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녹스(3)
분명 레비아탄을 쫓고 있던 이원이 여기에는 어떻게 나타난 걸까. 궁금했지만 지호는 입을 다물었다. 눈앞에 녹스를 둔 채로 지금까지 뭘 했는지 말할 수는 없으니까.
정말 갑자기 나타난 주제에 미리 약속이라도 하고 나타난 것처럼, 이원은 태연하게 물었다.
“자기야, 저런 헛소리를 왜 가만히 듣고 있었어.”
“그러는 너는 듣고 있었으면서 왜 지금 나타났어?”
따로 기척을 느낀 건 아니지만… 나타나는 타이밍이 지나치게 좋지 않았나.
지호의 허리를 끌어안은 이원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 들켰네?”
이원의 입술이 지호의 귓가에 닿는 바람에, 지호가 몸을 움찔했다. 낮은 목소리가 벌레를 유인해 죽이기 위해서 바른 꿀처럼 달착지근하다.
질 낮은 도발이었지만 효과는 좋았다. 그걸 보고 있던 녹스의 표정이 무시무시하게 일그러졌으니까.
“왜.”
감정을 억누르지 못한 녹스의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왜 내가 아니야?”
“…….”
“내가 너랑 계속 함께 있었어. 주이원 그 새끼 때문에 우리가 쪼개져서 떨어진 거야. 너랑 나는 원래 하나였다고!”
“녹스. 그…….”
“그야 내가 잘생겼으니까 그렇지.”
이원은 지호를 단숨에 얼굴만 보는 얼빠로 만들었다. 그리고 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질투하는 거 추잡해.”
지호가 이원의 옆구리를 퍽 쳤다. 이원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고 오히려 지호에게 매달렸다.
아니, 왜 굳이 도발을 한단 말인가? 하긴, 원래부터 지호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가차 없이 어그로를 끌던 녀석이긴 하지만…….
일그러졌던 녹스의 얼굴이 차차 무표정해졌다. 흥분이 가라앉고 증오로 날을 벼린 차디찬 얼굴이었다.
천천히 녹스가 심호흡했다. 그리고 그 순간, 어디선가 거대한 힘이 흘러들어 와 녹스에게 깃들었다.
“이 힘이 어디서 나왔는지 궁금해?”
“아니?”
녹스에게 쏘아붙이며 이원이 듣지 말라는 듯 지호의 귀를 막았다. 그러나 녹스의 목소리는 또렷하게 지호의 귀에 꽂혔다.
“내 힘을 나눠 쓰는 놈이 있잖아.”
서리.
원래 녹스였고, 녹스에게서 떨어져 나간 작은 파편. 녹스와 달리 지호의 편을 들어주는 작은 고양이.
안 그래도 의식을 잃은 아이다. 저도 모르게 달려 나가 녹스의 멱살을 쥘 뻔한 지호를 이원이 붙들었다.
“저놈 뜻대로 흔들리지 마, 지호야.”
이원이 침착하게 지호를 도닥였다. 동요하지 않는 목소리에는 단단히 중심이 잡혀 있어서, 분노로 휙 날아가려던 지호를 단단히 고정했다. 지호는 이원 덕에 무너지지 않은 채, 진정하려 애쓰며 녹스를 노려보았다.
“서리한테 무슨 짓 했어.”
“그딴 고양이가 나보다 중요해?”
“당연한 거 아니야? 지금은 서리가 더 소중하지. 우리 애잖아.”
울컥한 지호 대신 이원이 대답했다. 그 평온한 목소리를 들으니 조금은 정신이 들었다.
지호는 떨리는 눈꺼풀을 닫았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시스템에 직접 연결된 서리는 지호가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지호는 조금 전에도 확인했던 서리의 생명 반응을 다시 더듬었다.
죽지 않았다.
아직 반응이 느껴진다. 다만 이전보다 훨씬 희미했다. 평범한 고양이라면 곧 숨을 거둬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머리가 차갑게 식은 채, 지호는 녹스를 노려보았다.
“녹스. 내가 준 이름이지…….”
“그렇지.”
“그 이름은 줄 테니 가져. 그 외에 내가 더 줄 수 있는 건 없어.”
지호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꽉 깨물었다가 뗐다.
“내게 과거의 ‘녹스’는 서리뿐이야. 네가 아니라.”
기억이 떠오르며 함께 흔들렸던 감정이 서서히 평온하게 가라앉는다. 쉽게 정신 차릴 수 있었던 데는 뒤에 선 이원의 존재 또한 한몫했다.
그런 지호를 보며 녹스가 이죽거렸다.
“왜? 네 말대로라면 나도 영원히 나쁜 놈은 아닐 거 아냐.”
“그렇지. 너를 포기하지 않으면 언젠가 너를 바꿀 수 있을지도 몰라.”
“그래. 그러니까…….”
살살 꼬드기는 녹스를 향해 지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나는 널 위해 노력하지 않아. 너를 포기할 거야. 네 가능성을 믿는 것과는 별개로 지금의 내게는 서리가 더 중요하니까.”
서리가 과거의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 무렵의 ‘녹스’와 가까운 건 서리다. 지호 외의 모든 것을 부수려 드는 녹스가 아니라.
확연한 거부에도 녹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즐겁다는 듯이 활짝 웃는다.
“응. 나의 지호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괜찮아. 그런 네가 답답하지만 좋은 거니까…….”
다정한 말과 달리 기세는 살벌했다.
천천히 녹스가 자세를 낮췄다. 옆으로 뻗은 손에 새하얀 검이 쥐여졌다. 양날로 된 검은 손잡이가 없지만 검을 쥔 녹스에게는 아무런 상처도 입히지 않았다.
“괜찮아. 네 발로 직접 오지 않아도… 그래. 내가 그냥 빼앗아 오면 그만이지.”
낮게 중얼거린 녹스의 몸이 순간 사라졌다.
쾅!
지호는 눈으로도 쫓을 수 없었지만, 뒤에 서 있던 이원이 녹스의 공격을 막았다. 반구형의 결계가 녹스의 검을 막자 새하얀 불꽃이 튀었다.
녹스의 눈이 새파랗게 번뜩인다. 그와 동시에 녹스의 주변으로 가닥가닥 뻗어 서로 뒤엉킨 실 같은 것이 모습을 드러낸다. 녹스가 씩 웃자 그것들의 끄트머리가 녹스의 몸에 닿는다.
지호의 얼굴이 설핏 굳었다. 저건 분명 시스템에서 뻗어 온 힘. 저 작은 실들은 시스템의 힘을 연결하는 단말이다.
그리고 억지로 시스템의 힘을 헝클어트린 대가는.
“아악!”
그 관리자인 지호에게 왔다.
순간 덮쳐드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비명이 터졌다. 눈앞에 시스템창이 짧게 깜박인 것 같지만 확실하지 않았다.
머릿속에 직접 송곳 따위를 쑤셔 넣고 헤집는 듯한 고통. 지호는 애써 똑바로 서려고 했지만, 의지와는 다르게 무릎이 꺾였다.
“지호야!”
순간 녹스의 공격을 막아 내던 이원에게 틈이 생겼다. 그 어떤 일에도 동요하지 않는 이원이지만 유일한 예외이자 약점이 바로 지호였으니까.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녹스는 검을 수직으로 세웠다.
카가가가강!
견고했던 이원의 결계가 유리 조각처럼 깨져 나간다. 갑자기 깨진 마력은 이원에게 돌아오거나 흩어지는 대신, 진짜 유리처럼 조각나 떨어졌다. 이원은 쏟아지는 마력을 몸으로 막았다. 이원의 피부 위로 자잘한 생채기가 생겼다.
[별의 축언!]
“나 신경 쓰지 마!”
이원이 버럭 소리치며 화를 냈다. 지호를 떠민 이원이 지호의 주변에 반투명한 결계를 쳤다. 밖에서도 안에서도 움직일 수 없는 스킬이었다.
뭐라 하기도 전에 녹스가 다시금 시스템의 단말을 자신에게 연결했다. 지호는 이를 악물었다.
조금 전에 뜬 메시지가 뭔지 확인은 못 했지만,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알 것 같다.
멸망의 대적자.
시스템의 관리자이기도 한 그의 말일 것이다. 녹스가 할 수 있다면, 지호 역시 할 수 있다고. 오히려 더 능숙하게 할 수 있을 거라는 말이리라.
단말이 마력을 전달하기 전 간신히 멈췄다. 녹스가 피식 웃으며 지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녹스의 몸은 상대를 보지도 않고 자연스레 움직였다. 이원이 집어 던진 빛의 창을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해 내고, 다시 한번 자신의 검을 휘두르면서.
그 기이한 움직임을 가만히 보던 이원이 혀를 찼다.
“테네브군.”
이원이 중얼거리며 인벤토리에서 검 한 자루를 꺼냈다.
확실히 조금 전, 녹스의 시스템창에는 테네브와 계약했다는 문장이 똑똑히 쓰여 있었다. 눈으로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이전에 싸워 본 상대니 알 수밖에. 한때 이플리스를 오랫동안 수호했던 존재이니만큼 테네브는 강력했다.
게다가 평범한 수호신과는 달리, 녹스는 테네브의 힘을 제약 없이 쓰고 있다. 지금까지 녹스가 시스템의 규격을 몇 번이나 벗어난 만큼, 평범한 계약 관계는 아닐 것이다.
녹스가 검을 들고 이원에게 달려들었다. 곧장 목을 노린 검을 결계로 막아 내며 이원은 녹스의 배를 찔렀다. 그러나 정통으로 들어간 공격에도 녹스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오히려 아무렇지 않게 손으로 검을 뽑아내며 씩 웃었다.
“여기서 물러나면 곱게 죽여 줄게.”
“웃기지도 않는군. 지금까지 내 목을 노린 게 몇 명이었는데, 고작 네가?”
또 한 번의 충돌 끝에 이원이 물러났다. 후우, 숨을 고르며 이원이 지호에게 속삭였다.
“지호야. 저거 시체 썩는 냄새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