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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주이원(4) (273/283)
  • 42. 주이원(4)

    지호는 엄한 문에 화풀이하는 대신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지난 한 달간 애용했던 소파 위에 누워, 남자가 사다 준 인형을 꼭 끌어안았다. 치과에 갔을 때 주는 인형과 비슷한 용도로 쓸 작정이었다.

    ‘주이원이 알면 또 화내겠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세상이 신지호를 무리하게 만드는 것을.

    지호는 천천히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한 달 동안 알아본 바로 이 세계의 시스템은 지호의 세계보다 훨씬 정교했다. 비유하자면 이 세계가 오리지널, 나머지는 양산형 복제 수준이다. 지호는 한 달간 책을 읽으면서 습득한 정보를 토대로 시스템을 연구했다.

    하지만 직접 시스템에 관여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원래 세계에서와 달리 이 세계의 시스템은 지호의 관리 하에 있지 않으니까. 게다가 시스템에 침범하면 분명 ‘멸망의 대적자’가 알아차릴 것이다.

    하지만 남자의 말을 믿을 수 없게 된 지금, ‘멸망의 대적자’를 만나지 말라는 경고 또한 무의미해졌다. 의외로 그는 선선히 지호를 도울지도 모른다. 이성적인 사람이었으니까.

    들켜도 상관없다. 필요한 건 이곳의 정보 그 자체였다. 지호는 조심스럽게 시스템에 접근해 그 안의 정보를 뜯어보고 살피기 시작했다.

    이 세계는 시스템에 상당히 많은 부분을 의존한다. 단순히 헌터의 정보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데이터가 시스템에 보관되어 있다. 이 집의 잠금장치도 시스템을 활용하면 분명 열 수 있을 것이다. 개인을 인식하는 프로그램 역시 시스템에 의존하고 있으니까.

    분명 지호가 하려고 한 건 그 수준이었다.

    “와…….”

    하지만 막상 마주한 시스템은 그저 가볍게 넘기기엔 너무도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지호의 머릿속에 시스템이 형상화되어 떠올랐다. 시스템은 마치 거대한 은하수처럼 반짝였다. 하얀 빛이 번뜩이며 흘러가고, 때로는 점멸하며, 수많은 데이터를 취합해 계속해서 이동하고 또 수집했다.

    지호는 홀린 듯 그것들을 바라보았다. 이전에도 조금 경험한 적 있지만 지금은 차원이 달랐다. 슬쩍 볼 때마다 아인의 몸이 기억하는지 자연스레 정보가 따라왔다. 지호는 난생처음으로 탐욕스레 정보를 집어삼키며 시스템에 몰입했다.

    “아.”

    코끝에서 비릿한 냄새가 났다. 지호는 무척 아쉬워하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래도 이 정도면 생각보단 몸에 무리가 가지 않았다. 지호가 아니라 아인의 몸이라서 그런가.

    시각화되었던 시스템이 사라지고 눈앞에 현실이 펼쳐졌다.

    언제까지고 있어도 좋을 법한 세상이었다. 아예 그 거대한 물결에 흘러가고 싶을 만큼 아름다웠으니까.

    지호는 흐르는 코피를 닦았다. 조금 무리했다. 하지만 심한 부상도 아니니 조금만 쉬면…….

    “뭐해.”

    누가 있는 줄도 몰랐던 지호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다소 화난 듯 딱딱한 얼굴의 남자가 지호를 쏘아보고 있었다.

    “아니, 그냥 좀…….”

    “시스템에 접속하면 그놈이 알아차릴 거야. 이미 알아차렸겠지.”

    “…….”

    알아차려도 상관없다. 지호의 생각을 눈치챈 남자가 성큼 다가왔다. 도망칠 새도 없이 지호를 붙든 남자는 음습한 눈빛으로 지호와 눈을 마주쳤다.

    “도망치려고 하는구나, ‘아인’.”

    “……저는 그 사람이 아니에요.”

    “물론 아니지, 하지만…….”

    남자가 비릿하게 웃으며 지호의 심장께를 손가락으로 쿡 찔렀다. 마치 칼날로 찍은 듯이 옷이 찢어지고 가슴 위로 상처가 났다. 아릿한 통증에 머릿속이 어질해졌다.

    “네 혼은 아인을 그대로 기록하고 있어.”

    “그래서요?”

    “네 혼을 되감기 한다면 어떻게 될까?”

    환생하며 다른 사람이 되었지만 근본은 같은 사람이다. 만약에 지호의 혼의 기억을 계속 과거로 되감는다면 어떻게 될까? 그야, 이전의 혼이 돌아오겠지.

    “충분히 무르익었어. 이 세계에 익숙해졌잖아.”

    “그래서 여기에 가둬 둔 거군요. 다른 정보를 얻지 못한 채, 내가 여기서 시간을 보내길 원해서.”

    “맞아.”

    남자는 순순히 긍정했다. 그리고 작게 입술을 달싹여.

    “클라우 솔라스.”

    지호에게도 익숙한 이름을 말했다.

    그건 지호의 스킬명이었다. 어느 날 갑작스럽게 생긴 빛의 검. 왜 남자가 갑자기 그 이름을 말하는지 알 수 없었다.

    경악한 지호의 반응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는지 남자 또한 인상을 썼다.

    “왜 놀라?”

    “그거 제 스킬명인데.”

    “뭐?”

    남자는 무척 당황했다.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손으로 입을 틀어막는다. 그러다가 손으로 메마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거, 내 이름이야.”

    “네?”

    “그 스킬, 검을 소환하는 거지?”

    “……그런 것까진 어떻게 알아요?”

    “됐고. 이제 와서 그런 게 중요하진 않으니까.”

    남자의 손에 한 자루의 검이 들렸다. 지호가 소환하는 [클라우 솔라스]와 꼭 닮은 빛의 검이었다. 남자는 천천히 그것을 지호에게 겨눴다.

    “위력은 알고 있겠지.”

    “…….”

    “날 이길 만한 공격 스킬은 없잖아. 순순히 항복하는 게 네게도 좋을 거야.”

    “…….”

    남자의 권유대로 순순히 물러날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었다. 지호는 시스템을 확인했다.

    조금 전처럼 넓은 밤하늘에 은하수가 펼쳐진 듯한 환상은 없었다. 하지만 현실에서도 수많은 선과 점이 이어진 게 보였다.

    세계는 시스템을 중심으로 개편되었다.

    지호는 시스템을 활용해 적을 공격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했다. 물론 시스템의 주인인 멸망의 대적자가 아닌 이상, 지호에게도 충격이 오겠지만.

    ‘멸망의 대적자’가 이곳을 빠져나가라고 응원합니다.

    그때 익숙한 전언이 들렸다.

    지호가 아는 멸망의 대적자는 아니었다. 이 세계에 있는 멸망의 대적자가 시스템을 통해 지호에게 직접 말을 걸어 왔다.

    ‘당신… 나를 알고 있었어?’

    ‘멸망의 대적자’가 이것조차 해결하지 못하면 대던전은 완벽하게 공략할 수 없다고 경고합니다.

    반대로 이걸 스스로 해결하면 대던전을 공략할 수 있단 뜻이다.

    대던전은 단순한 무력으로 무너트릴 수 없다. 그저 힘으로 공략하면 그 세계에서 사라지고 다른 세계로 옮겨갈 뿐이니까.

    하지만 대던전 전체를 시스템으로 장악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을 구조 자체부터 무너트리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

    ‘멸망의 대적자’가 완벽한 정답이라고 말합니다.

    ‘멸망의 대적자’는 시스템을 유지해야하기에 사용할 수 없는 방법입니다. 그게 가능한 자가 나타난다면 대던전을 무너트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멸망의 대적자’는 당신이 대던전을 공략하길 원치 않습니다.

    ‘왜?’

    ─ 그걸 공략하면 너는 무사하지 못한다.

    이번에는 머릿속에 직접 울리는 목소리. 그저 문장으로 적힐 때와 달리, 얼핏 보면 차가운 목소리에 깃든 다정함이 느껴졌다.

    ─ 시스템에 관여할 필요 없어. 내게 도움을 요청하거라. 아인… 아니, 지호야.

    ‘시스템의 힘이 없으면 내 고향은 대던전 때문에 멸망할 거예요.’

    ─ 아니, 네 세상은 비껴갈 것이다. 내가 어떻게든 도와줄 터이니. 이미 분기점이 바뀐 차원간의 간섭은 까다롭지만…….

    ‘제 세상이 재앙을 피해간다면 다른 곳은요.’

    ─ 지금까지와 마찬가지겠지. 살아남을 세상은 살아남을 것이다.

    멸망의 대적자는 선을 그었다. 그의 목소리는 까마득히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신과 같았다. 인간에게 자비롭지만 모두를 구원하지 않는 신.

    지호는 그처럼 생각할 수 없었다. 지호는 인간이었다. 저 높은 곳이 아닌 땅에 발을 디딘 채 다른 이들과 살아가고 있다.

    지호는 세이크리스를 떠올렸다. 이곳저곳이 던전에게 뜯어 먹혀, 죽음에 가까워졌던 땅을.

    지호는 그런 세계가 더 늘어나길 원치 않는다.

    “아인.”

    남자가 지호를 불렀다. 이미 그는 지호를 아인으로 만들리라 강하게 확신하고 있었다. 지호는 그런 남자에게 고개를 저었다.

    “저는 아인이 아니에요, 클라우 솔라스.”

    “곧 그렇게 될 거야.”

    “알고 있겠지만 아인은 그런 걸 바라지 않아요.”

    지호조차 호구로 보일 만큼 올곧고 선량한 남자다. 그런 그가 멀쩡히 생을 보내던 자신의 환생을 소멸시켜가면서까지 살아남길 바랄 리는 없다.

    “그렇겠지.”

    “…….”

    “하지만 나는 원해.”

    남자가 작게 으르렁거렸다. 상처 입은 맹수처럼 험악하지만 듣기에 안타까운 목소리로.

    지호를 소멸시키려 하는 남자지만 그다지 화가 나진 않았다. 불과 한 달 전에 연인을 잃은 남자가 제정신이겠는가.

    지호는 고개를 들었다.

    지호의 시야에 넓은 하늘이 펼쳐진다. 건물 안인데도 지호의 의지를 따라 시스템이 시각화된다. 지금이라면 저것을 수족처럼 다룰 수 있었다.

    남자를 상대할 필요는 없다. 지호가 원하는 건 그저,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뿐이었으니.

    천천히 지호의 등 뒤로 문이 열렸다. 지호는 미련 남은 사람처럼 입술을 달싹이다가,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뭐라 하든 남자에게 별 위안이 되진 않을 것이다.

    “미안해요.”

    “…….”

    남자가 시뻘건 눈으로 지호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지호가 문을 향해 발을 내딛으려던 순간.

    남자가 자신의 검으로 가슴을 푹 찔렀다.

    지호는 놀라서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잊고 달려갔다. 이원과 똑같이 생긴 남자가 제 가슴을 가르는데, 도저히 이성적으로 대응할 수는 없었다.

    “뭐하는 거예요!”

    남자는 슬픈 눈으로 지호를 응시했다. 가슴을 가른 것 치고는 지나치게 멀쩡한 얼굴로, 남자는 제 안에 손을 쑤셔 넣었다.

    그러자 남자의 안에서 그가 들고 있는 검과 몹시 닮은 한 자루의 검이 빠져나왔다. 검이 완전히 빠지는 것과 동시에 남자가 쿨럭, 피를 토했다.

    “내 종족은 원래 무기를 품고 있지……. 가져가, 도움이 될 테니까.”

    “가져가면요?”

    “이걸 뽑아낸 순간 내 운명은 끝났어.”

    남자가 부들부들 떨며 지호에게 검을 건넸다. 피투성이의 검을 받아들자, 검은 순식간에 지호의 안으로 깃들었다.

    남자는 모든 기력이 쇠한 것처럼 천천히 쓰러졌다. 무릎 꿇은 남자는 밀랍인형처럼 핏기 없는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아인을 죽여 버리고 싶어.”

    “…….”

    “내가 살아가길 바라겠지? 누가 그딴 소망 들어줄까 봐……. 할 수만 있다면 네게 복수할 거야. 하, 하하…….”

    남자의 눈에서 점점 빛이 꺼졌다. 남자는 마지막 힘을 짜내 필사적으로 지호를, 정확히는 아인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리고 남자는 눈을 뜬 채 더 이상 숨을 쉬지 않게 되었다.

    지호는 충격으로 얼어붙었다.

    시스템 관리

    곧 문이 닫힙니다.

    그때 지호를 재촉하는 시스템 메시지가 울렸다.

    ─ 돌아가거라. 그 못난 녀석은 내가 수습할 테니.

    “하지만…….”

    ─ 한 번 문을 열었으니 시간이 흐른다. 네 세계가 어찌 되어도 좋다면 여기 남아서 수습해라.

    지호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리 이 세계의 이원이 눈에 밟힌다지만… 현실의 이원이 위험한데 시간을 끌고 있을 순 없었다.

    지호가 할 수 있는 건 남자의 눈을 감겨 주는 것뿐이었다. 아직 온기가 식지 않은 ‘주이원’의 눈을 감겨 주는 건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을 만큼 끔찍한 일이었다. 지호는 이를 악물고 손을 떼어 냈다. 파리한 얼굴을 확인한 지호는 인사를 남길 새도 없이 닫히는 문으로 뛰어 들어갔다.

    아슬아슬하게 빠져나온 곳은 무척 캄캄한 암흑이었다.

    “드디어 돌아왔군.”

    “…….”

    기다렸다는 듯이 환영하는 남자의 얼굴이 눈에 익었다. 지호는 혹시 몰라서 시스템창을 확인해 남자의 정체를 확신했다.

    “당신이… 무명이구나.”

    “맞아. SSS급으로 올라갔나 봐, 축하해.”

    지호는 웃는 남자에게 고개를 저었다.

    “SSS급이 아니야.”

    지호의 시선은 자신의 시스템창에 박혀 있었다.

    status

    이름 신지호

    직업 노네임의 길드 마스터

    등급 EX

    체력 4278

    마력 187412

    근력 1083

    민첩 5921

    칭호 지구의 첫 번째 신, 진리의 대현자, 차원의 여행자, 클라우 솔라스의 주인 (더 보기)

    스킬 [ON]안정화(EX), 신격(EX), 별의 수호자(EX), 꿰뚫어 보는 눈(EX), 바다의 주인(EX), 클라우 솔라스(EX), 이플리스의 수호(EX)

    인벤토리 (2312/3024)

    수호신 ‘멸망의 대적자’와 계약 중입니다.

    “EX급이지.”

    드디어.

    지호는 이원과 같은 선상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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