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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일촉즉발(8) (250/283)

37. 일촉즉발(8)

허소리는 자리에 앉아 가만히 목을 돌리면서 스트레칭을 했다. 가만히 한 자리에 앉아만 있으려니 영 뻐근했다. 원래 책상머리에 앉아 있는 건 성질에 안 맞는다. 이런 짓은 고3때 졸업했는데.

‘이 정도로 고생했으면 추가 수당 받아야 한다.’

몸 고생, 마음고생 다 했더니 실시간으로 몸이 축난다. 뭐, 길드장님이 어련히 잘 챙겨 주겠냐마는…….

신지호가 그런 사람인 걸 알았으니 허소리도 위험을 무릅쓸 수 있었던 거다. 만약 하늘 길드 소속이었다면 한두 번은 더 고민하지 않았을까?

손목을 옭아맨 묵직한 감촉을 느끼며 소리는 피식 웃었다.

‘그 양반은 살았으려나…….’

천희성.

마지막으로 처치할 때는 확실히 살아 있었지만. 그러나 게네시스의 흉수에 당한 만큼, 회생하리란 보장은 없었다.

‘살았으면 좋겠는데.’

게네시스와 손을 잡은 천하의 개새끼지만 보아 하니 진짜 흑막에게 당한 중간 보스 정도 되는 놈 같고.

게네시스와 연관된 걸 제외해도 하는 짓이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역시 눈앞에서 살해당하는 걸 보고 싶진 않았다. 감옥에 처넣고 싶을 뿐이지.

게다가 그대로 죽어 버리면 허소리가 기껏 잡히는 걸 무릅쓰고 치료한 보람이 없지 않은가.

‘……아직 우리 가족들은 모르겠지?’

허소리의 가족은 지극히 평범한 일반인이다. 그녀가 S급으로 각성하고 노네임의 부길드장이 되었을 때, 좋아하면서 동시에 큰일이라도 날까 봐 걱정부터 하던.

그런 가족들인데 허소리가 갑자기 살인 사건의 용의자가 되었다고 하면 얼마나 놀랄까……. 기왕이면 뉴스 타기 전에 해결됐으면 좋으련만.

“…….”

이런저런 생각을 끝낸 소리는 한숨을 푹 쉬며 천천히 눈을 떴다.

“시간 안 가네…….”

아니, 이게 시간이 안 간 걸까? 아니면 너무 빠르게 지나간 걸까. 아무것도 분간하지 못한 채 허소리는 눈을 깜박였다.

허소리의 눈앞에는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백색의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새하얀 공간을 보고 있으면 멀미처럼 묘한 어지럼증과 구역질이 함께 치밀었다.

이곳에 떨어진 지도 어언…….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한 시간이 지났는지, 하루가 지났는지, 혹은 열흘이 지났는지.

현실을 외면하고 싶어서 소리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진짜 안 깨나?”

일부러 소리 내어 말해도 변하는 건 없었다. 아무래도 단순한 꿈은 아니겠지. 꿈이기를 아주 간절히 바랐건만.

잠시 눈을 굴린 소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시각을 포함한 감각이 모두 모호해졌지만 적어도 몸을 움직이는 정도는 느껴진다. 그나마 긍정적이라고 해야 할까?

“……그럼 튀자.”

평범한 상황이면 얌전히 잡혀 있으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 얌전히 길드장을 기다릴 여유는 없었다.

일단 손목을 묶은 수갑부터 처리해야 할 텐데. 힘을 봉인한다는 걸 알면서도 헌터 협회 내에서라면 괜찮을 거라고 순순히 착용한 게 패인이었다.

적어도 뭔가 일이 벌어지기 전에는 신호가 있을 줄 알았지. 조사받고 있다가 잠시 딴생각을 했는데 이곳으로 옮겨져 있었다. 감각이 모호해서 정말 옮겨진 건지, 환각인 건지 구별하기 힘들다. 뭐가 어찌 됐든.

‘이런 이상한 데 갇혀서 죽는 것보단 신문 1면 장식하는 게 낫다.’

어떻게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소리는 가만히 정신을 집중했다. 몸을 적극적으로 움직일 수 없으니 이렇게라도 방법을 찾는 수밖에.

‘어?’

정신을 집중하고 보니, 묘하게 익숙한 느낌이었다.

이 느낌. 이 온도와 습도. 그리고 마력…….

어디에선가 경험한 적이 있다. 그것도 비교적 최근이었는데…….

“아.”

얼마 전에 방문했다가 허무하게 나왔던 오염된 방주. 그곳에서 느꼈던 혼탁한 마력과 똑같았다.

깨달음을 얻은 허소리는 반짝 눈을 떴다.

당시 오염된 방주에서 허소리는 직접 신지호를 찾아 문을 열고 나왔다. 그때의 지호와 똑같이 누군가가 소리를 밀어 넣었다. 하지만 소리에게는 지호의 손을 잡고 문을 찾을 때의 기억이 생생했다.

희미하게 마력의 흐름이 느껴진다. 그녀가 들어온 곳이 곧 출구. 정신을 집중한 허소리는 자신이 어딜 통해 이곳으로 들어왔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천천히, 허소리의 의식이 공백의 세상에서 탈출했다.

“허소리!”

누군가가 제 멱살을 잡고 흔드는 감각과 함께 소리는 눈을 떴다. 그곳에는 여기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기, 길드장님!?”

“쉿.”

신지호가 조용히 하라는 듯 소리의 입을 틀어막았다. 눈짓하는 신지호에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입을 막았던 손을 떼 주었다.

소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협회의 한복판이다. 신지호가 여기 와 버리면 허소리가 굳이 잡힌 보람도 없는데. 소리가 낭패한 얼굴로 입술을 뻐끔거렸다.

“여긴 왜 온 거예요?”

“허소리 헌터가 위험했잖아요.”

입 모양을 읽은 소리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 정도는 무사히 빠져나왔는데……. 불평을 털어놓는 대신 소리는 황급히 지호를 붙들었다.

“길드장님. 방주 한번 조사해 봐요.”

“방주요?”

“네. 방금 빠져나왔는데 느낌이 이상해서…….”

“뭐가 이상했는데요, 허소리 헌터?”

신지호가 묻는다. 스타카토처럼 끊어지는 발음과 허소리를 잡은 손에 들어간 힘. 소리가 묘한 위화감에 인상을 확 찌푸리며 신지호를 밀어 냈다.

아니, 신지호가 아니다. 허소리의 눈앞에 있는 자는…….

“너 뭐야, 이 새끼야?”

그러자 눈앞의 신지호인 척하던 것이 씩 웃었다. 그것이 입을 열어 뭐라고 더 지껄이기 전에…….

누군가의 손이 뻗어 나와 콱, 그것의 목을 잡았다. 그리고 뜯어냈다.

목이 뜯어진 공간에서 흘러나온 건 피가 아니라 현실감이었다. 묘하게 허공에 붕 뜬 감각이 사라지고, 허소리는 정말로 현실에 안착했다.

소리는 눈을 깜박였다. 생전 처음 보는 여자가 소리를 희미하게 미소 지은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허소리는 낯선 얼굴에 안도했다.

“구하러 왔단다.”

익숙한 말투. 상대는 양호진이었다. 그가 [둔갑술]을 쓸 수 있다는 건 잘 알고 있으니까.

소리는 반가움에 몸을 벌떡 일으키려다가 비틀거렸다. 호진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부축했다.

“괜찮니? 조심해. 몰래 들어온 거라…….”

“몰래요?”

화들짝 놀란 소리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깔끔하게 정돈된 조사실은 평온했다. 침입자의 방문을 전혀 모르는 듯.

“뭔가 안 좋아 보여서. 혹시 많이 안 좋으면 꺼내 줄까? 다소 위험은 동반하겠지만…….”

소리는 고개를 저었다. 일단 그 정체불명의 장소에서 빠져나왔으면 됐다.

“저는 괜찮아요. 그보다 길드장님은요?”

“진범을 찾고 있지.”

“……연관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소리는 확신이 안 가는 어조로 망설이며 입을 열었다.

“방주. 방주에 뭔가 있을 것 같아요.”

* * *

나름의 방식대로 맷을 추격하던 지호는 호진의 연락을 받고 방주로 향했다.

허소리와 함께 갔던 해외의 방주로 향한 건 아니다. 이전에 선태웅과 함께 발견했던 청의 방주. 허소리를 수호자로 만든 보주를 얻은 장소는 서울 한복판에 있었으니까.

“여긴 확실히 시스템과 밀접한 장소지. 굳이 특정 방주를 고집할 필요는 없을 것 같고.”

방주의 정식 명칭은 ‘지구 멸망 최후 대비 시스템’. 어쨌든 방주의 역할은 모두 동일했다. 상태 역시 같은지는 알 수 없었지만… 확인해 볼 가치가 있었다.

맷을 잡는다.

말이 쉽지. 실제로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게네시스에는 순간 이동이 가능한 황혜림이 있고, 덕분에 엄청난 기동력으로 도망 다니고는 했으니.

물론 이쪽에도 순간 이동과 관련된 능력자가 없는 건 아니다. 이전에 잡혔던 양호진만 하더라도 [축지법]이라는, 순간 이동에 필적한 스킬을 갖고 있었다.

이쪽의 전력이 부족한 건 아니다. 전력 차이를 만드는 건 녹스. 시스템을 편법에 가깝게 이용하는 존재. 애초에 지금 지호를 전면에 나서지 못하게 만든 것도 녹스의 퀘스트 때문 아닌가?

사실 그것부터 말이 안 된다.

녹스가 제아무리 시스템을 자유자재로 사용한다고 해도 관리자는 신지호다. 시스템 레벨을 올리고 권한을 개방하는 건 관리자의 몫 아닌가?

근본적으로 시스템을 관리자인 지호가 다시 장악해야만 했다.

“그래, 한 놈을 잡는 걸로는 안 끝나.”

이원이 단호하게 말했다.

“이미 바퀴벌레 소굴인 거야. 이미 한 마리 보인 이상 철저하게 때려잡았어야 하는데 못 잡아서 이 상황까지 온 거지.”

“…….”

왜 하필 비유가 저런 걸까? 어쨌든 이원의 말대로 맷 하나를 잡아서 끝날 문제는 아니긴 했다. 일단 중간 목적지인 방주가 엄청나게 수상쩍은 장소이긴 했지만.

“전에 갔을 때 상태가 별로 안 좋았다고 했지?”

“……응. 조심해.”

대던전과 유사한 마력이 방주에서 느껴졌다. 어차피 신경 쓰이던 찰나에 한 번 더 방문해야 하긴 했지만… 이 타이밍에 괜한 일을 터트리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기도 했다.

“걱정하지 마.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 줄게, 지호야.”

“넌 내가 지키니까 나서지 마.”

“자기야……. 감동이야.”

지호는 눈을 반짝이는 이원을 보며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시덥잖은 농담을 했더니 조금 기운이 났다.

“가자.”

지호는 이원의 손을 잡은 채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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