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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녹스(4) (263/283)

40. 녹스(4)

“지호야. 저거 시체 썩는 냄새 나.”

세게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 머리를 강타했다. 그러나 예상하지 못 했냐고 묻는다면… 조금, 의심은 했다. 믿고 싶지 않았을 뿐이지.

상대가 가진 EX급의 스킬, [빙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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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의(Lv.10)

등급 EX

설명 원하는 대상의 몸으로 의식을 옮긴다. 옮기는 대상에 한계는 없다. 단, 일정 확률로 빙의가 실패할 수 있으며, 죽은 대상을 상대로는 빙의가 100% 성공한다.

빙의한 상태로도 본인의 스킬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다. 빙의한 대상의 스킬 역시 사용이 가능하나, 사용하는 스킬은 최대 A급으로 지정된다. 그 이하의 스킬은 대상과 동등하게 적용한다.

단, 옮기는 대상의 육신이 일정 이상 부패했을 때는 종족이 [좀비]로 변화한다. [좀비]상태에서는 언어와 스킬을 사용할 수 없다.

지나치게 부패했을 때는 스킬 사용이 불가능하다는 단서 때문에, 멀쩡해 보여서 혹시나 했다.

분명 녹스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는 아니었을 텐데, 녹스의 반응은 태연했다.

‘그게 뭐?’라고 하듯이.

“허수혁은…….”

“꽤 쓸모 있는 녀석이었지. 이번에도 안 들켰으면 잘 써먹었을 텐데, 개새끼가 냄새를 맡을 줄은 몰랐네.”

단지 그것만이 안타깝다는 투였다.

“아니, 그걸 묻는 게 아니야.”

“그럼?”

“……허수혁은 정말 죽은 거야?”

지호는 입술을 깨물었다.

녹스가 사람의 목숨 따위 쉽게 여긴다는 건 잘 알았지만… 시체가 된 허수혁을 이용할 만큼, 죽은 사람을 향한 최소한의 예의조차 지키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싶진 않았다.

다 알잖아, 지호야.”

고작 그런 걸 묻는 지호의 반응이 퍽 귀엽다는 듯 녹스가 미소 지었다.

“진작에 죽었지. 바보 같은 놈. 사실 널 납치했을 때부터 이미 죽어 있었거든? 내가 다른 놈이 널 만지게 놔둘 리 없잖아?”

“…….”

그래, 그때의 녹스는 시스템을 더 자유롭게 조종할 수 있었으니까. 이번에 지호에게 들키지 않았다면 여전히 허수혁인 척 위장했겠지.

“누구든 무슨 상관이야. 죽이면 그만이지.”

“잠깐만.”

지호는 달려 나가려던 이원을 붙잡았다.

“자기야.”

“너무 지호를 재촉하지 마, 주이원. 매번 지호를 네 맘대로 움직이려 드는 거 보기 안 좋으니까.”

“너…….”

“그래서 할 말이 뭐야? 네가 말하는 동안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게.”

“저걸 믿어?”

“금방 끝나.”

지호는 차분히 자신을 바라보는 녹스를 꿰뚫듯이 응시했다. 허수혁과 별개로 그 안에 담긴 녹스의 본질을 확인하고 싶은 것처럼.

“넌 누구야?”

“녹스잖아.”

“그걸 묻는 게 아니야. 너는…….”

지호는 허수혁의 모습을 한 녹스를 응시했다.

이전부터 수상하다고 여긴 사람이 몇몇 있었다. 그리고 허수혁의 몸을 뒤집어쓴 녹스의 몸을 마주한 순간, 부족했던 퍼즐의 몇 조각이 채워졌다.

“네가 굳이 허수혁의 몸을 뒤집어쓰고 나타난 건 날 상대로 싸우기 위해서겠지.”

“계약한 신의 힘을 쓰려면 몸이 필요하니까.”

이원의 덧붙인 설명에 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강력한 신과 계약했다고 하더라도 그 힘을 쓰려면 실체가 필요할 테니까.

“하지만 정말 그것만을 위해서 몸을 만든 건 아닐 거야.”

“무슨 근거로?”

“그야, 최근에 몸을 만들었다면 굳이 주이원을 질투할 필요도 없잖아?”

“…….”

“시스템의 형태로 내 옆에 더 긴밀히 붙어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녹스는 이원을 질투했다. 지호와 이원의 시간을, 관계를, 접촉마저도. 마치 누군가를 짝사랑하는 사람이 그러하듯… 단지 애절하다기에는 뚜렷한 욕망이 느껴지는 시선이었다.

지호가 정신체였다면 모를까 육체가 존재하는 만큼, 육신은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만약 네가 실체 없이 존재했다면, 마찬가지로 실체 없이 존재했던 서리가 네 존재를 조금쯤 눈치챘을지도 모르고.”

아무리 상대적으로 약하다지만 서리도 시스템의 힘을 지녔다. 녹스도 서리와 마찬가지로 곁에 있었더라면, 20년 가까이 지호의 곁에 있던 서리가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다.

‘……서리.’

지호는 굳이 몸을 만들어 제 앞에 나타난 서리를 떠올렸다. 지금쯤 축 늘어진 채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을 서리. 그 모습을 떠올리면 무척 가슴이 아팠다.

지호는 서리와 짧다면 짧지만 나름 의미있는 시간을 함께했다. 게다가 한집에 사는 만큼, 둘만 있을 때면 서리는 지호의 몸 위나 옆에 찰싹 붙어 골골거리기를 즐겼다.

그렇게 서리와 쌓아 올린 시간만큼 마음의 통증은 늘어났다. 서리를 아끼고 사랑하니까.

“전에는 존재조차 몰랐지……. 하지만 이제 서리는 내 고양이야. 아마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고양이겠지.”

“…….”

“네게 그런 욕망이 없었을까?”

몸을 갖고, 지호에게 인식된 채, 삶을 즐기고 싶다는 욕망.

분명 녹스도 서리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너는 분명 내가 아는 사람이겠지.”

“그렇게 생각해?”

정답이라고도 오답이라고도 하지도 않은 채 녹스가 가만히 미소 지었다. 그 모호한 태도가 오히려 지호에게 확신을 줬다.

“그래. 넌 네 주변에 있던 사람이야.”

녹스는 분명 지호의 곁에 있었을 것이다. 서리보다 녹스의 힘이 훨씬 강한 만큼, 더 오랫동안. 어쩌면 지호에게서 떨어져 나간 시점부터. 곁에 있었을지도.

“가족은 아니겠지. 다른 사람이 위화감을 느끼기 쉬우니까. 나보다 다른 가족들은 서로를 오래 알아왔는걸.”

“맞아. 처음에는 그쪽을 노렸지만.”

녹스가 순순히 추측을 긍정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가족이 아니라도 나와 오랫동안 함께 있던 사람일 거야. 내… 친구라든가.”

“…….”

“덧붙여 최근 나와 더욱 가까워진 사람일 확률이 높겠지. 나랑 가까이 있는 편이… 녹스로서, 네 계획을 위해 날 감시하기 수월할 테니까.”

그 두 가지에 모두 부합하는 건 딱 한 사람.

“손경현.”

지호의 오랜 친구. 또한 최근 노네임 길드로 적을 옮긴 사람.

손경현뿐이었다.

“너지?”

녹스는 표정 없이 지호를 응시했다. 그러나 이내 환하게 웃었다.

“좀 뻔했나?”

아무것도 모르던 지호가 자신을 알아주기를 원해서, 차라리 들키기를 바랐던 사람처럼. 그렇게 만족스러운 희열이 녹스의 얼굴 위로 떠올랐다.

“맞아. 그래서 더더욱 화가 났어. 같은 집에서 살진 않았지만 나도 네 친구였잖아.”

녹스의 표정이 가면을 바꿔쓴 듯 완전히 달라졌다. 그가 지호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왜 주이원이지?”

“그야 내가 널 좋아하지 못하도록 막았으니까 그렇지.”

경현은 지호에게 물었지만, 그에 대한 답은 이원에게서 돌아왔다. 게다가 내용도 내용인지라 경현은 눈을 부릅뜬 채 애써 무시하려 했던 이원을 놀란 눈으로 돌아보았다.

“……뭐?”

“아, 오해하지는 마. 지호의 첫사랑은 나거든.”

이원이 그 와중에도 자랑스럽다는 듯 가슴을 쭉 편 채 손을 그 위에 얹었다. 마치 메달이라고 딴 듯 당당한 자세였다.

이원은 잠시 녹스의 충격 받은 얼굴을 감상하다가 낮게 속삭였다.

“하지만… 나는 지호에게 가족이잖아? 지호는 그런 쪽으로 고지식해서 말이야. 아, 정말 지긋지긋할 정도로 고지식하지.”

이원이 넌더리가 난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지호도 차마 그 말에는 반박할 수 없었다.

기억을 잃었을 적. 아무리 암시에 당했다 한들, 이원을 거절하는 이유 자체는 지호의 생각을 기반으로 나왔다. 그때 지호가 이원을 받아들이지 못한 가장 큰 이유가 ‘가족이어서’였으니까.

“몇몇… 가능성이 조금은 있다고 생각한 것들이 있거든.”

이원은 진지하게 생각하면서 손을 편 채 손가락을 꼽았다. 지호로서는 저기에 누가 해당하는지조차 짐작할 수 없었다.

손가락을 네 번 접은 이원은 다시 손을 펴고, 녹스에게 손가락질했다.

“거기서 가장 확률이 높은 건 너였어.”

“그럴 리가…….”

지호만큼이나 녹스도 전혀 상상 못 한 일인지 표정 관리를 전혀 하지 못하고 입을 떡 벌렸다.

“아, 진짜 좋아한 건 아니라니까? 지호의 첫사랑은 나야. 착각하지 말고.”

“…….”

“그래, 손경현… 너도 학교에서 널 매번 방해한 건 잘 알고 있겠지? 하지만 말이야, 그뿐만이 아냐. 그 외에도 지호가 아프다고 해도 너랑 약속이 있을 때 지나치게 자주 빠지지 않았어?”

“너…….”

“그리고 또… 지호는 남에 대해 나쁘게 말하는 걸 싫어하지만, 좋아하지 않도록 유도는 가능하거든? 가령 같은 반의 누가 손경현을 좋아하는 것 같다거나. 그런 식으로 말하면 착한 지호는 비밀도 지켜 줄 거고, 먼저 좋아한 아이에게서 널 뺏을 상황 자체를 만들지 않겠지. 그렇게 ‘좋아하는 사람’의 후보군에서 아예 아웃.”

어린애 치고는 꽤 음험한 계략을 늘어 둔 이원은 마지막으로, 경현을 꽤 안타깝다는 듯 응시했다. 물론 받는 사람 입장에선 더 화가 날 만한 시선이었다.

“사실 굳이 따지면 네겐 도움도 받았는데.”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지호가 어처구니가 없어서 녹스 대신 끼어들었다. 지금까지 말한 것 중에 대체 어느 부분에서 경현에게 도움을 받았단 말인가.

이원은 조금 뚱해진 얼굴로 속삭였다.

“자기는 원래 여자애 좋아해.”

“……내가?”

“완벽한 이성애자는 아니라고 해도, 자기 눈이 먼저 가는 건 여자애였으니까. 하지만 저거 얘길 꺼내면서 사랑의 다양성에 관해 말해 줬거든.”

“……네가?”

“기억은 안 날걸. 시도 때도 없이 말하긴 했어도 딱 티가 나게 말한 적은 없으니까.”

“…….”

그러고 보니 정확한 계기는 기억나지 않지만, 반 남자애들을 보며 이상한 기분이 들었던 적은 있다. 그러다가 가장 먼저 눈이 간 건 가족처럼 여긴 이원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지호답지 않은 일인데… 이원에게는 일석이조였고, 경현에게는… 날벼락이었다. 차라리 그때 눈치챘다면 뭐든 방법을 썼을지도 모르겠지만 다 끝나고 이제야 말하다니.

“고마워, 큐피트 님.”

이원이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았다.

아마 녹스도 그때는 순진한 꼬맹이 아니었을까. 아마 초등학생 때의 일일 테니까.

하지만 비슷한 나이에 순진한 꼬맹이었어야 할 이원은… 혼자 속이 검었다. 능구렁이를 100마리쯤 고아 먹은 이원에게 지호도 경현도 넘어가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상관없어.”

“아, 진짜? 부들부들 떨고 있는데?”

“어차피 지호와 나는 하나가 될 테니까.”

“하나가 되면 기분 좋은 일은 못 할… 으읍.”

급히 지호가 새빨개진 얼굴로 이원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냥 낯부끄러운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녹스는 정말 도발이라도 당한 것처럼 얼굴을 사납게 일그러트렸다.

“그냥 죽어.”

녹스가 들고 있던 무기를 집어 던졌다.

콰과과광!

요란한 소리와 함께 폭발음이 일었다. 녹스가 노린 건 두 사람이 아닌, 두 사람의 위였다. 지금까지 녹스가 만들어 둔 견고한 결계가 깨짐과 동시에…….

“다음에 봐, 지호야.”

녹스는 허수혁의 몸 그대로 사라졌다. 허수혁의 정체는 들켰지만, 아직 쓸 데가 있단 듯이.

하긴, 허수혁은 지호만큼은 못해도 상당히 좋은 스킬을 지녔다. 녹스라면 허수혁이 갖고 있던 디버프 스킬도 발동하지 않을 테니 더 유용하게 쓸 수 있겠지.

지호는 사람 하나 없는 복도를 한 번 훑어보고 다가오는 이원을 쏘아보았다.

“야!”

“어차피 이럴 계획이었을 거야. 그보다 녹스를 찾아야지. 찾으면서 조사한 결과도 알려 줄 테니까.”

“후…….”

이원의 말이 맞았다. 하지만 녹스를 어찌 찾을지가 문제였다.

“게다가 경현이는…….”

“녹스라고 해.”

“……손경현으로서의 측면을 말하려는 거야. 걔 부모님이 가만히 있겠어?”

아버지는 최근 신설되었지만 막강한 힘을 자랑하는 이능부 장관. 어머니는 최근 헌터 업계 쪽으로 사업을 확장한 중견기업의 전무.

안타깝게도 저기 쓰러진 허수혁과는 상황이 다르다. 허수혁은 범죄자였지만 손경현은 노네임의 길드원 중 하나다. 게다가 이원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만큼 단순히 죽은 자의 몸을 갈취한 것도 아닐 것이다.

게다가 지호의 기억 속에 손경현은 가족과 사이가 좋았다. 이능부 장관인 손정훈은 실제로, 경현의 부탁을 받고 몇 번이나 지호의 편의를 봐준 인물이 아닌가.

그런 ‘손경현’을 잡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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