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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일촉즉발(2) (244/283)

37. 일촉즉발(2)

한참 뒤에야 지호는 조금이나마 진정했다. 지호는 훌쩍이며 젖은 뺨을 손으로 닦았다. 눈물은 마를 법도 한데 계속 찔끔 흘러나왔다. 지호는 엉망이 된 얼굴을 가리며 어색하게 태용에게서 시선을 돌린 채 말했다.

“저, 미안한데 나 세수 좀…….”

“음, 아. 네…….”

어째서인지 태용은 지호만큼이나 귀를 빨갛게 물들이고 부끄러워했다. 태용은 지호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한 채 화장실로 안내했다.

혼자 남으니 다시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깔끔한 화장실에서 지호는 찬물로 세수했다. 그래도 정신이 들지 않아 손바닥으로 뺨을 찰싹 내리쳤다.

‘정신 차리자, 신지호.’

‘너무 오래 끌면 안 돼……. 소문이 걷잡을 수 없이 퍼질 테니까.’

아이템을 사용해서 미르 길드로 도망쳤으니 얼마간의 시간은 벌었다. 하지만 가만히 숨어 지낸다고 해결될 것은 없다. 이 틈에 상대도 부지런히 움직일 테니 어떻게든 해결해야겠지.

다행히 부은 눈은 금세 원래대로 돌아왔다. 지호는 딱딱한 얼굴에 미소를 끌어 올리며 밖으로 나갔다.

태용은 지호가 나오기를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다. 눈물이 그친 지호의 얼굴을 보고 안심했으나, 여전히 불안이 남은 얼굴로 태용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지호. 조금 괜찮아진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불과 몇 분 전, 지호는 저를 다정하게 위로하던 태용을 떠올렸다. 딱딱한 말투를 사용했을 때보다 훨씬 조곤조곤한 목소리였다.

“아까처럼 말해도 되는데.”

“아니…….”

태용은 귓가를 빨갛게 물들였다. 반응이 좋다. 더 놀려 줄까 하다가, 펑펑 운 자신을 가만히 지켜봐 준 태용을 생각해 입을 다물었다. 장난칠 때가 아니기도 하고.

“혹시… 양호진 헌터랑 서리 왔어?”

“아, 네. 조금 전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지금 저희 쪽 의원이 살피고 있다는데, 가 보시겠습니까?”

“응, 부탁할게.”

지호가 곧장 고개를 끄덕이자 태용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 앞에 서서 태용은 작은 수인을 맺으며 스킬을 썼다. 그는 지호의 눈치를 보며 덧붙였다.

“만에 하나를 대비해 눈에 띄지 않는 편이 좋을 듯하여… 물론 미르 길드원들은 믿을 만한 사람들입니다만, 게네시스의 마수가 뻗쳤을 확률을 대비해야만…….”

“응, 알아. 너무 걱정하지 마.”

“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마운 건 나지.”

싱긋 미소 지은 태용이 앞장섰다. 원래도 길드장실은 사람이 많이 드나드는 곳이 아니다. 스킬을 쓴 지금은 벌레 한 마리의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지호는 누군가가 들을세라 조심스레 태용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조심스레 도착한 곳은 다소 어둑어둑한 방이었다. 바닥과 벽, 천장까지도 온통 나무로 마감하여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방을 희미한 연기가 가득 채웠다. 연기에서는 한약재를 연상시키는 향이 났다.

방을 가득 채운 건 정체를 알 수 없는 별의별 기계였다. 크고 작은 기계의 부품부터 공구, 색색의 마석, 가지런히 손질된 약초나 몬스터의 신체 일부부터 진득한 약이 가득한 냄비까지.

연구실은 연구실인데 온갖 분야를 잡탕찌개처럼 다 섞어 둔 방이었다.

“여기.”

산처럼 높게 쌓인 설비 너머에서 호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심스럽게 방 안 가득 쌓인 것들을 헤치며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생각보다 훨씬 큰 방을 가로지르자 한쪽에 커튼으로 가려진 침대와 호진이 보였다.

지호는 재빨리 다가가 커튼 안쪽을 확인했다. 대체 어디서 구한 건지 모를 형형색색 꽃무늬 이불 위에 서리가 가만히 누워 있었다.

서리의 위로 주둥이가 길쭉한 플라스크가 둥둥 떠오른 채였다. 푸른 연기로 가득 찬 플라스크에서 아주 느리게 액체가 한 방울씩 서리 위로 떨어진다. 떨어진 액체는 서리의 몸을 적시는 대신 기화되어 몸속으로 사르르 녹아내린다.

“기력을… 회복시키는 약이에요…….”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지호가 화들짝 놀랐다. 어둠과 동화된 듯 짙은 색의 옷을 입은 여자가 느릿하게 다가와 침대 위에 앉았다. 여자의 희고 창백한 손이 서리의 몸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서리 님은… 괜찮아요…….”

느릿한 목소리. 잠이 덜 깬 것처럼 조금 잠겨 있지만, 여자의 눈은 또렷하게 빛났다.

“녹스… 때문에… 충격을 받아서… 놀란 거예요……. 하지만… 이상은 없으니까…….”

설명하면서도 여자는 서리의 몸을 신중하게 쓰다듬었다.

“이래 보여도 실력은 좋으니까 안심하렴.”

가만히 듣던 호진이 걱정을 덜어 주려는 듯 설명을 덧붙였다. 그러자 여자가 호진을 노려보았다.

“여우… 새끼한테… 그런 말을… 듣고 싶진… 않네요……. 아직… 새파랗게… 어린 것이…….”

천년 묵은 구미호를 새파랗게 어리다고 할 정도라면 눈앞의 여자는 대체 몇 살인 걸까.

“그래도 나는 꼬리가 아홉 개인데, 나보다 늙어서 승천하지 못한 뱀은 얼마나 한심한 걸까?”

여자와 호진이 매서운 시선을 교환했다. 가만 보면 양호진도 사람 좋은 척하지만 온갖 곳에 시비를 걸고 다닌다.

태용이 재빠르게 여자와 호진 사이에 섰다. 그러자 둘 다 진정했다. 왜 태용이 미르의 길드장을 맡았는지 알 것 같은 광경이었다.

“심예서 님은 오랫동안 주술을 연구하신 분입니다. 믿으셔도 좋습니다.”

“아, 심예서 님이라면…….”

지호는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다준 아이템, [용궁의 보물상자]를 꺼냈다. 심예서는 무척 기쁜 듯 환하게 미소 지었다.

“맞아요……. 제가 만든… 물건이죠…….”

심예서는 퍽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았다. 호진은 그런 심예서가 같잖다는 듯이 콧방귀를 끼었지만, 더 끼어들진 않았다.

실력자라는 건 알겠다. 하지만 지호는 여전히 불안한 마음으로 심예서를 힐끗거렸다.

“저기…….”

“네에…….”

“그, 거기가 안 좋은 건가요?”

지호는 여전히 서리의 몸 위에 얹힌 심예서의 손을 불안하게 응시했다. 심예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미소를 지었다.

“아아… 고양이… 귀여워서…….”

“한입에 잡아먹으려는 게 아니고?”

반사적으로 쏘아붙였던 호진이 지호를 돌아보고 환하게 웃었다.

“오래 묵은 이무기니까 살생은 안 해. 걱정하지 말렴.”

“한심한… 여우……. 불안한 소리… 하지 말고… 꺼지세요…….”

“언제쯤 깨어날까요?”

“아마… 내일이 되기 전엔… 깨어날 거예요……. 제가… 계속 지켜볼 테니… 안심하시고요……. 그럼 나가서… 쉬세요…….”

심예서가 부드러운 축객령을 내렸다. 서리를 조금 더 지켜보고 싶지만, 얌전히 쉬게 하려면 사이 나쁜 두 사람을 떼 놓는 게 우선이었다. 지호는 태용과 호진과 함께 길드장실로 돌아왔다.

길드장실에 들어서자마자 호진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여기 TV 어딨어? 전에 갖다 두지 않았니?”

“여기에 있습니다.”

태용이 방 한쪽의 병풍을 접어 옆으로 옮겼다. 그러자 거대한 신형 TV가 모습을 드러냈다. 호진이 그걸 보며 혀를 쯧쯧 찼다.

“아직 어린 녀석이 현대 문물을 왜 그렇게 싫어해? 세상 돌아가는 것도 보고, 그래야지.”

“그건 바보상자입니다. 이런 것에 몰두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그게 대체 어느 시대 이야기야? 뉴스도 보고, 시사 공부도 하고 그래야지.”

둘 다 꼰대 같았다.

조금 더 구시렁거리며 간신히 리모컨을 찾은 호진이 TV를 켰다.

TV에서는 조금 전 발생한 퀘스트 이야기로 온통 떠들썩했다. 무표정한 얼굴로 채널을 돌리던 호진의 손가락이 드라마를 재방송하는 채널에서 멈췄다.

“이대로면 오늘 방영할 드라마는 결방할지도 모르겠구나.”

“……양호진 헌터, 드라마도 보시나요?”

“사극은 좀 본단다. 그보다 생명의 은인인데 조금 편하게 부르는 게 어떠니? 형이라든가.”

가벼운 미소와 조금 들뜬 목소리에서 평소보다 잔뜩 신경 쓴 기색이 느껴졌다. 지호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전 괜찮으니까 괜히 신경 써 주지 않으셔도 돼요.”

“음, 우리 어린 관리자님을 신경 쓴 것도 맞지만 진심인데? 형이 싫으면 호진 씨라고 부르렴.”

“호진 씨, 전 정말 괜찮아요.”

“그래, 그래.”

TV를 끈 호진이 가운데 놓인 비단 방석으로 가서 털썩 앉았다. 그리고 내내 서 있던 지호에게 눈짓했다. 지호는 꺼진 TV 화면을 힐끗 보다가 맞은편에 앉았다.

“괜찮아도 많이 놀랐을 거야. 쉬고 있으렴.”

“저는…….”

“급한 마음은 알겠지만, 조금은 상황을 지켜보는 게 좋겠구나. 일단 서리가 깨어날 때까지만이라도 여기 있는 게 낫지 않겠니?”

옳은 말이다. 멋대로 퀘스트창을 띄운 녹스에 대항할 수 있는 건 서리뿐이었으니까. 물론 저렇게 뻗어 버린 서리에게 부탁해도 좋을지는 모르겠지만…….

“미르 길드의 길드장실은 한국에서 두 번째쯤 안전한 곳일 거란다.”

“첫 번째는 어딘데요?”

“너희 집이겠지. 그 편집증적인 남자가 지독하게도 보안에 신경 쓴 곳 아니니?”

“……편집증까진 아닌데요.”

“어쨌든 거기 있으면 이목이 쏠릴 테니까. 차라리 여기가 나을 거란다. 뱀도 곧 서리가 깨어날 거라 하지 않았니? 그때까지만이라도 얌전히 있으렴.”

다른 수가 없다. 지호는 내키지 않지만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호진은 만족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사이에 호진의 얼굴이나 체형은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변해 있었다. 그의 특기인 [둔갑술]이었다.

“나는 나가 볼 테니 여기 있으렴. 도련님도 여기 있을 거지요?”

“네, 다녀오십시오.”

잠깐 어딘가로 사라진 태용이 대답했다. 호진은 눈을 접어 웃고는 방을 나섰다. 그리고 곧장 태용이 작은 소반을 들고 지호에게 다가왔다. 소반 위에는 찻주전자와 찻잔이 놓여 있었다.

“마음을 진정시켜 주는 차입니다. 드십시오.”

지호는 순순히 차를 홀짝였다. 그런 지호를 보며 태용이 신중하게 말을 건넸다.

“이번 일은 모두 얕은 수작입니다. 지호에게 죄가 없음을 모두 알아 줄 것입니다. 잠시만 참으시면 됩니다.”

“응, 알고 있어.”

지호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답했지만 태용의 눈빛은 진지하게 가라앉은 채 지호를 응시했다.

“무엇이 그리 불안하십니까?”

“그게, 그러니까.”

지호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애써 쳐다보지 않던 단말기는 추적을 대비해 진작 꺼 두었다. 이런 상황에서 보통 사람이라면 연락할 수 없겠지만…….

“청람 길드장이 신경 쓰이십니까?”

“……어떻게 알았지.”

지호는 어색하게 웃었다.

최근 이원은 바쁘게 해외를 돌아다녔다. 연락이 드문드문한 데에도 적응했다. 엊그제부터는 흔한 안부조차 묻지 않았으나, 거기까지도 괜찮았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시스템창이 나타났다. 이원이 그걸 확인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리고 지호가 아는 주이원은, 지호가 곤경에 처한 상황을 두고 볼 인간이 아니다.

왜 아무런 연락도 없는 걸까. 이원에게 무슨 일이 생길 리 없다고 믿으면서도 지호는 못내 불안했다. 어쩌면 자신의 상황보다도 더.

태용이 지호의 손을 꽉 붙잡았다. 아직 어린 티가 나는 외모지만 손은 단단하고 뜨거웠다. 태용의 다짐이 고스란히 느껴질 만큼.

“청람 길드장만큼 믿음직하진 않겠지만…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지호는 고개를 저으며 태용의 오해를 정정해 주었다.

“아니, 연락이 없는 게 이상해서 걱정스러운 거야.”

“하긴… 청람 길드장이라면 이런 상황이 왔을 때 지옥에 있어도 찾아오겠지요.”

“…….”

대체 주이원의 이미지는 어떻게 되어 있는 걸까.

“그가 위험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만… 연락을 못 할 만한 상황에 처한 거겠지요. 그 또한 제가 알아볼 테니 조금은 안심해 주십시오.”

오히려 지호보다 심각해진 태용을 보고 있으니 그제야 표정이 조금 풀렸다.

“알았어. 주이원이 걱정되는 거지, 너는 믿으니까.”

지호의 말에 태용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뭐든 해낼 법한 미소를 보니 지호의 마음도 조금은 가벼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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