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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일촉즉발(6) (248/283)
  • 37. 일촉즉발(6)

    레비아탄의 격렬한 몸부림에 닿는 모든 것이 부서졌다. 단순히 부서지는 게 아니라 부식되듯 순식간에 시커멓게 변해 버렸다. 이미 죽음의 경계에 한 발 걸친 레비아탄은 죽음과 저주로 이루어진 불길한 존재였다.

    거대한 충격에 휘청거리던 이원의 결국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주이원!”

    그를 직접 도와줄 수 없는 잠수정 안에서 지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충격이 상당한 듯 이원은 잠시 움직이지 못했다.

    이원이 무력화된 사이, 레비아탄이 바닥에 바짝 붙였던 몸을 띄웠다. 거대한 몸은 믿기지 않을 만큼 빠르고 부드럽게 움직였다.

    이대로 공격하는 걸까. 바짝 긴장한 게 무색하게도 순식간에 레비아탄의 모습이 깊은 심해 너머로 사라졌다.

    도망친 것이다.

    ─ 아, 저게 진짜…….

    처박혔던 이원이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순간 큰 충격을 받고 날아갔으나 다행히 다친 곳은 없었다. 지호는 그제야 멈췄던 숨을 몰아쉬었다.

    그때.

    ‘멸망의 대적자’가 지금은 물러나야할 때라고 경고합니다.

    저것은 아주 위험한 존재입니다. 언젠가 저것을 막아야 합니다.

    ‘멸망의 대적자’는 당신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멸망의 대적자가 지호에게 연달아 메시지를 보냈다. 바다에 들어오기 전과 달리, 지금의 메시지는 또렷했다.

    메시지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건, 멸망의 대적자가 경고하려는 일이 그가 관여할 수 없는 선의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지호의 추측에 멸망의 대적자는 답하지 않았지만, 부정하지도 않았다.

    어쨌든 멸망의 대적자와 지호의 생각은 일치했다.

    “주이원, 쫓아가지 마!”

    당장이라도 레비아탄의 뒤를 쫓으려던 이원이 우뚝 멈춰서 지호를 돌아보았다. 잠시 생각하던 이원은 지호와 크사냑이 있는 잠수정으로 다가왔다.

    ─ 그래. 지호까지 위험하게 만들 수는 없으니까.

    어쩔 수 없다는 듯 대답하는 이원을 지호가 슬쩍 노려보았다. 이원은 그 눈빛을 눈치채지 못한 채, 주변을 살피며 천천히 위로 올라왔다.

    내려온 것보다 올라가는 속도가 더 빨랐다. 별다른 말없이 수면 위로 올라온 이원은 잠수정을 비행정에 내려놓았다. 지호와 크사냑이 잠수정에서 나오는 사이, 이원은 곧장 루에게 질문했다.

    “상황은?”

    “지금 레일레이 애샤가 만든 몸이 지호 님 대신에 헌터 협회로 조사를 받으러 갔습니다. 구속된 상태는 아니니 곧 풀려날 것으로 보입니다.”

    “다른 건?”

    “하늘 부길드장이 지호 님을 물고 늘어지는 중입니다. 하늘 길드장은 하늘의 비리 몇 가지를 제보했습니다.”

    “거기도 길드 꼴 잘 돌아가네.”

    이원이 피식 비웃었다. 잠수정에서 나온 지호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이원의 팔을 잡아당겼다.

    “자기야, 왜?”

    “됐으니까 일단 쉬어.”

    “음, 잠깐 보고 듣는 건데… 금방 끝나.”

    “금방 끝나면 조금 이따 해도 되잖아. 쉬고 나서 들어.”

    “난 괜찮아.”

    “내가 이 상황에서 괜찮다고 하면 어쩔 건데?”

    고집을 부리려던 이원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이내 한숨 쉬며 고개를 저었다.

    “자기를 감금할 계획을 세우겠지.”

    “……그건 너무 극단적이고.”

    “알았어, 쉴게. 도착하기 전에 보고해.”

    “알겠습니다.”

    지호는 방으로 향하는 이원을 따라 들어갔다. 그리고 이원이 괜한 짓을 하기 전에 침대에 눕혔다. 얌전히 자라는 의도였는데 이원의 손이 지호의 몸으로 슬금슬금 올라왔다.

    “이건 그런 뜻이야? 자기, 과감한데…….”

    “뭘 생각하는지 몰라도 아니야, 멍청아.”

    지호가 입술을 깨물었다. 평소라면 어디 있는 지호의 시선을 곧장 느끼는 녀석이, 바로 옆에서 노려보는데도 눈치채지 못했다. 지치고 힘든 주제에 아무렇지 않게 무리하고 있다. 지호는 걱정을 담아 이원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다음부터는 혼자 그러지 말고 이상한 게 있으면 일단 물러나. 나한테 말하고 나서 움직여. 알았어?”

    “하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어. 도망칠 것 같아서… 라고 해도 화낸다는 거지?”

    “아까도 말했지만 역지사지해 봐.”

    “알았어, 그럴게. 난 자기 말 잘 들으니까.”

    잘 듣기는 무슨. 지호는 눈을 흘겼다.

    사실 묻고 싶은 게 많았다. 레비아탄은 어떻게 발견한 건지. 레비아탄이 박정림의 주술을 사용하리라고 추측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그걸 모두 물어봤다가는 쉴 수 없을 터였다. 지호는 이원이 움직이기 어렵도록 이원을 꽉 끌어안은 채 누웠다. 이원이 깊게 더운 숨을 내뱉었다.

    “자기야, 이러면 쉴 수가 없어…….”

    “입 닥치고 쉬어. 이상한 짓 하지 말고.”

    “아, 이거 설마 벌주는 거야? 멋대로 굴었다고?”

    “그래. 그러니까 눈 감아.”

    이원이 뭐라 툴툴거렸지만 지호는 무시한 채 눈을 감았다. 바닷속에 오래 머물러 차갑게 식었던 몸이 지호의 체온으로 데워졌다. 피곤하긴 피곤했던 건지 이원은 이내 잠들었다. 그제야 지호는 조금이나마 마음을 놓았다.

    * * *

    허소리는 긴장으로 경직된 어깨를 풀기 위해 가볍게 스트레칭했다.

    ‘신지호’의 몸을 조종하는 건 긴장의 연속이었다. 주하은은 별문제가 없을 거라고 했지만, 지호를 연기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굉장한 부담이었다.

    헌터 협회는 ‘신지호’를 오래 붙잡아 두지 않았다. 애초에 시스템창 말고는 지호가 죄를 저질렀다는 증거 자체가 없으니까. 간단한 조사만 하고 ‘신지호’를 귀가시켰다.

    “하아…….”

    협회 근처에 차를 주차한 채 소리가 한숨을 쉬었다. ‘신지호’의 가짜 몸을 여기로 이동시켜서 노네임으로 들어가면 당장 임무는 끝이다. 소리는 긴장으로 뻐근해진 목을 이리저리 돌렸다.

    “역시 호진 씨랑 같이 올 걸 그랬나.”

    바쁜데 뭐하러 둘이 가냐며 혼자 오긴 했지만, 무사히 저 ‘신지호’를 회수하는 일이 중요하다보니 바짝 긴장되었다. 뭐, 여기까지 와서 무슨 일이 벌어지겠냐마는.

    가짜 신지호가 차로 거의 근접했다. 문을 열고 나서려던 소리는 잠시 멈칫했다. 누군가가 신지호를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나갈까, 말까. 고민하던 소리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제대로 연기하지 못하면 곤란한 상대가 앞에 있었으므로.

    천희성.

    무죄를 주장한 뻔뻔한 남자가 무슨 까닭에서인지 혼자 지호를 찾아왔다.

    ‘이 새끼, 지금 누구 앞이라고 나타나? 뻔뻔하긴.’

    소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가짜 몸은 어느 정도 소리의 감정에 영향을 받아 움직였다. 다행인 건 지호 역시 지금 천희성을 봤으면 소리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으리란 점이었다.

    “잠시 실례하지.”

    “무슨 일이시죠?”

    “무슨 일인지 몰라서 물어?”

    “모르겠는데요.”

    소리는 새침하게 대답했다. 천희성이 화가 나는 듯 인상을 찌푸린 채 ‘신지호’를 노려보았다.

    “뻔뻔하군. 하늘 길드에 누명을 씌워 놓고…….”

    “누명이라고요?”

    어처구니가 없어서 도리어 웃음이 나왔다.

    하늘 길드는 게네시스와 손을 잡고 온갖 불법적인 일을 저질렀다. 그러면서 제 죄를 지호에게 뒤집어씌우려고 했다. 모두 용서할 수 없는 일뿐이다. 모르는 이가 당해도 화났을 일을 당한 건 심지어 그녀가 소중하게 여기는 길드장, 신지호였다.

    용서할 수 없었다. 예전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 놈이었다. 한 대 때리고 싶어 주먹이 간질간질했지만… 아마 신지호는 저 말을 들어도 참을 것이다. ‘신지호’를 연기해야 하는 이상 멋대로 행동할 수는 없었다.

    ‘우리 길드장님은 사람이 너무 착해.’

    착하다 못해 조금 호구였다. 지호가 관리자로 각성하기 전 그를 욕하던 길드원들을 아무렇지 않게 풀어 줄 때부터 느꼈지만.

    소리는 머릿속에 가득한 욕설을 털어 내고, 지호가 할 법한 말을 떠올렸다.

    “증거는 명백해요. 그런데 아직도 누명이라고 주장할 생각입니까? 뻔뻔한 건 당신이에요.”

    “하늘 길드를 그렇게까지 찍어 내고 싶었나?”

    “당신이 저지른 짓을 부인할 생각입니까?”

    “부정할 수밖에 없잖나? 터무니없는 짓을 하늘 길드가 저질렀다고 했더군. 불법적인 인체 개조를 했다느니, 테러 집단을 지원했다느니… 무슨 악의 집단처럼 만들어 뒀던데.”

    천희성은 같잖다는 듯이 혀를 찼다.

    “그런 돈도 안 되는 일을 내가 했을 리 없잖아?”

    “……그거, 진짜 나쁜 놈 같은 말인데요.”

    “그래? 하지만 사실이다. 내 생각에 노네임 길드장은 소설을 너무 많이 본 것 같아.”

    소리는 천희성을 노려보았다. 헛소리를 들으며 참아줄 인내심이 바닥났다. ‘신지호’는 싸늘한 눈으로 천희성을 노려보았다.

    “조사하면 결과가 나오겠죠.”

    “그래, 너희가 누명을 씌웠다는 게 알려지겠지.”

    “더 말할 이유는 없네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어딜 가.”

    천희성이 ‘신지호’의 손목을 덥썩 붙잡았다. 갑작스러운 강압적인 행동에 소리는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그때, 누군가가 천희성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신지호’에게서 떼어 놓았다.

    그건 하늘의 길드장, 천희림이었다.

    천희림을 본 천희성이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분노에 차서 인상을 구겼다. 그러나 천희림은 태연하게 천희성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형, 여기 있었어?”

    “형이라고 부르지 마. 널 배려해서 거둬 줬더니 이딴 짓을 하다니.”

    “거두긴 뭘 거뒀다고 그래.”

    천희림이 빈정거렸다. 언제나 가벼운 태도와 달리, 지금 천희림의 눈은 더없이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웃기지도 않은 가족 놀이로 나를 붙잡으려고 한 건 그쪽이지.”

    천희림. 한국에 와서 양자 제안을 받고 이름을 바꿨으나, 천공에서는 그를 완전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계약으로 그를 묶어 둔 채 지지부진하게 시간을 끌면서.

    “그런 주제에 내가 넘어오니까 적당히 얼버무리려고 하고. 사람을 쓰려면 조금 더 성의를 보였어야지. 안 그래?”

    이죽거린 천희림이 천희성에게 다가갔다.

    “하긴, 어차피 사생아에 불과한 형이 뭘 할 수 있었겠냐마는.”

    “입 닥쳐, 천희림.”

    천희성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상대를 긁은 주제에 천희림은 아무 잘못도 없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나는 천희림이 아니야. 내 부모에게 받은 이름은 맷이지. 내 가족은 죽은 그들뿐이고.”

    “그러면 네 원래 이름을 갖고 꺼져. 너도 누릴 건 다 누렸잖아? 괜히 억울해하지 마.”

    “딱히 그런 걸 탓하는 건 아니야. 하늘 길드에는 감사하게 생각해.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았으니까.”

    “입에 침이나 바르고 말해라.”

    “진심인데. 뭐…….”

    천희림, 아니, 맷이 ‘신지호’를 돌아보았다. 그가 짓궂은 장난꾸러기처럼 씩 웃었다. 가벼운 태도인데 어째서인지 소름이 올라왔다.

    맷의 눈이 둥글게 휘었다. 그렇게 환하게 웃으면서…….

    푸욱.

    맷의 손이 천희성의 가슴을 관통했다. 생물을 죽였으리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가볍게 들어가 밖으로 빠져나온 손. 천희성은 제대로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맷은 손을 빼냈다. 피를 흘리며 천희성이 쓰러졌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써먹을게.”

    낮은 목소리와 함께 황혜림이 나타났다. 그녀는 신지호를 똑바로 보지도 않은 채 맷을 붙들고 공간을 넘었다.

    순식간에 그 자리에는 신지호와 천희성… 그리고 사라진 두 사람은 몰랐겠지만, 허소리까지 셋만 남았다.

    상황을 차 안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소리가 운전대를 꽉 잡았다.

    이대로 신지호만 챙겨서 발을 뺄까. 가장 먼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누명을 쓰기 딱 좋은 상황이었으니까.

    물론 천희성을 공격한 건 맷과 황혜림이다. 하지만 그걸 당장 증명하기는 어렵다. 일부러 소리는 사람 눈을 피해 이곳에 왔으므로. 저들이 발을 묶어 둔 채 무슨 짓을 꾸밀지도 미지수였다.

    소리는 일단 차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탄식했다.

    천희성이 가늘게 숨을 쉬고 있었다.

    “와, 진짜…….”

    소리가 한손으로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렸다. 소리는 맷이 일부러 천희성을 당장 죽이지 않았으리라고 확신했다. 그녀의 길드장은 죽어 가는 누군가를 버려 둔 채 떠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개자식들…….”

    소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역시 양호진이랑 함께 올 걸 그랬다. 그라면 조금 더 단호한 결정을 내릴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안타깝게도, 허소리 또한 죽어 가는 사람을 두고 떠날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소리는 스킬을 써서 ‘신지호’를 강하게 내리쳤다. 가짜 몸은 만약을 대비해 쉽게 부서지도록 만들었다. 미리 입력된 소리의 마력 패턴을 인지한 ‘신지호’의 가짜 몸이 무너져내려 증거를 없앴다.

    소리는 이를 악문 채 천희성에게 포션을 쏟아부으며 외쳤다.

    “힐러, 누가 힐러를 불러 주세요!”

    어느새 천희성의 피로 범벅된 채, 소리는 간절히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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