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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반격(1) (254/283)
  • 39. 반격(1)

    방으로 뛰쳐 들어온 사람은 신재운의 전 고모부인 유경우였다.

    조금 전 1층을 내려다봤을 때만 해도, ‘저 사람은 고모랑 옛날에 이혼했으면서 왜 자연스럽게 여기 있지?’라는 의문을 품었었는데.

    재운은 자신의 어리석은 과거를 탓하며 울먹이는 얼굴로 활짝 웃었다.

    “고모부!”

    고모부였던 건 몇 년 전이고, 이제 법적으로 아무 관계도 아니다. 신지혜를 제외한 다른 가족들이야 그를 보아 온 시간이 있어 살갑게 굴었지만, 재운은 특히나 그에게 데면데면하게 굴었다. 그게 못내 섭섭하고 아쉬웠는데… 반가워하는 목소리가 몹시 달았다.

    물론 감격에 젖어 있을 틈은 없었다. 단단히 각오를 다진 채 경우가 이지영을 쏘아보았다.

    “말로 할 때 순순히 재운이를 놔줘.”

    “협박인가요, 지금?”

    이지영이 무척 같잖다는 듯이 유경우를 비웃었다.

    평범한 연금술사라면 이 거리에서 A급 공격계 헌터를 상대로 필패하겠지만… 이지영은 평범한 연금술사가 아니다.

    이지영은 인벤토리에서 자신이 특수 제조한 작은 환약을 꺼냈다. 환약은 이지영의 마력에 반응해 곧장 녹아내렸다. 녹아내린 약은 즉효성 독으로 변해 방 안으로 퍼졌다.

    “고모부!”

    재운이 당황하며 버둥거렸지만, 아무리 보조계라 한들 각성자인 이지영의 힘을 이길 순 없었다.

    이 독은 마력에 반응한다. 이지영은 자신의 독에 내성이 있었고, 비각성자인 재운에게는 거의 듣지 않는다.

    이지영은 차디찬 눈으로 발버둥 치는 신재운을 응시했다.

    아무리 일반인이라지만 귀찮은 일 없도록 완전히 제압해 두는 게 낫겠지.

    마음먹은 그녀가 재운에게 손을 쓰려던 순간.

    바닥으로 쓰러지던 유경우가 기어이 앞으로 쏘아져 나왔다.

    완전히 당한 줄 알았던 상대의 습격. 이지영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유경우는 재운을 낚아채 이지영에게서 거리를 벌렸다.

    “우리 조카는 못 데리고 가!”

    “어떻게.”

    당혹스러운 듯 이지영이 중얼거렸다. 유경우는 대답 대신 씩 웃었다. 방 안에 여전히 독이 가득하지만, 몸 안에서 서서히 독이 물러나고 있었다.

    유경우가 지닌 고유의 스킬은 아니다. 그는 평범한 A급 헌터일 뿐이니까. 하지만 그는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길드의 부길드장이기도 했다. 그는 눈에 띄지 않게 수많은 아이템을 착용 중이었고, 덕분에 어지간한 S급 부럽지 않을 능력을 보유했다.

    일명 템빨.

    물론 아이템이 모든 독을 막아 줄 순 없다. 다만 인질로 쓸 재운을 상하게 할 수 없어서 맹독을 쓰지 못한 게 그녀의 패착이었다.

    노련한 실력자답게 이지영은 허둥거리지 않았다. 낭패하던 것도 잠시. 신재운을 낚아채느라 벽을 등지고 선 유경우의 퇴로를 차단하듯 이지영이 문 앞에 섰다. 그리고 창문을 힐끔거리는 유경우를 막는 대신 작게 중얼거렸다.

    “작전 실패. 확보해 주세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누군가가 방 안에 나타났다.

    아무런 기척도 없이 갑자기 나타날 수 있는 사람은 황혜림뿐.

    또한 황혜림이라면, 손쉽게 재운과 이 자리에서 감쪽같이 사라질 수 있었다.

    [그리고 승리하라!]

    그러나 유경우는 황혜림의 등장을 미리 알고 있던 사람처럼 곧장 스킬을 썼다. 불쑥 나타나는 황혜림은 요주의 대상이었기에 당황하지 않았다.

    [그리고 승리하라]는 강한 힘으로 상대를 밀쳐 내거나 짓누르는 스킬. 단순하지만 그만큼 위력적이다. 전투 능력은 B급 각성자에 못 미치는 황혜림은 그대로 밀려났다.

    “흐……!”

    신음하면서도 황혜림이 씩 웃었다. 아무리 전투계가 아니라지만 그녀 또한 S급의 각성자. 무작정 당하고 있을 만큼 무능하진 않다.

    [공간 고정.]

    황혜림의 마력이 유경우와 신재운을 얽맸다. 두 사람의 위치가 제자리에 고정됐다. 퇴로를 막다 못해 완전히 발을 묶었다.

    [쟁취하라.]

    [쟁취하라]는 활용도가 가장 높은 유경우의 염력 계통 스킬이었다. 스킬에 반응해 방 안의 가구와 전자기기들이 그들 주변을 빼곡히 감쌌다. 황혜림이 그들 곁으로 다가올 수 없도록.

    신지혜의 순간 이동 스킬은 본인에 한해서는 제약이 없지만, 다른 사람이 포함되면 조건이 여럿 추가된다. 이런 식으로 감싸면 이동하기 위해 대상과 닿을 수도 없고, 빈공간이 없어서 강제로 포털을 만들 수도 없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황혜림은 가구 위에 손을 얹었다. 묵직한 침대가 그녀의 손짓 한 번에 다른 곳으로 이동된다. 몇 겹의 가구를 이동시키는 데는 수 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

    어차피 독 안에 든 쥐.

    “황혜림!”

    이지영이 비명처럼 외쳤다.

    황혜림이 방심한 건 아니었다. 그저 공격이 지나치게 빨랐을 뿐. 요란한 소음을 내며 창문이 깨졌다.

    혜림의 몸이 바닥을 굴렀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조금 전까지 황혜림이 서 있던 자리에 이지영이 쓰러져 있다.

    어깨에 긴 나뭇가지가 꽂힌 채로, 이지영이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상처가 크지 않은데도 그녀는 꼼짝하지 못한 채 몸을 벌벌 떨었다.

    황혜림의 판단은 빨랐다. 유경우, 그리고 이지영을 공격한 상대. 전투계 두 명을 비전투계열인 그녀가 상대할 수는 없는 노릇. 황혜림은 망설이지 않고 곧장 공간을 넘어 도주했다.

    “빨리도 튀네.”

    깨진 창문 안쪽으로 남자가 느릿하게 훌쩍 뛰어 들어왔다. 강태주였다. 태주의 뒤로 검 두 자루와 채찍 하나, 활 하나가 그를 따라다녔다.

    태주는 쓰러진 이지영을 발로 툭 찼다.

    “설마 같은 수에 계속 당하겠냐? 등신도 아니고.”

    거의 당할 뻔하긴 했지만, 이란 말은 속으로 삼켰다.

    [순간 이동]이 가능한 황혜림은 게임으로 치면 치트키다. 사기적인 능력 앞에서는 온갖 대응이 속수무책이다. 지금처럼 2인 1조로 한 명이 매복한 다음 대응하는 게 이상적이지만… 실력자를 호위가 필요한 대상에게 모두 붙이기엔 인력이 부족했다.

    신지호의 가족들에게도 든든한 호위가 붙어 있었지만… 이지영과 황혜림은 어지간한 각성자로도 대응하기 힘든 상대. 신지호가 예측하지 못했다면 저기서 벌벌 떠는 신재운은 지금쯤 잡혀갔을 확률이 높다.

    대체 무슨 수를 쓴 걸까. 방법은 모르겠지만 미리 알고 있던 덕에 손쓰긴 쉬웠다. 강태주는 뺨을 긁으며 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좀 싱겁네.”

    “싱거운 게 아니라 다행인 거지.”

    “그래. 하긴 맨날 뒤통수 처맞을 때보단 좋네. 특히 이 새끼한텐 갚아 줄 빚이 있었는데.”

    강태주는 제 뒤에 꺼내 둔 무기들을 이공간으로 집어넣었다. 단 [루기아의 가지]는 내버려 뒀다. 강태주의 예상보다 훨씬 더 좋은 효과가 나오고 있었으니까.

    유경우는 제 주변을 둘러쌌던 가구를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황혜림이 어딘가로 날려 버린지라 몇 개 남지 않았지만.

    그제야 잔뜩 긴장하다가 다리에 힘이 풀린 재운이 숨을 뱉었다. 흐물흐물 자리에 주저앉으려던 재운은 바닥에 쓰러진 이지영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저, 저 사람 왜…….”

    “상성이 좋았거든.”

    강태주가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재운은 그런 태주가 무섭다는 듯 슬금슬금 뒷걸음쳤다.

    의식을 잃은 이지영은 고통스럽게 피를 토하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피부 위로 조금씩 주름이 생겨났다. 시간을 돌리기라도 한 것처럼 이지영이 급속도로 노화했다.

    “기껏해야 황혜림 발 좀 잡고 끝날 줄 알았더니.”

    [루기아의 가지]는 대상의 마력을 흡수한다. 그리고 이지영은 평범한 인간임에도 수백 년 살아 온 연금술사다.

    종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이지영은 수많은 대가를 치르고 있을 터. 갑작스러운 공격으로 스킬의 균형이 깨진 순간 그녀는 무력해졌고, 술법 또한 어그러졌다.

    갑작스레 노파가 된 이지영은 움직이기도 힘들 만큼 가냘팠다. 완벽한 제압이긴 한데…….

    “당장 죽진 않겠지?”

    유경우가 다소 미심쩍다는 듯 이지영을 살폈다. 어떻게 잡았는데, 정보를 빼내기도 전에 갑자기 죽어 버리면 곤란하다. 강태주는 무성의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나도 잘 모르지. 봐서 죽을 것 같으면 뺐다가 다시 꽂아.”

    “…….”

    그건 무기의 주인인 당신 할 일 아니냐고 하려던 유경우는 입을 다물었다. 저 태도를 보아하니 유경우가 하는 게 속 편했다.

    “아, 저거 남이 만지면 마력 흡수되는구나. 내가 할게.”

    “…….”

    유경우가 했다면 마력이 빨려서 최소 기절했겠지. 이지영처럼 갑자기 변하진 않아도 꽤 치명적이었을 것이다.

    강태주를 상대하는 대신, 유경우는 묵묵히 주하은에게 연락했다. 이지영을 잡았으니 그녀의 힘을 단단히 봉인할 만한 아이템을 준비해 달라고.

    그러는 사이 아래층에서 신지혜가 올라왔다. 청람의 부길드장이니만큼 그녀도 대략적인 사정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지혜는 몹시 놀란 채였다.

    “재운아.”

    “고모.”

    “다행이다.”

    신지혜는 남이 보기엔 냉정한 사람이지만 누구보다 가족을 사랑했으니까, 가족이 얽혀 있다면 놀랄 수밖에. 재운이 무사한 걸 확인한 지혜가 경우를 돌아보았다.

    “……너도 고마워.”

    유경우의 눈이 툭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이혼 후 아무런 감정도 남지 않았다는 듯, 부길드장으로 자신을 스카우트할 때부터 지금까지 딱딱한 호칭만을 고수해온 신지혜다.

    신지혜에게 ‘너’라고 불린 건… 정말로 오랜만이었다.

    여전히 짙게 남은 미련과 애정이 유경우를 적셨다. 유경우의 눈이 일렁였다. 물기 섞인 눈이 이미 흘러간 추억을 유영했다.

    “뭘, 내가 당연히 도와줘야 할 일이지.”

    그리고 지켜보는 강태주의 표정이 썩어들어 갔다. 고개를 돌리던 강태주는, 제 고모와 전 고모부 사이에서 흐르는 뜨뜻한 기류를 견디지 못한 신재운과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은 눈빛을 나눴다.

    ‘쟤네 원래 저러냐?’

    ‘당연히 아니죠…….’

    드문 일이니 방해도 못 하고 들러리가 된 거 아닌가.

    다행히도 어색한 분위기를 깰 발소리가 들렸다. 이번에 방 안으로 들어온 건 재운의 아버지인 신지형이었다.

    긴장과 두려움, 마지막엔 뻘쭘함까지. 몸과 마음이 모두 지친 재운은 어릴 때처럼 아버지에게 다가가 그를 끌어안았다.

    “아빠!”

    “어, 어.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신지형이 떨리는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깨진 창문, 듬성듬성 사라진 가구, 뉴스에서 몇 번 본 적 있는 S급 헌터란 신분의 외부인까지.

    “야, 이러다 다 올라오겠다? 정리 좀 하지.”

    “그래. 오빠, 상황은 가면서 설명할게. 엄마랑 아버지, 언니 모시고 일단 가자.”

    “어딜 가는데?”

    “지호네 집. 거기가 안전해.”

    “지호네?”

    “하나하나 다 캐묻지 말고. 엄마 이거 보면 기절해. 빨리!”

    지혜의 재촉에 지형이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손자가 습격당했다는 걸 알면 어머니는 쓰러지시고도 남았다.

    할머니를 걱정하는 재운이 가장 먼저 튀어 나갔다. 습격을 받았던 집 안은 아무 일도 없었던 양 빠르게 정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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