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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반격(6) (259/283)
  • 39. 반격(6)

    허소리의 일격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주먹을 불끈 쥔 허소리는 맷을 향해 곧장 스킬을 연계했다.

    [짙푸른 일격!]

    [거해궁의 파편.]

    그러나 허소리가 만들어 낸 물길은 허무하게도 맷의 [거해궁의 파편]의 제어 하에 움직였다. 허소리는 다시 [백곡왕의 긍지]를 사용해 해일처럼 덮쳐드는 물을 갈랐다.

    “귀찮게 구네!”

    [별의 축언]의 버프 효과가 적용되는 한 힘은 이쪽이 압도적인 우세.

    그러나 맷은 불, 물, 바람, 땅 네 가지를 모두 조종하며 이쪽의 힘까지 제어한다.

    “허소리.”

    지금까지 견제하며 허소리의 공격을 보조하는 선에 그치던 임승주가 앞으로 나섰다. 임승주의 얼굴에는 그의 검만큼이나 날카로운 예기가 서려 있다.

    “여기는 내게 맡겨.”

    “멋있는 척 하기는.”

    허소리가 장난스레 인상을 찌푸렸다. 조금 멋쩍어하는 승주에게 씩 웃은 소리는 순순히 물러났다.

    “농담이에요. 그럼 부탁해요!”

    두 사람을 잠시 지켜보던 맷이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둘이 같이 덤벼도 되는데?”

    “그쪽이야말로 자만하지 마라.”

    여유롭게 이죽거리는 맷을 향해 승주가 검을 들었다. 당장 달려드는 대신 임승주는 검을 들고 정신을 집중했다.

    임승주가 계약한 수호신이 내려준 스킬. 스스로 습득한 기술은 아니다. 그러나 수호신의 조언을 받고 직접 몸으로 체득하는 과정에서 승주는 나름의 깨달음을 얻었다.

    지나치게 화려한 움직임은 필요 없다. 나무처럼 굳게 뿌리내려 단단히 중심을 잡은 하체. 당연한 기초에서부터 시작된 검술은 곧, 튼튼하게 자란 나무처럼 가지를 뻗고 화려한 꽃을 피워 낼 테니까.

    임승주의 검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런데도 선명하게 그려내는 궤도 덕에 검의 움직임을 눈으로 쫓는 건 쉬웠다.

    그러나 다음 순간, 눈 앞에서 검이 사라진다. 변초와 함께 아름다운 검의 궤적이 그려내는 것은 한 송이의 꽃.

    [이십사수매화검법.]

    임승주가 피워낸 꽃은 한 송이의 소담한 매화였다. 그 아름다운 환상은 점점 더 번져나간다. 한 송이의 꽃이 수십, 수백 송이로 번져간다.

    [매화분분!]

    맷의 위로 흐드러지게 핀 매화가 낙화했다. 얼핏 아름다운 꽃으로만 보이던 매화 속에 숨겨진 검기 역시 맷을 향해 날아든다. 아름다운 환상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 든 건 결국 살초.

    “큭!”

    저 꽃 아래 날카로운 예기가 숨어있으리라 예상치 못한 맷이 낭패한 얼굴로 몸을 틀었다. 하지만 비처럼 쏟아지는 꽃잎을 피할 방법은 없었다.

    “아무리 봐도 장르가 다르지 않아요?”

    “장르요?”

    중얼거리는 소리에게 지호가 반문하자, 소리는 퍽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외국인한테 무협을 주니까 대응을 못 하지…….”

    소리가 쯧쯧 혀를 찼다. 아마 지호 역시도 저게 뭔지 몰라서 대응 못 했을 것 같은데……. 어리둥절한 지호에게 소리가 속삭였다.

    “길드장님, 웹소설 안 보죠?”

    “……안 보는데요.”

    “그럼 제가 다음에 하나 추천해 드릴게요. 길드장님은 세나헌 같은 거 좋아할 것 같아요.”

    “…….”

    뭐에 줄임말인지 전혀 모르겠지만 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일이 마무리되면 책이나 보면서 느긋하게 쉴 생각이었으니까.

    ……이런 식의 농담 따먹기를 해도 될 만큼, 임승주는 맷을 여유롭게 몰아쳤다.

    “흠.”

    상황을 보던 허소리가 주먹을 쥐었다. 궁지에 몰린 맷의 눈이 수상쩍게 번뜩였기 때문이었다.

    빛처럼 빠르게 튀어나간 소리가 바닥을 퍽 내리쳤다. 아스팔트 바닥이 소리의 주먹에 맞고 찰랑이는 물처럼 솟아올랐다. 잠시 퇴로가 막힌 사이, 임승주의 검이 맷의 옆구리에 틀어박혔다. 임승주는 혀를 차며 검을 거뒀다.

    “괜히 반항해서 일을 귀찮게 만드는군.”

    결국 맷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패배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 맷은 낮게 흐느끼듯 웃기만 했다. 웃는 맷의 눈이 광기로 번들거렸다.

    “너희가 이제 뭘 하든 소용없어. 어차피…….”

    맷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임승주가 맷의 뒷목을 손날로 내리쳤다. 지호와 소리가 황당하다는 눈으로 쳐다보자 그는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적였다.

    “어차피 쓸데없는 말이나 할 것 같아서 기절시켰습니다.”

    “음… 네.”

    맞는 말이긴 하다. 어차피 쓸데없는 어그로나 끌겠지. 필요한 정보가 있으면 다른 방법으로 캐내야지, 여기서 순순히 말하는 정보면 어차피 블러핑에 불과할 것이다.

    “길드장님. 그럼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드럼통에 넣어서 콘크리트 붓고 바다에 던질까요?”

    소리가 맷을 바라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농담이에요.”

    “……누가 봐도 진심이었는데.”

    “에이, 승주 씨도 참. 제가 왜 그런 무서운 짓을 하겠어요? 물론 이놈 때문에 살인 누명을 쓴 걸 생각하면 오체분시를 해도 모자라지만…….”

    몸을 부르르 떠는 임승주를 보며 소리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헌터 협회에 보내는 수밖에 없죠. 진범을 잡아야 제 누명이 벗겨질 테니까. 뭐, 보내기 전에 스킬 못 쓰도록 저희 쪽에서 처치는 단단히 해 두는 게 좋겠네요.”

    “그렇게 하죠.”

    이견을 달 필요 없는 깔끔한 결론이었다. 임승주가 인벤토리에서 아이템을 꺼내 맷을 결박했다.

    “어째 너무 쉽게 잡은 것 같은데요…….”

    지호는 근심 가득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지금까지의 일을 생각해 보면 일이 이리 쉽게 풀릴 리가 없는데. 혹시 이것도 게네시스나 녹스의 계략이 아닐까?

    걱정 많은 지호의 등을 소리가 짝, 소리 나게 내리쳤다.

    “에이, 뭐가 쉬워요! 오히려 엄청 아슬아슬하게 막은 거죠. 길드장님이 못 찾았으면 강남 한복판에서 또 난리 났을 거예요.”

    “……그런가요.”

    “훌륭하셨습니다.”

    빈말은 못 하는 임승주까지 칭찬했다. 요즘은 빈말을 하긴 하더라만 티가 나던데. 자연스러운 감탄을 듣자 지호도 마음이 조금 놓였다.

    그래, 시스템을 파악하고 있다면 어떻게든 앞으로도 해쳐나갈 수 있다.

    ‘멸망의 대적자’가 시스템은 만능이 아니라고 경고합니다.

    ‘아니, 왜 초를 치고 그래요?’

    ‘멸망의 대적자’가 당신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연달은 메시지에 지호의 말문이 막혔다. 예전이라면 뭐라 하든 타박했겠지만… 전생에 아버지였다는 걸 알고 나니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딱히 아버지란 느낌은 전혀 없는데도 지호 안의 유교가 입을 단속시켰다.

    ‘자만할 생각은 없어요. 이전보다 해 볼 만하다는 거지.’

    ‘멸망의 대적자’가 당신을 믿습니다.

    ‘믿긴 뭘…….’

    지금까지 실컷 타박해 놓고. 투덜거렸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절대적인 신뢰가 뒤를 받쳐 주는 안정감.

    지호는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으며 맷을 응시했다.

    맷은 중요한 인물이다. 오고 싶어서 오진 않았을 텐데, 맷 정도의 패를 과감하게 써 버린다는 것은… 어쩌면 상대의 계획이 이미 마무리 단계라는 뜻일지도 모른다.

    그 계획이 뭔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짐작 가는 건 있어…….’

    부디 예상이 틀리길 바라고 있지만.

    “그럼 갑시다.”

    임승주가 기절한 맷을 어깨에 들쳐 멨다. 차로 향하려던 그때 누군가가 일행을 가로막았다.

    지금쯤 헌터 협회 근처를 살피고 있어야 할 강태주였다.

    “허소리 사라졌대.”

    대뜸 폭탄 선언을 한 강태주는 힐끗 소리를 돌아보았다.

    “그러니까 얘 말고 그 새끼.”

    지금 헌터 협회에서 허소리를 대신하는 사람은 양호진. 즉, 양호진이 실종됐다는 뜻이다.

    원래 양호진은 몸을 빼야 할 일이 생기면 원래 모습을 드러내고 사라진다고 했었다. 그런데 실종자가 ‘허소리’로 알려졌다는 건, 양호진이 수를 쓸 만큼의 시간도 없었다는 뜻.

    강태주가 지긋지긋하단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설마 그 새끼 또 잡혀간 거냐? 아니, 지가 공주님이야 뭐야.”

    “……잡혀간 건 아닐 거예요.”

    헌터 협회 근처 시스템의 흔적을 조사한 지호가 신중하게 고개를 저었다. 불과 몇 분 전, 양호진이 헌터 협회 안쪽에서 인벤토리를 연 흔적이 있다. 잡혔다면 한가롭게 인벤토리를 열 여유는 없을 터.

    게다가 미리 대비한 만큼 그리 쉽게 잡혀갔을 리는 없다. 협회에서는 게네시스도 손을 쓰기 어려우니까 대대적인 작전을 펼칠 수는 없었을 테고.

    물론 잡히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도 없다. 인벤토리를 열고 얼마 후에 잡혔을지도 모르니까.

    “……아직 아닐 거예요.”

    “뭐냐, 그 불안한 말은.”

    “그냥… 일단 호진 씨를 믿어 볼…….”

    그때.

    쿵.

    거대한 땅 울음이 울렸다. 땅 울음은 아주 가까이서 들리는 듯도 했고, 멀리서 들리는 듯도 했다. 믿기지 않을 만큼 거대한 소리였다. 요란하게 천둥이라도 친 것처럼.

    그와 동시에 땅이 흔들렸다. 지진이 자주 발생하지 않는 한국에서 이례적일 만큼 강렬한 지진이었다. 일행은 휘청거렸으나 금세 중심을 잡았다. 하지만… 다른 평범한 일반인은 여기서 태연하게 버틸 수 없을 것이다.

    지호는 재빨리 길드 채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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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지런하네, 너.”

    길드 채팅을 확인한 강태주가 혀를 내둘렀다. 대단하다는 듯 말했지만 지호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분명 인명 피해가 있을 텐데 고작 명령만 하고 사라져야 한다는 게.

    하지만 지금은 일단 눈을 돌리는 수밖에 없었다.

    “…….”

    뭐라고 말하려던 지호의 말을 단말기의 진동이 끊었다. 단말기를 확인한 지호의 얼굴이 언뜻 굳었다.

    “왜 그래?”

    지호는 한숨을 쉬었다. 잔뜩 피곤한 얼굴로 마른세수를 한 지호는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피로는 가시고 굳은 의지가 지호의 얼굴에 깃들어 있었다.

    “일단, 헌터 협회로 가면서 말씀드릴게요.”

    이럴 때라도. 아니, 이런 때니까 더더욱. 지금 당장은 협회로 가서 일을 처리해야만 했다.

    그곳에 분명, 녹스가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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