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 0408(2) (237/283)
  • 35. 0408(2)

    제 마음을 부정하는 단계야 진작 끝나기는 했다. 주이원이 아니었으면 하지 않았을 일, 허락하지 않았을 일을 수없이 해 왔으니까.

    제 마음을 돌아보며 지호가 고민한 건 이원을 향한 감정만이 아니었다.

    이원의 삶에는 보통 사람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굴곡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원은 그 지난한 시간을 지호를 떠올리며 견뎌 왔다. 사랑, 그리움, 때로는 원망을 품은 채.

    단지 연인이 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주이원의 꿈 속 신지호보다는 그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언젠가 괴로운 시간도 잊을 수 있도록.

    그렇게 주이원의 삶 전체를 돌아보다가 떠올린 것이 그의 양부모님이었다. 지구에 온 이원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분들이니까.

    이원의 부모님은 순수한 선의로 이원을 거두어, 계산 없이 사랑을 퍼부어 주었다. 그렇기에 오랜 세월 동안 다른 세계에서 닳아온 이원이 여전히 부모님만은 애틋한 존재로 남았다. 이제 이원에게 부모님의 죽음은 오래된 과거일 텐데도 이렇게 찾아올 만큼.

    ……게다가 어렴풋이 듣기로, 이플리스에 있던 주이원의 친부모는 자식이라고 사랑할 만한 인간이 아니었던 듯하니까.

    이원에게 특별한 오늘, 이원에게 특별한 사람. 그의 부모님이 잠든 곳에서 지호는 맹세했다.

    주이원을 지켜 주겠노라고.

    지호의 삶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 혹은 그 이후에도, 영원히.

    이원이 터무니없이 강하다는 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앞에 있는 적은 인간의 인지를 한참 뛰어넘은 것들이다. 실제로 이원 또한 위태로운 적이 몇 번이나 있었으니까…….

    적어도 가장 위태로운 적을 넘긴 후에 지호는 정식으로 이원에게 정식으로 고백하고 싶었다. 이원은 약혼반지를 기대하는 것 같지만, 거기에 결혼반지를 함께 얹어서.

    지호의 머릿속에서는 나름대로 큰 그림이 그려지는 중이었다.

    “왜 나중이야. 응?”

    물론 성질 급한 주이원이 얌전히 기다려 줄 리 없다. 이원이 따지듯이 물었다. 꽤 기분 좋아 보이지만, 별개로 지호의 말에 불만이 퍽 많은 얼굴.

    운전석에 앉아 있던 이원이 지호가 있는 쪽으로 넘어왔다. 쓸데없이 큰 차 덕분에 저 커다란 몸이 넘어와도 문제는 없었다. 물론, 몸이 밀착되긴 했지만. 이원이 지호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은근한 손길로 쓰다듬었다.

    “응? 자기야.”

    뱃사람을 현혹하는 세이렌처럼, 대놓고 지호를 꾀어내려는 듯 낮은 목소리가 비단처럼 부드럽게 지호의 귀에 감겨든다. 귀에 닿을 듯 말 듯 가까워졌던 입술이 천천히 떨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지호의 목에 맞닿았다.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느낌에 지호가 바짝 긴장했다.

    이원이 또다시 낮게 웃는다. 승리를 예감한 사람처럼 자신만만한 얼굴로. 이원이 지호에게 고개를 숙인다. 이원의 체중이 지호에게 실리는 만큼, 지호의 얼굴은 더더욱 붉어졌다.

    지호는 이원의 손길을 받아들이고픈 욕망을 꾹 누른 채, 이원을 밀어 냈다.

    “안 비키면 선물 뺏어갈 거야.”

    “너무하네. 이건 이제 내 거야. 뺏어 가면 신고할 거야.”

    “…….”

    “진짜야.”

    단단히 엄포를 놓은 이원은 순순히 제자리로 돌아갔다. 지호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사실 미루는 이유 중에 하나는 이원의 저런 태도 때문이다. 주이원이 자꾸 사람 홀릴 듯이 구니까. 그러니까… 지호의 자리로 넘어와서 괜히 치근덕거리는, 그런 행위. 아직 정식으로 사귀지 않는 데도 저러는데, 진짜로 사귀면 어떻게 되겠는가?

    ……다는 아니지만 희미하게 돌아온 기억 속, 지호는 이원과 연인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때를 똑똑히 기억했다. 학업에 방해된다는 이유를 들어 이원과의 연애를 미루다가, 드디어 대학에 합격하고 성인이 되어 본격적으로 사귀기 시작했던 때를.

    성실, 그 자체였던 지호가 수업을 빠진다거나. 지나치게 무리해서 과제를 대충 날림으로 해치운다거나. 막판에 정신 차려서 성적이 개판 나지는 않았지만, 인생에서 제일 안 좋은 성적표를 받았다.

    그런 과거를 비춰 봤을 때, 뻔히 보인다. 이원에게 정신 팔려 다른 것에 덜 신경 쓰게 될 자신의 미래가.

    게다가 그때의 주이원은 풋풋한 대학생일 뿐이었다. 지금은 속에 능구렁이가 들어앉은 놈이고. 그때도 속절없이 넘어갔는데 지금은 아주 간단하게 함락될 거 아닌가?

    이원을 좋아한다고 확신을 내리고 나니 더더욱 연애 따위는 할 수 없었다. 이 중요한 시기에 이원과의 연애에 정신 팔리지 않겠다고 장담할 수가 없어서.

    지호도 제 주장이 다소 억지스러운 건 잘 알았다. 하지만 이걸 솔직하게 설명하기에는… 정말이지, 너무도 부끄러웠다. 차라리 반지를 안 주고 말지.

    결국 지호가 꺼낸 건 어설픈 변명이었다.

    “생각해 봐. 약혼은 우리 둘만의 일이 아니야.”

    “약혼이 우리 둘만의 일이 아니면 뭔데?”

    “좀 더… 가족 간의 일이지.”

    “빌어먹을 유교.”

    이원이 진심으로 짜증 냈다. 그러나 금세 회복해서 눈을 반짝이며 지호에게 들이댄다.

    “그러면 가족 허락만 맡으면 되는 거야?”

    “잠깐만. 아직 정식으로 사귀는 것도 아니잖아.”

    “……반지까지 줘 놓고? 자기, 내 몸과 마음을 농락하고 먹버하려는 거야?”

    “그냥 준 반지라니까……. 아무튼.”

    괜히 휘말려서 아무 말이나 하다가 분위기는 다 깨져 버렸다.

    “조금만 기다려. 진짜 조금만.”

    “…….”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진 않을 테니까.”

    지호가 달래는 말에 이원은 사탕을 빼앗긴 여섯 살짜리처럼 인상을 잔뜩 구겼다. 그러더니 이내 한숨을 쉬고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천 년도 넘게 기다렸는데 몇 달을 못 기다릴까……. 아니, 몇 달 수준인 거 맞지? 몇 년씩 넘어가는 건 아니겠지?”

    “물론 아니야. 너무 걱정하지 마.”

    “걱정한다기보단 지호가 너무 감질나게 구니까 그래. 맛은 다 보여 줘 놓고……. 뭐, 대충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으니까 봐줄게.”

    이미 과거에 학업을 이유로 이원을 거절한 적 있다 보니, 직접 말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는 눈치 챈 것 같다.

    “기쁘게 기다릴게, 자기야.”

    반지를 톡톡 두드리며, 이원은 제법 만족스럽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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