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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멸망(2) (276/283)

44. 멸망(2)

─ 똑똑히 봐 둬. 실패한 새끼가 어떻게 되는지.

주이원에게 그 목소리가 들린 건, 정신을 차린 지호가 [클라우 솔라스]를 꺼내 들었을 때였다.

멋대로 정신을 연결하는 상대에게 저항하려고 했으나, 이어지는 기억은 이원을 멈췄다. 지호와 똑같이 생긴 전생. 하필, 그 전생이 죽어 가고 있었기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어지는 ‘클라우 솔라스’의 기억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동시에 이원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아주 잠깐의 안일함으로 지호를 영영 잃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생각과 실제로 보는 건 큰 차이가 있었기에…….

─ 두 번이나 죽게 놔두지 마.

그건 아주 먼 옛날 연인을 잃은 남자가 남긴 처절한 전언이었다.

이원은 해일을 가르는 [클라우 솔라스]를 노려보았다.

“조심해!”

지호가 소리 지르며 검을 날렸다. 이원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간 검은 뒤로 다가온 것을 찌르는 것과 동시에 폭발했다. 이원은 차디찬 눈빛으로 뒤에 있는 것을 돌아보았다.

“테네브.”

“……주이원.”

표정 없는 신이 이원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테네브의 얼굴에서 순간이지만 감정이 되살아났다. 강한 증오와 살의. 지저분한 악의로 번뜩이는 눈은 죽음을 뛰어넘은 신이라기보다는 원혼으로 살아난 시체와 같았다.

이원이 넌더리가 난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과거의 악연이 또다시 그의 발목을 잡으러 왔다. 지긋지긋한 과거, 이제 떨쳐 낼 수 있으면 좋으련만.

다만 오늘 테네브의 목표는 이원과 지호가 아니었다. 테네브는 이원의 힘으로 의식을 잃은 채 자리에 붙박인 레비아탄을 응시했다.

태양을 등지고 선 테네브의 머리 뒤로 거대한 헤일로가 떠올랐다. 흰옷을 입은 테네브는 그 속이 어떤들 압도적인 신위를 드러냈다. 흉흉하게 번들거리는 테네브의 눈이 이원을 쏘아본다.

순간, 과거 신의 저주에 걸렸던 때처럼 위에서 묵직한 것이 이원을 짓눌렀다.

“주이원, 조심해!”

“괜찮아.”

이전과는 다르다. 멀쩡하게 테네브의 저주를 막아 낸 이원의 눈이 금빛으로 빛났다.

이원이 가진 것중 가장 강력한 스킬은 EX급의 [진리에 닿은 마법사].

본래 마법이란 의식을 집중해 철저한 계산 하에 쓸 수 있다. 하지만 시스템에 스킬이 등록된 순간부터 이원은 자신이 지닌 마법을 아무 제약 없이 쏘아 낼 수 있게 됐다.

빛을 사그라트리는 짙은 어둠이 테네브의 머리 위를 뒤덮었다. 테네브의 찬란한 후광 역시 어둠 속으로 잠겨든다.

테네브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멈칫했던 것도 잠시, 그는 어둠에 사그라들지 않을 만한 거대한 빛의 창을 소환해 냈다.

손잡이 없이 날로만 이루어진 창에는 빼곡히 주술적인 문자가 새겨져 있다. 지호는 읽을 수 없었지만, 저건 이플리스의 오래된 일족에게서 내려져 오는 저주의 문장이었다.

허공에 떠오른 창이 곧장 레비아탄을 향해 쇄도했다.

콰앙!

창은 레비아탄에게 꽂히는 대신, 이원이 만든 결계와 충돌해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폭발이 가라앉은 후에도 여전히 창은 기세가 쇠하지 않았다. 레비아탄에게 날아들던 각도 그대로 꼿꼿이 선 채.

카가가강!

결계를 꿰뚫으려는 듯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돌진하려 애쓸 뿐.

물론 그걸 가만히 두고 볼 리 없었다.

이원의 발 아래에 있던 바다가 기다란 넝쿨처럼 뻗어 나와 테네브를 휘감았다. 꼿꼿이 서 있던 테네브의 몸이 휘청거렸다.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는 바닷물은 점점 면적을 넓혀 테네브의 전신을 감싸기 시작했다.

“…….”

하지만 테네브는 공격당해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하나의 창을 더 쏘아 냈다. 창은 원래 있던 창의 뒤에 박힌 채 추진력을 더했다.

그때, 지호가 앞으로 나섰다.

지호는 천천히 들고 있던 [클라우 솔라스]를 내려놓았다. 검은 바다로 떨어지는 대신 허공에 둥둥 떠올랐다. 이어서 지호가 가진 다른 무기, [투이아의 스태프]와 [방주의 보검]을 비롯한 무기가 단번에 소환되었다.

세 자루의 무기를 포함해, 지호는 여러 무기를 소환해 냈다. 무기는 지호를 지키듯 주변을 느릿하게 떠다녔다.

지호가 테네브의 창이 있는 곳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십수 자루의 무기가 단번에 쏘아졌다. 무기는 단번에 쏟아지는 게 아니라 때로는 베어 내고, 때로는 찌르며 현란하게 움직였다.

카앙!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무엇보다 단단해 보였던 테네브의 창이 부서졌다.

그걸 확인한 테네브는 한 자루의 창을 더 꺼냈다. 이번에 테네브가 노린 건 지호였다.

“지호…….”

“괜찮아!”

급히 자신을 부르는 이원에게 시원스레 대답한 지호가 허공에서 자리를 잡았다. 평지에서처럼 가뿐하게 선 지호가 날아드는 창을 향해 주먹을 내뻗었다.

작은 주먹이 일으킨 무형의 힘은 바다를 찢어놓듯 시원스레 가른다. 그러고도 여전히 모든 적을 찢어 버릴 기세로 날아든다. 마침내 창과 부딪쳤을 때.

테네브의 창은 깔끔하게 두 쪽으로 갈라져 바다로 떨어졌다.

지호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자신의 검이자 스킬, [클라우 솔라스]를 들고 정신을 집중했다. 호흡을 가다듬고, 정신을 검 한 자루에만 집중한다. 그리고 온힘을 다해 검을 휘두른다. 물아일체의 경지에서 휘두른 검. 검이 그린 궤적대로 마력이 시원스레 뻗어 나갔다.

순간 온 힘을 다 쏟아 낸 지호가 휘청거린다. 바다로 빠질 뻔한 지호를 이원이 마력으로 부축했다. 무모한 공격이었지만 그럴 만한 가치는 있었다.

쿠웅!

충격파를 맞은 테네브의 몸에서 믿기지 않을 만큼 큰 소리가 났다. 몇 초 안에 이어진 연격에 테네브가 믿기지 않는단 얼굴로 바다를 향해 추락했다.

하지만 단번에 쓰러트릴 만큼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니다. 간신히 중심을 잡고 선 테네브의 얼굴에는 의문이 가득했다.

“관리자는 이렇게 강하지 않았을 텐데.”

“네가 약했던 거겠지.”

드물게도 악의를 담은 채 지호가 빈정거렸다.

이원은 모든 것을 보며 침묵했다.

지호가 쓴 힘은 다 눈에 익었다. 앞에서 검을 소환하고 움직인 스킬은 분명 강태주의 [무기 소환]과 [무형검]. 테네브의 창을 쪼갠 스킬은 허소리의 [백곡왕의 긍지]. 그리고 테네브를 날린 건 임승주의 [일격필살一擊必殺].

개인이 지닌 힘과 스킬의 차이는 시스템이다. 검술이나 마법은 스스로 계산해 움직여야 하지만, 스킬은 상대적으로 덜 집중하더라도 시스템이 보조해 주기에 훨씬 발동하기 쉬웠다.

아무리 힘이 늘었어도 지호가 갑자기 다른 사람의 힘을 똑같이 따라하기는 힘들다. 저건 분명 스킬이었다.

“주이원!”

지호가 이원을 크게 불렀다. 이원은 얌전히 지호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테네브가 다시 공격태세를 차리는 걸 보며, 지호가 이원을 재촉했다.

“내가 레비아탄을 붙잡아야 돼.”

뜬금없는 말에 이원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원은 얌전히 지호의 말대로 결계를 한정적으로 해제했다.

레비아탄에게서 지독한 악취가 풍겼지만 지호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 위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는 이원을 잡은 채 입술을 달싹였다.

[단거리 전이].

예상대로, 그건 분명 황혜림이 지닌 스킬이었다.

레비아탄과 주이원과 함께 신지호는 어딘가로 이동했다. 이동할 때의 감각은 분명, 황혜림과 함께 이동할 때와 똑같았다.

다만.

“단거리를 이동한 게 아닌 것 같은데.”

“마력량이 다른데 당연히 다르겠지. 이쪽 스킬은 EX급이고.”

지호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이미 감은 잡혔지만, 이원은 확인 차 질문했다.

“어떻게 된 거야?”

“레비아탄을 지키면서 싸우는 건 불리해. 차라리 포탈을 만들어서 우리 편을 부른 후에 싸우는 게 낫겠어.”

“그거 말고.”

지호는 슬쩍 이원의 눈치를 봤다. 조금 멋쩍은 낯으로 지호가 작게 대답했다.

“새 스킬… 이랄까, 그냥 잔재주야. 남의 스킬 그대로 베껴서 쓸 수 있는 거.”

왜 부끄러워하나 했더니, 베끼는 부분이 부끄러웠던 걸까. 하지만 원본을 초월한 스킬들이었다.

물론 이원도 남의 기술을 베낄 줄은 안다. 하지만 아예 시스템의 보조를 받아 남발할 수 있는 건… 말도 안 되는 경지였다.

“사기잖아.”

“네가 할 소리야? 그 스테이터스 뭔데?”

지호의 말에 이원이 웃었다. 솔직히 조금은 당황했으나 그가 살아 온 세월이 태연자약한 태도를 유지해 주었다.

“아, 처음 보는 거야?”

“그래! 뭐 이렇게 세?”

이원은 힐끗 자신의 정보창을 살폈다.

status

이름 주이원

직업 청람의 길드 마스터

등급 EX

칭호 환생자, 바다의 신성, 이플리스의 신화, 지구의 영웅, 구원의 반역자, 탐욕의 악마, 영육의 학살자, 별빛의 길잡이, 던전 마스터, 신지호의 맹약자 (더 보기)

체력 42001

마력 223901

근력 154136

민첩 127314

스킬 영원한 신성(EX), 바다의 지배자(EX), 진리에 닿은 마법사(EX), 흡수(EX), 만독불침(EX), 페르사의 주인(EX), 각인(EX), 이플리스의 수호(EX), 무도武道의 극의(SSS), 차원의 길잡이(SSS), 이상적인 군주(SS), 위압적인 폭군(S)

인벤토리 (3011/3024)

수호신 ‘멸망의 대적자’와 계약 중입니다.

처음 본 거라 다행이다. 최근 테네브와 대적하기 위해 급격히 힘을 늘였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것들의 힘과 생명력을 마구잡이로 흡수했으니까.

다행히 지호는 거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게다가 뭐야, 멸망의 대적자와는 언제 계약했어?”

“그건 너 의식 잃었을 때. 예상한 건지도 모르겠네.”

‘멸망의 대적자’가 불쾌한 일이라며 불평합니다.

‘불쾌한 건 나도 마찬가지야.’

자신을 지원하는 상대가 과거, 세이크리스의 대던전에서 자신을 죽이려고 했었다. 그 사실은 ‘멸망의 대적자’의 힘이 깃들자마자 알아차렸다. 상대는 진심으로 이원이 싫지만 어쩔 수 없이 지원하고 있다.

이원은 제게 떠오르는 전언 너머로 황당하다는 듯 픽 웃는 지호를 보았다. 아마 저쪽에는 사탕발림에 가까운 전언을 보내고 있겠지.

“음, 여튼.”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모르겠지만, 지호의 귀가 붉었다.

“네 스킬은 못 쓰더라. 지구산이 아니라 그런가.”

“지구산이라니…….”

이원이 헛웃음을 지었다. 동시에 지호의 새로운 스킬을 어떻게 막아야 할지 계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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