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 녹스(2) (261/283)
  • 40. 녹스(2)

    지호의 말에 허수혁, 아니 녹스가 미소 지었다. 오랫동안 헤매던 여행자가 오아시스를 만난 듯이 반갑게. 이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환희에 떨면서.

    “드디어 알아줬구나, 나를.”

    “녹스…….”

    이전에 지호는 녹스와 만나게 될 때를 몇 번이고 상상했었다. 녹스는 지금까지 벌어진 악의 근원 중 하나이며, 모든 계획을 방해해 온 놈이었기에.

    지호는 녹스를 만나면 그저 분노할 줄 알았다. 원망을 토해 내거나, 또는 이성을 잃고 화를 낼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하지만 지금 지호는 자신이 생각했던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실제로 녹스를 마주한 지금, 오히려 지호는 그를 잊은 데 대한 죄책감마저 느꼈다. 분명 무척 소중한 가족이나 다름없는. 어쩌면 그 이상의 존재였는데.

    “그립네, 그 이름. 예전에 자주 불렀었는데.”

    “내가… 지어 준 거지.”

    “맞아. 기억해?”

    “……지어 줬다는 것 정도는.”

    녹스와의 기억이 모두 떠올랐어도 나눴던 이야기 전부가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신이 나서 녹스의 이름을 지어 준 건 확실히 기억났다.

    녹스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어렸다.

    “그거 네가 보던 만화의 악당 이름이었어.”

    “……악당?”

    “그래, 나름대로 사연 있는 녀석인데 결국 죽었거든. 그래서 네가 불쌍하다고 했잖아.”

    왜 하필 악당의 이름인가 했더니. 자세히 기억은 안 나지만 자신이라면 충분히 그럴 만했다. 녹스는 여전히 그리운 눈으로 지호를 응시했다.

    “그때 네가 그랬지. 세상에 처음부터 나쁜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고. 다들 도와주면 바뀔 수 있을 거라고.”

    녹스의 목소리가 차츰 낮아졌다. 어딘가 불온한 느낌이 가득한 목소리에 지호의 몸이 움찔했다.

    “현실은 어땠어? 너도 이제 마냥 어리지 않잖아. 이제 충분히 이 세상이 얼마나 더러운지 느꼈잖아. 아직도 그렇게 생각해?”

    그저 다정하게만 느껴지던 녹스의 눈빛에 비릿한 증오가 섞였다. 피비린내를 풍기며 녹스가 나지막히 물었다.

    “그 생각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어?”

    “물론.”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에 녹스가 잠시 움찔했다. 그러나 여전히 여유를 잃지 않은 채 속삭였다.

    “온갖 사람들에게 모두 욕을 먹었잖아.”

    “모두가 욕한 건 아니야. 게다가 사람들이 다 각성자에 관해 잘 아는 건 아니니까.”

    “헌터들도 널 욕했잖아. 마찬가지야.”

    “그건…….”

    받아치려던 지호의 머릿속에 갑자기 무언가가 떠올랐다.

    헌터 스페이스. 국내 최대의 헌터 관련 사이트. 한국어를 쓰는 사이트지만 해외에도 충분히 영향력이 있는 곳. 그리고 지호를 가장 열렬히 비난한 곳이기도 했다.

    이원은 헌터 스페이스의 운영자를 계속 추적해 왔다. 그러나 그 이원조차도 찾을 수 없었다.

    “녹스, 설마. 헌터 스페이스는…….”

    “맞아, 내가 만들었어.”

    녹스는 부정하지 않았다. 우습게도 그 순간 지호가 느낀 감정은 섭섭함과 배신감이었다.

    아마 녹스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었겠지.

    “오해하지는 마, 지호야. 처음부터 너를 욕할 생각으로 만든 건 아니니까. 나는 단지 자유롭게 풀어 뒀을 뿐이야. 하지만… 정말이지, 인간이란 건 악의로 가득 찬 생물이더라.”

    지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헌터 스페이스에서 오가던 말들이 떠올랐기에. 인터넷에서 가볍게 꺼내던 수많은 말이 지호를 짓눌렀다.

    이제 괜찮아졌다고 여기는데도 여전히 당시의 상흔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지호는 거기에 일조한 상대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어쨌든 네가 만들었다는 거잖아. 내가 힘들어 하는데 계속해서…….”

    “그야 바라는 게 있었으니까.”

    “네가 바라는 게 뭔데?”

    “관리자의 자리를 버리자, 지호야.”

    생각지도 못한 말에 지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관리자로서의 자신을 필요로 한다 여겼지, 아예 그 자리를 버리라고 할 줄은 상상도 못했으므로.

    한 가지 확실한 건, 녹스는 지호가 알던 시스템의 수호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본능처럼 새겨진 사명. 그게 원래대로 작동하고 있다면 결코 저런 말을 할 수 없었을 테니까.

    그런 건 자신의 의지만으로 가능한 게 아니다. 애초에 그게 버린다고 해서 버려지는 종류의 자리였던가? 무언가 다른 수를 써서 제 의무에서 해방된 게 분명했다.

    “나야말로 네게 바라는 게 있어, 녹스.”

    “…….”

    “원래대로 돌아와. 예전처럼 내 곁에 함께 있자.”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상대라고 여겼으나… 지호는 기꺼이 녹스에게 손을 뻗었다. 분명 누군가가 알면 화를 내겠지. 하지만 지호는 진심으로 녹스가 제 손을 잡길 바랐다.

    그러나 지호의 예상대로 녹스는 손을 잡지 않았다. 대신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이 세상에는 죄다 쓰레기들뿐이야. 너는 네 목숨을 갈아 넣어서 이 세상을 지키고 있는데 그것들은…….”

    “녹스.”

    지호는 흥분한 녹스의 말을 잘랐다. 잔뜩 열을 내는 상대와 달리 지호는 충분히 머리를 식혔다.

    과거의 분노도 은원도 접어둔 채, 지호는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분명하게 결론을 내렸다.

    “이 세상만을 기준으로 한다면, 세상에 나쁜 헌터는 없어. 누구든 이 세상을 침략하는 이계로부터 이곳을 지켰는걸.”

    “……너를 공격한 자들조차?”

    “물론 죄가 있으면 죗값을 받아야겠지. 하지만 그들이 원망스럽다고 해서 내가 이 세상을 버릴 이유는 되지 못해.”

    게다가 사람은 변한다. 이전과는 다른 사람처럼 바뀐 임승주처럼, 누구든 기회가 주어진다면 변할 수 있을 것이다. 기회를 잡았느냐 잡지 못했느냐의 차이일 뿐.

    누군가는 지호가 지나친 이상론자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지호 역시 제 생각이 희망에 가깝다는 건 잘 알았다.

    하지만 적어도 그런 희망을 가진 사람이 하나쯤 있어도 나쁘진 않겠지. 앞으로도 이어질 세상에 가장 필요한 건 희망이니까.

    “누군가가 밉다는 이유로 이 세상이 멸망한다는 건 더더욱 말도 안 되고.”

    녹스는 입을 다물었다. 불온한 침묵이었다. 지호는 그다지 좋은 생각을 하지 않을 것 같은 녹스를 가만히 응시했다.

    “녹스.”

    “응.”

    “그러는 나야말로 묻고 싶어.”

    “……뭘?”

    “솔직히 말해 줘. 네가 정말… 나를 소중히 여기는 게 맞다면, 속이거나 숨기지 말고.”

    녹스가 눈을 깜박이고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 지호는 가볍게 숨을 들이켰다.

    모든 존재는 바뀔 수 있다. 그건 즉, 안 좋은 쪽으로도 바뀔 수 있다는 뜻이다.

    “녹스.”

    “응.”

    “네가 모든 걸 시작한 게 정말로 이 세상에 대한 원망 때문이야?”

    녹스는 곧장 답하지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은 한참이나 변화가 없었다.

    이어지던 침묵을 깬 것은 말이 아닌 녹스의 발걸음이었다.

    지호에게로 가까이 한 걸음, 또 한 걸음.

    지호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녹스 역시 순순히 자리에 멈춰섰다. 그리고 가볍게 양팔을 벌려 지호를 향했다.

    “맞아, 다른 건 사실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해. 내가 정말 원하는 건…….”

    녹스의 얼굴에 희미한 홍조가 떠올랐다. 그는 열렬한 눈으로 지호를 응시했다. 마치… 이전의 ‘허수혁’을 마주했을 때와 비슷한 눈빛이었다.

    “지호야. 나랑 하나가 되자.”

    “……뭐?”

    “네가 그리워……. 너도 그렇지 않아? 우리는 원래 함께 있었잖아.”

    물론 그립다. 그립지만…….

    “이 몸을 버릴게. 너와 다시 하나가 되고 싶어.”

    지금의 녹스가 하는 말에 긍정할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게다가 지금 녹스가 말하는 ‘하나’라는 게… 이전과 같은 형태인 것 같진 않았다.

    지호에게서 선명한 거절의 의사를 읽은 녹스의 얼굴이 구겨졌다. 지금까지의 부드러운 태도는 어디에도 없었다.

    “주이원은 되면서 왜 나는 안 되는 건데?”

    “녹스, 그건…….”

    “안 된다고 말해도 소용없어. 나는 너와 하나가 될 생각이니까.”

    지호는 입술을 깨물었다. 역시 이런 곳까지 끌고 와서 순순히 넘어갈 리가 없었다. 지호는 제 피가 묻은 검을 꾹 쥐었다.

    과거는 그립지만 지호가 살아가는 건 현재였다. 소중한 모든 것을 놓고 녹스의 손을 잡을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물론 혼자서 녹스에게 대항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대로 저 말을 따를 수는 없으니까…….

    그때.

    “남의 것에 손대지 마.”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제삼자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리고 지호의 뒤에서 짙은 바다의 냄새가 풍겼다.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기도 전에 그가 지호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 자리에 아무렇지 않게 나타난 건 주이원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