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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주이원(1) (270/283)

42. 주이원(1)

■■.

지호의 의식을 뚫고 쓰러져 죽어가는 제 전생의 목소리가 들렸다.

■■.

그는 누군가를 부르고 있었다. 어떤 이름을 말하는지 뭉개져서 제대로 들리진 않았지만, 누구를 부르는지는 알 수 있었다.

■■. ■■. ■■. ■■. ■■. ■■. ■■. ■■. ■■. ■■. ■■. ■■. ■■. ■■. ■■. ■■. ■■. ■■. ■■. ■■…….

쏟아지는 이름의 홍수. 그건 단 한 사람만을 간절히 부르며 그리고 있었다.

이 세계의 주이원을.

보고 싶어. 마지막으로 한 번만. 미안해. 사랑해. 미안해, 그러니까. 한 번만, ■■…….

애절한 부름이었지만 전생의 신지호가 바라는 기적은 이루어졌다. 그러니까 아주 간발의 차이로.

“■■!”

그렇게도 그리워하던 목소리가 지호를 불렀다. 전생의 이원이 다가와 망연자실하게 멈춰 섰다. 한눈에 보기에도 상처는 심각했다. 절대자에 가까운 ‘멸망의 대적자’가 와도 살려 낼 수 없을 만큼.

■■은 자리에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꺾여 버렸다고 표현하는 쪽이 더 정확했다. 차게 식은 떨리는 손이 죽어가는 연인을 더듬었다.

“용서 못 해.”

서슬 퍼런 목소리로 ■■이 속삭였다. 정말로 살벌한 목소리인데 몸의 주인은 힘없이 웃었다.

“죽여 버릴 거야, 너…….”

꾸며낸 게 아닌 분노가 ■■의 안에서 들끓었다. 지금까지 제 결심을 꺾지 않고 기어이 고집을 부리던 지호에게, 그런 지호의 의견을 꺾기 위해 얼굴조차 보지 않고 홀로 둔 자신에게 그리고 멋대로 죽으려 드는 지호에게 화가 나서.

“널 죽이고 나도 따라갈 거야.”

그러지 마, 라고 말할 힘도 없었다. 이미 전생의 자신은 의식조차 사라지고 있었으니까. 저 말도 안 되는 말도 ■■의 목소리라고 기뻐할 만큼, 아무것도 분간할 수 없게 되었으니까.

안녕, ■■. 나중에 또 만나.

그게 전생의 지호가 남긴 마지막 생각이었다. 다음 생에서 만날 수 있으리라는 강한 확신… 아니, 확신을 넘어서 의심 한 점 없는 만고불변의 진리처럼 여긴 생각.

그걸 끝으로 ■■는 허무한 죽음을 맞이했다.

“아…….”

■■은 망연자실하게 죽어 버린 연인을 끌어안았다.

“아, ■■, 아, 안, 안 돼, 이…….”

살벌한 목소리는 어디 가고 곧장 부서질 듯이 연약한 목소리로 ■■이 제 연인을 불렀다. 덜덜 떨리는 손 때문에 몇 번이나 놓칠 뻔하면서도 기어이 손을 떼진 않았다.

하필이면 얼굴도 거의 똑같아서는, 마치 자신이 죽은 후의 이원을 보는 것 같았다.

이 세상을 모두 잃은 듯이 절망한 얼굴. 지호는 ■■의 젖은 뺨을 닦아 주고 싶었다. 우는 모습을 보면 볼수록 지호의 심장 또한 찢어질 듯이 아파서.

“울지 마, 이원아.”

지호는 손을 뻗어 ■■의 뺨을 닦아 주었다. 그리고 저도 놀라 화들짝 굳어 버렸다. 놀란 건 ■■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은 단순히 놀라는 데서 끝내지 않았다. 언제 울었냐는 듯이 사납게 얼굴을 일그러트리고는, 조금 전까지 소중하게 끌어안고 있던 지호의 몸을 바닥이 내리꽂았다. 힘이 어찌나 센지 몸이 부서질 것처럼 아팠다.

“윽!”

“너 뭐야.”

으르렁거리며 ■■이 고개를 숙였다. 지나치게 가까워진 거리에 순간 입이라도 맞추는 줄 알았다. 저도 모르게 눈을 꾹 감은 지호를 ■■이 비웃었다. 맞닿은 건 입술이 아닌 이마였다.

“어떤 새끼가…….”

사납게 중얼거리며 ■■은 정신을 집중했다.

순간.

누군가가 서늘하고 날카로운 칼로 머릿속을 쑤시는 듯한 통증이 엄습했다. 지나치게 차가워서 오히려 뜨겁게 느껴지는 고통이 머리 이곳저곳을 쑤실 때마다, 의도하지 않았는데 멋대로 지호의 기억이 이리저리 튀었다.

곧 ■■이 몸을 들었다.

“……너, 뭐야?”

경악과 혼란이 섞인 얼굴로.

* * *

지호의 일생을 낱낱이 살펴본 ■■은 일단 지호를 놓아주었다. 그리고 설명을 요구했다.

어차피 모든 걸 아는 자에게 거짓말을 할 수도 없었다. 지호는 ■■에게 최대한 할 수 있는 설명을 모두 했다.

잠시 생각하던 ■■은 한숨을 쉬며 지호에게 손을 뻗었다. 움찔하는 지호를 붙잡고 가볍게 손을 털자, 뚫린 옷이며 묻어 있던 피가 없던 것처럼 복구되었다.

“내 이름. 안 들리는 걸로 부르려 애쓰지 말고 이원이라고 불러.”

“그건…….”

“계속 이상하게 부르려고? 말 들어.”

■■은, 아니, 이 세계의 주이원은 이상하리만치 평온한 태도로 충고했다. 지호는 상대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 못하는 게 상대의 의중뿐이겠는가. 단순한 환상이나 기억인 줄 알았는데 이미 죽은 이의 몸을 차지했고, 그 다음부터는 마치 진짜 존재하는 세계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현실과 같았다. 손끝에 닿는 감각, 불어오는 바람에 섞인 냄새, 또렷한 목소리와 멀리서 들리는 잡음까지.

“지금 상황이 이해 안 되지?”

혼란스러운 지호에게 주이원이 물었다. 지호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인을 좀 해 봤어. 내가 단순히 네 꿈이나 환상 속 존재인지…….”

“그런 것도 확인할 수 있어요?”

놀람과 의구심 섞인 질문에 주이원이 지호를 돌아보았다. 퍽 귀엽고 사랑스러운 작은 동물을 보듯, 주이원의 얼굴에 느긋한 미소가 어렸다.

“시스템을 확인하면 돼. 아무리 꿈이라도 그걸 완벽히 구현하는 건 불가능하니까. 시스템이 작동되는 걸 보면 나는 진짜야.”

“…….”

“그러니까 여긴, 분기점이지.”

“……분기점?”

“그래, 네가 오면서 ■■가 죽지 않게 된 세계.”

주이원의 목소리가 다정했다. 그러나 주이원의 목소리에는 감출 수 없는 슬픔이 어려 있었다. 그는 연인을 잃은 지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은 상태였으니까.

“그러니까, 네가 여기 있으면 ■■는 살게 된다는 거지. 이 몸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는.”

“그런 게 가능해요?”

“물론, 가능해. 어쨌든 혼은 같잖아? 모두 너를 위화감 없이 ■■로 인식하겠지. 신지호가 아니라. 그러면 이 세계는 신지호가 끝까지 죽지 않는 세계가 되어… 너희 세계와는 다른 분기로 흘러가겠지.”

지호는 저도 모르게 바짝 긴장해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걸 본 주이원이 가볍게 웃었다.

“왜, 내가 너를 붙잡아 그 자리에 앉히기라도 할 것 같아?”

“……그게.”

“걱정하지 마. 그런 짓 안할 테니까.”

“…….”

“정말인데. 네가 ■■라고 착각하고 있다면 또 모를까……. 아무리 환생이라지만 별개의 사람인데 그런 착각을 하겠어?”

“그건… 그렇죠.”

만약 주이원이 죽었다가 그의 환생이 몸을 대신 차지한다고 해도, 지호 역시 그를 똑같은 이원으로 받아들이진 못할 것이다.

“괜한 경계하지 말고 이만 원래 세계로 돌아가… 라고 말하고 싶지만.”

“…….”

“너, 돌아가는 법 모르지?”

당연하지.

지호는 대답하는 대신 슬쩍 시선을 회피했다. 그러자 주이원이 혀를 찼다.

“보내 줄 수는 있어. 시간과 연구가 좀 필요하지만.”

“……얼마나 필요한데요?”

“며칠에서 몇 주?”

“…….”

“그렇게 세상 무너진 얼굴 하지 마. 네가 온 것과 같은 시점으로 돌려보내 줄 테니까.”

그런 게 가능하다면 천만 다행이었다.

“다만… 그 시간 동안 네가 죽었다는 티는 안 내는 게 낫겠지. 괜히 성가셔질 테니까.”

“그렇겠죠.”

“화해했다 치고 나랑 같이 있어.”

“……알았어요.”

“그럼 가자.”

어째 일이 물 흐르듯 진행되어서 지호는 얼떨떨하게 그를 따라갔다. 근처에 이원의 차가 세워져 있었다. 바퀴가 달린 대신 비행선처럼 허공에 떠오른 차였다. 두 사람이 차에 오르자, 차는 따로 운전하지 않아도 허공을 가로질렀다.

집까지는 금방 도착했다.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현실의 이원이 집에 설치한 것과 흡사한 형태의 엘리베이터를 타니, 수백 층 꼭대기까지 금세 도착했다.

멀리서 보았을 때도 건물이 크다고 생각했지만, 한 층을 모두 쓴 내부는 장관이었다. 입구에는 정원이 만들어져 있었고 조금 더 들어가자 집이 나왔다.

집 곳곳에는 연인의 흔적이 가득했다. 벽에 걸린 사진 속 연인은 영원히 행복할 듯 보였다.

이원은 일부러 주변을 돌아보지 않았다. 바닥을 보며 걸어간 그는 문 하나를 열었다.

“손님방인데 여길 써.”

“……감사합니다.”

“식사 준비해 줄게. 먹고 쉬어.”

이원은 부드럽게 미소 짓고 방을 나섰다.

식사를 마치고 잠에 든 한밤 중, 지호는 멀리서 들리는 소리에 깨어났다.

지호는 홀린 듯이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살짝 열린 문을 열자, 거대한 침대 위에 웅크린 남자가 보였다.

이 세계의 주이원이다.

지호를 본 이후 지금껏 내내 태연하게 보였던 주이원이 침대 위에 웅크린 채 울고 있었다.

자신의 심장을 쥐어뜯고 두드리면서. 어찌나 힘을 줬는지 살이 패여 피가 떨어졌다.

“주이원.”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이원과 너무 닮은 얼굴로 계속 눈물을 흘렸을 뿐이다.

이원의 전생이니 남이라면 남이다. 하지만 지호는 그를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었다. 머릿속으로 뭔가를 생각하기 이전에, 애초에 이원과 닮은 얼굴을 보자마자 무의식중에 몸이 반응해서.

지호는 그가 있던 침대로 올라갔다. 그리고 가슴을 쥐어뜯는 손을 잡아 억지로 떼어 냈다.

“울지 마.”

“윽…….”

“……미안해.”

저도 모르게 감정이 복받쳐 목소리가 떨렸다. 죽어 버린 전생의 지호의 감정이 옮겨 붙은 듯이 마음이 괴로웠다.

주이원이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렸다. 눈물 가득 찬 숨을 헐떡이며 주이원은 지호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숨이 막힐 정도의 힘이 지호를 으스러트릴 것처럼 조인다.

“…….”

지호는 입술을 달싹였다.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 어떤 말도 그를 위로할 수 없을 테니까.

대신 손을 들어 그를 꼭 안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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