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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멸망(3) (277/283)

44. 멸망(3)

“나 일단 연락 좀. 우리 어딨는지도 알려 줘야 하고… 음, 어디로 가지? 그것도 의논 좀 해 볼까 봐. 지키기도 편하고, 최대한 피해 없을 만한 곳이… 그런 데가 있으면 황혜림이 갔었겠지? 그럼…….”

이원은 지호의 말을 반쯤 흘려들으며 생각에 잠겼다.

황혜림의 스킬이 지호에게 생긴 건 그야말로 날벼락이었다. 잡으려 해도 끝없이 도망치면 그만이니, 지호를 억지로 이플리스로 데려가는 게 힘들어졌으니까.

어지간하면 곱게 데려가려 했지만, 이렇게 된 이상 어디 한두 군데쯤 부러트린 다음에 끌고 가는 수밖에…….

“……너, 지금 무슨 생각 하냐?”

단말기를 끄며 미심쩍다는 듯 묻는 지호에게 이원은 말을 돌릴 겸 시큰둥하게 중얼거렸다.

“별거 아냐.”

“뭐야. 너 이상한 생각 했지?”

“……바람둥이.”

“뭐?”

이원의 눈빛이 지호의 [클라우 솔라스]에게 닿았다. 다른 검은 역소환했지만 이 검은 그 자체가 스킬이라서 그런지 여전히 들고 있었다. 그냥 말을 돌리려고 했는데 보다 보니 울컥한다.

“바람둥이라고 생각했어. 딴 놈이나 주무르고.”

“변태같이 말하지 마!”

지호가 기겁하며 [클라우 솔라스]를 역소환했다. 잔뜩 당황하던 지호는 심호흡하더니 후, 깊이 한숨 쉬었다.

“……이게 뭔지는 또 어떻게 아는 건데? ‘멸망의 대적자’가 알려 준 거야?”

“아니. 자기가 그거 꺼냈을 때 그 새끼 기억이 흘러들어오더라.”

불쾌한 기억에 절로 이원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애인이 죽는 순간조차 지키지 못한 놈은 추했고 처절했다.

“뭘 얼마나 봤는데?”

“자기야, 꼭 불륜 상대 들킨 남편이 아내한테 도리어 큰소리치는 것처럼 따진다.”

“불륜이라니, 찔릴 만한 짓 안 했거든?”

“나 꽤 많은 걸 알게 됐는데.”

지호가 눈을 굴렸다. 아무리 봐도 자신은 잘못이 없는데, 대체 또 뭘 보고 버튼이 눌렸나 싶은 얼굴로.

“우리 사이를 방해하는 장인어른 하나도 모자라서, 하나 더 있다는 거라든가.”

“누가 장인어른이야!?”

“그리고 또… 우리 자기의 전생은 호구구나, 하는 거.”

“걔가 호구긴 했지. 하지만 난 안 그러거든? 이상하게 쳐다보지 마.”

“자기라면 있을 법한 일이야.”

“아니, 난 안 그런다니까!”

발끈하는 지호를 가만히 응시하며, 이원은 앞의 잡다한 생각보다 자신을 훨씬 강렬하게 사로잡은 순간을 떠올렸다.

“멍청하게 너조차 지키지 못한 씨발 새끼가 어떤 꼴로 죽어 가는지도 잘 봤지.”

이원이 보기에는 무척 꼴사나웠다. 좀 더 처절하게 죽어 마땅한 새끼였다. 전생의 자신은.

놈이 전해 준 전언이 없더라도, 이원은 전생과 같은 일을 반복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이놈이 언젠가 깨어나든 죽든 하나는 할 텐데, 그렇게 되면 다 끝이야. 대던전이 강림하면 그때는 도망치기도 힘들어.”

이원은 어둡게 가라앉은 눈으로 레비아탄을 노려보며 음침하게 중얼거렸다.

“주이원…….”

지호의 눈이 간절하게 이원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보면 이원의 마음이 약해진다는 걸 아는 것처럼.

이야기 속에서 태풍은 나그네의 옷을 벗기지 못했지만, 태양은 그저 내리쬐는 것만으로 나그네의 옷을 벗겼다. 지호는 이원의 태양이었다. 머리 위에 뜬, 쏘아서 무너트릴 수도 없는 절대적인 천체. 지호는 언제나 미소 한 번으로 이원을 무력화시켰다.

종종 그래서 더 날선 태도로 지호를 대했다. 지호를 제 상자 안에 끼워 맞추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늘 신지호는 아무렇지 않게 상자를 열고 나왔다.

이번에도 늘 그렇듯…….

“적당히 좀 해, 늙은 꼰대 새끼.”

“…….”

……평소처럼 설득할 줄 알았는데.

조금도 부드럽지 않은 말에 이원은 순간 귀를 의심했다. 우리 지호가 이런… 저급한 단어를 사용하다니? 이원의 충격은 몰라준 채 사춘기 질풍노도의 시기를 달리는 청소년처럼 지호의 표정은 삐딱했다.

“네가 두려워하는 건 모두 과거야, 이 멍청아.”

지호가 이원 때문에 힘을 빼앗겨 아팠던 일. 지호와 억지로 떨어져 이플리스로 갔던 일. 이번에 본, 허무하게 죽어 버린 지호의 전생까지도 모두…….

전부 과거였다.

하지만.

“일어났던 일이고, 또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

천 년 동안 주이원의 기억 속에 가장 강렬하게 남아있던 건 지호를 본 마지막 순간이었다. 무력하게 쓰러진 연인과 그를 도울 수 없는 자신.

오랜 세월 과거만을 곱씹으며, 그는 한순간도 편하게 잠들 수 없었다. 차라리 잊어버리자고 생각한 적도 있지만, 언젠가는 다시 보자는 약속을 지키고 싶어서…….

잊지 않으려고 계속, 계속, 계속 되새긴 기억은 모조리 핏빛으로 물들었다.

지구로 돌아온 그가 과거에 집착하며 미래를 대비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수순이었다.

지켜 내야만 했다.

두 번 다시 잃지 않도록, 더는 기회가 없으니까. 그리고 이제는 그에게 힘이 있으니까.

하필 그를 막으러 온 게 테네브였던 탓에 이원은 더더욱 초조해졌다. 테네브가 여기까지 오게 만든 건 이원의 과오였다. 하지만 과거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다. 가장 좋은 방법은 위험을 회피하는 것이다.

“아니.”

하지만 지호는 이원의 생각을 간단히 부정했다.

“이미 과거에 끝난 일이라 답을 얻은 거야. 정답이든, 오답이든. 이제 그걸로 길을 찾으면 돼.”

이상적인 말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이상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현실은 잔혹하다. 이원은 세상 돌아가는 꼴을 지호보다 족히 수십 배는 더 오래 봐 왔다.

“그렇게 찾은 길이 오답이면? 더 안 좋아질 뿐이라면 어떡해? 지호야, 나는.”

“이원아.”

“하나부터 열까지 다 불안해.”

“내가 그렇게 못 미더워?”

이원은 고개를 저었다. 이전에는 확실히 못 미더웠지만 지금은 자신과 싸울 수 있을 만큼 강했다. 그런 이유로 지호의 발목을 잡는 게 아니었다.

“못 미더워서 그러는 게 아니야……. 나는 그냥, 널 지켜 주고 싶을 뿐이야.”

“무엇으로부터?”

“모든 위험…….”

“아니, 네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날 지키고 싶은 거겠지.”

반박하려던 이원은 입을 다물었다. 지호의 말이 맞았다. 미래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과거가 덧씌워졌다. 아주 약간의 위기에도 이원의 머릿속은 최악의 상황을 그렸다.

지호는 어두운 표정의 이원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자꾸 안 좋은 순간만 떠올리지 마.”

“하지만 그걸 어떻게 잊겠어. 나는, 아주 오랫동안…….”

너를 생각할 때마다 피투성이의 기억이 떠올랐는데. 돌아가지도 못한 채, 그 세계에 얽매여, 차라리 너를 죽여 버리고 싶다고 생각할 만큼……. 그렇게 시간을 보내 왔는데.

“잊으라고는 안 해.”

지호가 단호하게 말하며 이원에게 다가왔다.

“잊지 마. 잊을 수도 없는 일들이고, 잊어서도 안 될 일들이잖아. 그 모든 게 너를 만들었으니까, 너는 괴롭겠지만… 알다시피, 그랬기에 우리가 다시 만난 거잖아.”

“…….”

“물론 이건 다 네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다 모르니까 할 수 있는 소리겠지. 그래도 나는… 나는 그런 네가 좋으니까…….”

지호가 메마른 입술을 핥았다.

“나를 믿어.”

“…….”

“나를 사랑한다면.”

이원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졌다. 도무지 부정할 수 없는 단서를 내밀고 강요하는 건 반칙이지 않나.

“비겁하네. 그런 식으로 나오다니.”

“너한테 배운 거잖아.”

맨날 억지 부려놓고. 작게 투정한 지호가 손을 뻗었다. 희고 곧은 손이 이원의 손을 붙든다.

“한 번만 믿어 봐, 이원아. 다 잘 될 거야.”

“자기야, 사이비 같아.”

“그래? 관리자교 같은 종교를 만들까? 넌 특별히 첫 신자로 삼아 줄게.”

“난 그런 엉터리 종교 안 들어가.”

“엉터리라니? 한번만 믿어 봐. 믿으면 내가 상으로…….”

“상으로?”

지호가 장난꾸러기처럼 씩 웃었다.

“결혼하자.”

지호의 손이 이원의 손가락을 매만졌다. 매만지는 손길에는 작은 금속이 들려 있었다. 그건 반지였다. 지호의 약지에 끼워진 반지와 한 쌍으로 만들어 둔, 지금껏 지호의 인벤토리에 묵혀 둔 반지.

지호가 꺼내든 건 약혼반지만이 아니었다.

인벤토리에서 화려하고 작은 상자가 하나 더 툭, 튀어나왔다. 검은 벨벳으로 감싼 상자를 열자 나온 건, 서로 다른 사이즈의 반지 한 쌍이었다. 심플한 디자인이지만 가운데에는 영원을 상징하는 보석이 박혀 있다. 지나치게 화려한 디자인은 아닌지라 오히려 평소에 끼기 좋을 법한… 전형적인 결혼반지였다.

“나를 줄게, 이원아.”

“…….”

“너도 너를 내게 줘.”

이원은 문득 지호의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는 걸 발견했다. 수많은 적 앞에서도 떨지 않은 지호가, 고작 반지를 건네면서 떨고 있다. 긍정적인 답이 나올 거야 뻔한 걸 알면서도… 한 번뿐인 순간에 긴장한 채.

“내게 너를 맡기고, 나를 믿어. 네 불안까지 내가 모두 떠맡을 테니까.”

“지호…….”

“자기야.”

늘 이원만이 내뱉던 호칭을 내뱉은 지호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무슨 말을 들었는지 단번에 이해하지 못한 이원의 얼굴은 멍했다. 굳어 버린 이원에게 지호의 얼굴이 불쑥 가까워졌다.

지호의 입술이 천천히 이원의 입술 위로 맞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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