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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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 0408(1)

    어려지고 나서 지호는 꼬박꼬박 10시를 넘기지 않은 시간에 일찍 잠들었다. 원래의 지호 또한 너무 늦은 시간에 잠들지 않는 편이었다. 어려진 몸이야 당연히 시간에 맞춰 잠을 요구했다.

    자정에 가까운 현재, 지호는 쏟아지는 잠을 간신히 이겨 내고 있었다.

    “졸리면 그냥 자.”

    “싫어…….”

    “어린이는 일찍 자야 하는데.”

    강렬한 수마에 저항하는 동안 주이원은 말만 보탰다. 말로만 걱정할 뿐, 이원은 그다지 지호를 재울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지호가 정말로 잠에 빠지려 할 때마다 은근슬쩍 깨웠다.

    깨어 있는 이유, 깨우는 이유. 정확히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둘 다 뻔히 알고 있다.

    오늘의 이원은 선물 상자를 열어보기 전처럼 기쁜 얼굴이었다. 지호가 힘겹게 졸음을 쫓아낼 원동력이 될 만큼.

    끔벅끔벅 졸다가 결국 눈을 감은 지호를 이원이 안아 들었다. 이원의 손이 지호의 등을 토닥인다. 내내 어려진 지호를 조심스럽게 다루던 것과 달리 다소 투박한 손길로.

    그 덕에 반짝 정신이 들었다. 지호는 곧장 시계를 확인했다. 언제 넘어가나, 한참 기다리던 시침이 마침내 12를 향해 있었다.

    드디어 하루가 넘어간 지금, 4월 8일.

    “생일 축하해, 주이원.”

    오늘은 주이원의 생일이었다.

    이원의 단말기에는 축하의 메시지가 산처럼 쌓이고 있을 것이다. 그 수많은 사람보다 먼저, 첫 번째로 이원의 생일을 축하해 주기 위해 지호는 일부러 잠을 참았다.

    “선물은 안 줘?”

    “……나중에.”

    “아직 준비 못 했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 바쁘기도 했고, 갑자기 어려졌잖아.”

    “그런 거 아니거든?”

    준비야 한참 전에 마쳤다. 그러나 이원은 여전히 미심쩍은 눈빛이었다.

    “솔직하게 말해 봐. 그냥 몸으로 때워도 되니까. 음, 지금은 어려졌으니까 조금 이따가.”

    “이상한 짓은 안 해 줄 거거든?”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왜 이상한 짓이라고 단정해?”

    능글맞게 웃는 이원에게 지호가 콧방귀를 뀌었다.

    “일반적인 부탁이 아니라 몸으로 때운다는 건 결국 나 자신을 활용한 거고, 어린 상태로 못 한다는 건 결국 수위가 있다는 거잖아?”

    “당황 안 하네.”

    “흥.”

    예전 같았으면 이 말에 넘어가 당황했겠지만… 근 1년간 성장한 건 지호의 능력만이 아니다. 지호는 이원의 머리칼을 거칠게 쓰다듬었다.

    “이제 잠이나 자.”

    “네, 분부대로 해야죠.”

    이원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곧장 침실로 향했다. 어차피 잘 준비는 진작 마친 채였으니까. 제 옆에 지호를 눕힌 이원은 작은 몸을 끌어안은 채 부드럽게 속삭였다.

    “잘 자, 지호야. 좋은 꿈 꿔.”

    “……너도.”

    오늘 같은 날에 어울리는 좋은 꿈 꾸기를. 그렇게 소망한 지호는 이원의 품에서 순식간에 잠들었다.

    * * *

    지호는 현재의 자신이 유일하게 볼 수 있는 시스템창을 확인했다. 상태 이상이 풀리기까지 이제 초읽기 상태였다. 지호는 뚫어지도록 그 숫자를 응시했다.

    3초, 2초, 1초, 그리고… 끝.

    아무런 고통도 없이, 시간을 빠르게 감은 것처럼 몸이 자라났다. 멸망의 대적자가 안심하라며 언질 준 대로였다. 지호가 다 자란 몸을 확인하기가 무섭게 밖에서 커다란 외침이 들렸다.

    “지호야! 괜찮아?”

    “괜찮아! 괜찮으니까…….”

    들어오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한 게 무색하게도 이원이 벌컥 문을 열어젖혔다.

    아무 이상 없을 거라고 몇 번이나 설명해도 믿지 못하고 내내 어쩔 줄 모르더니만. 실물을 확인하고 그제야 이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도 잠시. 이원은 이내 몹시 아쉽다는 듯 지호를 훑어보았다.

    “이불은 왜 싸매고 있어?”

    “너 이럴 게 뻔해서.”

    “나한테 선물도 안 줄 셈이야?”

    “좋게 말할 때 문 닫아라.”

    살벌하게 속삭이는 지호에게 씩 웃어 보인 이원은 베개가 제 얼굴로 날아오기 전에 잽싸게 문을 닫았다. 지호는 닫힌 문을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하여간 이럴 때는 정말로 뻔하게 구는 녀석이다.

    지호는 빠르게 준비해 둔 옷으로 갈아입었다. 바로 외출해도 될 법한 차림으로 지호는 방을 나섰다. 밖에서 기다리는 이원 역시, 온종일 집에 있었음에도 외출복 차림이었다.

    “어린이 신지호도 좋지만 역시 지금이 제일이야.”

    “지금이 신경 쓸 게 없으니까.”

    “그런 뜻 아닌 거 알면서. 하여간 귀엽기는.”

    활짝 웃으며 다가온 이원이 지호를 끌어안고 멋대로 뺨에 입 맞췄다. 기다렸다는 듯이 구는 이원을 지호는 얌전히 받아 주었다. 그러나 결국 이원의 손이 지호의 옷 속으로 슬금슬금 들어올 무렵 그를 밀어 냈다.

    “늦었잖아. 너 안 나가?”

    “나가야지. 자기 선물 받고.”

    온종일 저 소리다. 내내 이원은 몇 달 체납된 빚 받으러 온 빚쟁이처럼 굴었다. 처음에는 농담처럼 굴었지만, 이제는 정말로 선물이 있는지 진위를 의심하는 모양새였다. 지호는 쯧, 소리 나게 혀를 찼다.

    “줄 거거든? 이따 줄 거니까 같이 가.”

    “자기는 마저 쉬지. 시간도 늦었는데.”

    “너 일하러 가는 거 아니잖아.”

    말 안 해도 어디로 갈지는 뻔하다. 게다가 오늘 같은 날에는 이원이 혼자 가는 곳이라는 것도 잘 안다. 이원이 조금 난감한 듯이 미소 지었다.

    “음.”

    “같이 가기는 싫어?”

    잠깐 고민하던 이원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괜찮아. 같이 가자.”

    생각보다 순순히 떨어지는 허락에 지호가 고개를 까딱였다.

    도착했을 때는 이미 주변이 어두컴컴했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주차장은 썰렁했고, 사람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차 안에서는 평소보다 훨씬 조용한 분위기였다. 차에서 내린 지호는 주변을 가만히 둘러보았다. 처음 오는 건 아니지만 자주 들른 곳도 아니다. 어릴 때부터 늘 지호와 함께 다니던 이원이 이곳만은 대부분 혼자 오곤 했으니까.

    지호는 조용히 이원의 뒤를 따랐다. 자주 찾아온 듯, 망설임 없이 걸어간 이원의 걸음이 어느 한 곳에서 멈춰 섰다.

    “오랜만이에요. 아버지, 어머니.”

    매년 이원이 생일마다 향하던 곳. 이플리스에 갔다가 지구로 귀환한 후에도 여전히 변치 않고 향하던 장소. 여기는 주이원의 양부모님이 잠든 봉안당이었다.

    “저 왔어요. 제 남편도 데려왔고요.”

    “……누가 남편이야?”

    어지간하면 장단 맞춰 주려 했던 지호였지만 여기선 끼어들 수밖에 없었다. 이원은 줄곧 진지하다가 풀린 지호를 보고 피식 웃었다.

    “그러면 미래의 남편.”

    “…….”

    지호는 더 대꾸하는 대신 고개를 돌렸다. 한 줌 재가 된 이원의 부모님이 잠들어계신 곳. 지호는 한 번 더 그들에게 감사 인사를 올렸다. 신원 모를 아이를 기꺼이 거두고 사랑해 준 그들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이원 역시 없었을 테니까.

    이원은 그리 오랜 시간을 머물지 않았다. 오히려 오랜만에 오는 곳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짧은 시간을 보냈을 뿐. 아무렇지 않게 나오는 길, 이원은 자신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지호를 오히려 위로했다.

    “새삼 오래 머무를 필요는 없어서. 어차피 오래전에 떠나신 분들이고, 어릴 때랑 달리 지금은 뭐… 감사한 마음뿐이지.”

    “그렇다면 다행이고.”

    돌아가는 차에 올라, 지호는 계속 미루던 제 선물을 꺼냈다. 양손으로 들 만한 크기의 상자는 겉보기와 달리 몹시 가벼웠다. 모두 포장재의 무게가 아닐까 싶을 만큼.

    “준비한 거 맞구나.”

    “준비했다니까. 왜 그렇게 못 믿어?”

    “자꾸 미루니까 그렇지. 그럼 이제 열어 봐도 돼?”

    “물론.”

    지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원은 상자를 분해하듯 뜯어 버렸다. 그 안에는 상자보다 훨씬 작은 반지 케이스가 들어 있었다.

    “……그걸 왜 그렇게 급하게 뜯어.”

    작게 핀잔한 지호는 이원 대신 반지 케이스를 열었다. 안에 들어 있는 건 단순한 디자인의 반지 하나였다.

    지호는 이원의 왼손 약지에 반지를 끼워 주었다. 반지는 이원의 손가락에 딱 맞았다. 이원은 답지 않게 조금 당황한 얼굴이었다.

    “자기, 아니 지호야. 이거…….”

    “다른 반지랑 한 쌍이라든가 그런 건 아냐. 그래도 그냥 끼고 다녀.”

    변명처럼 말하며 지호는 달아오른 얼굴을 문질렀다. 보나 마나 표정이 꼴사나울 것 같은데… 이원은 대체 생각만 해도 속이 간지러워지는 말을 어찌 그리 태연하게 하는 걸까.

    “……나중에 다른 거 줄 테니까.”

    생일 선물로 뭘 줄지, 지호는 꽤 예전부터 고민했다. 고민할 때마다 떠오른 것이 반지였다. 제 왼손에 끼워진 반지는 늘 존재감을 드러내며 반짝이고 있었으니까.

    이원이 아이템이라는 명목으로 준… 약혼반지. 이 반지와 한 쌍이 되는 다른 반지는 지호의 인벤토리 안에 들어 있다. 지호가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때 다시 돌려 달라던 이원의 약속과 함께.

    그걸 돌려줄까, 충동이 일었던 적도 있다. 물론 충동은 금세 잦아들었다. 생일 선물을 전에 받은 것으로 되돌려줄 수 없다는 이유에서만은 아니었다.

    주이원이 좋다.

    도저히 부정할 수 없을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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