붙잡았다. 천천히 이원의 손과 자신의 손이 얽히도록 깍지를 낀 지호는, 이원의 뜨거운 손을 꽉 쥐었다.

“안 해, 바보야. 너무 걱정하지 마.”

“나는 자기가 지나치게 긍정적이라고 생각하는데…….”

“그야 나 혼자면 힘들었겠지. 너랑 나 둘이면 더 무섭고.”

자신만 죽어서 해결된다면 차라리 낫다. 이원과 함께 목숨을 던져야 한다면 무섭다. 몇 명 더 추가된다고 해서 불안이 덜어지진 않는다.

하지만.

“말했지, 너 혼자 애쓸 필요 없다고.”

이전의 지호는 불신이 가득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호가 가능성에 기대어 저지른 일에 호응해 준 수많은 사람이 있으니까.

“그리고 우리끼리 애쓸 필요도 없어.”

지호는 정신을 집중해 시스템을 조작했다. 그리고 곧, 모든 각성자들의 눈앞에 새로운 퀘스트가 떠올랐다.

시스템 관리

퀘스트: 대던전 공략

곧 지구에 대던전이 발생할 예정이다.

보상 지구의 안전

세계 곳곳에 거대한 포털이 설치됐다. 인구가 많은 곳이라면 어김없이 설치된 포털로 각국에서 선별된 헌터들이 들어간다.

국적도 인종도 나이도 성별도 모두 다른 이들이 향하는 곳은 하나.

현재 레비아탄이 존재하는, 주변에 무인도뿐인 어느 해역이었다.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별의 수호자] 스킬로 축복을 내려준 지호는 한시름 놓고 잠시 구석에 앉았다. 여기저기서 지호를 힐끗거리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대응할 여유는 없었다.

구경만 하는 사람들 사이로 허소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처음 퀘스트 봤을 때는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괜찮네요?”

“그러게요.”

퀘스트는 등급을 가리지 않고 모든 각성자에게 전해졌다. 비각성자에게도 그 퀘스트의 내용이 전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뉴스에 퀘스트의 내용이 뜨는 것과 거의 동시에, 대부분의 유력 길드가 대던전의 공략 의사를 밝혀 왔다. 하긴, 이득을 따질 만한 일이 아니었다. 어차피 대던전을 막지 못하면 멸망이다. 그리고 대던전을 성공적으로 공략했을 경우, 참가하지 않은 길드는 거나하게 욕을 얻어먹을 터였다.

“일반 헌터도 이만큼이나 참여할 줄은 몰랐지만요.”

허소리는 감탄하며 주변을 살폈다. 길드에 속하지 않은 헌터나 중소형 길드 또한 이번 작전에 참가했다.

물론 개인의 이득을 따져가며 참가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확실히 이 참여율은 높았다. 오죽하면 모두 이 자리에 오지는 못하고 만에 하나를 대비해 세계 각지의 던전 앞에서 대기하고 있으니.

그렇게 한참 준비 중이던 때였다.

「거기, 지금 뭐하는 거야!?」

외국인이 버럭 화를 내며 누군가에게 소리친다. 공격적인 목소리에 돌아보니 표정 없는 여자가 기묘한 움직임으로 레비아탄에게 바싹 다가가 있었다.

지호가 여자를 바라본 순간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히죽 웃는다.

「녹스를 위하여.」

마치 저주처럼 말을 남긴 여자가 그대로 레비아탄을 향해 몸을 던졌다. 분명 레비아탄으로 향하는 결계가 있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가간 그녀는 자신이 가진 모든 마력을 일시에 불살랐다.

콰과과과광!

꽤 높은 등급의 각성자가 제 목숨을 버리며 만들어낸 최후의 폭발에는 버티지 못했다.

여자의 몸이 레비아탄에 닿는 순간, 끔찍한 비명이 울렸다. 여자가 내지른 단말마는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크고 묵직한, 거대한 바다뱀의 비명.

─ 길동무가 많이도 왔군. 마지막을 장식하기에는 퍽 괜찮다.

고통 따위 느끼지 않는 것처럼, 태연자약한 레비아탄의 전언이 머릿속에 울렸다.

─ 어리석은 인간들아, 그저 너희의 마지막 순간을 못 보는 것만이 아쉽구나.

웃음 섞인 전언과 달리 실제의 울부짖음은 끔찍했다. 높은 단말마를 끝으로 레비아탄의 몸이 축 늘어졌다.

오랫동안 바다의 패자로 불려 온 이의 죽음이었다.

레비아탄의 죽음은 결코 평온하지 않았다. 망치로 내리친 것처럼 레비아탄의 몸이 납작하게 눌린다. 그러더니 잘게 찢겨 나가기 시작했다. 바다를 갈라 놓은 곳에서 레비아탄의 몸은 마치 거름처럼 젖은 땅과 뒤섞였다.

그리고 죽음은 멸망으로 향하는 연쇄를 일으킨다.

츠츳… 츠즈즈즛…….

라디오의 주파수를 잘못 잡아 노이즈만 나올 때처럼, 그보다 훨씬 요란한 소음이 넓은 해역을 가득 채웠다.

그와 함께, 바다 아래에서 새싹이 움트듯 무언가가 레비아탄의 시체를 비집고 나왔다. 아주 작았던 그것은 인식한 순간, 순식간에 자라난다. 마치 나무처럼.

순식간에 해수면보다 높아지고, 하늘 위로 끝도 없이 뻗어나간 그것은…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절망의 탑 같았다.

대던전.

멸망의 또다른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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