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원류(3)
눈앞의 풍경이 이지러졌다. 순식간에 무너진 풍경 속, 남은 것은 신지호와 ■■뿐이었다.
지호는 자신의 전생인 ■■를 묘한 기분으로 마주했다.
쌍둥이처럼 닮은 얼굴이었다. 잘 뜯어보면 미묘하게 다른 점이 있지만 쉽게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차이라면 ■■의 머리색은 지호보다 훨씬 밝은 금발이었다.
그러나 닮은 것은 얼굴뿐. 분위기는 딴판이었다. 눈앞의 ■■는 우울했으며 무언가를 향해 분노하고 있었다.
분명 기억 속의 ■■는 밝고 자신만만한 모습이었는데. 자가 자신에게 불안도, 불신도 없는 듯이.
─ ‘주이원’을 위해 대가를 치렀기에 멸망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한 건 이해해.
“…….”
─ 하지만 ‘주이원’을 지키지 못한 건 이해할 수 없어. 힘을 지닌 건 너였고, 먼저 각성한 것도 너였어. 다른 세계에 보내지 말았어야지. 상처 주지 말았어야지. 네가 지켜 줬어야지. 주이원이 지키게 두지 말고.
눈앞의 ■■가 사납게 이를 드러냈다. 지호는 상대의 분노가 어딜 향하는지 눈치챘다. ■■ 자신이다. 그리고 지호 자신이었다.
─ ■■은… 강해 보이지만 사실은 섬세하고 연약해. 내가 지켜 줘야 해.
“…….”
저 ■■이 분명 주이원의 전생을 뜻하는 말일 텐데. 전생과 현생의 이원이 많이 다른 걸까, 아니면 눈앞의 지호 닮은 놈의 콩깍지가 너무 두터운 걸까?
─ 너는 ■■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너도 ‘주이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지.”
자신이 주이원을 더 잘 안다는 듯이 구는 꼴을 가만히 보고 넘길 수는 없었다. 지호가 이를 드러내자 상대는 피식 비웃었다. 그러나 더는 반박하지 않았다.
─ 사소한 견해 차이는 둘째 치고.
“…….”
─ 너는 명심해야 돼. ‘주이원’이 있는 세계라 지킬 가치가 있는 거야. 나는 너무 뒤늦게 깨달았고… 너는 아직 모르는 것 같지만.
“내가 뭘 모른다는 거야?”
발끈하는 지호를 상대가 가소롭다는 듯이 바라보며 웃었다. 그리고 천천히 다가와 손을 들어 올렸다. 하늘거리는 손끝이 지호의 뺨을 쓰다듬는다. 기분 나쁘리만치 달라붙는 손길에 소름이 끼쳤다.
─ ■■을, ‘주이원’을 지켜.
■■가 지호의 뺨을 콱 움켜쥐었다. 아플 정도로 억센 힘에 지호가 신음했으나 상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 너는 할 수 있어. 아니, 해야 해.
■■가 명령한다.
─ 위협을 제거해.
그러기 위해 관리자가 되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반대하는 데도, 고집을 부리다가…….
─ 다만 ‘주이원’을 혼자 남기지는 마.
“……너는 혼자 남겼어?”
─ 그래. 나는 살해당했거든.
■■가 서늘하게 미소 지었다. 가만히 뜬 두 눈에는 숨길 생각조차 하지 않은 차디찬 증오가 넘실거린다.
살해당하다니. 왜, 어떻게? 대체 누구에게…….
─ 그런 기억까지는 자세히 안 보는 게 좋아. 분명 증오하게 될 테니까.
기억 속에서 봤던 밝은 인간과는 정 딴판인 ■■가 음산하게 속삭였다.
─ 중요한 건 ‘주이원’을 지키는 거야.
■■가 물끄러미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지호의 손이 있는 곳이었다. 언뜻 지호의 손만 존재하는 듯 보이지만… 지호는 제 손을 꽉 잡은 온기를 느꼈다. 이원이 지호를 붙들고 있다.
─ 상처 입히지 마. 빼앗기지 마. 지켜. 이 세상을. 그리고 ‘주이원’을.
눈 깜짝할 사이에 ■■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그의 음울한 목소리는 계속해서 귓가에 메아리쳤다.
그대로 지호는 비틀거렸다. 이원이 지호의 허리를 끌어안아 붙드는 게 느껴졌다.
“신지호!”
“괜찮, 괜찮아…….”
“괜찮기는 무슨, 너 지금…….”
지호는 말하는 대신 손을 허공에 휘저었다.
환상 속에서 ■■는 시스템을 다뤘다. 환상 속에서 본 과정을 그대로 체득한 건 아니다. 그러나 어떻게 움직이는지 이해했다. 시스템에 도움을 받는 입장이 아니라, 설계자 측면에서의 시스템을.
지호는 지금까지 대던전의 악의가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몰랐다. 대던전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고작 타인을 짓누르기 위한 저열한 욕망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더는 그 초라한 민낯에 압도적인 공포를 느낄 수 없었다.
이건 불가해한 공포가 아니다. 멍청한 놈들의 기분 나쁜 발버둥일 뿐이다. 이 세상은 대던전을 만든 자들의 야욕보다 훨씬 더 가치 있다. 고작 이깟 것들 앞에서 무릎 꿇기에는 모든 게 너무도 빛났다.
멸망에 대적하는 힘은 바로 거기에서부터 시작한다. 저열한 욕망을 부정하는 의지. 살아 있는 것을 존중하는 선의. 미래로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 말로 늘어놓으면 뻔한 것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원하는 자가 멸망을 밀어 낼 수 있다.
천천히 지호의 손끝에서부터 어둠이 갈라진다. 바늘 틈새만큼 어둠을 벌린 지호에게서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
이원의 손끝이 움찔거렸다. 지금 당장이라도 지호를 말리고 싶다. 굳이 따라왔는데 오늘도 어김없이 무리하는 게 싫다. 지호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영역에 있는 것도 싫다.
한참 망설이던 이원이 피가 날 정도로 세게 주먹을 꽉 쥐었다. 이원은 지호를 말리는 대신 가만히 지켜보았다.
잠시 후.
잡아 찢듯이 어둠이 완전히 벌어졌다. 태양이 떠오른 것처럼 순식간에 어둠이 자취를 감춘다.
어둠이 사라진 자리에 드러난 건 폐허가 된 청의 방주였다. 태풍이 휩쓸고 간 것처럼 엉망으로 헝클어진 곳에 방주의 관리인이 널브러져 있었다.
지난번 찾아왔을 때는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생김새였지만, 지금은 잔뜩 낡고 해어진 인형처럼 더럽게 닳았다.
방주의 관리인이 지호를 돌아보았다. 힘겹게 내뱉는 숨, 무언가를 전하고 싶은 듯 보이는 시선. 그러나 관리인은 아무것도 전하지 않은 채 이내 창백한 낯으로 눈을 감는다.
그대로 방주의 관리인은 움직임을 멈췄다.
“고장 난 거야?”
“몰라.”
지호는 조금 당황한 채 관리인에게 다가갔다. 어느 정도 가까워졌을 무렵, 관리인의 몸이 모래 탑을 툭 친 것처럼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그리고 관리인의 마력이 기억과 함께 지호에게 쏟아졌다.
“아.”
지호는 자리에 멈춰 선 채 휘청거렸다.
관리인의 기억은 특별한 게 없었다. 그는 아주 오랜 시간을 방주에서 머물며, 언젠가 올지도 모르는 때를 대비한 채 깊은 잠에 빠져 있었으니까. 지호가 그에게서 얻을 수 있는 기억 또한 적었다.
다만.
관리인은 지호보다 훨씬 더 시스템을 자유롭게 다뤘다. 방주 안에서 관리인은 그 누구보다 전능한 신이었다. 그가 시스템을 다뤘던 방식이 지호의 기억에 새겨졌다.
근원을 이해했으며, 세부적으로 다루는 방법을 체득했다.
지호의 눈이 반짝였다.
* * *
신재운은 까치발을 들고 조심스레 복도를 가로질러 계단을 반쯤 내려갔다. 1층이 간신히 보일 만한 위치에서 재운은 거실을 바라보았다.
엄마에게 기대어 이마를 짚은 할머니가 보인다. 아빠는 자리에 없었다. 고모는 사라지고 전 고모부가 자연스럽게 거실에 껴서 할머니를 위로했다.
초상이라도 난 것처럼 우울한 분위기다. 재운은 다시 소리 죽여 방으로 돌아왔다.
“에휴.”
이게 무슨 난리인지.
삼촌이 범죄를 저질렀다느니, 뭐 그런 안 되는 퀘스트창이 뜬 후. 귀여운 손자인 자신보다 막내삼촌을 더 좋아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난리가 났고, 아빠도 뒤집어졌고, 그 무서운 고모조차 사색이 되었다.
그 와중에 재운은 애먼 욕을 들어먹었다. 범죄자의 가족이면 똑같은 범죄자라나, 뭐라나. DM으로 욕을 박는 놈들은 양반이다. 재운과 뻔히 아는 사이면서도 문자나 톡을 보내 비난하는 새끼들도 여럿이었다.
그간 삼촌에 관해 자랑해 둔 게 이딴 식으로 안 좋은 일로 번질 줄은 몰랐다. 재운은 원망스러운 마음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에휴…….”
“답답하지?”
곁에서 들린 낯선 목소리에 재운이 기겁하며 펄쩍 뛰어올랐다. 그대로 아래로 굴러떨어지려던 재운을 상대가 붙잡았다. 재운보다 작은 체구에 호리호리한 여자인데도 힘이 무척 셌다.
“누, 누구세요?”
재운은 동네방네 소리지르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애써 침착하게 질문했다. 여자의 눈이 둥글게 휘었다.
“이지영이라고 해.”
“……이지영?”
“신지호 씨와는 막역한 사이지.”
“삼촌이랑요?”
재운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언뜻 수긍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재운은 지영의 말을 티끌만큼도 믿지 않았다. 그야 지호와 잘 아는 사람이 다짜고짜 침입할 리가 없지 않은가.
“침착하구나. 하나도 안 믿으면서.”
“…….”
“교육을 잘 받은 애네. 그렇지, 각성자 앞에서 괜히 소란 떨다가 목이 날아갈 수 있으니까.”
“…….”
“무서워하지 마. 죽일 거면 말을 걸었겠어? 너는 살아 있어야 가치가 있으니까.”
“……무슨.”
“좋은 말로 할 때 같이 가지 않을래?”
재운의 얼굴이 굳었다. 당연히 싫다. 하지만 싫다는 말에 물러날 거였다면 애초에 남의 집에 침입하지도 않았겠지.
어떻게든 시간을 끌려는데 지영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와 거의 동시에, 쿵!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문짝이 뜯겨져 나갔다.
재운은 반가운 이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재운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지영의 손이 재운을 콱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