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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반격(3) (256/283)
  • 39. 반격(3)

    맷은 자신이 가진 스킬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자신의 스킬 세 가지를 읽고 또 읽는 건 최근 맷의 하루 일과가 되었다.

    이제는 굳이 눈으로 읽지 않아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모두 외우고 있지만… 그런데도 맷은 읽고 또 읽었다. 중요한 의식을 치르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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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양궁의 파편(Lv.7)

    등급 A

    설명 4월 17일에 태어난 당신의 아버지는 양자리의 상징이자 화성의 힘과 연관된 자이다. 죽은 아버지의 의지가 당신에게 힘을 내리고 있다. 불을 조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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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해궁의 파편(Lv.5)

    등급 A

    설명 7월 21에 태어난 당신의 어머니는 게자리의 상징이자 달의 힘과 연관된 자이다. 죽은 어머니의 의지가 당신에게 힘을 내리고 있다. 물을 조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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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칭궁의 파편(Lv.8)

    등급 B

    설명 11월 7에 태어난 당신의 동생은 천칭자리의 상징이자 금성과 연관된 자이다. 죽은 동생의 의지가 당신에게 힘을 내리고 있다. 바람을 조종할 수 있다.

    저 문장만이 현실에 남은 가족들의 흔적이었으니.

    맷은 피식 웃었다. 시스템창에 적힌 문장을 현실로 봐도 되는 것인가. 시스템 또한 세계의 일부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실존하는 무언가로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계속 읽는 건… 스킬의 설명 하나하나가 가족들의 애정을 그대로 비추고 있기 때문이다.

    가족을 잊은 적은 한 번도 없다. 가족이 모두 죽는 동안 혼자 살아남아 죄스러웠고, 각성한 후로는 이 힘을 진작 발현하지 못한 자신을 책망했다. 어떻게든 살려야 했다는 후회가 매 순간 그를 갉아먹었다.

    눈을 감으면 악몽을 꾼다. 눈을 뜬 순간 찾아드는 현실 역시 지옥이다. 혼자 살아남은 자의 삶은 혹독했다.

    그러니 가족들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다. 악마가 되라고 하면 기꺼이 악마가 되리라.

    맷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천희림.”

    “맷이야.”

    맷은 눈을 뜨며 상대를 돌아보았다. 아무런 굴곡 없는 매끈한 가면이 남자의 얼굴을 덮어 가렸다. 남자는 맷을 응시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계약한 건 하늘 길드의 천희림이지. 네 역할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그깟 이름, 그냥 부르면 안 되나.”

    “이름은 중요해.”

    고집스러운 주장에 결국 맷이 두 손을 들었다.

    “그러시겠지, 녹스.”

    이름이 여럿 있는 놈다운 말이었다.

    물론 맷은 ‘녹스’이외에 다른 면모는 궁금하지 않았다. 저 남자의 본질에 가장 가까운 녹스는 그냥 차분한 미친놈이었다. 맷조차 인상 찌푸리게 되는 일을 아무렇지 않게 해 버리는 꼴을 보자면, 녹스를 깊이 알고 싶단 생각 따위 들 수가 없었다.

    어쨌든, 맷은 놈이 천희림이라고 부르는 게 싫었다.

    맷은 천공 그룹의 제안을 받고 한국에 왔다. 새로 받은 이름. 그럴듯한 새 직함. 자신을 아껴 주는 새로운 가족이 생겼다고 순진하게 믿었던 맷이 제 착각을 깨닫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바로 그때 녹스가 그에게 접촉했다. 맷은 녹스가 했던 말을 여전히 잊을 수 없었다.

    ‘백양궁의 파편은 네 아버지, 거해궁의 파편은 네 어머니, 천칭궁의 파편은 네 여동생. 죽은 가족의 힘을 쓰면서 새 가족과 영화를 누리려 하니 안 좋은 결과가 나오지.’

    맷은 곧장 녹스의 멱살을 잡았다. 두 가지의 이유로 맷은 여차하면 상대를 죽여서라도 입을 닫을 생각이었다.

    당시의 맷은 시스템창을 읽을 수 없었지만, 그 힘이 죽은 가족에게서 이어진다는 것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어서 입 다문 스킬의 상세한 내용을 아는 상대에 대한 의심이 하나.

    그리고 아픈 부분을 찔려 발끈했다는 게 둘.

    결과적으로 맷의 공격은 아무 소용이 없었고, 오히려 비밀리에 계약을 맺어 그를 돕게 되었지만.

    맷은 여전히 상대가 꺼림칙했다. 하루라도 빨리 상대에게서 벗어나고 싶을 만큼. 천희림이라는 굴레 역시 빨리 벗어 던지고 싶었다.

    “맷이 별명인 셈 쳐. 그 이름 지긋지긋하니까 그만 부르고.”

    “그래, 맷.”

    그제야 녹스는 순순히 맷의 말을 따랐다. 녹스는 맷이 저를 꺼린다는 걸 다 알면서도 인위적인 미소를 지었다. 한때는 저런 태도에 배알이 꼴리던 때도 있었지만… 녹스와 함께 한 시간이 길어진 지금은 그냥 넘기는 게 이롭다는 것을 잘 알았다.

    녹스는 감정이 희박하다. 그가 감정을 드러내는 건 오직 신지호를 향할 때다. 날뛰는 꼴을 보느니 기계적인 미소를 보는 게 훨씬 낫다.

    “그래서 무슨 용건이야?”

    “이지영이 잡혔으니 그녀를 회수하기 위해 노네임을 압박해 줬으면 좋겠는데.”

    “그 여자가 잡혔다고?”

    믿기지 않아 맷이 되물었고 녹스가 끄덕였다. 기껏 찾아와 이런 농담이나 할 녀석이 아니니 정말 잡히긴 잡혔다는 건데.

    맷이 본 이지영은 바늘 하나 들어갈 것 같지 않은 철두철미한 각성자였다.

    그러고 보면 이지영도 녹스와 닮은 부분이 있다. 녹스가 신지호의 이름이 나오면 반응하듯, 이지영 또한 양호진을 상대로만 인간처럼 굴었으니까.

    맷은 이지영이 꺼림칙했으나 녹스의 명령을 어길 순 없었다. 다만 군말 없이 따르던 다른 때와 달리 이번에는 영 자신이 없었다.

    “압박이라니. 하늘 길드장으로서 압박하라는 거야?”

    “그래.”

    “나도 용의자로 의심받는 건 알고 있겠지.”

    지금 당장은 허소리에게 이목이 쏠려 있지만 어찌 될지 몰라서 몸을 피한 상태다. 그 상황에서 노네임을 압박하라니.

    녹스는 대답 대신 맷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결국 맷은 한숨을 쉬었다.

    “해 보기야 하겠다만 쉽지 않을걸.”

    “잠깐 시선을 돌리는 수준이면 충분해. 다른 수도 써 뒀으니까.”

    “내 위험부담은 생각하지 않는군.”

    “안 할 거야?”

    평온하게 묻는 얼굴이 얄밉다. 하지만 소소한 감정은 대의 앞에서 사라진다. 녹스가 나타나 그에게 제안을 한 그날부터, 어차피 맷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나는 네가 요구하는 대로 했어. 약속 지켜.”

    “물론, 신지호만 손에 넣고 나면 얼마든지… 네게 가족을 돌려줄게.”

    “…….”

    녹스는 맷에게 가족을 살려 주겠다고 말했다.

    온전한 부활은 아니다. 지금까지 하늘 길드가 개발해온 정교한 인조인간에 가족들의 혼을 넣어 되살리는 편법. 하지만 그들을 볼 수 있다면 사소한 방법이야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다.

    “이미 재료는 준비됐잖아.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녹스가 악마의 꼬드김처럼 속삭였다. 다 알면서도 맷은 그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 * *

    허소리로 위장한 호진은 얌전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사방에 달린 CCTV가 그를 살피는 중이지만 별 위기감은 없었다. 그동안 넘나든 사선이 몇 개인데 이 정도에 굴할 리가. 최근에 바빴던 탓인지 휴가라도 온 것처럼 몸이 늘어진다.

    사실, 이렇게 가만히 있으면 머릿속이 복잡해져서 차라리 움직이고 싶었지만.

    ‘스승님!’

    호진이 기억하는 이지영의 목소리가 자꾸만 떠오른다.

    이지영은 그에게 마냥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잔혹한 기질을 몰랐던 건 아니지만 그 정도는 올바르게 이끌 수 있으리라 여겼다.

    이제 와서 그 아이를 사랑으로 보듬고 싶은 건 아니다. 이지영은 돌이킬 수 있는 선을 넘었다. 그러니 최소한 호진은 이지영이 하는 짓을 막고 싶었다. 그게 아이를 잘못 키운 호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

    자꾸만 떠오르는 이 목소리 때문에 무리한 건 확실히 실책이었지만. 덕분에 호진뿐만 아니라 강태주도 죽을 뻔했다.

    강태주는 솔직히 쓰레기지만 의외로 믿을 만한 구석은 있었다. 자신이 한 계약은 어기지 않고, 퍽 친해진 상대에게는 손해 보지 않는 선에서 기꺼이 손을 빌려주었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호진이 피식 웃었다.

    과거 은인의 후손인 강태주. 성격은 완전히 다른 듯한데 가끔 닮은 면이 튀어나온다. 어쩌면 자신이 죽은 이를 보고 싶기에, 그와 닮은 면이 보이는 거겠지.

    “…….”

    잡생각을 하던 호진이 천천히 눈을 떴다. 눈앞에 막 떠올리려던 상대가 서 있었다. 호진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소리 씨.”

    “여긴 무슨 일이야?”

    “소리 씨, 빨리 탈출해야 해요. 이지영이 안 좋은 계획을 세웠어요. 위험해요.”

    “그래?”

    기가 찼다. 여기 있는 게 허소리로 변한 양호진인지도 모르고. 양호진은 얼굴을 일그러트린 채 눈앞의 가짜를 콱 움켜쥐었다.

    “소리 씨?”

    “너 뭐야. 감히 누굴 사칭해?”

    “……어떻게 알았지? 내 신지호 연기는 완벽할 텐데.”

    상대가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천진하게 웃었다. 그리고 호진의 손을 쳐 내는 대신 도리어 꽉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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