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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주이원(5) (274/283)
  • 43. 주이원(5)

    지호가 EX급이 됐다는 말에 무명은 치아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기특하네.”

    “기특은 또 뭐야.”

    “아니, 처음에는 약했잖아. 관리자라고 이렇게 쑥쑥 성장하긴 쉽지 않거든……. 역시 그자의 아들이라서 그런가?”

    무명이 말하는 게 신지호의 아버지인 신중호를 일컫는 건 아닐 것이다. ‘멸망의 대적자’. 보통 존재조차 모를 이를 무명은 자연스레 입에 올렸다.

    지호는 상대를 응시했다. 그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으니… 절로 떠오르는 이가 있었다.

    “당신… 아인을 죽였던 그 사람이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데도 묘하게 낯익다.

    지호의 추측이 맞았는지, 무명의 얼굴에 경악이 서렸다. 크게 부릅떴던 두 눈이 이내 가늘어지더니 입술 끝이 씩 올라갔다.

    “하, 하하!”

    그러더니 뭐가 그리 기쁜지 허리를 접어 가며 웃기 시작했다. 경쾌한 웃음은 이내 흐느낌처럼 변했고, 정말로 눈물을 뚝뚝 흘린다. 기괴하게 웃던 남자는 어느 순간, 눈물을 뚝 그치고 고개를 들었다. 가면 같은 무표정으로.

    “맞아……. 내가 그 대단하신 아인 님을 죽였지. 그리고 그 애비란 놈이 내게 복수한 게 이 꼴이지.”

    남자가 두 팔을 벌리더니, 한 손으로 제 심장을 짚었다.

    “존재는 있되 제대로 된 이름도 없고 누구에게도 식별될 수 없는 하찮은 존재. 그나마 남의 이름을 빌려야만 인식될 수 있지.”

    “왜 그런…….”

    “그야 네 아버지의 복수 아니겠어? 복수도 할 겸, 널 도우라고 여기에 밀어 넣었지.”

    제 아들을 살해한 이에 대한 멸망의 대적자의 복수.

    “안타깝지 않아, 응?”

    “별로.”

    무명은 아주 오랫동안 존재했다고 하니, 그 역시 오랜 세월 고통받았겠지만……. 무고한 사람을 단지 본인의 사적인 감정으로 죽인 이일 뿐.

    “당신이 한 짓이잖아. 그리고 남의 이름을 빌리면 된다며? 남을 죽여 놓고 넌 수백 년이나 살았으면서 뭐가 그리 억울해.”

    무명이 지호를 쏘아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원한 적 없다만. 아인의 환생을 돕는 것도, 정상적인 죽음을 빼앗긴 채 사는 것도.”

    무명이 뚜벅뚜벅 지호를 향해 걸어와 손을 내밀었다.

    “손 줘 봐.”

    “…….”

    “너무 경계하진 말고.”

    ‘멸망의 대적자’가 그 말대로 해도 괜찮다고 안심시킵니다.

    때마침 멸망의 대적자가 지호에게 말을 걸어 왔다. 지호가 반신반의하며 손을 내밀자, 무명이 지호의 손을 콱 잡았다.

    무명과 닿은 부분이 따끔했다. 무명은 제 손을 내려다보다가 작게 중얼거렸다.

    “천희성한테는 미안하다고 전해 줘.”

    그 순간, 무명의 기억이 흘러들어 왔다.

    아인을 죽인 그의 영혼을 ‘멸망의 대적자’가 수거했다. 그런 게 어떻게 가능했는지 원리는 모르겠지만, 그 신적인 존재는 가능했다.

    그는 ‘멸망의 대적자’가 이끄는 대로 수많은 세계를 돌아다녔다. 대던전을 막으며 힘을 쌓았다. 죽어서 도망칠 수도 없었다. ‘멸망의 대적자’는 그의 영혼을 소유하고 있었기에.

    무명이 죽음을 바라게 된 지는 오래되었다. 그러나 ‘멸망의 대적자’는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렇게 수많은 세월을 살아온 어느 날. 다시 한 번 ‘멸망의 대적자’에게 죽음을 청했을 때, 그는 뜻밖에도 제안을 해 왔다.

    그가 죽인 아인이 지구에서 환생할 것이라고.

    그를 도와 지구의 대던전을 막아 낸다면 기꺼이 안식을 주겠노라고.

    끝까지 이용당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에게 거절의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당연히 ‘멸망의 대적자’가 한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만큼 안식은 거대한 미끼였기에.

    지구에서의 생활은 나쁘지 않았다. 인식되지 못한다고 하나, 그만한 존재가 오래 머무르니 희미하게나마 그는 알려졌다. 그것만으로도 가치는 있었다.

    그렇게 수백 년을 살아온 때.

    마침내 신지호가 태어났다.

    무명은 살의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저것이 죽으면 안식은 없던 이야기가 된다. 그뿐일까. 그나마 무명을 봐주던 ‘멸망의 대적자’가 더욱 지독한 벌을 내릴 것이다.

    미웠다.

    그래서 사사건건 방해하기 위해, 신지호와 대적할 존재와 손을 잡았다. 궁극적으로 신지호를 죽일 생각은 없었기에 ‘멸망의 대적자’는 묵인했다.

    천희성은 그저 이용하기 위한 존재였다. 그러나 마지막 삶이라고 나름 살뜰히 돌봤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토록 오래 살아왔음에도 죽음이 두려웠기 때문일까. 무명은 마지막 생에서야 다시 인간적인 감정을 품었고, 진짜 조카도 아닌 천희성을 아끼게 됐다.

    아낀다고 해서 그를 위해 줄 수는 없었다. 너무 많은 업보를 쌓은 탓에 천희성의 영혼은 탁했다.

    그래서 그는 천희성을 신지호의 방패막이로 떠밀었다. 비록 가짜라고 해도 관리자를 살리는 건, 꽤 큰 선행이었기에. 그간 엇나갔던 신지호와 잘 풀리라는 의미에서도.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싶었지만 더는 시간이 없었다. 아마 천희성은 그의 존재를 두려운 미지의 존재로만 기억하겠지.

    적어도 그는 알아줬으면 했다. 조금이나마 무명이 그를 가족으로 여겼단 사실을.

    무명의 기억이 끝나고, 지호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무명은 이미 머리부터 모래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지호가 뭐라 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무명의 몸이 사라졌다.

    “…….”

    불쌍하지도 않은 놈이라고 생각했는데 기억을 다 보고 나서일까. 눈앞에서 죽는 모습을 보니 입 안이 썼다.

    “불쌍하게 여길 것 없다.”

    그러나 이어지는 목소리가 지호의 생각을 끊었다. 언제나처럼 시스템창이나 아득하게 울리는 목소리가 아니라, 또렷하게 울리는 음성.

    지호가 고개를 돌린 곳에는 ‘멸망의 대적자’가 서 있었다. 이전처럼 얼굴을 가리던 베일을 치운 채로.

    ‘멸망의 대적자’는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지호를 응시했다. 이곳의 부모님보다 더 지호를 닮은 얼굴이었다.

    지호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자, 웃고 있던 멸망의 대적자가 움찔했다.

    “신지호.”

    “난 당신 아들 아닌 거 알죠?”

    경계심 어린 목소리였지만, 멸망의 대적자는 되레 안심했다.

    “물론. 나는 클라우와 다르다. 다만, 너를 신경 쓰는 건… 네 가족이나 주이원이 환생한다면 너는 그걸 방치할 것인지, 되물어보고 싶구나.”

    “…….”

    아마 그럴 수는 없겠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은 하면서도 완전히 미련을 버리진 못하고 맴돌 것이다.

    “게다가 너는 관리자로 환생했으니 본인은 아니되 본인에 가까운 상태. 그런데도 내가 너를 신경 쓰는 게 불편하다면…….”

    “아니, 아니에요.”

    지호는 황급히 손을 저었다.

    “그런 것까진 아니고, 그냥 아까…….”

    “그래, 클라우가 너를 그 세계에 묶어 두려고 했지. 이해한다.”

    “……어디까지 아는 거예요?”

    분명 지호가 간 세계의 ‘멸망의 대적자’는 다른 인물일 텐데.

    “그곳은 무명을 통해 보낸 가능성의 세계 중 하나지. 내가 보냈는데 내가 모를 리 없지 않겠나.”

    “아…….”

    “이곳은 차원의 틈새. 레비아탄이 훔친 운명을 이용해 너를 흔들려고 하기에 급히 여기로 불렀다. 그 과정에서 다른 세계와 잠시 연결됐고, 나 또한 그곳의 ‘나’와 연결되었다. 그래서 순조롭게 돌아오는 것 또한 가능했지.”

    굳이 지호가 문을 열지 않았어도.

    ‘멸망의 대적자’는 지호가 스스로의 힘으로 이겨 내길 바랐지만, 동시에 바라지 않았다.

    “너를 돌려보내야 하지만 조금은 시간이 있는 터라 얼굴이라도 보고 싶어서 불렀다.”

    ‘멸망의 대적자’는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목소리에 깃든 희미한 그리움에서, 지호는 멸망의 대적자가 아인을 그리워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아들을 잃은 아버지. 동시에 아들을 험한 곳으로 보내야 하는 아버지.

    지호는 그가 안타까웠다.

    “저기요.”

    “말해라.”

    “……아직 이름도 모르는 것 같아서요. 이름이 뭐예요?”

    “영속을 대가로 나 또한 이름을 잃었다. 대던전이 어느 차원에서든 소멸하기 전까지, 나는 이름 잃은 채 영원히 그것을 막아야 하니.”

    “그럼, 음, 아버지.”

    남자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지호 역시 제멋대로 튀어나온 호칭에 놀랐다. 그러나 자신이 내뱉은 말을 후회하진 않았다.

    지호는 천천히 남자를 끌어안았다.

    “저는 아인과 다른 사람이지만 연관 없는 사람은 아니잖아요.”

    지호가 가진 아인의 기억은 극히 일부. 아인이 자신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 호구 같은 남자에게서 자신이 이어졌음을 부정하진 않는다.

    게다가 눈앞의 ‘멸망의 대적자’는 지금까지 지호를 돌봐준 사람이지 않나. 그렇다면 지호에게 이 정도의 호칭을 들을 자격이야 충분했다.

    “아빠… 는 저희 아빠가 질투하실 것 같아서. 아빠라고는 못 불러 드리지만, 아버지라는 호칭은 드릴게요.”

    이렇게 되면 평생 아빠를 아버지라고 부를 일은 없겠군. 시덥잖은 생각을 떠올린 순간, 지호의 ‘아버지’는 누구보다 기쁜 듯 환히 웃었다.

    “……웃기도 하네요.”

    목소리의 변화는 있어도, 지나치게 오래 산 나머지 그대로 표정이 굳어 버린 듯하던 남자다. 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전까지는 웃을 일이 없었지.”

    “…….”

    “도둑놈이 여기서도 아들을 빼앗아갈 줄 몰랐거든.”

    다른 사람이면 화를 냈겠지만 아버지의 말은 아무렇지도 않다. 가족으로서의 애정이 담겨 있으니까. 지호는 타박하는 대신 웃었다.

    “너무 미워하지 마세요.”

    “밉지 않아. 얄미울 뿐이지.”

    그게 그거 아닌가.

    “그건 이곳의 네 아비도 마찬가지겠지.”

    거기엔 확실히 부정할 수 없었다. 주이원을 싫어하는 건 전생, 현생 통틀어서 똑같은 걸까.

    차츰 아버지의 웃음이 잦아들었다. 어느새 이곳에서 머물 수 있는 때가 다 지나가고 있었기에. 지호 또한 그것을 느꼈다.

    “저, 아버지…….”

    “잠시.”

    인사를 하려던 지호에게 아버지가 손을 뻗었다. 아무렇지 않게 지호의 몸 안으로 손을 넣은 그는 무기 하나를 꺼냈다.

    그건 클라우 솔라스가 억지로 쥐여 준 것. 지호의 몸으로 깃들었던 무기였다.

    “그들은 타고나기를 무기인 종족이다. 덕분에 클라우 역시 많은 고생을 했고… 죽을 위기에 처한 그를 구해 준 게 너였다. 클라우를 구하기 위해, 그에게 아주 많은 마력을 넘겼지.”

    이 세계의 신지호가 주이원을 구했듯. 같은 삶을 반복하듯 무척 닮은 과거였다.

    “이 세상에 절대적인 운명이란 없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너희를 보면 적어도 운명을 만들어 가는 인연이란 존재한다고 믿을 수밖에 없구나.”

    “……안타까울 일은 아니지 않나요?”

    “직접 거둬들여 키워줬더니 도둑놈이 되어서 귀한 아들을 빼앗아갔는데, 안타까울 수밖에.”

    기어이 도둑놈이란 호칭을 포기하지 않는 말에는 이원을 향한 애정도 깃들어 있어서, 지호는 결국 웃을 수밖에 없었다.

    멸망의 대적자가 지호를 따라 웃었다. 그러면서 마치 천을 걷어내듯 손을 들어올렸다. 그가 손을 들어 올린 곳 아래로 지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새파란 바다가 보인다.

    “가거라. 도둑놈이 미친 것처럼 날뛰고 있으니까.”

    조금 질린 듯이 하는 말에 지호는 불안해졌다. 또 뭘 하고 있는 걸까.

    지호는 아버지에게 꾸벅 인사하고 공간을 넘어 지구로 돌아갔다.

    “으…….”

    공간을 넘자마자 지호는 작게 신음했다. 레비아탄이 정신을 헤집으려 한 여파인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게다가 지호의 몸 또한 누군가에게 붙들린 채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언제 자리를 이동했는지 메마른 바닥만이 보였다.

    “…….”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지호는 여기가 어딘지 금방 알아차렸다.

    자리를 옮긴 게 아니다. 바다를 그대로 들어 올렸을 뿐.

    머리 위의 바다가 지금 당장이라도 쏟아질 듯 넘실거렸다. 그리고 저 너머에 피투성이가 된 레비아탄이 축 늘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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