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 주이원(3) (272/283)
  • 42. 주이원(3)

    충격을 받은 지호를 보며 남자가 웃음을 터트렸다.

    “농담이야. 잠깐 지망생이긴 했지만.”

    “네?”

    잠깐 지망생이었다는 것도 진짜 아이돌이었다는 말만큼 충격적이다.

    “왜…….”

    “반항기에 잠깐 그랬나 봐.”

    “…….”

    반항이 소심하다고 해야 할지, 파격적이라고 해야 할지. 이 세상의 아이돌은 어떻게 되어 먹은 건지 복장이 무척… 아무튼 꼴 보기 싫었다.

    꼴 보기 싫은 건 남자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남자는 혀를 차며 홀로그램을 모두 치웠다.

    “넌 본인에 가까우니까 보여 주는 거야. 그때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면 뜯어말렸을 텐데.”

    지호와 이원과는 달리 어릴 적부터 알던 사이는 아니었나 보다. 호기심이 들었지만 남자의 심정을 생각해 묻지 않았다. 대신, 사방에 가득 찬 다소 앳된 아인을 돌아보았다.

    “확실히 남한테 보여 줄 만한 꼴은 아니네요.”

    “뭐? 우리 아인이 어때서 그래?”

    본인이 질색한 주제에 지호가 비난하니 남자는 펄쩍 뛰었다.

    하지만 저건 아마 아인에게도 흑역사가 되어 있지 않을까. 지호는 제 전생을 완벽히 자신과 분리한 채 평가했다.

    너무 닮아서 사실 헷갈리긴 했다. 외모조차 같지 않은가. 하지만 지나치게 호구 같은 면이며, 반항한다고 이런 짓이나 한 걸 보니 자신과는 확실히 다른 사람이었다.

    물론 공통점도 존재한다. 눈앞의 남자와 주이원이 그러하듯 기본적인 기질은 비슷해도, 그 외에는 자라 온 환경이나 상황이 영향을 끼쳤겠지.

    “아인이 진짜로 아이돌 같은 걸 했으면, 내가 아인을 본 인간들 눈을 죄다 파 버리고 구속당했겠지.”

    “……과격하시네요.”

    “네 ‘주이원’도 마찬가지일걸? 그건 장담해.”

    지호는 인상을 찌푸렸다. 우리 이원이가 그럴 리 없다… 고 말할 수 없는 게 소소한 비극이었다.

    지호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이원은 이플리스에서 10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고생했다. 그렇다면 이 남자는 어떤 일을 겪었길래 이렇게 성격이 더러워진 걸까?

    “당신은 뭐하는 사람인데요?”

    “배우.”

    “헛소리 그만하시고요.”

    “헌터야. 아인은 연구자였고.”

    “연구자요?”

    지호 자신이 헌터여서 그런가, 아인 또한 싸우는 일을 할 줄 알았는데.

    하긴, 언뜻 본 ‘멸망의 대적자’가 아인에게 험한 일을 시킬 것 같지도 않았고… 만약 다른 직업을 갖고 있었다고 해도, 아버지의 일을 돕는 건 그에게 당연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무력이 있었다면 거기서 허망하게 죽을 일도 없었겠지. 그리 생각하니 입맛이 썼다.

    “돈 많으면 집에서 놀기나 할 것이지 쓸데없는 일을 하고 말이야…….”

    주이원이라면 쌍수를 들고 환영할 만한 직업인데 남자에게는 못마땅한 모양이다. 이원이 들었다면 배부른 소리라고 욕하겠지.

    “넌 뭐였는데?”

    “헌터요.”

    남자는 아인이 아이돌이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의 지호처럼, 거짓이길 간절히 바라는 듯이 눈을 껌벅였다.

    “……설마 몬스터 잡는 그거?”

    “맞아요.”

    허어……. 남자는 탄식을 내뱉었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단 듯이 고개를 저었다.

    “연구자가 낫네……. 내 환생은 그걸 눈뜨고 지켜보든? 미친놈이군.”

    “아주 많은 일이 있었죠.”

    이원도 가만히 눈 뜨고 지켜본 건 아니다. 쉴 새 없이 지호의 속을 뒤집으며 그만두라고 권했지. 지금은 그럭저럭 지호의 선택을 받아들였지만… 지금이라도 관둔다고 하면 쌍수를 들고 환영할 것이다.

    지호의 표정에서 많은 것을 읽어 낸 남자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안쓰러운 새끼…….”

    “……진짜 안쓰러운 건 직업 선택의 자유도 갖기 힘들었던 전데요.”

    “나였으면 발목 힘줄이라도 잘랐어.”

    “…….”

    남자의 눈이 지호의 발목을 훑는다. 어째… 이 또한 익숙한 눈빛이었다. 이원은 지호가 다칠 때마다 때때로 저런 눈빛으로 전신을 훑어보곤 했으니까. 특히 발목 쪽을 많이 봤었지.

    설마 어딜 망가뜨려야 고민했던 걸까. 이젠 그게 나름 이원답다는 걸 알지만… 좀, 소름끼치긴 했다.

    남자는 에휴, 한숨 쉬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아무튼… 지금 네가 나타나면 노릴 사람도 많을 테니 밖으로 나가지 말고 한동안 여기서 기다려. 알았지?”

    “나가지 말라고요?”

    지호의 목소리가 절로 뾰족해지자 남자는 스스로 몸을 낮추며 양해를 구했다.

    “응. 당분간만, 조금만 참아. 잘못하면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니까.”

    싫다고 말하려던 지호가 입을 다물었다. 이 몸의 주인, 아인이 피습당해 사망한 게 어제 일이다.

    “알았어요.”

    “아인의 아버지가 연락해도 무시해.”

    “왜요?”

    “그 인간이 어떻게 나올지 전혀 모르겠거든.”

    “…….”

    지호도 모르겠다.

    분명 ‘멸망의 대적자’는 지호에게 호의적이었다. 하지만 그건 아인이 옛날에 죽고 환생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닐까? 죽은 아들의 안에 들어앉은 지호를… 과연 이전처럼 호의적으로 봐줄지는 의문이었다.

    하지만 지호가 아는 멸망의 대적자는 좋은 사람이었다. 그러니 제 인생을 갈아 넣어서 대던전에 맞서고 있지 않겠는가? 지금의 지호를 호의적으로 보진 않더라도 해칠 것 같진 않다.

    그리 생각하는 지호에게 남자가 혀를 쯧쯧 찼다.

    “네가 뭘 모르는 모양인데, 장인어른은 거의 전능해. 무장한 함선 하나를 고갯짓만으로도 무력화시킬 수 있으니까. 불세출의 천재, 유일한 대현자… 신이라고 부르는 사람조차 있으니.”

    “……그렇게나?”

    “그렇게나.”

    상상조차 하기 힘들 정도로 까마득히 강한 사람이었다. 도무지 실존하는 사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수준의 이적. 그런 사람이 전생에 지호의 아버지였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을 만큼 놀라웠다.

    “만약 이쪽의 피해를 걱정하지 않았으면 대던전을 공략할 수도 있었을 거야. 전면전으로 싸우면 희생이 너무 커서 피하는 거지.”

    이들이 대던전을 막으면 수많은 세계가 구원받는다. 하지만 이미 선의로 돕고 있는 이들에게 무작정 희생을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다. 관리자를 보내는 것만으로도 이미 많은 것을 하고 있으니까.

    “대던전의 기초가 된 설계도 아인의 아버지가 만들었지. 물론 만들 당시에는 그런 파괴적인 게 아니었지만.”

    “그것 때문에 미움을 샀겠네요.”

    “맞아. 웃긴 게 그 사람한테는 아무 소리 못하면서 아인만 만만하게 보고 괴롭혔지. 애초에 그 자가 여기 남아 있는 게 아인 덕분인데.”

    “......”

    “왜 그래?”

    “그냥, 용케도 호구 같은 성격으로 자랐네요.”

    “내 말이. 결국…….”

    아인은 죽었다. 그 아버지가 노력하던 게 무색하게도 온갖 괴롭힘을 받다가. 가진 게 많았으나 없었던 아인이 마지막으로 바란 건 눈앞의 남자 하나였다.

    그만큼 사랑했고, 그만큼 사랑받았겠지.

    내내 가벼운 태도를 위장하던 남자였지만 차마 아인이 죽었다는 말까진 내뱉지 못했다.

    “괜찮아요? 너무 생각하지 마세요.”

    “난 괜찮아.”

    괜찮을 리가 없다. 지호의 안쓰러운 눈빛을 받으며 남자가 피식 웃었다.

    “다만… 지금 생각해 보면 억울한 마음은 있어.”

    “뭔데요?”

    “사실 굳이 우리가 대던전을 신경 쓸 필요는 없잖아. 안 그래?”

    “……당신들은 공격하지 않을 테니까?”

    대던전과 직접 싸울 만한 힘을 가진 이들이다. 굳이 대던전을 신경 쓰지 않으면, 대던전 또한 그들은 건드리지 않겠지.

    당장은 말이다.

    “그렇게 힘을 키운 대던전이 당신들까지 먹어치우면 어쩌려고요?”

    “그도 맞는 말이야.”

    남자는 순순히 인정했다.

    “하지만 다들 그렇게 생각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왜 우리가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생각. 이기적인 놈들이 참 많아. 물론 날 포함해서.”

    “…….”

    “너처럼 제발로 희생하는 사람은 모르겠지. 하지만 다들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이 관리자가 되겠다고 하면 반대해. 제 발로 죽을 길 찾아간다는 거니까.”

    “…….”

    “실제로 관리자에 지원하는 사람 중 다수는 죽음을 원하는 자들이야. 아인이 별종이었지.”

    남자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뭐라 더 말하려던 남자는 지호와 눈을 마주치곤 아무 일도 없었던 양 씩 웃었다.

    “너랑 더 얘기하다가 또 울겠다.”

    “울어도 되는데요.”

    “됐고, 일단 나는 좀 나가 봐야겠어. 혹시 필요한 거 있어?”

    “딱히… 아, 아니. 책 같은 거?”

    이플리스에서 얻은 지식도 지호에게 상당히 도움이 되었다. 그보다도 발달한 이 세계의 지식은 분명 훨씬 더 결정적인 도움이 되리라.

    남자는 작은 리모컨 같은 걸 건네주었다. 어떻게 조작하는지 물어볼 필요도 없이, 손에 들자마자 지호의 의사에 따라 홀로그램을 띄웠다.

    지호의 눈앞에 떠오른 건 수만 권의 책. 지호가 자세히 생각하기도 전에 그 의사를 반영하듯 몇 권의 책이 스르르 앞으로 다가왔다.

    “얼마든지 봐. 많이 봐두면 좋을걸?”

    “고마워요.”

    남자가 나가든 말든, 그 시점부터 반쯤 홀린 지호는 정신이 없었다. 이후로 지호는 정신없이 책에 몰두했다.

    한 달 후.

    지호는 온갖 책을 읽었다. 처음에는 기술 서적 위주로 읽다가, 중간 중간 소설이나 에세이 같은 다른 장르도 틈틈이 봤다. 책이 힘들 때는 가끔 방송을 확인했다. 이 세계의 모든 것이 고스란히 나와 있었다.

    그렇게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즐겁게 지냈는데…….

    “갇혔네…….”

    순진하게 남자를 믿고 있다가 한 달 만에야 깨닫다니. 너무 신나서 그만…….

    지호도 마냥 책만 읽고 있던 건 아니었다. 물론 9할 정도 책에 집중하느라 현실을 조금 외면하긴 했지만…….

    딱히 막막하진 않았다. 갇혀 있을 만큼의 가치가 있던 시간이었으니까.

    이제 탈출할 시간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