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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멸망(1) (275/283)
  • 44. 멸망(1)

    지호는 황급히 이원을 말렸다.

    “죽이면 안 돼!”

    “저 정도로 안 죽어.”

    이원은 태연하게 대꾸했다. 정보창을 확인하니 레비아탄의 HP는 생각보다 넉넉하게 남아 있었다. 오히려 다쳤던 게 언제냐는 듯 흉흉하게 달려들었다.

    [클라우 솔라스]!

    지호는 새로 얻은 빛의 검을 꺼냈다. 원 주인에게 직접 받아와 이제 EX급이 된 스킬. 지호가 검을 휘두르자 레비아탄이 날린 공격이 마치 종잇장처럼 가볍게 갈라지며 파훼됐다.

    지호는 검을 쥔 손을 바라보았다. 이 검이라면 상대를 죽이는 것도 어렵진 않다.

    죽이지 않고 어떻게든 무력화시킬 방법을…….

    툭.

    “응?”

    갑자기 뺨으로 물방울이 떨어졌다. 지호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위를 확인했다.

    이원이 들어 올린 바다가 출렁이고 있었다. 물이 담긴 병을 세게 흔드는 것처럼, 무척 격렬하게 울렁인다.

    돌아본 이원은 어째서인지 조금 멍한 기색이었다. 게다가 평소보다 낯빛도 훨씬 창백하다. 집중은커녕 다른 생각에 사로잡힌 눈빛이 멍하다.

    “야, 주이원! 야! 이 멍청아!”

    지호는 화들짝 놀라 이원을 잡고 세게 흔들었다. 그러자 이내 이원은 어, 하는 소리를 내더니 잠에서 깬 것처럼 정신을 차렸다.

    “아…….”

    낮게 신음한 이원도 곧 상황을 알아차렸다. 이원이 두 눈을 깜박이는 동안, 다시 바다는 원래대로 안정적으로 변했다.

    “너 괜찮아?”

    “응. 괜찮…….”

    ─ 건방진 어린 것들!

    “지호는 몰라도 내가 어리진 않은데.”

    지호는 이원의 팔을 붙들었다. [별의 수호자]. 이전의 [별의 축언]이 진화한 스킬을 이원에게 걸자, 이원의 스테이터스가 순식간에 배 가까이 증가했다.

    “자기, 세졌다 싶었는데 엄청 세졌네?”

    이원이 픽 웃으며 손으로 총 모양을 만들어 레비아탄에게 쏘듯 내밀었다. 그러자 바늘처럼 얇은 무언가가 튀어나왔고, 이내 거대한 기둥이 되어 레비아탄의 몸에 딱 닿도록 고정된다.

    ─ 아아아아아!

    레비아탄이 비명을 지르며 축 늘어졌다. 그제야 이원은 들어 올린 바다를 아래로 내렸다. 바다는 레비아탄이 있는 곳을 빼고 채워졌다.

    “주이원.”

    지호는 쓰러진 레비아탄 대신 이원을 살폈다. 이원의 안색은 여전히 썩 좋지 않았다.

    “너 쓰러질 것 같아.”

    “자기야, 나는 자기처럼 연약하지 않아.”

    “개소리하지 말고…….”

    지호가 이원을 타박하려던 순간, 지호의 단말기가 울렸다. 중요한 연락일까 싶어서 단말기를 확인한 지호의 얼굴이 굳었다.

    * * *

    이지영이 처음 사람을 죽였을 때, 그녀의 스승은 탄식했다.

    ‘내 잘못이야.’

    그 말은 틀렸다. 스승의 잘못은 없었다. 이지영은 그저 스승을 죽이려 들던 자들을 반대로 사냥했을 뿐이었다.

    ‘지영아, 네 마음속에 분노가 가득 차 있구나.’

    그 말은 옳았다. 이지영은 사람은커녕 짐승조차 해치기를 꺼려하는 스승을 단지 여우라는 이유로 사냥하는 사람에게 분노했다. 또한 그런 사람들은 죽이지 않으면서 제게 화를 내는 스승에게 다시 한번 분노했다.

    ‘스승님이 날 버리고 가면, 나는 스승님을 쫓아서 여우 사냥꾼은 죄다 죽여 버릴 거예요.’

    ‘그러니. 그러면 내가 너를 책임져야겠지.’

    그 말은 마음에 들었다. 이지영은 스승과 함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스승을 쫓던 사냥꾼을 몰래 잡아 고문하고 죽인 게 들통났을 때, 결국 그녀는 버려졌다.

    스승은 이지영에게 사람을 죽이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경고했다. 때문에 이지영은 더는 이 땅에서 살아가기 힘들겠다고 여겼다. 그녀는 북쪽으로 올라가 명나라에서 자리 잡았다.

    이지영은 사술을 쓰는 이를 새로운 스승으로 모셨다. 그러나 그녀가 진정 스승으로 여긴 이는 하나뿐이었다.

    ‘스승은 부모다. 너는 그치를 스승으로 여기는 게 아니다. 넌 단지 놈에게 발정하는 것 아니냐.’

    ‘…….’

    ‘원하는 대로 취하고 먹어 치워라. 그래야 네가 만족할 테니.’

    당시의 스승은 그리 말하며 이지영을 비웃었다. 그녀는 당시 강하게 부정했다. 하지만 내심 두 번째 스승의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였다.

    그녀는 수백 년 동안 스승을 생각하고 버려지던 순간을 되새겼다. 애정과 진작 시취를 풍기며 썩어 버렸고, 증오는 거름으로도 못 쓸 만큼 지독한 독이 되었다.

    ─ 파멸을 원하는구나.

    그러던 어느 날, 이지영의 귓가에 목소리가 들렸다.

    ─ 너에게 종말을 불러올 힘을 주마.

    목소리는 이지영의 소망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았다.

    이제 자신을 훌훌 털어버리고 홀로 잘 살고 있는 스승에게 각인되는 것.

    더 나아가서는 죽이거나, 죽임당하는 것.

    종말이 찾아온다면, 이지영이 바라는 두 죽음이 모두 충족된다. 이지영은 달콤한 파멸을 원했다. 그래서 리크레스와 손을 잡았다.

    멸망을 계획하며 이지영은 세심하게 작업했다. 하늘 길드를 포함한 수많은 연구소에서 인조 인간을 만들었다. 그들이 살아 있는지 죽어 있는지는 중요치 않다. 발견되지 않을 만큼 조금씩만, 혈액에 레비아탄의 피를 섞어 두었으니까.

    레비아탄의 죽음을 기점으로 수많은 개체가 함께 반응한다. 레비아탄이 죽는 순간 그 죽음은 강렬한 소망으로 바뀌어, 대던전을 이끄는 신호가 될 것이다.

    마치 주이원이 신지호를 신호로 지구로 온 것처럼.

    그리하여 대던전 자체가 이 세상에 강림할 것이다. 파멸한 수많은 세계를 품은 채로. 그걸 막을 방도 따위는 없다.

    ─ 그러니 쓸데없는 발악 마시고 같이 가시겠어요?

    무의식 속에서 기억을 읽히고 있던 이지영의 의식이 불쑥 솟아올랐다. 집요한 집념으로 그녀는 제 안에 들어온 양호진을 붙들었다.

    “씨발, 병신 같은 새끼!”

    지나치게 거슬리는 어휘와 함께 단단한 손길이 양호진을 붙들었다. 폭압적인 힘으로 그는 양호진을 붙들어 의식 속에서 건져 냈다.

    “아.”

    양호진은 작게 탄식했다. 어쩌면 지친 것은 이지영 뿐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를 따라가기에는 저를 붙든 이의 숨이 너무도 생생하다. 양호진을 아무렇지 않게 삶으로 끌어올 만큼.

    “죽고 싶냐? 야, 사람 말 안 듣냐?”

    하필이면 그게 강태주란 것은 마음에 안 들지만… 양호진은 환자복을 입은 채 파리한 얼굴로 누운 이지영을 힐끗 돌아보았다.

    “강태주.”

    “어, 왜?”

    “너는 너무 엇나가지 말렴. 이제부터 착하게 살고.”

    “뭐래?”

    삐딱한 대답은 영 못미덥다. 양호진은 한숨을 쉬었다. 지금이야 이지영이 훨씬 타락했지만, 그래도 저 나이에 현재의 강태주만한 업을 쌓진 않았다.

    어떤 식으로든 연을 맺은 만큼, 강태주가 타락하면 양호진은 분명 후회하겠지.

    “이번에는 평생 감시해야겠구나.”

    “미친 새끼. 돌았냐?”

    강태주가 코웃음쳤다. 진심이라는 걸 알면 기겁하겠지. 양호진은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살아남으면 말이지만.”

    “소득이 있었나.”

    이지영과 의식을 연결해준 몽마, 루가 딱딱한 어조로 물었다. 양호진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고 단말기에 자신이 본 정보를 적어 넣었다.

    “일단 길드장에게 연락해야겠구나.”

    * * *

    지호와 이원은 호진으로부터 대던전이 강림하는 자세한 방식을 전해 들었다. 이원은 대놓고 인상을 찌푸렸다.

    “나랑 똑같은 방법으로 온다고?”

    “그래. 살아 있는 게 아니라 죽는 순간에 기회가 찾아오는 것 같지만.”

    단말기를 만지작거리던 지호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로 얌전히 있는 이원을 향해 눈을 가늘게 떴다.

    “안 돼.”

    대뜸 안 된다는 말부터 내뱉은 지호에게 이원이 억울하단 듯 항변했다.

    “자기야, 내가 개도 아니고 무조건 안 된다고 하면 돼?”

    “레비아탄을 다른 차원으로 보내려는 거잖아.”

    “아니…….”

    뭔가 변명하려던 이원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피식 웃었다. 저렇게 확신하고 있다면 어찌 변명하듯 먹히지 않으리라.

    “안 돼, 주이원.”

    지호가 다시 한번 경고했다.

    이원은 차원을 넘을 수 있다. 지구로 오기까지는 수많은 실패가 있었지만, 무작위로 차원을 넘어가는 건 어렵지 않다. 레비아탄 또한 다른 세계로 보내 문제를 떠넘길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인조인간이 열쇠가 된다 한들, 가장 큰 신호를 보내는 건 레비아탄이니까.

    이원이 비릿하게 웃었다.

    “그럼 지구부터 멸망할까? 차라리 딴 세상으로 가면 거기서 처리하자.”

    “주이원.”

    “그게 정말 지구를 통째로 먹어 치우기라도 하면 지금보다 더 강해져. 어떻게 할지 생각한 것도 없잖아. 시간을 벌어서 그 차원으로 가서 막는 거야.”

    “미친 소리 하지 마. 레비아탄이 넘어간 곳은 어쩌라고? 저건 아무나 상대 못 해. 그냥 다 죽으라는 거야?”

    “이대로 내뒀다가, 네 가족이 희생되어도 그렇게 말할 거야?”

    지호가 이를 악물었다. 이원이 건드린 곳이 너무 뼈아팠다. 이원 또한 자신이 지나치게 민감한 부분을 건드린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리라. 그러면서도 입에 올렸다. 어떻게든 설득하기 위해.

    “희생되도록 만들지 않아.”

    “말은 쉽지.”

    “…….”

    “죽는 건 더 쉬워.”

    이원의 눈빛이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최악을 가정하는 얼굴. 지호는 이원을 급히 쳐냈다. 예전이라면 아래로 떨어졌겠으나, 지금의 지호는 허공에 멀쩡하게 섰다. 그걸 본 이원이 잠시 인상을 찡그렸다가 말을 이었다.

    “이플리스로는 안 가. 간다고 해도 돌아올 수 있어.”

    말 안 해도 이원의 노림수야 뻔하다. 이원은 부정하지도 않고 어깨를 으쓱였다.

    “자기는 날 너무 사랑하는 것 같아.”

    “……갑자기 뭐야?”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나에 대해선 너무 잘 알잖아.”

    너는 대던전의 위험성을 모른다. 이원은 그렇게 경고하고 있었다.

    “미안한데 자기는 좀 자고 있어야겠어.”

    “이제 내 뜻에 따른다며?”

    “아, 나 원래 네 말 안 듣는 거 잘 알잖아.”

    말이나 못하면. 하지만 장난스러운 말투와 달리 이원의 눈빛은 시종일관 진지했다.

    “자기의 착한 주이원으로 남고 싶은데 쉽지 않네.”

    그리고 등 뒤에서 지호를 향해 거대한 해일이 밀어닥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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