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 일촉즉발(4) (246/283)

37. 일촉즉발(4)

꿈에서 깨어나자마자 루는 곧장 크사냑과 함께 미르 길드를 찾아왔다. 직접 온 건 아니다.

둘은 퀵서비스로 찾아왔다.

가벼운 상자를 받는 순간 이게 뭔지, 얼마나 의아했던지. 안에서 나온 건 솜 인형 두 개였다. 날개 달린 여자아이는 루, 세모꼴의 몸에 꼬리가 길게 나온 드래곤 형태의 인형은 크사냑.

바들거리며 똑바로 선 솜 인형이 팔을 휘저었다.

“루입니다. 이쪽은 크사냑. 직접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찾아왔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지호 님. 이런 몸으로 뵙게 되어 부끄럽습니다만,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꼬리만 살짝 흔들어 크사냑이 인사했다.

“그리고 오랜만입니다, 김태용 씨.”

“네, 오랜만에 뵙습니다. 제가 자주 안부 인사드렸어야 하는 건데…….”

“피차 바빴지요. 그리고 잠시 연락이 끊어진다 해서 멀어질 사이는 아니잖습니까?”

“네, 물론입니다.”

공손한 두 사람의 인사를 괴이쩍단 눈으로 바라보던 호진이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생각보다 이세계에서 잘 지냈던 모양이야?”

“친해질 수밖에 없었죠.”

이원과 지호를 찾아 무작정 이세계로 왔던 크사냑과 김태용. 지호도 두사람과 꽤 어울리긴 했지만, 주이원이라는 방해물 때문에… 함께한 시간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런 만큼 크사냑과 김태용은 많이 붙어 있었고, 종도 비슷하다면 비슷하고, 서로 성향이 크게 다르지도 않은 덕분에 꽤 친해졌다.

“인사는 그쯤 끝내십시오.”

귀여운 모습과는 정반대로 서릿발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정겨운 인사를 끊었다. 루는 작은 날개를 파닥였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주이원 님과 신지호 님입니다.”

“물론 그 사실을 잊은 적은 없네만. 지호 님의 긴장을 조금이나마 덜어드리는 게 이원 님도 바라시는 바가 아니겠나.”

“지호 님도 이원 님에 관해 듣고 싶으실 겁니다. 지금부터는 본론을 이야기하죠.”

“그래, 그러지.”

순순히 대답하는 크사냑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배어 있었다. 루보다 두세 배 이상 살아온 크사냑이 그녀를 꽤 귀여워하는 것 같았다.

“네. 충분히 도움 됐고요. 그럼 주이원에 관해 알려주시겠어요?”

“사실 알려드릴 게 많진 않습니다. 그분은 워낙 혼자 다니는 걸 즐기시는 터라…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는 급하게 뭔가 생각나셨다면서 가 버리셨습니다. 조금만 설명을 하고 가셨으면 좋으련만.”

“이원 님의 결정에 불만을 갖지 마십시오, 크사냑.”

“충언을 올리는 것도 심복이 할 일이지……. 어쨌든 이원 님이 마지막으로 향한 곳이 북마리아나 제도의 동쪽이라는 것밖에 없습니다.”

“거긴 분명 마리아나 해구가 있는 곳이죠.”

수심 1만 미터에 달하는 깊은 심해. 반드시 그곳에 갔으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바다 한 가운데보다는 특징적인 곳에서 사라진 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곳으로 가신 게 맞다고 해도, 왜 며칠째 연락이 없는지 이해하실 수 없습니다.”

“저기…….”

가만히 듣고 있던 허소리가 손을 든 채 끼어들었다.

“그런 곳에 사람? 이 갈 수가 있나요?”

이원을 사람으로 표현하는 게 의구심이 드는 듯, 소리는 묘한 얼굴이었다. 그 순간 루의 날개가 다소 요란하게 파닥였다.

“이원 님이라면 뭐든지 가능하십니다.”

“……그런 식으로 말하면 사이비 종교의 열성적인 신도 같잖나.”

‘틀린 말도 아닌 것 같은데.’

지호는 열성적인 루의 태도를 지적하는 크사냑의 묘사가 퍽 잘 들어맞는다고 생각했다. 주이원을 숭배하다 못해 방해가 된다고 여긴 지호를 죽이려 한 세테르나, 이플리스에서 본 여러 가지 일들을 생각해 볼 때… 주이원은 거의 살아 있는 신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그걸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다만 저 열성적인 태도가 불안하기는 했다. 너무 확고한 믿음 덕분에 앞뒤 재지 않고 이원이 무사하리라 여기는 것 같아서.

물론 지호도 이원을 믿고 있긴 한데… 그럼에도 불안을 감출 수 없었다.

“정말로 걱정하지 마십시오.”

지호의 불안을 감지한 건지 크사냑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위로했다.

“다른 곳이면 모를까, 바다는 이원 님을 해치지 않습니다. 절대로.”

“그렇다면 다행이지만요…….”

지호는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안 나타나는 게 이상해서…….”

“……그건 그렇습니다.”

이원에게 광신적인 믿음을 보내는 루조차 긍정했다. 호진이 잔뜩 심각해진 지호의 어깨를 툭 쳤다.

“그래서, 찾아가려고?”

“네. 일단 확실히 거기 있는지는… 확인해야겠어요.”

“곤란합니다, 지호. 여기서 나갔다가는… 당신이 더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태용의 말대로였다. 아무리 서리가 퀘스트를 취소했다고 해도, 시스템이 한 번 지호를 범인으로 지목했다. 아직 누명이 벗겨지기도 전인데 해외로 향했다가는 도피했단 소리를 들을 것이다.

“만약 간다고 하더라도 심해까지 직접 들어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건 가능합니다. 다만, 반드시 마리아나 해구에 계신다고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넓은 대해에서 이원 님을 찾을 수 있으리란 보장은 없지 않습니까?”

“그건 괜찮아요.”

자신만만하게 장담하는 지호에게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지호는 조금 망설이면서 눈을 굴렸다.

“그게… 음, 방법이 있어요.”

“뭐예요? 길드장님 탐색 스킬 없잖아요.”

소리가 지호를 의구심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지호는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전에 주이원한테 반지 줬는데 거기 위치추적 스킬 걸어 둬서요……. 지금은 너무 먼 거리라 모르겠는데, 대충 위치만 알면… 그 정도는 찾을 수 있을 거예요.”

말을 할수록 지호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경악과 흥미로움 섞인 시선이 지호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만들면서도 기분 나쁜 짓이라고 생각해서 남에겐 말하지 않을 작정이었는데.

“음… 다행이네요.”

침묵 속에서 소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순진한 길드장님을 잡아먹는 것 같았는데 끼리끼리 노는 게… 아니, 이건 물든 건가?”

“……이상한 말 하지 마세요.”

“이상한 말 하지 마십시오.”

지호와 루가 거의 동시에 대답했다. 입을 다문 지호 대신 루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이원 님은 그저 철저하실 뿐입니다.”

“아, 네. 네, 그렇죠.”

솜 인형의 기세에 눌린 소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어떻게 갈 거니?”

호진의 말대로 그게 걱정이었다. 지호와 이전부터 친분이 있던 미르 길드에도 감시하는 눈이 붙었다. 그래서 루와 크사냑도 어쩔 수 없이 퀵서비스로 찾아왔다. 하지만 이원을 찾으러 솜 인형의 모습으로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거라면 방법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방법이라니요?”

루도 금시초문이라는 듯 되물었지만 크사냑은 퍽 당당하고 자신만만했다. 그의 설명을 듣는 지호의 눈이 점점 동그랗게 커졌다.

“너무 극단적인… 아니, 좋을 것 같기도 하네요.”

이원을 만나러 가는데 수단과 방법을 가릴 수 있겠는가? 지호는 결국 크사냑의 방법에 동의했다.

* * *

시스템이 누군가를 ‘사건의 흑막’이라고 지적한 초유의 사태. 물론 곧 정정되었다지만, 그래서 더 사람들의 관심은 한층 더 격렬해졌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이전이라면 지호를 욕하는 의견이 대세였겠지만, 현재는 옹호하는 쪽이 더 많았다. 그러나 지호를 미심쩍어하는 이들은 감쪽같은 잠적을 문제 삼았다. ‘정말 당당하다면 앞에 나섰을 것 아니냐’라고.

현재 수사기관 역시 갈팡질팡하는 중이었다.

신지호에게 죄가 있다는 아무런 증거도 없다. 그렇다고 시스템 메시지를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다. 게다가 막 밀고 들어가 조사하자니, 이전과 달리 신지호의 가치가 지나치게 커졌다.

어느 나라에서나 각성자의 타국 유출은 심각한 문제가 된다. 물론 신지호의 가족이 한국에서 뿌리를 두고 있어서 쉽게 해외로 향하진 않겠지만……. 만약 신지호가 타국으로 향한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뭐든 제공할 나라가 많다.

게다가 사실상 신지호가 가면 주이원도 갈 것 아닌가? 주이원이 신지호를 좋아하네 마네, 세간에서는 농담 취급하지만… 오히려 주이원의 행보를 조금 더 자세히 아는 헌터 협회에서는 확신했다. 주이원, 저 미친놈이 얼마나 신지호를 좋아하는지.

그런 이유로 협회는 신지호의 심기를 거스를 수 없었다. 하지만 벌집을 들쑤신 듯한 여론을 완전히 무시하기도 힘들었다.

그런 아슬아슬한 상황.

신지호가 사라진 지 사흘 째 되는 날 오후, 노네임 길드 지하 주차장에 짙게 선팅한 차 한 대가 멈춰 섰다.

차 문이 열리고 반질반질한 구두와 함께 긴 다리가 나온다. 바닥에 발을 디딘 채 잠시 망설이듯 멈춰 섰던 그는 이내 차 문을 활짝 열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그는 아무도 없는 엘리베이터 위로 올랐다. 가볍게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1층으로 향하는 버튼을 누른다. 금세 엘리베이터는 1층에 도착했다. 서서히 열리는 문을 보며 그는 가볍게 숨을 골랐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그는 주저 없이 1층 로비로 향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경악의 시선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다.

그가 이 자리에 나타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랬기에 오히려 반응이 느렸다. 그것도 잠시. 그를 향해 연신 요란한 플래시가 터진다.

“많이들 오셨네요.”

왜 여기 나타났냐는 질문에 그는, 신지호는 침착한 태도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제가 이곳에 나타나지 못할 이유라도 있습니까? 저는 아무런 죄도 없는데요.”

주변이 반응할 시간을 주듯,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몰린 인파에 한 번씩 시선을 준 그가 말을 이었다.

“하늘 길드의 천희성 부길드장이 노네임의 부정을 밝히겠다고 나섰더군요. 하지만 저는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 제게 누명을 씌우시다니,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한 번 숨을 고른 지호는 당당하게 미소 지었다.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조사를 받겠습니다. 노네임 길드도 수색하세요.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테니까요.”

잘못을 저질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맑은 눈빛. 선량한 인상과 아름다운 얼굴은 그의 말에 설득력을 더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